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심효진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오던 도중 스쿠터의 배터리가 다 닳아서 그걸 끌고 되돌아가기도, 앞으로 계속하여 가기도 너무 멀어, 소정남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심효진이 소정남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가 그에게 데리러 오라고 한 것은, 주로 소정남과 함께 친구를 위로하고 싶어서였다.그렇지 않으면 동생을 불러 그를 데리러 오라고 했지! 소정남더러 오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소정남은 심효진을 데리러 가려던 계획을 접고 하예정에게 자리를 권했다.“무얼 마실래요?”“필요 없어요, 몇 마디만 물을게요. 태윤 씨가 갑부 전씨 가문의 큰 도련님 맞죠? 당신의 직속 상사이고요?”소정남은 잠자코 있다가 물었다.“인터뷰를 보신 건가요?”“네, 그래요. 여태껏 저를 속이다니! 전 그 사람이 태윤 씨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어요!”소정남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묵묵히 마음속으로 전태윤을 대신하여 기도했다.전태윤의 이번 결혼 위기는 당분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꼴 좋다, 누가 신분을 속이라고 했어?’소정남은 갑자기 자신이 일찍이 심효진에게 자기 신분을 알린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힘들게 구애하고 있지만 적어도 전태윤처럼 결혼 위기에 직면할 필요는 없다.까딱하면 하예정이 정말 전태윤과 이혼할지도 모른다.이 두 사람은 절대 갈라지면 안 된다.소정남은 전태윤을 잘 알고 있다. 전태윤은 원래 천성적으로 매정하고 쌀쌀맞은 사람이라, 그가 사랑에 빠지리라고는 누구도 생각 못 했다. 그는 자기의 마음을 움직인 하예정을 제외하고는 평생 다른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그녀를 잃을까 봐 두려운 전태윤은 지금까지 속여오다가 오늘에서야 사실을 공개했다.공개조차도 그는 하예정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대중에게 먼저 공개하는 방법을 택했다.만약 심효진이 전태윤의 신분에 의심을 품지 않았더라면 하예정은 아마도 제일 마지막에야 알게 되었을 것이다.하예정이 전태윤을 떠나면 그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가 미쳐버리면
“하예정 씨, 태윤이가 왜 신분을 숨겼든 간에, 당신에 대한 그의 감정은 진짜이고, 사랑도 진짜예요. 그 점은 의심할 필요가 없어요.”하예정은 손으로 촉촉해지는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소 이사님, 대답 고마워요. 폐를 끼쳤어요. 이만 가볼게요.”이미 확인한 그녀는 더는 그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소정남은 그녀를 만류하지 않고 일어서서 그녀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하예정 씨가 지금 충격받고 화 난 것도 알고 있고 태윤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것도 알지만 그도 정말 그럴 만한 고충이 있어요. 좀 진정하고 나면 그에게 해명할 기회를 줘봐요. 어쨌든 당신들은 부부잖아요!”하예정의 얼굴빛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웠다.직접 하예정을 아래층까지 데려다주고, 그녀와 함께 사무실 건물을 나선 소정남은 차를 가지러 갔다.“형수님.”지금 돌아오는 길이니 형수를 붙잡아 두라고 도움을 청하는 형님의 전화를 받은 전이진이 사무실 건물 입구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먹장구름처럼 어두운 하예정의 얼굴을 보고 전이진은 스트레스가 몰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시각 회사에 있는 게 잘못이었다. 형님이 서둘러 오고 있지만 먼 곳의 물로는 가까운 곳의 불을 끌 수가 없으니, 동생인 그가 먼저 나서서 형수를 붙잡아 둘 수밖에.형님은 형수가 회사를 나서면 자기를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무서워하고 있다.하예정은 지금 전씨 식구들을 보기만 해도 화가 나 그들과 말을 섞기 싫어서 전이진을 피해 걸어가려 했다.손으로 그녀를 잡아당기려던 전이진은 감히 손으로 잡아당기지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두 팔을 벌려 하예정을 막았다.“형수님, 가지 마세요, 지금 형님께서 오고 있어요. 곧 도착할 거예요.”하예정이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순간 전이진은 형수의 싸늘한 눈빛이 형님을 닮았다고 느꼈다.부부가 오래되면 서로 닮는다고, 형수도 형님을 닮아가는 건가?“전이진 씨, 아니 둘째 도련님, 비켜주세요!”하예정이 자기를 부르는 호칭을 들은 전이진이
노동명이 하예진을 전씨 그룹에 데려올 때까지 말이다.스쿠터에 배터리가 없어 길가에 서 있는 심효진을 만난 노동명이 심효진도 함께 태우고 왔다. 스쿠터는 자물쇠를 잠가 길가에 남겨두었고, 우선 하예정부터 달랠 생각이었다.“예정아.”하예진과 심효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예정에게 달려갔다.하예진은 아들마저 내버려 두고 말이다.그 덕에 노동명은 마침내 소원대로 주우빈을 안을 수 있엇다.엄마가 자신의 존재도 잊고 노동명 아저씨 차에 자기를 내버려 둔 채 달려가는 바람에 꼬맹이는 어쩔 수 없이 아저씨한테 안겼다. 그는 아저씨가 자기를 차에서 안아내려줄 줄 알았는데, 정작 차에서 내린 후에도 그 손을 놓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이모에게 다가갔다.하예정은 소정남과 전이진 때문에 전씨 그룹을 떠날 수 없었고 몸도 지쳤다.언니를 본 순간 서러움이 북받친 하예정은 언니 품에 와락 안겼다.“언니.”언니 품에 안긴 하예정은 억울함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언니 여기 있어.”가슴 아파 난 하예진이 하예정을 꼭 끌어안았다.몇 분 동안 울던 하예정이 언니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언니, 집에 가고 싶어, 태윤 씨 집 말고 언니 집에.”하예진이 눈물을 닦아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 집에 가자.”하예정의 손을 잡던 하예진은 그제야 노동명에게 안겨 있는 주우빈을 발견하고 급히 그의 품에서 주우빈을 받아안고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제가 우빈이를 안을게요.”심효진의 말에 하예진은 심효진에게 주우빈을 넘겨주었다.“형수님!”전이진은 다시 한번 하예정 자매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러고는 하예진에게 말했다.“예진 누나, 형님이 지금 회사로 오고 있어요, 형수님과 형님의 일은 그들 둘에게 맡겨 해결하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하예진이 차갑게 말했다.“둘째 도련님, 예정이는 지금 당신 형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비켜줘요. 당신들 전씨 가문과, 우린 감히 엮이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여동생을 데리고 전이진을 피해 앞으로 걸어갔다.초조해진 전이진이
하예정의 마음은 점점 차가워졌다.그가 평소에 운전하는 그 현대 SUV는 그가 일부러 그녀를 속이기 위해 산 거겠지?그가 다닐 때면 지금처럼 호송 차량과 경호원 팀이 따라다니는데, 이것이야말로 큰 도련님이 다니는 방식이겠지!전태윤은 차에서 내린 후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자매 앞에 다가간 전태윤은 미안한 표정으로 먼저 하예진에게 말했다.“처형, 제가 잘못한 거 알아요, 예정이랑 단둘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하예진이 동생을 바라보자 하예정이 차갑게 말했다.“우리가 더 할 얘기가 남았나요? 당신께선 높으신 전씨 가문 도련님이신데, 저 같은 소시민이 어찌 감이 넘볼 수가 있겠어요? 당신과 말할 자격도 없지요.”“예정아.”전태윤은 손을 뻗어 언니를 잡고 떠나려는 그녀를 잡아당겼다.하예진이 손을 떼고 동생에게 말했다.“예정아, 태윤 씨랑 얘기 좀 해봐. 어쨌든, 그에게 해명할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어?”하예정이 전태윤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전태윤이 그 손을 놓을 리 없었다.갑자기 화가 난 하예정은 미친 사람처럼 그를 때렸다.그녀의 분노를 묵묵히 참던 전태윤은 그녀가 지치자,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이런 결과가 두려워서 고백하지 못하고 있던 전태윤은 예준성의 조언을 듣고 나서야 용기를 내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전태윤, 이 망나니 사기꾼! 이거 놔!”전태윤은 그녀를 꼭 껴안은 채, 그녀가 그를 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물려 통증이 느껴져도 여전히 그 손을 놓지 않았다.손을 놓으면 그녀가 그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예정아, 미안해, 미안해.”전태윤은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되뇌었다.그녀를 그렇게 오랫동안 속인 그는 정말 그녀에게 미안했다.그가 된감기에 걸렸을 때, 그녀에게 어떤 상황에서 그를 떠나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만약 그가 가정폭력을 휘두르고, 바람을 피우고, 그녀를 수없이 속인다면 그를 떠났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녀는 또한 진짜 떠날 때는 말도 없이 떠들지도 않고 조용히 떠날 거라고 했다
산 정상 별장에 돌아간 후 전태윤은 하예정을 안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나 혼자 내릴게요. 안을 필요 없어요. 더는 날 터치하지도 말아요!”하예정은 포옹하려는 그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는 전태윤이 더는 건드리지 말기를 바랐다.결국 남편을 매정하게 밀친 후 그녀 스스로 차에서 내렸다.이때 장씨 아저씨가 집안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하예정을 보자 매우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금세 스스럼없이 인사했다.“사모님.”이에 하예정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저는 당신들의 사모님이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전태윤 도련님을 넘보겠어요!”그녀는 비난하는 어조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예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고개를 홱 돌리고 전태윤에게 말했다.“이래놓고 뭐? 혼자 산다고요? 태윤 씨는 이젠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네요. 어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날 속여요?”그의 연기가 너무 완벽하다 보니 단순한 하예정은 감쪽같이 속았다.‘다 내가 멍청해서 그래. 태윤 씨가 몇천만 원짜리 SUV를 타고 다니고 별장이 아닌 아파트에 사니 진짜 일반 직장인인 줄 알았어. 전에 나한테 자신이 만약 갑부라면 믿겠냐고 물은 적 있지? 그땐 아예 안 믿는다고 했어. 갑부는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테고 난 연예인 뺨치는 미모를 지닌 것도 아니니 재벌 집 도련님이 나랑 결혼할 리가 없잖아!’애초에 초고속 결혼을 할 때 절친 심효진도 그녀에게 장난치듯 물었지만 하예정은 단호하게 부인했다. 재벌 집 도련님이 길거리에 널린 것도 아닌데 초고속 결혼으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면서, 효진에게 로맨스 소설 좀 그만 보라고 다그쳤었다.하지만 결국 하예정만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 돼버렸다.전태윤은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묵묵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하예정을 속인 건 사실이니 그도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하예정은 그를 날카롭게 째려보더니 장씨 아저씨를 스쳐지나 홀로 별장에 들어섰다.“도련님, 사모님께서 아시게 된 후 몹시 화나셨나 봅니다!”
하예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게 주방으로 들어갔다.전태윤은 집안에 들어오며 마침 주방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는 하예정을 묵묵히 지켜봤다.하예정은 요리할 줄 몰라서 라면에 달걀 한 개를 넣고 끓인 후 냄비 채로 들고 나왔다.전태윤을 본 그녀는 힐긋 째려보더니 공기 취급하며 식탁 앞에 앉아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전태윤은 그녀가 홧김에 단식이라도 할까 봐 걱정했는데 라면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도 식탁 앞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예정아...”“입 닥쳐요! 밥맛 떨어지니까!”아내가 으름장을 놓자 전태윤 도련님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그는 지금 잘못을 저지른 입장이니 땅이 꺼지도록 머리를 숙여야 한다.그녀가 먹는 모습에 전태윤도 배가 고팠다.하지만 감히 자리를 비우지 못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로 그녀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 배고픔을 꾹 참고 라면 먹는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하예정은 라면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수저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예정아, 나 줘. 설거지 내가 할게.”전태윤은 얼른 그녀의 손에서 냄비를 뺏어왔다.하예정도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설거지하겠다고 하니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고 주방을 나섰다.그녀가 밖에 나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전태윤도 시름 놓고 설거지하러 갔다.그는 가장 빠른 속도로 설거지를 끝내고 그녀에게 과일까지 씻어서 조각으로 잘라 접시에 담아왔다.“여보.”“여보라고 부르지 말아요!”“예정아.”전태윤은 곧바로 호칭을 바꿨다.아내의 분노가 극에 달했으니 모든 걸 아내에게 맞춰야 한다.“과일 좀 먹어.”전태윤은 조각으로 자른 과일 그릇을 하예정 앞에 내려놓았다.“당신한테 배신당한 것만 생각하면 기가 차서 배가 저절로 부른데 과일이 넘어가겠어요?!”전태윤은 과일 그릇을 내려놓으려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탁자 앞으로 가져갔다.하예정은 라면 한 그릇 뚝딱 비웠으니 당연히 배부를 것이다.“미안해, 예정아
“난 애초에 태윤 씨가 재벌 집 도련님인 줄도 몰랐어요! 내가 뭘 노렸는데요? 우리가 처음 싸웠을 때 나도 바라는 게 있다고 똑똑히 말했었죠. 태윤 씨에게 집이 있으니 집 구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고, 태윤 씨가 성숙하고 듬직한 데다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어 우리 언니가 만족하고 마음 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잖아요.”전태윤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나도 알아. 넌 처형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랑 결혼한 거지 절대 내 돈을 노리거나 신분을 노린 건 아니야. 내가 오해했어.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예정아. 날 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아. 내가 한 잘못이니 무슨 처벌이든 달갑게 받을게.”전태윤은 끝까지 억울하단 말 한마디 없었다.하예정이 그를 째려봤다.“처음엔 너의 성품을 보려고 신분을 숨겼었어. 할머니가 한사코 너랑 결혼하라고 하니 네가 과연 내 평생을 바칠 가치가 있을지 알고 싶었어. 그래서 내 정체를 숨기고 일반인처럼 위장하며 너랑 함께 지냈었어. 지내다 보니 네가 참 좋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됐고 서서히 널 사랑하게 됐어.”전태윤이 하예정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그녀가 매정하게 뿌리쳤다.“미안해, 예정아.”하예정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말을 꺼냈다.“처음엔 날 떠보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요? 무려 4개월 동안 속였어요. 4개월 내내 나란 사람을 의심한 거예요? 인제야 내 성품을 인정하게 됐냐고요?!”“나중엔 감히 너한테 고백할 엄두가 안 났어. 네가 진실을 알게 된 후 날 떠날까 봐 너무 두려웠어. 난 널 잃고 싶지 않아.”전태윤이 다시 한번 손을 잡으려 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매정하게 뿌리쳤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터프하게 그녀의 손을 확 잡아당겨 입가에 가져가더니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전태윤은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 자상함과 미안함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예정아, 난 진짜 두려웠어. 여태껏 살아오면서 널 사랑하게 된 이후로 처음 그런 두려움을 느꼈어. 널 잃을까 봐 두렵고 네가
전태윤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손을 놓으면 그녀는 별장을 떠날 테고 둘은 더이상 만나기 힘들 것이다.그는 누구보다 하예정을 잘 알고 있다.“이거 놔요! 나 지금 태윤 씨랑 말하고 싶지도 않고 쳐다보기도 싫어요!”하예정은 그가 손을 안 놓아주려 하자 고개 숙여 그의 손등을 꽉 깨물었다. 다만 전태윤은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화가 난 하예정이 잔뜩 흥분하며 그에게 발길질해댔다.전태윤은 발악하는 그녀를 강제로 품에 안고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그는 부드러운 키스로 그녀를 다독이고 싶었다.하지만 하예정이 그의 입술을 가차 없이 깨물었다. 전태윤은 곧바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그는 어쩔 수 없이 하예정의 뒷목을 타격해 기절시킨 후 축 처진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쓱 닦고는 허리 숙여 이미 기절한 하예정을 안더니 위층으로 올라갔다.하예정을 침대에 눕힌 후 그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묵묵히 바라봤다.그녀가 화낼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예정아, 내가 다 잘못했어. 날 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으니 절대 날 떠나진 마. 난 너랑 이혼 못 해, 안 해!”그는 다시 몸을 숙여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잔잔한 키스를 남겼다.“띠리링...”이때 전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고 할머니한테서 걸려온 전화인 걸 확인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쉰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태윤아, 예정이 좀 어때? 많이 화났지?”“할머니는 아시면서 뭘 물으세요?”전태윤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너한테 그렇게 오랫동안 속았으니 화낼 만도 하지. 네가 많이 양보해줘. 더 싸우지 말고.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예정이는? 내 전화 받아줄까? 이 할미가 널 위해 좋은 말 몇 마디 해주고 싶은데.”“할머니가 먼저 예정이를 속였다는 걸 잊지 마세요.”할머니는 살짝 마음이 찔린 듯 말을 이었다.“내가 속인 건 맞지만 너까지 속이라고 하진 않
이윤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방윤림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방윤림에게 물었다“방 비서,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으세요?”방윤림은 이은화가 이윤미에게 배정해준 사람이었다. 이은화는 이윤미에게 방윤림이 그녀의 곁에 머문 순간부터 방윤림을 믿을 수 있고 그 또한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윤미가 앞으로 이씨 가문의 가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방윤림은 그녀와 평생 함께할 것이며 다시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이윤미는 여러 번 방윤림을 시험한 뒤에야 방윤림을 믿기로 했다.역시 방윤림은 특별 비서직을 맡기 위해 특별히 양성된 사람답게 정말 못 하는 것이 없었다.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이윤미는 이씨 그룹이 점점 못해지고 있지만, 선조들이 세운 훈련 기지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훈련 기지의 책임자가 어디서 이렇게 대단한 아이를 찾아 기지로 데려와서 조금씩 유능한 비서로 양성했는지 모른다.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비주얼도 아주 훌륭했다.방윤림은 비록 전씨 가문의 도련님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잘생긴 남자라고 칭찬받을 만큼 멋지다.이윤미가 이씨 가문에 돌아온 지 2년이나 되었지만, 이씨 가문의 비서를 양성하는 훈련 기지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그녀는 이은화에게 물었지만, 이은화는 그녀에게 훈련 기지가 어디인지 알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 훈련 기지를 담당하는 사람은 이씨 가문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사람들이고 가문의 사람들과 사적으로 교류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 알면 된다고 했다.전심전력으로 역대 가주들을 위해 최고의 특별 비서를 양성했다.이윤미는 이씨 가문의 재무 보고서를 보았지만, 교육 기지에 돈을 썼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하지만 매년 이씨 가문에서는 큰돈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지만, 돈의 행방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한 적 없었다.이윤미는 그 돈이 바로 훈련 기지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지급되리라 추측했다.훈련 기지도 자급
한참을 울다가 이윤정은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일어섰다. 그녀는 40만 원을 세어보더니 더도 말고 딱 40만 원이었다.과거에는 40만 원은 그녀의 눈에는 돈에 속하지도 않았다.그러나 지금 40만 원이라는 돈은 이윤미의 한 달 숙박비와 식비일 수도 있다.지금의 이윤정은 관성의 여운별도 더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여운별은 비록 용태호에게 이용당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친동생 여천우가 매달 그녀에게 생활비를 주기 때문에 굶지는 않았다.그러나 이윤정이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강성을 떠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이윤정은 돌아가서 그녀의 세 형수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했다.정군호 형제는 정군호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밖에서 내연녀를 두기 좋아했다.이윤정은 그들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성질도 잘 알고 있었다. 정일범 형제 또한 이윤정에 대한 정도 깊었기 때문에 그녀가 조금만 꼬드겨도 금세 넘어올 것이다.그들 형제가 전부 이윤정에게 빠져들게 해서 세 형수님이 죽도록 화나게 하고 싶었다.어차피 이윤정의 몸은 이제 깨끗하지 않으니까.이윤정은 이씨 가문의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정일범 형제와도 혈연관계가 없었다.그들이 이윤정에게 돈을 주고 그녀를 내연녀로 삼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그러면 조윤 일행도 기가 막혀 죽을 지경일 것이다.이윤정은 될 대로 되라고 중얼거리면서 병원을 떠났다.고급 병실의 거실 창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윤미는 이윤정이 이은화를 쫓아다니며 해명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윤정은 큰 소리로 울며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이은화가 경호원에게 이윤정 손에 돈을 좀 쥐여주라고 하고 자리를 떠난 모습을 본 이윤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저 모습을 보니 아마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몰라요.”이윤미 옆에 서 있는 방윤림이 이윤미의 반응을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이윤미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의 말에 동의했다.“윤정이는 지금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건 바로 세 오빠일 거
“엄마, 누가 저와 아버지를 해쳤는지 알아요. 세 형수님이에요. 그 술은 큰오빠가 방에서 아버지께 가져다드린 술인데 큰오빠가 그렇게 할 이유가 없잖아요. 분명 형수님들일 거예요. 엄마!”이은화가 차에 올랐다.이윤정이 앞으로 덤벼들었지만 차 문도 만질 수 없었다.운전기사가 차를 몰기 전에 이은화는 창문을 눌러 경호원들에게 이윤정을 풀어주고 이윤정이 가까이 오도록 지시했다.이윤정은 웃음 지으며 경호원을 물리치고 얼른 앞으로 다가갔다.“엄마, 저 믿으시는 거죠? 제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에요. 엄마는 계속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아직 조사할 시간이 없으셨겠지만, 집으로 돌아가셔서 조사하기만 하면 금방 진실이 밝혀질 거예요.”이은화는 이윤정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너와 군호 씨가 남의 계략에 빠졌다는 사실을 나도 알아.”이윤정이 더욱 기뻐했다.이은화의 아이큐로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하지만 뭐? 너희 두 사람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될 수는 없잖아.”이윤정의 희망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엄마.”이윤정의 눈시울이 바로 붉어졌다.그녀는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웠다.이윤정의 처음은 한 영감탱이에게 빼앗겨버리고 말았다.“넌 내 딸이 아니야. 네 몸에는 우리 이씨 가문의 피가 흐르지도 않고 정씨 집안의 피도 없어. 넌 나와 군호 씨 딸이 아니거든.”“하지만, 저는 엄마와 아빠가 키운 딸인걸요. 한때 저를 소중한 보물로 여기면서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셨잖아요.”이은화는 피식 웃었다.“그건 우리가 네 친아버지한테 속았기 때문이야. 원망하려면 네 친아버지를 원망해. 날 원망하면 안 되지. 넌 시종 우리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일범이는 내 친아들이고 일범의 아내도 내 며느리야. 너의 형수님들이 널 모함했는데, 그래서 뭐? 나에게는 핏줄이 가장 중요해.”이은화는 이윤정의 창백한 얼굴을 무시하고 경호원에게 분부했다.“얘한테 돈 40만 원 줘서 보내. 얼른 가자!”이은화도 속으로 화가 났지만, 조윤과 이윤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
정군호는 이윤미가 자신과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이었다.“영화도 좀 보고 쉬어야겠어.”이윤미는 아버지를 눕히고 싶어 했고 방윤림이 그녀의 뜻을 알아듣고 대신 정군호를 눕혀 주었다.“아버지, 저와 방 비서는 거실에 있을게요.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이따가 큰오빠도 오실 거에요.”정군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네 오빠가 왜 와? 네가 날 이틀 동안 돌보겠다고 하지 않았어? 왜 돌보기 싫어서 그래?”“큰오빠도 아버지 아들인데 아버지께서 입원하셨는데 오빠가 와서 돌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제가 돌보기 싫은 것과 상관없는 것 같은데요. 아버지는 저 혼자만의 아버지가 아니잖아요.”정군호는 목이 메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네 오빠는 출근하시잖아.”“저도 출근해야죠. 제가 큰오빠보다 더 바빠요.”정군호가 또 무슨 말을 하려 하자 이윤미는 이은화를 내세우며 계속해서 말했다.“엄마가 저 보고 병원으로 와서 아빠와 좀 이야기도 나누라고 했어요. 한 시간 뒤에 오빠가 오신다고 하셨고요.”정군호는 이은화의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는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정군호는 이윤정의 정황을 묻고 싶었지만 감히 이윤미에게 묻지 못했다.이윤정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그녀는 지금 입원 병동 입구 근처에 숨어 대문을 바라보며 이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드디어 이은화가 나타났다!이은화가 경호원들과 함께 입원 병동을 나서자 이윤정은 재빨리 나타나 쏜살같이 달려갔다.이은화 곁의 경호원들도 만만한 실력이 아니었기에 이윤정이 다가오기도 전에 먼저 발을 내밀었다.다행히 이윤정은 반응이 빨라 경호원이 날린 발차기를 재빨리 피했다.“엄마, 나야. 윤정이.”이윤정은 큰소리로 외쳤다.이윤정이라는 말을 들은 경호원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이윤정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엄마, 엄마!”이은화의 발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자 이윤정은 소리를 지르며 따라갔다.“엄마,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엄마,
이윤미가 입을 열었다.“삼촌들의 삶은 여전히 행복하게 살고 계세요.”이윤미는 정군호가 정씨 집안의 미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정씨 집안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이은화의 복수 수단을 두려워했던 정군호는 스스로 그 부분을 잘라 혼인 생활을 지키기로 했다. 앞으로 같은 침대에 있더라도 아무 짓도 못 하는 점에 대해 정군호도 받아들였다.조심했어야 했는데.“그럼 됐어. 윤미야, 비록 넌 네 엄마의 이씨 성을 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정씨 집안의 피가 흐르고 있거든. 앞으로 정씨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로 수수방관해서는 안 돼. 네 삼촌과 고모들도 너에게 잘 대해 주시잖아.”이윤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그분들도 지금 그들만의 일자리가 있잖아요. 그분들이 열심히 일하고 안전하게 지내시기만 한다면 생활이 나쁘지 않을 거예요. 만약 급한 일이 생기면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와드려야죠.”만약 이윤미가 도울 수 없는 일이라면 예외가 없을 것이다.정군호도 이윤미의 말뜻을 알아챘다.이윤미는 이은화처럼 매우 냉정하고 정씨 집안 사람들과 감정이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정씨 집안에 가장 정이 깊은 사람이 바로 이윤정이였다.이윤정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정군호는 부드럽게 웃었다.“성실하게 생활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셔. 그리고 저의 사촌 형제들도 전부 성실한 사람들이지.”성실하거나 말거나 이윤미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이 이씨 가문의 명목으로 함부로 행동하면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이윤미는 남들이 그녀를 바둑판의 바둑알로 이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아버지, 저도 알아요.”정군호는 이윤미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방윤림을 힐끗 쳐다보았다. 정군호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고 그의 모습을 본 이윤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버지,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우리가 친부녀 사이인데 못할 말이 어디 있겠어요?”“윤미야, 사실 네 엄마 마음속에도 한 남자가 들어있어. 다만 그 남자가 자취를 감췄
정군호도 그럴 용기가 없었다.이은화는 자식마저 내쫓을 수 있는 사람인데 데릴사위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이은화는 몸을 돌려 떠났다.이윤미는 이은화를 배웅해 주러 나가면서 정군호의 안부를 물었다.“넌 여기서 군호 씨랑 얘기를 나누고 있어. 한 시간 뒤에 너의 큰오빠가 오실 거야. 장남으로서 네 아빠를 돌보는 일은 일범이가 앞장서야지.”이윤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몇 마리 대화를 나누다가 엘리베이터 입구에 도착했다. 이윤미는 멈춰 서서 이은화가 경호들과 함께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돌아서서 병실로 돌아갔다.방윤림은 정군호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주었고 정군호도 방윤림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가주나 후계자 주변의 특별 비서들은 가문의 심복이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얕보지 못했다.이은화조차 방윤림에게 예의를 갖추곤 했다.“윤미야.”정군호는 이윤미가 돌아온 것을 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친딸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아버지, 기분이 어때요? 좀 나아졌어요?“이윤미는 정군호의 병상 앞에 앉아 예의를 갖추어 물었다.가장 친한 부모님이어야 하는데 이윤미는 친아버지를 손님을 대하듯 정중하게 대했다.친근해질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일주일 동안 입원한 정군호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고 핏기가 없어 보였다. 적어도 열 살은 더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윤미도 정군호가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신체적인 통증과 신체장애가 정군호의 마음을 심하게 괴롭힌 데다 병원에서 관리를 못 한 탓으로 그는 늙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래도 많이 나아졌어. 곧 퇴원하실 수 있을 거야. 네 엄마도 날 세심하게 보살펴 주셨거든. 매일 직접 밥도 먹여 주셨어.”정군호는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이은화는 확실히 매일 삼시 세끼를 직접 먹여 주었지만, 음식이 따뜻하든 차갑든 상관없이 정군호의 입에 쑤셔 넣었다.밥이 뜨거울 때는 정군호의 혀가 빨개질 정도로 뜨거웠고 차가울 때는 그의 마음마저 차가워질 정도로 차가웠다
20분 후, 두 사람의 차가 병원 주차장에 멈춰 섰다. 방윤림은 먼저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이윤미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 이윤미가 차에서 내리자 방윤림은 그녀의 물건을 들어주었다.이윤미는 아버지에게 영양제 두 박스와 과일 한 바구니를 사 왔다.“주세요. 무거워요.”방윤림은 이윤미가 과일을 들게 하지 않았다. 이윤미가 일반 여자들보다 힘이 센데도 말이다.그는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힌 사람으로서 힘이 더 드셌기에 과일 한 바구니를 들기에는 아주 거뜬했다.이윤미도 사양하지 않고 방윤림에게 과일 바구니를 들라고 했고 그녀는 한쪽 손으로 영양제 박스를 들었다.두 사람은 병원으로 걸어갔고 길을 가던 도중에 이윤미는 이윤정을 만났다. 이윤정이 구석에 숨어 있는 것으로 보면 아마 이은화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이윤미는 이윤정을 보았지만, 이윤정은 이윤미를 못 본 눈치였다.방윤림이 이윤정을 힐끗 보더니 이윤미에게 물었다.“쫓아낼까요? 가주님께서는 분명 윤정 아가씨를 보고 싶지 않을 겁니다.”이윤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내버려 둬요. 우리가 엄마를 만나지 못하게 해도 윤정이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 꿈을 꾸게 되는 법이죠. 꿈은 언젠가 깨질 텐데.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보고 싶어요.”방윤림은 말을 잇지 않았다.두 사람은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이윤정은 아는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사실 그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전부 진료를 받거나 환자를 방문하는 사람일 텐데 누가 낯선 사람에게 신경 쓸 여유가 있겠는가!이윤정은 강성에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다들 삶을 위해 뛰어다니며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돈을 더 버는 것이 남을 관심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이윤미와 방윤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정군호가 입원한 고급 병실에 도착했다.이은화의 경호원들은 병실 복도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
고빈도 이윤미가 그녀만의 사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어쩐지 고현이 이윤미를 마음에 들어 하더라니! 이윤미는 양부모 밑에서 잘 살지 못했지만 작은 풀처럼 굳세게 성장했다. 젊은 시절 이윤미는 그녀의 지력와 담력으로 그녀만의 상업 왕국을 만들어냈다.대단한 장사꾼이다.고현이 늘 고빈과 이윤미를 맺어주려고 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아마 고현은 지금도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하예진이 나타났기에 이씨 가문의 차기 후계자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이윤미가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면 자유롭게 시집갈 수 있고 데릴사위도 데려오지 않아도 될 것이다.고현도 이런 점을 고려해 아직도 고빈과 이윤미를 맺어주려고 했다.“누나, 알겠어. 그런데 윤미 씨 곁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어.”고빈은 일부러 귀띔해 주었다.그는 고현을 단념시켜 더는 그와 이윤미를 엮지 말았으면 했다.고빈은 이윤미의 능력을 감상할 수는 있지만, 남녀 간의 설레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게다가 이윤미 곁에는 수호자 방윤림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고현은 동생을 보며 말을 건넸다.“윤미 씨 옆에 누가 있든 너와 무슨 상관? 내가 윤미 씨 곁에 누가 있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왜 또 이 화제를 끌어들여? 혹시 네가 윤미 씨에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왜 윤미 씨를 언급할 때마다 그 일을 떠올려?”고빈이 당황해하며 대답했다.“아니... 절대 아니거든!”고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빈을 바라보았다. 고빈은 자신이 누나가 파놓은 큰 구덩이에 뛰어들었다고 느꼈다.“누나, 난 정말 윤미 씨에게 관심 없어. 싫어하는 건 아니고 그냥 순수하게 감상할 뿐이야. 그런데 내가 감상하는 여자들이 너무 많아.”고빈의 여성 지인들이 많이 언급되면 고현은 얼굴이 바로 어두워지곤 한다.“빨리 진정한 여자 친구를 찾아봐. 호영 씨가 고자질하지 않더라도 넌 계속해서 이렇게 빈둥거리면서 놀 수는 없잖아.”고현은 큰누나티를 팍팍 내며 고빈을 혼내고 있었다.고빈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나도 여자
고현은 그 빨간 작은 상자를 들고 열어보더니 다시 닫으며 고빈에게 물었다.“이건 너의 여성 지인들을 달래기 위해 산 거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그녀는 그 작은 상자를 고빈에게 던져주었다.“난 이런 액세서리들이 부족하지 않아. 호영 씨가 요 며칠 동안 나에게 보석과 여자 옷, 그리고 하이힐 등을 미친 듯이 사줬거든.”고현은 여성 물건들이 부족하지 않았다.그녀 자신도 돈이 많으니, 마음에 들면 아무리 비싸도 살 수 있었다.예비 시어머니도 귀한 보석들을 고현에게 많이 주셨다.단지, 그녀가 이런 여성 액세서리들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전씨 할머니도 그녀에게 몇 가지 귀중한 보석들을 주셨다. 할머니는 민국에서 태어나 집안이 부유했지만, 그 뒤로 몰락한 적이 있었고 또다시 부자가 되었다.어르신이 소장하고 있는 보석 중 일부는 골동품이었기에 매우 귀중했다.할머니는 몇 명의 며느리를 얻은 뒤로 그 며느리들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고 또 일부를 남겨두었다.원래는 손녀가 태어나면 대부분 물건을 주려고 했지만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하셨다.손자며느리가 생겨도 전씨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손자 며느릿감을 골라주시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소중한 보석 액세서리들을 선물했다.어르신은 돈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많은 것을 나누어주었지만 그녀의 창고에는 여전히 많은 액세서리가 남아있다.할머니는 앞으로 누가 그녀에게 증손녀를 낳아주면 큰 상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하지만 전씨 가문에 시집온 여자들은 희망을 품지 않았다.전씨 가문은 소문난 아들 천국이었다.몇 세대에 걸쳐 딸이 태어난 적 없었다.며느리들은 그녀들이 그렇게 운이 좋아 수많은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딸을 낳으리라는 희망조차 품지 않았다.고빈은 질투하며 말했다.“누나는 호영 형이 생기니까 이제 동생도 잊은 거야? 호영 형이 누나에게 준 선물은 호영 형의 성의이지, 내 마음이 아니잖아. 남매 사이에 내가 처음으로 목걸이를 선물했는데, 받지 않으려 하니 너무 속상하다. 이 목걸이는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