전태윤은 조 비서가 안고 있는 서류 뭉치를 보면서 분부했다.“전이진한테 보내서 처리하라고 해. 만약 결정을 못 내리겠으면 걔더러 할머니를 찾아가라고 전해. 그리고 나 요즘 회사에 자주 못 나오니까 걔한테도 말해. 전이진도 전씨 가문의 남자이니 마땅히 날 위해 전씨 그룹의 중임을 분담할 의무가 있어.”조 비서가 알겠다며 머리를 끄덕였다.대표님은 수중의 업무를 내려놓고 오롯이 사모님께 전념하려는 걸까?전태윤은 비서에게 분부한 후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몇 분 후, 그는 전용차를 타고 전씨 그룹을 떠났다.그 시각 조 비서도 부대표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안에 들어가 전태윤이 한 말을 모조리 전이진에게 전했다.전이진은 조 비서가 안고 있는 한 뭉치 서류를 보더니 표정이 확 굳었다.“여기 놓고 가. 다 처리하면 가지러 오라고 다시 통지할게.”“고마워요, 부대표님. 아 그리고 대표님께서 요즘 회사에 자주 못 나오시고 부대표님도 전씨 가문의 남자이니 마땅히 대표님을 위해 전씨 그룹의 중임을 분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전이진이 이해한다는 듯이 대답했다.“알았어. 가서 볼일 봐.”그는 일찌감치 예감이 들었다.큰형은 형수님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회사의 중임을 그에게 맡길 게 뻔하다.아홉 형제 중에서 전태윤과 전이진만 회사의 핵심 인물이다. 다른 남동생들은 계열사를 책임지거나 호텔 운영을 책임지고 또 일부는 아예 가족 기업에서 근무하지 않고 스타트업에 뛰어들었다.전태윤이 여유가 없으면 전이진이 나서야 한다.게다가 그는 아직 솔로이니까!듣기로 할머니가 최근에 그와 어울리는 여자친구를 사방으로 물색하고 있다고 한다...전이진은 몸이 움찔거렸다. 큰형이 사랑의 늪에 빠지더니 이성까지 잃었다. 그는 쭉 이렇게 솔로로 지내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만약 그 언젠가 정말 결혼하게 된다면 전이진은 상대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솔직하게 밝히리라 다짐했다. 절대 큰형처럼 신분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전태윤의 일은 전씨 일가의 형제들에게 큰 깨우침을 줬다.
전태윤의 눈가에 슬픔이 스쳤지만 어제처럼 격하게 반응하진 않았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예정아, 정말 저 동물들을 키우고 싶어? 그럼 내가 장씨 아저씨더러 길을 안내해서 너랑 효진 씨를 데리고 우리 집 과수원들을 구경시켜줄게. 닭을 키우기 적합한 곳이 있으면 바로 거기서 키워. 네가 직접 돌보고 싶으면 직접 돌보고 그게 아니면 도우미들이 돌봐줘도 돼.”하예정이 미간을 찌푸렸다.“구정 때 당신 본가에서 보냈는데 과수원을 전혀 못 봤어요.”“서원 리조트 옆에 산이 몇 개 있는데 과수를 많이 심었어. 그게 바로 과수원이야. 거긴 우리 집안의 대저택이라 매년 구정 때마다 거기서 보내.”시댁에 뜬금없이 리조트가 하나 생겨도 하예정은 더이상 놀랄 것 없었다.갑부니까.모든 분야로 돈만 벌 수 있다면 그들은 전부 섭렵할 것이다.“날 이 별장에서 내보내려고요?”하예정은 뒤늦게 전태윤의 말에서 요점을 포착했다.전태윤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도 마주 봤다. 부부가 서로 마주 본 순간 하예정은 그제야 전태윤도 요 이틀 얼마나 수척해졌는지 알아챘다. 그녀가 힘든 만큼 그도 똑같이 괴로웠다.“예정아, 미안하단 말을 수없이 해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과하고 싶어. 널 그렇게 오랫동안 속이지 말아야 했어. 나에 대한 믿음이 다 깨졌잖아. 지금 당장 날 용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건 바라지도 않아. 단지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내가 그 믿음을 다시 쌓아 올릴 수 있게. 그리고 쉽게 이혼 얘기를 꺼내지 말아 줄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파.”진짜 이혼할 지경에 이르지 않는 한 말다툼하고 감정이 격해질 때 이혼 얘기를 꺼내면 상대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것과 다름없다.하예정은 한참 침묵한 후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지금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내가 한 말과 행동에 가끔 후회하기도 해요... 태윤 씨, 나 인제 더는 태윤 씨랑 할 얘기 없으니까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돌아가서 마음을 좀 진정하고 싶어요. 우리 결혼 생
앞으로 계속 감금당할 거란 생각에 그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다행히 전태윤이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녀에게 자유를 돌려주었다.“이모부.”주우빈은 이모에게 안길 때 이모부를 보더니 신이 나서 두 팔을 벌리며 안아달라고 했다.전태윤은 아이의 요구를 만족하며 바로 안아주었다.“높게 들어줘요, 이모부. 더 높게.”전태윤이 웃으며 주우빈을 높이 들었다. 아이는 신이 나서 깔깔대며 웃었다.“이 트럭은...”하예진이 묻기도 전에 전태윤이 덥석 가로챘다.“처형, 예정이가 직접 키운 닭을 잡아먹고 싶다길래 효진 씨가 대신 이 닭들을 사 왔어요. 지금 막 장씨 아저씨한테 길을 안내해서 예정이를 데리고 우리 집 과수원으로 가볼 참이었어요. 이 닭들을 과수원에 넣어 키우면 어떨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하예진은 동생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뜬금없이 웬 닭을 키워?”하예정이 말했다.“이미 사 왔으니 어디 둘 곳은 있어야잖아...”하예진은 동생과 제부를 번갈아 보더니 동생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런데 잠깐, 그녀는 뭔가 놓친 듯싶었다.좀 전에 전태윤은 집사더러 길을 안내하여 하예정을 데리고 과수원으로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예정이한테 자유를 돌려준 건가?“태윤 씨, 난 안 갈래요. 장씨 아저씨보고 기사와 함께 과수원으로 가라고 하면 돼요. 언니가 마침 왔으니 난 언니네랑 돌아갈게요.”전태윤이 자상하게 대답했다.“그래, 너 하고 싶은대로 해.”그는 아무 의견이 없었다.하예정은 그의 품에서 우빈이를 안아오며 언니와 심효진에게 말했다.“언니, 효진아, 가자 인제.”“응, 그래.”심효진과 하예진은 가면서 고개 돌려 전태윤을 쳐다봤다.하예정은 우빈을 안고 차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우빈을 안에 태웠다. 그녀도 이제 막 타려고 할 때 전태윤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예정아.”세 여자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특히 하예정은 본능적으로 전태윤이 번복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빨리 도망쳐야겠다고 황급히 차 문을 열었다. 하지만
전태윤의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가 번복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니었다.하예진이 재빨리 말했다.“제부, 걱정 말아요. 요 며칠 제가 쭉 예정이를 지킬게요. 운전도 안 되고 술도 많이 못 마시게 할게요!”그녀는 또 한마디 더 보탰다.“얘가 진짜 술 먹고 싶다 그러면 집에서 맥주 두 병 마시게 할게요. 바에는 두 번 다시 안 보내요.”“네, 처형, 그럼 요 며칠은 처형한테 잘 부탁드릴게요.”전태윤은 또다시 하예정에게 말했다.“예정아, 처형 집에 며칠 머무르다가 집에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데리러 갈게. 만약 나랑 함께 있기 싫다면 넌 발렌시아 아파트로 돌아가고 난 여기서 지낼게.”하예정은 그를 한참 지켜보다가 말했다.“잘 있어요.”곧이어 그녀는 차에 올라탔다.“제부, 몸 잘 챙겨요. 예정이는 내가 잘 보살필게요. 제부가 예정이를 데리러 올 때 통통하게 살을 찌워놓을게요.”하예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이 언니가 지금 날 돼지도 사육할 기세네?’하예진은 제부에게 당부한 뒤 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매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전태윤은 차가 멀어져갈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효진 씨.”심효진도 막 떠나려 할 때 전태윤이 그녀를 불렀다.“하실 말씀 있으시면 얼른 분부하세요, 대표님.”심효진이 공손하게 말했다.전태윤은 바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어제 내가 예정이를 위해 준비한 발렌타인 선물 중 하나에요. 새 차인데 예정의 차 앞부분이 훼손됐으니 효진 씨가 나 대신 새 차 키를 예정이에게 보내줄래요?”한편 심효진은 차 키를 받지 않았다.“태윤 씨는 본인한테 자신이 없어요. 아니면 예정이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가요? 오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고요! 앞으로 예정의 손에 직접 선물을 쥐여줄 기회가 많고 많은데 왜 굳이 저를 통해서 전해주려고 해요?”전태윤은 입술을 앙다물고 손을 거두어들였다.“고마워요, 효진 씨. 후에 직접 예정이한테 줄게요. 저기 혹시 예정의 앞에서 나 대신
장씨 아저씨가 공손하게 대답하더니 또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도련님, 밖에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우니 집 안으로 들어가세요. 오늘 일어나서부터 아무것도 못 드셨죠?”전태윤은 꿈쩍하지 않은 채 장씨 아저씨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굶어서 쓰러지면 예정이가 돌아올까요?”장씨 아저씨는 말문이 막혔다.전태윤은 이런 자신이 우스웠다.“그냥 한번 물어본 거예요. 내 몸 갖고 장난치지 않아요. 예정이랑 아이도 낳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아야죠. 백발이 되는 그날까지 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아쉽겠어요.”장씨 아저씨가 얼른 말했다.“사모님은 끼니를 꼭꼭 챙겨 드세요. 저는 사모님의 이런 마음가짐이 참 바람직하다고 봐요.”전태윤이 일부러 굶어서 쓰러졌는데 만에 하나 사모님이 모질게 돌아오지 않으면 결국 도련님만 굶어 죽는 게 아닌가?“예정이는... 날 사랑하는 마음이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처럼 깊지 않아요.”그래서 그녀는 좀 더 모질게 마음먹을 수 있었다.“일구야.”전태윤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강일구를 불렀다.강일구는 곧바로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차 대기해. 리조트에 가서 며칠 지낼 거야.”“네.”강일구는 서둘러 기사에게 통지했다.몇 분 후 전태윤의 럭셔리 차량이 이 큰 별장을 떠나서 살기등등한 기세로 서원 리조트에 돌아갔다.리조트의 중심 정원 홀에서 할머니가 한창 도우미가 끓여온 커피를 건네받았다.장소민이 시어머니께 말했다.“어머님은 이젠 연세도 있으시고 원래 잠도 잘 못 주무시는데 커피까지 드시면 잠이 더 안 와요.”“커피는 내 수면에 영향 주지 않아. 진정 영향을 주는 건 태윤이네 부부야.”할머니는 커피 두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정신 좀 차리고 어떻게 도울지 생각해봐야겠어.”장소민이 말했다.“어머님,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더 간섭하시려고요? 그들 부부가 알아서 해결하게 놔두시죠. 태윤이랑 예정이가 지금 이렇게 된 건 어머님이 간섭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항상 예정이가 태윤이랑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
어르신은 목이 메어 허탈하게 말했다.“그건 타고난 성격이니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어르신이 또다시 혼잣말을 이었다.“우여곡절이 있어야 서로를 더 소중히 여기게 돼.”장소민은 말문이 막혔다.이때 도우미가 한 명 들어왔다.“어르신, 사모님, 큰 도련님이 돌아오셨어요.”할머니는 화들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렵한 동작이 할머니의 연세를 무색하게 했다.“소민아, 난 방에 가서 누우련다. 태윤이가 나에 대해 묻거든 걔네 부부 일로 걱정에 휩싸여 몸져누웠다고 하거라.”장소민이 말했다.“그럼 태윤이가 어머님을 병원에 실어갈 거예요. 저는 분명 미리 말했어요. 그때 가서 저를 탓하면 안 돼요, 어머님.”“화장터로 보내지만 않으면 돼.”할머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제 방에 돌아가 침대에 누워 아픈 척했다.한참 누워 있었지만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할머니는 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설마 이 녀석이 너무 화나서 할머니가 ‘몸져누웠다’라는 데도 신경 쓰지 않는 걸까?아이고, 인기척이라도 해줄 것이지.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을, 몰래 가서 손주 녀석이 뭘 하는지 훔쳐봐야 하는 걸까?전태윤은 대체 뭘 하고 있을까?그는 돌아온 후 방안에 할머니가 안 보이자 두말없이 나가버렸다.장소민이 재빨리 쫓아가 그의 뒤에서 관심 조로 물었다.“태윤아, 너 괜찮은 거지?”전태윤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괜찮아요, 엄마.”“안색이 안 좋아 보여. 제대로 쉬지 못했어? 예정이는?”“처형이랑 함께 나갔어요.”장소민은 흠칫 놀라서 걸음을 멈추다가 아들이 또 멀리 가버리자 재빨리 뒤쫓아가며 물었다.“나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말 그대로 나갔다는 뜻이에요.”전태윤은 결국 야외 수영장 앞에서 멈춰 섰다.이어서 그는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너 미쳤어? 지금 이 날씨에 수영하면 감기 걸려!”장소민은 더 따져 물을 겨를 없이 얼른 달려가 아들을 제지했다. 이 추운 날에 수영장에 뛰어드는 건 빙어로 되는
“엄마.”전태윤은 지금 똑바로 설명하지 않으면 엄마가 진짜 그에게 재벌 집 딸들과 선 자리를 마련하여 오해를 불러올 것 같았다.그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예정이가 처형과 함께 나갔다는 건 친정에 돌아가 한동안 지내면서 마음을 식힌다는 뜻이에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고요. 나도 걔가 안 돌아오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하예정을 풀어주고 그녀가 처형을 따라가는 걸 허락하는 일이 전태윤에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 하늘은 알고 있겠지!“나도 마음을 식혀야 하는데 좀처럼 진정이 안 돼서 수영장이라도 뛰어들려고 했어요. 그럼 혹시 차분해질 수 있겠는지... 엄마, 난 전혀 고육지책을 쓸 의향이 없어요.”장소민이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물었다.“너희 두 사람 아직 이혼 안 했어?”“엄마는 내가 이혼하길 무지 바라시네요?”“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엄마는 늘 너희 두 사람이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너희 둘은 사교 영역이 달라서 예정이가 비집고 들어가기도 힘들 거야. 지금은 이해할 수도 없고 체감할 수도 없겠지만 화해하고 난 후에 예정이를 데리고 사업 미팅에 가거나 여러가지 연회, 자선단체 등 행사에 참석할 때면 바로 느끼게 될 거야. 넌 괜찮겠지. 남들이 널 비웃는 걸 천연덕스럽게 받아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예정이는 달라. 상류층 사모님들의 사교 모임에는 벼락부자의 아내들도 끼어들기 힘든데 예정이는 오죽할까. 따돌림을 당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갖은 야유와 비난만 받을 거야”장소민은 평생 재벌가에서 지내다 보니 평소 사귀는 사람들도 전부 그녀와 지위가 비슷한 사모님들이다.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겐 왕왕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 상대를 자신의 사교 영역에 들이는 건 불가능하다.그녀의 시어머니처럼 전혀 틀을 차리지 않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하지만 네가 예정이를 사랑하고 엄마도 너희 둘이 이혼하는 걸 원치 않아. 이혼하고 너 평생 솔로로 지낼까 봐 두려워. 세상에 어느 엄마가 제 아들이 독신으로 사는 걸 원하겠어? 게다가 이렇게 훌
“소민아, 사람 시켜서 저 녀석한테 생강차를 끓여주라고 해. 태윤이가 매워 죽게 생강을 많이 넣어.”어르신이 방에서 나오며 밖에 있는 며느리에게 분부했다.장소민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도우미에게 생강차를 끓이라고 했다.고부가 나란히 수영장 앞에 왔을 때 전태윤은 여전히 물고기처럼 물속을 헤엄치고 있었다.“전태윤.”할머니가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전태윤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할머니를 힐끗 보더니 계속 앞으로 헤엄쳐갔다. 수영장 가장자리로 헤엄쳐간 후 그는 물속에서 나와 자리에 앉았다.할머니는 수영장을 에돌아 그의 앞에 다가가더니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여기 앉아서 뭐해? 얼른 방에 들어가.”“할머니, 나 머리 좀 식히고 싶어요.”어르신이 그를 질책했다.“머리 식히려거든 문 잠그고 방 안에 있어도 돼. 아무도 널 방해하지 않을 테니 마음껏 머리를 식혀. 왜 굳이 물속에 뛰어드는 건데?”“나름 효과 있더라고요.”전태윤이 담담하게 말했다.“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니 머리가 맑아지고 복잡했던 마음도 훨씬 편해졌어요.”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진정이 됐으면 어서 옷 입고 방에 돌아가. 여기 오래 앉아있으면 감기 걸려.”전태윤은 입술을 앙다물었다.장소민이 그의 외투를 가져와 몸에 걸쳐주며 말했다.“너 감기 걸리기만 해봐, 엄마가 바로 예정이 찾아가서 따질 거야. 걔가 널 아프게 했어.”“엄마가 과연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올까요?”전태윤은 엄마가 하예정을 찾아가 따지는 걸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장소민은 말만 독하게 할 뿐 정작 너무 지독한 일은 하지 못한다.장소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엄마는 제 새끼를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어.”어르신도 말했다.“태윤아, 일단 방에 가서 옷부터 갈아입고 나랑 얘기하자.”전태윤은 할머니를 올려다보며 비난 조로 말했다.“난 또 할머니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어야 쾌유할 줄 알았죠.”그가 돌아올 때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미리 숨어 계신다는 걸 눈치챘다. 할머니가 늘 해오던 수법은 바로 아픈 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