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 씨, 태윤이가 왜 신분을 숨겼든 간에, 당신에 대한 그의 감정은 진짜이고, 사랑도 진짜예요. 그 점은 의심할 필요가 없어요.”하예정은 손으로 촉촉해지는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소 이사님, 대답 고마워요. 폐를 끼쳤어요. 이만 가볼게요.”이미 확인한 그녀는 더는 그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소정남은 그녀를 만류하지 않고 일어서서 그녀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하예정 씨가 지금 충격받고 화 난 것도 알고 있고 태윤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것도 알지만 그도 정말 그럴 만한 고충이 있어요. 좀 진정하고 나면 그에게 해명할 기회를 줘봐요. 어쨌든 당신들은 부부잖아요!”하예정의 얼굴빛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웠다.직접 하예정을 아래층까지 데려다주고, 그녀와 함께 사무실 건물을 나선 소정남은 차를 가지러 갔다.“형수님.”지금 돌아오는 길이니 형수를 붙잡아 두라고 도움을 청하는 형님의 전화를 받은 전이진이 사무실 건물 입구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먹장구름처럼 어두운 하예정의 얼굴을 보고 전이진은 스트레스가 몰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시각 회사에 있는 게 잘못이었다. 형님이 서둘러 오고 있지만 먼 곳의 물로는 가까운 곳의 불을 끌 수가 없으니, 동생인 그가 먼저 나서서 형수를 붙잡아 둘 수밖에.형님은 형수가 회사를 나서면 자기를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무서워하고 있다.하예정은 지금 전씨 식구들을 보기만 해도 화가 나 그들과 말을 섞기 싫어서 전이진을 피해 걸어가려 했다.손으로 그녀를 잡아당기려던 전이진은 감히 손으로 잡아당기지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두 팔을 벌려 하예정을 막았다.“형수님, 가지 마세요, 지금 형님께서 오고 있어요. 곧 도착할 거예요.”하예정이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순간 전이진은 형수의 싸늘한 눈빛이 형님을 닮았다고 느꼈다.부부가 오래되면 서로 닮는다고, 형수도 형님을 닮아가는 건가?“전이진 씨, 아니 둘째 도련님, 비켜주세요!”하예정이 자기를 부르는 호칭을 들은 전이진이
노동명이 하예진을 전씨 그룹에 데려올 때까지 말이다.스쿠터에 배터리가 없어 길가에 서 있는 심효진을 만난 노동명이 심효진도 함께 태우고 왔다. 스쿠터는 자물쇠를 잠가 길가에 남겨두었고, 우선 하예정부터 달랠 생각이었다.“예정아.”하예진과 심효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예정에게 달려갔다.하예진은 아들마저 내버려 두고 말이다.그 덕에 노동명은 마침내 소원대로 주우빈을 안을 수 있엇다.엄마가 자신의 존재도 잊고 노동명 아저씨 차에 자기를 내버려 둔 채 달려가는 바람에 꼬맹이는 어쩔 수 없이 아저씨한테 안겼다. 그는 아저씨가 자기를 차에서 안아내려줄 줄 알았는데, 정작 차에서 내린 후에도 그 손을 놓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이모에게 다가갔다.하예정은 소정남과 전이진 때문에 전씨 그룹을 떠날 수 없었고 몸도 지쳤다.언니를 본 순간 서러움이 북받친 하예정은 언니 품에 와락 안겼다.“언니.”언니 품에 안긴 하예정은 억울함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언니 여기 있어.”가슴 아파 난 하예진이 하예정을 꼭 끌어안았다.몇 분 동안 울던 하예정이 언니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언니, 집에 가고 싶어, 태윤 씨 집 말고 언니 집에.”하예진이 눈물을 닦아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 집에 가자.”하예정의 손을 잡던 하예진은 그제야 노동명에게 안겨 있는 주우빈을 발견하고 급히 그의 품에서 주우빈을 받아안고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제가 우빈이를 안을게요.”심효진의 말에 하예진은 심효진에게 주우빈을 넘겨주었다.“형수님!”전이진은 다시 한번 하예정 자매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러고는 하예진에게 말했다.“예진 누나, 형님이 지금 회사로 오고 있어요, 형수님과 형님의 일은 그들 둘에게 맡겨 해결하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하예진이 차갑게 말했다.“둘째 도련님, 예정이는 지금 당신 형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비켜줘요. 당신들 전씨 가문과, 우린 감히 엮이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여동생을 데리고 전이진을 피해 앞으로 걸어갔다.초조해진 전이진이
하예정의 마음은 점점 차가워졌다.그가 평소에 운전하는 그 현대 SUV는 그가 일부러 그녀를 속이기 위해 산 거겠지?그가 다닐 때면 지금처럼 호송 차량과 경호원 팀이 따라다니는데, 이것이야말로 큰 도련님이 다니는 방식이겠지!전태윤은 차에서 내린 후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자매 앞에 다가간 전태윤은 미안한 표정으로 먼저 하예진에게 말했다.“처형, 제가 잘못한 거 알아요, 예정이랑 단둘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하예진이 동생을 바라보자 하예정이 차갑게 말했다.“우리가 더 할 얘기가 남았나요? 당신께선 높으신 전씨 가문 도련님이신데, 저 같은 소시민이 어찌 감이 넘볼 수가 있겠어요? 당신과 말할 자격도 없지요.”“예정아.”전태윤은 손을 뻗어 언니를 잡고 떠나려는 그녀를 잡아당겼다.하예진이 손을 떼고 동생에게 말했다.“예정아, 태윤 씨랑 얘기 좀 해봐. 어쨌든, 그에게 해명할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어?”하예정이 전태윤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전태윤이 그 손을 놓을 리 없었다.갑자기 화가 난 하예정은 미친 사람처럼 그를 때렸다.그녀의 분노를 묵묵히 참던 전태윤은 그녀가 지치자,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이런 결과가 두려워서 고백하지 못하고 있던 전태윤은 예준성의 조언을 듣고 나서야 용기를 내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전태윤, 이 망나니 사기꾼! 이거 놔!”전태윤은 그녀를 꼭 껴안은 채, 그녀가 그를 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물려 통증이 느껴져도 여전히 그 손을 놓지 않았다.손을 놓으면 그녀가 그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예정아, 미안해, 미안해.”전태윤은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되뇌었다.그녀를 그렇게 오랫동안 속인 그는 정말 그녀에게 미안했다.그가 된감기에 걸렸을 때, 그녀에게 어떤 상황에서 그를 떠나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만약 그가 가정폭력을 휘두르고, 바람을 피우고, 그녀를 수없이 속인다면 그를 떠났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녀는 또한 진짜 떠날 때는 말도 없이 떠들지도 않고 조용히 떠날 거라고 했다
산 정상 별장에 돌아간 후 전태윤은 하예정을 안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나 혼자 내릴게요. 안을 필요 없어요. 더는 날 터치하지도 말아요!”하예정은 포옹하려는 그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는 전태윤이 더는 건드리지 말기를 바랐다.결국 남편을 매정하게 밀친 후 그녀 스스로 차에서 내렸다.이때 장씨 아저씨가 집안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하예정을 보자 매우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금세 스스럼없이 인사했다.“사모님.”이에 하예정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저는 당신들의 사모님이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전태윤 도련님을 넘보겠어요!”그녀는 비난하는 어조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예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고개를 홱 돌리고 전태윤에게 말했다.“이래놓고 뭐? 혼자 산다고요? 태윤 씨는 이젠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네요. 어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날 속여요?”그의 연기가 너무 완벽하다 보니 단순한 하예정은 감쪽같이 속았다.‘다 내가 멍청해서 그래. 태윤 씨가 몇천만 원짜리 SUV를 타고 다니고 별장이 아닌 아파트에 사니 진짜 일반 직장인인 줄 알았어. 전에 나한테 자신이 만약 갑부라면 믿겠냐고 물은 적 있지? 그땐 아예 안 믿는다고 했어. 갑부는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테고 난 연예인 뺨치는 미모를 지닌 것도 아니니 재벌 집 도련님이 나랑 결혼할 리가 없잖아!’애초에 초고속 결혼을 할 때 절친 심효진도 그녀에게 장난치듯 물었지만 하예정은 단호하게 부인했다. 재벌 집 도련님이 길거리에 널린 것도 아닌데 초고속 결혼으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면서, 효진에게 로맨스 소설 좀 그만 보라고 다그쳤었다.하지만 결국 하예정만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 돼버렸다.전태윤은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묵묵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하예정을 속인 건 사실이니 그도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하예정은 그를 날카롭게 째려보더니 장씨 아저씨를 스쳐지나 홀로 별장에 들어섰다.“도련님, 사모님께서 아시게 된 후 몹시 화나셨나 봅니다!”
하예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게 주방으로 들어갔다.전태윤은 집안에 들어오며 마침 주방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는 하예정을 묵묵히 지켜봤다.하예정은 요리할 줄 몰라서 라면에 달걀 한 개를 넣고 끓인 후 냄비 채로 들고 나왔다.전태윤을 본 그녀는 힐긋 째려보더니 공기 취급하며 식탁 앞에 앉아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전태윤은 그녀가 홧김에 단식이라도 할까 봐 걱정했는데 라면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도 식탁 앞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예정아...”“입 닥쳐요! 밥맛 떨어지니까!”아내가 으름장을 놓자 전태윤 도련님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그는 지금 잘못을 저지른 입장이니 땅이 꺼지도록 머리를 숙여야 한다.그녀가 먹는 모습에 전태윤도 배가 고팠다.하지만 감히 자리를 비우지 못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로 그녀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 배고픔을 꾹 참고 라면 먹는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하예정은 라면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수저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예정아, 나 줘. 설거지 내가 할게.”전태윤은 얼른 그녀의 손에서 냄비를 뺏어왔다.하예정도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설거지하겠다고 하니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고 주방을 나섰다.그녀가 밖에 나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전태윤도 시름 놓고 설거지하러 갔다.그는 가장 빠른 속도로 설거지를 끝내고 그녀에게 과일까지 씻어서 조각으로 잘라 접시에 담아왔다.“여보.”“여보라고 부르지 말아요!”“예정아.”전태윤은 곧바로 호칭을 바꿨다.아내의 분노가 극에 달했으니 모든 걸 아내에게 맞춰야 한다.“과일 좀 먹어.”전태윤은 조각으로 자른 과일 그릇을 하예정 앞에 내려놓았다.“당신한테 배신당한 것만 생각하면 기가 차서 배가 저절로 부른데 과일이 넘어가겠어요?!”전태윤은 과일 그릇을 내려놓으려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탁자 앞으로 가져갔다.하예정은 라면 한 그릇 뚝딱 비웠으니 당연히 배부를 것이다.“미안해, 예정아
“난 애초에 태윤 씨가 재벌 집 도련님인 줄도 몰랐어요! 내가 뭘 노렸는데요? 우리가 처음 싸웠을 때 나도 바라는 게 있다고 똑똑히 말했었죠. 태윤 씨에게 집이 있으니 집 구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고, 태윤 씨가 성숙하고 듬직한 데다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어 우리 언니가 만족하고 마음 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잖아요.”전태윤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나도 알아. 넌 처형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랑 결혼한 거지 절대 내 돈을 노리거나 신분을 노린 건 아니야. 내가 오해했어.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예정아. 날 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아. 내가 한 잘못이니 무슨 처벌이든 달갑게 받을게.”전태윤은 끝까지 억울하단 말 한마디 없었다.하예정이 그를 째려봤다.“처음엔 너의 성품을 보려고 신분을 숨겼었어. 할머니가 한사코 너랑 결혼하라고 하니 네가 과연 내 평생을 바칠 가치가 있을지 알고 싶었어. 그래서 내 정체를 숨기고 일반인처럼 위장하며 너랑 함께 지냈었어. 지내다 보니 네가 참 좋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됐고 서서히 널 사랑하게 됐어.”전태윤이 하예정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그녀가 매정하게 뿌리쳤다.“미안해, 예정아.”하예정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말을 꺼냈다.“처음엔 날 떠보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요? 무려 4개월 동안 속였어요. 4개월 내내 나란 사람을 의심한 거예요? 인제야 내 성품을 인정하게 됐냐고요?!”“나중엔 감히 너한테 고백할 엄두가 안 났어. 네가 진실을 알게 된 후 날 떠날까 봐 너무 두려웠어. 난 널 잃고 싶지 않아.”전태윤이 다시 한번 손을 잡으려 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매정하게 뿌리쳤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터프하게 그녀의 손을 확 잡아당겨 입가에 가져가더니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전태윤은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 자상함과 미안함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예정아, 난 진짜 두려웠어. 여태껏 살아오면서 널 사랑하게 된 이후로 처음 그런 두려움을 느꼈어. 널 잃을까 봐 두렵고 네가
전태윤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손을 놓으면 그녀는 별장을 떠날 테고 둘은 더이상 만나기 힘들 것이다.그는 누구보다 하예정을 잘 알고 있다.“이거 놔요! 나 지금 태윤 씨랑 말하고 싶지도 않고 쳐다보기도 싫어요!”하예정은 그가 손을 안 놓아주려 하자 고개 숙여 그의 손등을 꽉 깨물었다. 다만 전태윤은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화가 난 하예정이 잔뜩 흥분하며 그에게 발길질해댔다.전태윤은 발악하는 그녀를 강제로 품에 안고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그는 부드러운 키스로 그녀를 다독이고 싶었다.하지만 하예정이 그의 입술을 가차 없이 깨물었다. 전태윤은 곧바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그는 어쩔 수 없이 하예정의 뒷목을 타격해 기절시킨 후 축 처진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쓱 닦고는 허리 숙여 이미 기절한 하예정을 안더니 위층으로 올라갔다.하예정을 침대에 눕힌 후 그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묵묵히 바라봤다.그녀가 화낼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예정아, 내가 다 잘못했어. 날 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으니 절대 날 떠나진 마. 난 너랑 이혼 못 해, 안 해!”그는 다시 몸을 숙여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잔잔한 키스를 남겼다.“띠리링...”이때 전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고 할머니한테서 걸려온 전화인 걸 확인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쉰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태윤아, 예정이 좀 어때? 많이 화났지?”“할머니는 아시면서 뭘 물으세요?”전태윤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너한테 그렇게 오랫동안 속았으니 화낼 만도 하지. 네가 많이 양보해줘. 더 싸우지 말고.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예정이는? 내 전화 받아줄까? 이 할미가 널 위해 좋은 말 몇 마디 해주고 싶은데.”“할머니가 먼저 예정이를 속였다는 걸 잊지 마세요.”할머니는 살짝 마음이 찔린 듯 말을 이었다.“내가 속인 건 맞지만 너까지 속이라고 하진 않
“태윤아, 당황해하지 마. 할머니가 지금 바로 갈게. 너희 어디 있어?”할머니는 전태윤의 마음을 달랬다.손주 부부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른 건 할머니도 불가피한 책임이 있다.전태윤은 고함을 지른 후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했다.“할머니가 오셔도 아무 소용 없어요. 우리 모두 예정이를 속였어요. 예정이는 우릴 볼 때마다 몇 개월 동안 감쪽같이 속아온 것만 떠올릴 거예요.”할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게 내가 진작 털어놓으랬잖아... 그럼 네가 알아서 방법을 찾아봐. 예정이 잘 달래줘. 전혀 소용없으면 며칠만이라도 진정할 수 있게 놔둬. 너무 다그치지 말고...”“예정이는 우리 집에서 반 발짝도 못 나가요!”전태윤은 지금 이 순간 여느 때보다 일방적이었다.할머니는 말문이 막혀 결국 묵묵히 전화를 끊고는 속으로 손주 녀석을 위해 기도했다. 전태윤이 일방적인 버릇을 못 고치는 한 하예정과 처음처럼 돌아가는 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할머니와 통화를 마친 후 전태윤은 강일구 일행에게 전화해 분부를 내렸다.“내가 예정이한테 준비한 발렌타인 선물들 전부 우리 집으로 가져와. 그리고 장미꽃도 좀 더 사 와서 정원을 예쁘게 꾸며놔.”그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인터넷에서 기사가 신속하게 퍼져 흘렀고 경호팀도 사모님이 대노하실까 봐 줄곧 가슴을 졸였다.그리고 분노를 터트리는 사모님을 직접 목격하니 입이 쩍 벌어졌다. 사모님은 생각보다 도련님을 모질게 대했다.뭇사람들은 알콩달콩했던 이 부부가 어떤 파국에 치닫을지 몹시 걱정됐다.이때 문득 전태윤의 분부를 받으니 강일구는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는 도련님이 사모님을 잘 달랜 줄로 알고 홀가분하게 대답했다.“네, 알겠어요. 지금 바로 가서 도련님이 준비한 선물들을 가져올게요.”전태윤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빨리 진행시켜.”하예정이 곧바로 깨날 테니까.경호팀은 가장 빠른 속도로 전태윤이 아내를 위해 준비한 발렌타인 선물을 집안에 들여놓고 위층까지 가져왔다. 그들은 전태윤의 방문을 노크하고 침
전호영의 전화를 받은 고현은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핑계를 주었다.고현은 자신의 하이힐을 신고 걸어 다니는 자태를 감시하고 있는 진미리에게 말했다.“엄마, 호영 씨 전화예요.”“그래.”고현은 소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앉았고 그녀의 걸음걸이 자태를 보던 진미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라왔다.남자의 분장에 익숙해진 고현이 치마로 갈아입고 하이힐을 신으면 진미리의 요구대로 잘 걸을 수 없었다. 재벌가 딸들의 우아한 자태로 걷는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고현은 하이힐을 신고 삐뚤삐뚤 걸어 다녔다.어쨌든 진미리는 고현이 하이힐을 신고 걷는 모습이 매우 못마땅했다.고현은 소파에 앉자마자 바로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진미리는 고현의 상황을 살피지도 않은 채 하늘을 찌르는 듯한 굽 높은 신발을 신고 걷는 연습을 시켰다. 비록 연회에 참석할 때 신을 하이힐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말이다.고현은 내심 불만이었다.하지만 진미리는 굽 높은 신발로 연습을 해야 연회 때 신어야 할 하이힐을 쉽게 신을 수 있다고 했다.“호영 씨.”고현은 부드럽게 전호영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처럼 전호영의 전화를 기다린 적이 없었고 또한 이렇게 부드러운 말투로 전호영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었다.그녀는 성격이 차가운 편이라 전호영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여자들처럼 애교도 부리지 않았다.가끔 고현이 전호영과 이야기할 때 약간의 웃음을 띠면서 말을 건네기만 해도 전호영은 며칠 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오후에 회사에 돌아가지 않았어요. 반나절을 쉬려고 우리 부모님 집으로 왔어요.”고현의 부드러움은 전호영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만 사용됐고 다시 입을 열어 말했을 때는 말투가 정상으로 돌아갔다.전호영이 물었다.“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워커홀릭이라 결혼하기 전의 전태윤처럼 평일에 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주말이 되어 집에서 쉰다 해도 사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고현은 가끔
임원들은 고빈의 주위에는 적어도 여성 지인들이 많아 그녀들과 만나면서 먹고 놀 수 있다지만, 고현은 그야말로 전호영에 의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아주 훌륭하고 관성의 제일 갑부인 전씨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뭐가 소용 있겠는가!동성연애는 국내 사람들이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고빈 씨에게 드리는 꽃이 아니거든요. 고현 씨는 회사에 없어요? 나가셨어요?”전호영이 물었다.고빈은 손이 전호영에 의해 뿌리쳐졌지만, 화도 내지 않고 일부러 전호영에게 말했다.“우리 형에게 매달리더니 너무 심하게 매달린 건 아닌가 봐요? 우리 형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다니. 우리 형이 오후에 회사에 돌아오지도 않았어요. 모르셨어요?”전호영은 정말 몰랐다.그는 고현이 오늘 저녁에 그녀와 함께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밖에 몰랐다.오늘 밤 두 사람이 참석하는 연회는 강성에 있는 한 재벌가의 저택에서 열리기 때문에 전호영은 일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달려왔다.그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로 왔다.전호영은 매일 양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선천적으로 잘생긴 외모로 옷을 대충 입어도 쉽게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곤 했다.“호영 씨 표정을 보니 우리 형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네요. 하하! 우리 형을 반년 넘게 귀찮게 하여 동성애자로 만들더니 결국 우리 형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이지는 못했네요.”고빈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전호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시간이 없어서 잔소리 그만할게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고빈은 전호영을 뒤로 한 채 임원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리를 떠났다.전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프런트 데스크로 돌아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직원에게 물었다.“고 대표님께서 오늘 오후 정말로 회사로 돌아오지 않았어요?”“네, 오후에 돌아오지 않으셨어요.”전호영이 다시 물었다.“어디로 가신다는 말은 안 하셨어요? 사업 때문에 나가신 거예요?”전
하예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살며시 노동명을 안아주었다.잠시 후 노동명은 그녀를 가볍게 밀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서 쉬어.”“잘 자요. 동명 씨도 내일 관성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두 사람은 서로 인사한 뒤 하예진은 노동명의 방을 나섰다. 노동명은 휠체어를 타고 그녀를 현관문 밖으로 나와 그녀가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문을 닫았다.밤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다음 날 노동명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하예진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하루 호텔을 떠났다.하예진은 공항까지 따라가지 않고 노동명을 차에 태우고 호텔 입구에 서서 그를 배웅했다.공항까지 배웅하면 더 아쉬울 것 같았다.노동명이 타고 있던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하예진은 그제야 경호원들과 함께 전호영이 안배해 준 차를 향해 걸어갔다.노동명이 관성으로 돌아갔으니 그녀도 계속 일을 해야 했다.바쁠 때는 시간이 유난히 빨리 지난다.날이 조금 전에 밝은 것 같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또 저녁이 되었다.전호영은 고현이 오후에 회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그는 평소처럼 저녁 무렵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가서 고현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그리고 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 했다.고현은 사업이 무척 바빠서 전호영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매일 식사 시간이 바로 그와 고현이 정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그의 차는 고씨 그룹에 들어가서 늘 주차하던 곳에 멈춰 섰고 전호영은 조수석에서 꽃다발을 안아 들고 차에서 내렸다.전호영은 사무실 건물 입구에서 밖으로 나가는 고빈을 만났다. 고빈은 회사 임원 몇 명과 함께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전호영을 본 고현 일행은 멈추어 섰다.“회사엔 왜 왔어요?”고빈이 입을 열자마자 물었다.전호영은 그 물음에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제가 왜 당신 회사에 올 수 없어요?”전호영은 매일 고씨 그룹으로 왔다.그럼 전호영을 쫓아내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고빈이 감히 그를 쫓아낸
“응, 내일 돌아가려고. 예진이도 너무 바빠서 영향 줄까 봐 그래. 관성으로 돌아가서 우빈이도 돌봐야 예진이가 걱정하지 않지. 내가 강성으로 돌아가서 나와 우빈을 위해 강산을 다스려야 되거든. 하하!”노동명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하예진이 말했다.“나중에 빚이 쌓일까 봐 두렵네요.”노동명이 되물었다.“뭐가 두려워? 수십 조의 빚만 아니라면 다 갚아줄 수 있어. 넌 마음 놓고 가서 일해.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버텨줄 테니까. 파산될 걱정은 하지 마.”수십 조의 빚이라고?하예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현재 하예진의 상황으로 놓고 보면 수억 원의 빚만 져도 그녀는 너무 걱정되어 흰머리가 나올 것 같았다.전태윤은 또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우리 처형에게 너 같은 후원자가 있으니 반드시 강성에서 성공할 거야.”노동명은 하예진에게 전태윤의 음성메시지를 들려주며 말했다.“들어봐, 태윤이가 너를 엄청나게 믿고 있어.”“항상 저를 이렇게 믿어주시는데 제가 더 열심히 해야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겠네요.”“너도 혼자 견디지 말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에게 도움을 청해. 내가 다리를 다쳤지만 머리가 다친 건 아니거든. 나도 너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하예진은 노동명이 다리를 다쳤다는 둥 머리를 다쳤다는 둥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동명 씨의 다리는 좋아질 거예요. 저는 그런 말 듣기 싫어요. 앞으로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동명 씨가 다리 나아지면 저랑 결혼도 하셔야죠.”노동명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그런 말을 해 주니 내 다리도 분명 나아질 거야.”하예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너무 오래 얘기하지 마세요. 일찍 쉬어요. 저도 방에 가서 쉴게요. 내일 또 회사 일로 많이 뛰어다녀야 하거든요.”“응, 가. 잘 자.”노동명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달라고 암시했다.하예진은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더니 노동명의 칼자국이 있는 얼굴에 입을 맞추
“형인 씨 마음속엔 아직 네가 있을지도 몰라.”노동명이 말했다.그는 오히려 주형인이 우빈 앞에서 그의 험담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주형인이 험담하면 할수록 우빈은 그를 싫어할 것이고 오히려 노동명과 우빈의 정이 더 깊어져만 갈 테니까.노동명은 마침내 우빈이 주씨 집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무척 잘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우빈도 미안했던 모양이다.주형인이 그의 험담을 했기 때문이다.“형인 씨는 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거예요. 저를 사랑했다면 저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씨 집안 가족들이 저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어떻게 시어머니와 그의 누나가 저를 비난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겠어요?”“그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에요. 제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만약 형인 씨와 서현주 씨가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고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행복하게 살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을 텐데. 제가 죽든 살든 상관했겠어요? 우빈에 대한 감정조차 옅어졌을걸요. 그들만의 아기가 생기면 우빈에 대한 감정이 워낙 깊지 않은데다 감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노동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문득 화제를 돌렸다.“맞아. 그런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과 일들을 생각하지 말자. 나 내일 관성으로 돌아갈 거야. 예진아, 나랑 같이 가서 새 옷 몇 벌 사 오자. 우빈에게 줄 장난감도 좀 골라줘. 내가 매번 선물한 장난감을 녀석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하예진도 전남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진작에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노동명 앞에서 전남편 얘기를 꺼내면 노동명이 질투할까 봐 걱정했다.교통사고를 당한 후 노동명도 많이 연약해졌다.주로 다리 장애로 자신감을 잃은 노동명은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노동명
하예진이 물었다.“예정이에게 없고 저한테 있는 게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동명 씨가 재활을 꾸준히 하시고 제가 관성에 없을 때 자신을 돌보고 시간이 나면 우빈을 돌봐 주세요. 우빈이도 동명 씨를 보러 자주 갈 거예요. 녀석이 지금 자기 아빠보다 동명 씨를 더 좋아하니까요.”노동명은 의기양양하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우빈에게 진심으로 대해서 그래. 우빈이 친아빠는 늘 우빈이 앞에서 내 험담만 하거든. 우빈이는 똑똑하니까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 잘 알고 있어. 우빈이 친아빠가 내 험담을 하면 할수록 자기 친아빠를 더 싫어할걸.”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하예진을 바라보았다.주형인에 관한 얘기가 언급되자 하예진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그때 하예진이 입을 열었다.“뭘 봐요? 내가 아직도 그 남자를 신경 쓰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은 단지 우빈이 아빠일 뿐이에요. 제가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줄 알았죠? 그 사람을 언급하면 제 기분이 가라앉을 줄 알았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제가 어떻게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제가 아직도 사랑했다면 애초에 이혼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마음이 찢어진 이상 최대한 빨리 이혼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주형인도 약속한 대로 그와 그의 가족들은 더는 하예진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연관성은 우빈 뿐이었다.그러나 주형인은 하예진과 노동명이 함께 있는 모습을 태연자약하게 지켜보지 못했다.그는 또 노동명이 친아버지인 자신보다 더 나은 계부로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우빈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을 했다.우빈이 아직 노동명을 두려워할 때,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우빈은 노동명을 대신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했다.오늘날 우빈과 노동명의 사이가 매우 좋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주형인 부자가 만날 때마다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이 폐인으로 되었기에 하예진과 함께 한다면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 거나 다름없다면서 노동명의 험담했다.또
모두 웃기 시작했다.전호영은 노동명과 하예진이 돌아오면 요리들이 올라오게끔 미리 준비해 놓았다.그들은 유쾌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식사 후 고현은 곧 자리를 떠나 고성 호텔로 박 대표를 만나러 갔다.다행히도 하루 호텔과 고성 호텔은 가까웠다. 두 호텔은 길을 건너면 바로 볼 수 있다.그러나 아무리 가까워도 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해 주겠다고 고집했다.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호텔을 나와 호텔 근처 거리를 거닐며 강성의 밤거리를 구경시켜 주었다.“기분은 좀 나아졌어?”노동명이 뒤에 있는 하예진에게 물었다.하예진은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네, 많이 나아졌어요. 앞으로 저에게 닥칠 일들이 지금보다 더 가혹할 거에요. 만약 이번 일조차 직면할 수 없다면 제가 강성에 있을 필요도 없이 관성으로 돌아가 계속 저의 레스토랑을 돌보는 게 나을걸요.”그렇게 하면 이경혜의 바람과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다행이네. 이렇게 오래 돌아다녔는데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선물로 사줄게.”하예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제가 사면 돼요. 선물할 필요 없어요.”“난 지금 네 남자 친구거든. 앞으로 남은 인생을 함께할 남자라고. 나도 너에게 선물을 준 적 없는데. 사실 우리 집 객실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여러 선물로 가득 차 있거든. 전부 내가 너에게 준비한 선물들이야. 어떤 것은 너에게 선물했지만 네가 받지 않은 물건들이고 어떤 것은 내가 너에게 미처 선물하지 못한 것도 들어있어. 네가 받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그 방에 넣어두었거든. 앞으로 우리가 한 가족으로 되면 그 물건들은 어차피 너의 것으로 될 테니까. 네가 가지지 않으면 우리 집안의 돈이 낭비되는 거나 다름없을 텐데. 너도 우리 가정의 돈이 낭비되는 게 싫지?”하예진은 말문이 막혔다.과거에 그녀는 노동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재혼하고 싶지 않고 돈만 벌고, 사업을 일으켜 우빈을 잘 키워
전호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두 사람을 1층으로 안내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에서 고현에게 뽀뽀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다.그는 고씨 그룹에서 고현에게 체면을 세워 주어야 했다. 어쨌든 고현은 고씨 그룹의 대표님이니까.전호영이 차를 몰고 고현과 함께 고씨 그룹을 떠났고 고현의 운전기사와 경호원들도 두 사람 뒤를 따랐다.식사를 마치고 나면 고현은 또 박 대표와 약속이 있었다.전호영은 그들이 하루 호텔에 도착했을 때 하예진과 노동명은 아직 호텔에 돌아오지 않았다.하예진 일행은 약 30분 뒤에야 호텔로 돌아왔다.하예진은 어두운 얼굴로 노동명을 호텔로 밀고 들어갔다. 노동명은 계속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못 듣는 체했다.노동명은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위로의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하예진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고 노동명도 더는 위로하지 않았다.하예진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위층으로 올라가 전호영이 안배해 준 식사하는 룸에 도착해서야 하예진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동명이 형.”전호영은 하예진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급히 일어나 하예진을 도우려고 했다.“호영 씨, 동명 씨가 혼자 몇 걸음 걸을 수 있어요.”하예진은 전호영의 도움 없이 노동명의 휠체어를 식탁 앞에 세웠고 노동명은 스스로 일어나 두 걸음 걷다가 다시 탁자 앞에 있는 걸상에 앉았다.고현도 일어섰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두 사람과 인사를 했다.“돌아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하예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괜찮아요. 저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언니, 일은 다 처리했어요?”모두 자리에 앉은 후 고현은 두 사람에게 각각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라주며 관심 있게 하예진에게 물었다.“다 처리했어요.”하예진이 대답했다.“잘됐네요. 노 대표님, 내일 돌아가시려고요?”고현은 나지막이 물었다.노동명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예진이 보러 온 것뿐이
“엄마.”고현은 진미리의 전화를 받았다.“현아, 퇴근했어?”“네, 막 퇴근하려고 그래요. 왜 그러세요?”“드레스 말고도 평소에 입을 옷도 몇 벌 더 사줄까?”고현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요.”고현은 단지 내일 저녁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그녀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어 전호영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더는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다들 전호영이 고현을 삐뚤어지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바라보았으나 고현은 정상적인 남자라고 여겼다.진미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필요 없어? 여자 신분을 회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내일 저녁에만 드레스 입고 계속 남자 옷을 입고 다니려고?”“네. 원래대로 다니려고요.”고현은 이제 그녀의 가짜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약간 태평공주기 때문에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양복을 입어도 남자처럼 보였다.진미리는 계속해서 설득했다.“신분을 드러내기로 했는데 왜 또 남자 행세를 하려고 해? 얼마나 힘들어.”“엄마, 그건 제 습관이에요. 20년 동안의 습관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 저의 요구대로 사주세요. 앞으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시려면 엄마 아드님 걱정 좀 하세요.”“빈이 그 자식은 걱정해도 소용없어. 그럼 엄마는 네 요구대로 드레스를 사줄게. 그리고 평소 입을 옷도 몇 벌 사 갈게. 옷장에 넣어두었다가 입고 싶을 때 꺼내서 입어.”“알겠어요.”“그래. 넌 퇴근해. 난 네 아빠랑 밥 좀 먹어야겠어. 네 아빠가 오랜만에 쇼핑하니 너무 힘들대. 먼저 밥 먹고 나서 다시 옷 보러 돌아다닐게.”진미리는 전화를 끊었다.고지호가 곁에 물었다.“현이가 싫대?”고진호 부부는 고현의 도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들을 많이 봤다.“현이가 싫다고 해도 우리가 집으로 사가서 현이 옷장에 넣어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