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곧게 호텔 맨 위층의 로얄 스위트룸으로 올라갔다.몇 분 후, 김종헌 부부도 그제야 경호팀의 안내 하에 노크하고 방에 들어갔다.전태윤은 그들에게 앉으라고 청했다.“고마워요, 대표님.”부부는 고마움을 표하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자리에 앉은 후에도 둘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전태윤이 왜 갑자기 만나자고 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전태윤은 이 일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김 대표, 오늘 여기로 불러온 이유는 댁 아드님을 잘 단속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서예요. 더는 우리 와이프한테 집착하지 말라고 해주세요.”김종헌 부부는 돌연 낯빛이 어두워졌다.심미란은 말까지 더듬었다.“대표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우리 진우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걔가 무슨 엄두로 대표님 아내분을 집착하겠어요?”전씨 사모님의 신분은 타이틀만으로도 위압감이 넘치는데 누가 감히 그녀를 넘본다는 말인가?김종헌도 말했다.“맞아요. 우리 진우 확실히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걔는 절대 그럴 리가... 저기요 대표님, 실례지만 아내분이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전태윤의 기혼 사실은 상류층 사람들과 전씨 그룹 직원들만 알고 있다.다만 상류층 사람들은 그의 아내가 누구인지는 모른다.김종헌은 일단 제 아들 진우가 전씨 그룹 사모님을 집착할 배짱이 없다고 여겼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직 전씨 그룹 사모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진우가 좋아하는 사람은 하예정이었다. 김종헌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심미란도 뒤늦게 반응하며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인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하예정이 전태윤의 아내란 말인가?이럴 수가!전태윤은 특별한 날에 하예정에게 제 신분을 솔직하게 밝히기로 계획하고 있어 김종헌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려도 무방했다.그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대답했다.“심미란 씨가 우리 아내 예정이랑 아주 잘 아는 사이죠.”아니나 다를까 하예정이었다!심미란의 낯빛이 확 돌
“전 대표님, 진우는 이미 오랫동안 예정이를 안 찾아갔어요.”심미란이 말했다.“예정이가 대표님 아내분인 줄 전혀 몰랐어요. 다만 몇 개월 전에 이미 결혼한 사실은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진우가 집착한 건 엄연한 잘못이에요. 저도 그래서 진우더러 예정의 서점도 찾아가지 말고 전화도 하지 말라고 강하게 단속했어요.”전태윤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오늘 밤에 댁 아드님이 또 새로운 번호로 제 와이프한테 전화했어요. 나도 알아요. 진우 씨랑 예정이가 십여 년간 알고 지내서 내가 예정이랑 알고 지낸 시간보다 길다는 것을. 다만 예정이는 날 선택했고 이젠 내 아내예요. 더이상 딴 사람들이 우리 예정이를 넘보는 걸 용납할 수 없어요. 예정이도 단호하게 거절했고 이성적인 감정이 전혀 없다고 딱 잘라서 말했어요. 진우 씨를 늘 동생으로만 봐왔다고 얘기했는데 진우 씨는 여전히 갖은 수법으로 예정이를 집착했죠. 난 예정이 믿어요. 하지만 진우 씨가 계속 예정이한테 집착하는 건 더이상 지켜볼 수 없어요.”김종헌이 재빨리 그에게 맹세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제가 돌아가서 반드시 아들 교육 단단히 하겠습니다. 대표님 아내분을 집착하는 일은 더이상 없을 겁니다. 진우 걔가 아마 예정이가 대표님 아내분인 걸 몰라서 그럴 겁니다. 만약 알았더라면 절대 예정이를 건드릴 엄두도 못 낼 거예요.”전태윤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나랑 예정이는 혼인 신고한 지도 3개월이 지났어요. 우린 비록 비밀 결혼을 했지만 예정이는 효진 씨한테 결혼 사실을 숨기지 않았어요. 김진우 씨도 예정이가 유부녀란 걸 진작 알았을 텐데 전에는 고백하지 않다가 하필 예정이가 결혼한 후에 고백하다니, 이건 분명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겁니다. 예정이가 내 와이프가 아니면 김진우 씨가 계속 집착해도 되나요? 제삼자가 되어 남의 결혼생활을 기어코 파탄 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김종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다 진우 잘못이에요. 그리고 제가 자식 교육을 그르친 탓입니다. 전 대표님, 정말 죄송해요.”전태윤은
“여보, 내일 다시 얘기해요.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당신 이러다가 우리 딸 깬다고요.”심미란은 남편이 더는 문을 걷어차지 못 하게 말렸다.“진우가 기분이 나빠서 방에서 술을 좀 마신 것 같아요. 애가 취해서 문 두드리는 소리도 못 듣잖아요.”김진우는 요즘 방에서 만취할 정도로 술 마시기가 일쑤였다. 그의 방엔 작은 바가 있는데 아빠가 평소 아끼는 술을 전부 제 방으로 옮겨왔다.우울한 기분을 술로 달래고 다음 날 회사에서 넋이 나간 채로 있다 보니 최근에 업무상에 실수가 남발한다.김종헌은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이 아내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방에 돌아간 후 심미란이 물었다.“여보, 전 대표가 우리한테 예정이가 아내라고 말했는데 우리가 대신 비밀로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직 예정이랑 본인의 관계를 대외적으로 완전히 공개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그녀의 조카는 하예정과 절친이지만 전태윤의 진짜 신분을 모른다.김종헌은 방안의 소파에 앉아 한참 침묵한 후 대답했다.“예정이랑 전 대표가 비밀 결혼했다고 했잖아. 전 대표가 아직 완전히 공개하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알고 있어도 일단 외부에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괜히 또 우릴 찾아와 번거롭게 할지도 모르잖아. 그럼 그렇지, 전씨 그룹에서 다짜고짜 협력을 중단할 리가 없는데. 내가 전씨 그룹과 협력하려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들였다고. 협력을 성사한 후에도 늘 방심하지 않았어. 우리 제품에 차질이 생길까 봐 일말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단 말이야. 가끔 연회에서 전 대표를 마주쳐도 일부러 찾아가 아부하지 않았어. 심기를 건드릴 일은 더더욱 없었고. 전 대표가 차갑고 냉정한 분이어도 아무 이유 없이 우릴 난처하게 굴진 않아. 이치에 맞게 행동하시거든. 모든 게 진우 때문이었어. 그 자식 진작 예정이를 좋아했지? 예정이가 초고속 결혼하기 전에는 고백할 생각도 없다가 결혼하고 나니 고백하고 집착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라고?”“어휴.”심미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게요. 무슨 소용이라고.
“설 후에 H시의 계열사로 보내서 몇 년간 일하면서 경험 쌓게 해야겠어. 예정이를 철저하게 내려놓고 좀 더 성숙해진 후에 다시 데려올 거야. 그리고 또 2년 좌우 단련해서 대임을 맡을 수 있으면 그땐 바로 김씨 그룹을 전수할 생각이야. 만약 헤어나오지 못하고 대임을 맡을 수 없다면 우리 김씨 그룹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상속자를 바꾸는 수밖에 없어.”김종헌은 제 아들이 김씨 그룹의 후계자가 되길 엄청 바라고 있지만 전제는 아들이 대임을 맡을 그릇이 돼야 한다. 만약 김진우가 앞날보다 사랑을 더 중시한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조카 중에서 새로운 후계자를 물색해야만 한다.심미란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다가 말을 꺼냈다.“정월 초나흘에 바로 보내요. 그리고 용돈도 전부 끊어요. 거기서 출근하거든 버는 만큼 쓰게 해야죠. 애가 안일한 삶에 너무 적응한 것 같아요. 예정이가 전씨 그룹 사모님이란 사실도 정월 초사흘에 진우한테 알려줍시다. 그럼 마음 접고 H시에 갈 거예요.”김종헌은 아내의 제안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H시의 계열사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하게 해야겠어. 그쪽 담당자한테 잘 돌봐달라고 하면 별일 없을 거야. 하지만 더는 안일한 삶을 살 수도 없겠지. 은행카드 전부 정지시키고 H시에 가면 다시 은행카드를 발급받아 월급으로 살아남게 해야겠어.”그들 부부는 김진우가 하예정을 향한 사랑을 전부 내려놓고 김씨 그룹의 중임을 맡을 후계자가 되길 바라며 독하게 마음먹었다.김진우는 부모님이 그를 저 멀리 H시로 보낼 거란 계획을 전혀 몰랐고 하예정도 아무것도 모른 채 깊게 잠들었다.옆에 핫팩처럼 따뜻한 물체가 있어 품에 꼭 끌어안고 단잠에 빠졌다.꿈에서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건지 그녀는 가끔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다음 날 아침잠에서 깬 하예정은 전태윤이 옆에 누워있는 걸 발견하곤 한 손으로 머리를 지탱하며 곤히 잠든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다만 머릿속에 감도는 건 꿈에서 본 맛있는 음식이었다.그녀는 꿈에 누군가가 맛있는 음식을
하예정이 아침을 다 차렸지만 전태윤은 여전히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 내밀어 그의 콧구멍에 살짝 갖다 대고 이마도 짚어보았다. 전태윤은 열이 나는 것도 아니고 숨도 잘 쉬고 있었다.“설마 오늘 아침에 돌아온 거 아니야? 왜 이렇게 깨질 않아?”하예정은 구시렁댔지만 그를 깨우지 않았다. 그녀는 부부의 옷을 정리하며 그가 깨나길 기다렸다. 이따가 아침 먹고 곧바로 출발하면 된다.“띠리링...”하예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언니.”“제부랑 이미 출발했어?”“아니, 태윤 씨 아직 자고 있어. 이따가 깨나서 아침 먹고 출발하려고. 무슨 일이야 언니?”하예진이 대답했다.“그럼 집에서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 너희 부부한테 설 용돈 준비했는데 까먹고 못 줬네.”“괜찮아 언니, 밖에 비 오고 바람 불어서 엄청 추워. 차도 없고 숙희 아주머니도 없는데 우빈이 데리고 나왔다가 애가 감기 걸리면 어떡해? 진짜 주고 싶으면 설날 아침에 나랑 태윤 씨 언니한테 전화해서 설 인사할 때, 그때 주면 돼. 그냥 인사 치레잖아.”관성에서 설을 쇨 때 용돈 주는 건 한해의 좋은 시작을 의미한다. 액수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서 보통 2천 원에서 4천 원 사이로 돈 봉투에 담아 준다. 가까운 사이여도 2만 원에서 4만 원 정도로 준다. 관성뿐만 아니라 수도권에서 대부분 이 금액으로 주고 있다. 세뱃돈 액수는 늘 그렇듯 많은 편이 아니다.하예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래 그럼.”“언니, 진짜 우리랑 함께 안 갈 거야?”“응, 난 우빈이랑 함께 보내면 돼. 이젠 대가족을 위해 음식을 차릴 필요도 없고 시중들 필요가 없어서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라. 토스트 가게도 개업하지 않아서 이참에 우빈이 데리고 관성에서 실컷 놀아야겠어.”주형인에게 시집간 이후로 그녀는 거의 여행 가본 적이 없다.매일 남편과 아들 주변을 맴돌고 명절 때에는 남편을 따라 시댁에 가서 시댁 식구들의 하루 세끼를 차려야 했다.매년
“얼른 가서 씻어요. 아침 다 차려놨으니 씻고 나와서 밥 먹고 출발해요. 거리가 멀다면서요, 우리 일찍 출발해요.”“뽀뽀해줘.”“왜 내가 해줘야 해요? 태윤 씨가 해주면 안 돼요?”전태윤은 웃으며 그녀를 돌려세우고 머리를 살짝 숙여 그녀의 빨간 입술을 탐했다.다만 하예정이 작은 손으로 그의 입술을 가로막았다.“씻고 나와서 뽀뽀해요.”하예정은 말하면서 그를 밀쳐내고는 뒤돌아서서 캐리어 지퍼를 잠갔다.전태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아내에게 더럽다고 미움을 받았다.“씻을 때 수염도 깎아요. 볼 찌를라.”하예정은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그녀는 꽃에 물을 주고 반려동물 세 마리까지 전부 챙겼다.반려동물들도 잠시 후 언니네 집으로 보내서 며칠 동안 언니에게 맡기기로 했다.“여보, 나 왔어.”전태윤은 다 씻고 수염도 깔끔하게 깎은 후 방에 돌아와 사랑하는 아내를 불렀다.“얼른 와, 내가 뽀뽀하게.”하예정은 주방에서 다 만든 음식을 들고 나왔다.전태윤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녀는 치킨 두 마리가 담긴 그릇을 전태윤에게 건넸다. 전태윤은 그릇을 건네받고 재빨리 그녀 볼에 입 맞추고 나서야 흡족한 듯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오늘은 웬일로 치킨?”하예정이 자리에 앉으며 가볍게 웃었다.“어젯밤에 누가 나한테 밥 사주는 꿈을 꿨거든요. 꿈에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밤새 먹다가 나중에 닭다리 두 개가 남아서 태윤 씨한테 먹이려고 포장하고 싶었는데 도통 잡히질 않는 거예요. 깨고 보니 꿈이더라고요. 그래도 태윤 씨한테 치킨 먹이고 싶어서 사 왔어요.”전태윤은 실소를 터트렸다.‘먹보가 따로 없다니까. 꿈에서조차 먹을 생각이잖아.’“난 닭날개를 좋아해서 저 두 개는 내 거예요. 여보, 일회용 장갑 줄래요? 장갑 끼고 먹으면 손 안 더럽혀서 편해요.”전태윤이 미소를 지었다.“네, 당신 남편께서 달갑게 서비스해드릴게요.”그는 하예정을 도와 일회용 장갑을 가져왔다.“어젯밤엔 대체 어디 갔다 왔어요? 나 처음엔 악몽 꾸고 잠에서 깼는데
하예정은 치킨을 먹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내가 태윤 씨한테 뭐 하나만 숨겨도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다며 버럭 화내더니 정작 태윤 씨 좀 봐봐요. 소 이사님이 술 마시러 가자고 불러도 나한테 숨기고, 그래서 악몽까지 꾼 거잖아요.”전태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다 내 잘못이야. 다음에 소 이사가 또 불러내면 그땐 같이 가. 네가 대신 내 술을 막아주면 그 사람들도 뭐라 하지 못할 거야.”“그럼 다들 태윤 씨가 아내를 무서워하는 팔불출이라고 생각하겠죠.”“그러라고 하지 뭐. 자기들은 솔로라서 팔불출이 되고 싶어도 자격 없으면서.”하예정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그녀는 남편이 건강을 해치는 일만 안 하면 더 간섭하지 않는다.배불리 먹은 후 하예정은 다시 한번 짐 정리를 체크하며 빠트린 게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문밖을 나섰다.그들은 우선 반려동물 세 마리와 차 키까지 하예진에게 갖다 주었다.하예진은 동생 부부를 보더니 그제야 준비했던 용돈을 건넸다.전태윤은 직접 운전하여 아내와 함께 본가로 설 쇠러 갔다.전씨 고택은 조상들이 남겨주신 거라 고전적인 느낌이 물씬 난다고 진작 전해 들었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니 그녀는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건 조선 시대에서도 잘 산다는 대갓집 기준의 으리으리한 집이었다.고층 건물 없이 오로지 옛스러운 인테리어로 되어있었고 담장도 매우 높게 쌓아 올렸다. 사방에 CCTV를 설치해 안전 시스템이 매우 철저하게 되어있었다.저택 안에는 정자와 누각이 있었고 굽이굽이 오솔길을 따라가면 가산과 연못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택 안에 들어온 순간 마치 시공간을 초월하여 조선 시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태윤 씨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엄연한 도련님이었을 거예요.”전태윤은 아내와 함께 자가의 옛 저택을 거닐며 익숙한 환경을 감상했다. 그는 하예정의 말에 저도 몰래 웃음이 새어 나왔다.“내가 만약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널 만나지 못했을 거야.”그는 지금도 엄연한 도련님이다.전태윤을 협조하기 위해 전
“난 이젠 늙어서 하루하루 시간을 때울 뿐이야. 내가 죽기 전에 저 아이들 장가갈 순 있겠지?”할머니는 관성을 돌아다니며 남은 손자들에게 마땅한 신붓감을 골라줄 생각이었다. 자신이 고른 신붓감을 손자들에게 알린 후 손자들이 알아서 적극 구애하면 되니까.할머니의 미션을 완성하지 못하는 손자는 8월 말에 있을 할머니의 생신 잔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할머니는 꼭 만수무강하실 거예요.”“나도 그러길 바라. 증손녀가 태어나는 걸 지켜봐야지 않겠어?”증손녀라는 말에 할머니는 하예정의 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하예정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볼 거 없어요, 할머니. 오늘 생리 왔어요.”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전태윤이 그토록 노력했지만 아직 할머니께 증손녀를 안겨주지 못했다.전이진을 비롯한 몇몇 형제들은 바로 도시에 돌아갔고 전태윤과 하예정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정월 초엿새에 집으로 돌아가서 남은 휴가를 여기저기 여행 다니며 알차게 보냈다. 전태윤은 매일 하예정과 함께 놀러 다녔는데 더는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싶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여행지에서 그를 우연히 마주쳤다.그리고 베일에 싸인 전 대표의 아내도 보았는데 미인이 따로 없었다. 다들 그녀가 눈에 익었지만 이름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사람들은 감히 전태윤 부부에게 다가가 인사하지 못하고 몰래 사진을 찍었다.전태윤은 하예정에게 한없이 자상하고 두 눈에서 꿀 떨어질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런 모습들을 아름다운 사진으로 휴대폰에 저장했다.전태윤이 널리 알리지 않아도 그들이 알아서 소식을 퍼뜨렸고 전씨 그룹 대표님이 아내를 엄청 아낀다는 타이틀이 따라붙었다.유쾌한 휴가가 끝나고 다들 각자 회사 혹은 학교로 복귀했다. 긴 휴가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곧바로 발런타인데이를 맞이했다.하예정은 명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관성중학교가 곧 개학한다는 생각으로 차 있었다. 그녀와 심효진은 아침 일찍 가게에 돌아가 깨끗이 청소하고 물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