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서준은 소정남에 대한 첫인상도 좋은데 사적으로 연락까지 해대면 친누나를 팔아버릴지도 모른다.휴대폰을 꺼내는 소정남의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역시 서준 씨가 생각이 깊어요. 우리 서로 카톡 추가해요. 서준 씨 처음 봤을 때부터 옛친구 만난 것처럼 친근하더라니, 나중에 시간 되면 제가 밥 한 끼 살게요.”심서준은 싱글벙글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그와 카카오톡을 서로 추가했다.“정남 씨,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요.”“잘 가요, 나중에 제가 밥 한 끼 살게요.”“그럼 저야 영광이죠.”심서준은 헤벌쭉 웃다가 누나의 따끔한 시선에 다시 코를 어루만지며 황급히 차에 올라탔다.소정남은 제자리에 서서 두 남매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한참 운전해나간 후 심효진이 동생에게 말했다.“너 정남 씨가 무슨 신분인지 알아? 어디서 친한 척이야? 카톡을 왜 추가하냐고?”“무슨 신분인지 그게 뭐가 중요해? 누나랑 소개팅했고 누나한테 관심이 있어 보이니 난 그걸로 됐어.”심효진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내가 하루빨리 집에서 나갔으면 좋겠니?”“누나, 난 그렇게 훌륭한 재력가가 아니야. 내 월급 150만 원으로 누나를 평생 길러줄 순 없어. 그러니까 누나도 여생을 책임져줄 반쪽을 찾길 바라. 그럼 나도 부담이 조금 덜해지잖아.”동생이 운전만 안 했어도 심효진은 그를 발로 힘껏 걷어찼을 것이다.“야 이 자식아, 네가 날 길러줘? 내 월급이 너보다 훨씬 높아.”“난 엄마랑 얘기했어. 만약 누나가 시집 못 가면 내가 평생 책임질 테니까 엄마랑 고모더러 누나 그만 다그치라고 했단 말이야. 나도 부담이 너무 커.”심효진은 감격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우리 집에서 세를 준 집과 가게가 얼만데 나 하나 못 키울까 봐?”“그건 엄마, 아빠의 자산이지 내 게 아니잖아. 다만 이제 재산 나눌 때 엄마, 아빠더러 누나를 좀 더 많이 나눠주라고 할게. 늙어빠진 시누이가 돼도 가장 돈 많은 시누이가 될 수 있도록 해줄게.”심효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누나, 정
발렌시아 아파트에 도착한 후 전태윤은 또다시 부드럽게 하예정을 안아서 차에서 내렸다.“도련님, 숙희 아주머니는 예진 씨 집에 계십니다.”강일구가 말했다.전태윤은 그에게 나지막이 대답했다.“아주머니 필요 없어. 내가 직접 보살필 거야.”그는 하예정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강일구는 도련님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차를 타고 떠나갔다.집에 도착한 전태윤은 입구에 놓인 그의 슬리퍼를 보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옛 생각에 잠겼다. 전에 금방 혼인 신고했을 때도 하예정은 이런 식이었다. 남들에게 이 집에 남자 주인이 있다는 걸 알리면 상대적으로 안전할 거라며 그의 신을 내려놓았었다.그녀의 실력으로 웬만한 건달들은 쉽게 제칠 수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예정아, 먼저 서 있어. 나 집 키 꺼낼게.”전태윤이 그녀를 내려놓자 만취 상태로 제대로 서지 못하던 그녀는 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전태윤은 황급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녀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한 채로 주머니를 뒤지며 집 키를 찾았지만 양쪽 주머니 모두 키가 없었다.너무 성급하게 돌아오다 보니 집 키를 까먹고 못 챙겨온 걸까?전태윤은 다시 하예정의 바지 주머니도 만져보았지만 집 키가 없었다.하예정은 외출할 때 꼭 집 키를 챙기기에 술집에 두고 왔거나 심효진의 차에 떨어트렸거나 둘 중 하나였다.전태윤은 재빨리 소정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정남아, 효진 씨한테 여쭤봐 줘. 우리 예정이가 집 키를 효진 씨 차에 떨어트렸는지 말이야!”“알았어, 지금 바로 물어볼게. 아니, 지금 바로 효진 씨 집에 가서 너희 집 키를 가져올게.”소정남은 통쾌하게 대답하며 상사의 심부름에 한달음으로 나섰다.비록 밤 11시가 다 넘었지만 그들과 같은 올빼미족에겐 아직 한창 이른 시간이었다.소정남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심효진의 집으로 향했다.그는 심효진의 집에 가본 적이 없지만 주소는 알고 있었다.전태윤의 정보통으로서 그는 진작 심효진의 조상 3대까지 모조리 조사를 마쳤다.그가 심효진의 집에 도착
그녀는 줄곧 재벌가에 시집가고 싶지 않다더니 정작 본인이야말로 재벌가 출신이었다.단지 심씨 일가 사람들이 겸손하고 삶에 충실하다 보니 부자가 되었어도 일반인처럼 지냈을 뿐이다.“저희 부모님이 다 주무셔서 정남 씨를 집안에 초대하진 않을게요.”소정남이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선물도 없이 두 분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 푸짐한 선물로 준비해서 제대로 효진 씨 부모님 뵐게요.”심효진이 속으로 구시렁댔다.‘인제 겨우 꽃다발을 선물하며 대시하더니 부모님 볼 생각을 하고 있어?!’“태윤 씨가 급하게 돌아왔는데 내일 또 출장 가나요?”심효진이 불쑥 물었다.소정남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아마도 내일 또 부랴부랴 떠날 거예요. 그쪽 일을 전적으로 책임지다 보니 문제가 생기면 태윤이가 가서 처리해야 하거든요.”“그럼 엄청 피곤하시겠어요.”“그렇긴 하지만 제 와이프를 위해서라면 이까짓 피로쯤은 흔쾌히 받아들일 거예요.”심효진이 입을 삐죽거렸다.“그래도 다 태윤 씨 잘못이에요. 고작 그런 일로 예정이랑 싸우다니. 애가 종일 기분 나쁜 것도 꾹 참다가 저녁이 돼서야 내게 다 털어놓는 거 있죠.”심효진은 난생처음 남자의 소심함이 이토록 치명적이란 걸 알게 됐다.“정남 씨도 남들보다 소심한가요?”“아니요, 난 보통 사람들처럼 마음이 너그러워요.”소정남은 자신이 속 좁은 남자가 아니라고 바로 얘기했다.심효진은 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나도 이만 가서 잘래요. 예정이 물건도 집 키 줄 때 함께 주세요.”“그래요, 잘 자요.”소정남은 오늘 밤 수확이 꽤 크다고 느껴 더 집착하지 않고 그녀를 보내줬다. 괜히 그녀에게 반감만 쌓이면 안 되니까.작별 인사를 마친 후 그는 하예정의 물건을 챙겨 차에 올라탔다.곧이어 그는 전태윤 부부에게 집 키를 보내주러 갔다.발렌시아 아파트에 도착했을 땐 이미 열두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태윤의 말대로 8층에 올라가 전태윤의 집을 찾고 보니 그가 한창 하예정을
집에서 나온 후 소정남이 혼잣말로 중얼댔다.“자식, 결벽증이 있으면서 토사물이 옷에 묻었는데 예정 씨를 밀치지도 않네? 진짜 진심으로 사랑하나 봐, 이걸 다 참다니.”소정남은 여전히 하예정의 열렬한 팬으로서 그녀를 존경할 따름이다.한편 집안에서 전태윤은 외투를 벗어 바닥에 내던지고는 하예정의 외투도 벗겨서 바닥에 던졌다.그는 나중에 깨끗이 치울 예정이었다.우선 만취한 그녀부터 안방에 들여보내야 한다.“태윤 씨...”구토한 하예정은 정신이 맑아졌는지 아니면 속이 후련해서인지 또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전태윤이 안자마자 그녀는 불쑥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그래, 나 여기 있어.”전태윤은 다정한 말투로 대답하며 그녀를 안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뭔가 달라졌다는 걸 발견했다.그녀의 물건이 싹 다 없어졌다!이건... 홧김에 본인 방으로 짐을 옮겼다는 말인가?전태윤은 문 앞에 서서 몇 분 동안 침묵하다가 결국 하예정을 안고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태윤 씨... 나빠... 나 태윤 씨 안 좋아할래요... 태윤 씨 미워할래...”전태윤이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자 그녀는 또다시 남편이 싫고 안 좋아할 거라며 구시렁댔다.“삐돌이...”전태윤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허리 숙여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미안해, 예정아, 내가 잘못했어.”하예정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전태윤은 몰래 한숨을 내쉬고 자리를 떠났다.그는 하예정의 깨끗한 옷을 찾아 침대 위에 내려놓고 그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그제야 자리에 앉아 옷을 벗겨주기 시작했다.그는 불타오르는 마음을 달래며 겨우 하예정에게 깨끗한 옷을 갈아입혔다.그리고 방에 돌아가 황급히 찬물에 샤워했다.추운 날에 자꾸만 찬물로 샤워를 해야 했다. 그가 컨디션이 좋았으니 망정이지 진작 추위에 떨어 감기 걸렸을 것이다.30분 후 그는 다시 하예정의 침대 머리맡에 자리 잡고 앉았다.하예정은 더는 뒤척이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하지만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얼굴의 눈물 자국도
“결혼 뒤에도 난 줄곧 널 경계하고 의심해서 6개월짜리 계약서도 작성했지. 대부분 너에 대한 많은 제약으로 구성됐어... 맞아, 나 나쁜 놈이야, 내 이익만 따지고 널 고려한 적이 없었어. 날 망할 자식이라고 욕해, 난 진짜 망할 놈이야. 미안해, 예정아!”전태윤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맹세할게,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어. 널 이해하고 대화로 풀어보도록 노력할게. 널 믿도록 노력할게. 너도 아내가 처음이고 나도 남편이 처음이야. 우린 모두 경험이 없어. 그러니까 인제부터 함께 배워나가고 함께 노력하며 오래오래 같이 살자, 응?”전태윤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한참을 속삭이다가 결국 그녀 옆에 누운 채로 잠들어버렸다.이번 일로 부부는 서로 너무 힘들었다.하예정은 술집에 가서 술로 아픈 마음을 달랬고 전태윤은 밤새 업무에 몰입하며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다가 아내가 술 마시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중의 업무를 전부 내려놓고 곧바로 돌아왔다. 그는 배도 고프고 졸음이 쏟아지고 피곤이 마구 몰려왔다.숙희 아주머니가 타일렀듯이 부부는 서로 믿어주고 배려해야 오래간다고 했다.전태윤은 그녀보다 일찍 깨났다.그가 깨났을 땐 이미 아침 7시가 넘은 시각이었다.거실을 미처 청소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는 하예정의 볼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서둘러 청소하러 나갔다.토사물을 깨끗이 치우고 바닥을 여러 번 닦은 후 그의 외투를 휴지통에 버리고 하예정의 옷은 직접 손빨래했다.토사물이 너무 많이 묻어 세탁기까지 더러워질까 봐...모든 일을 마친 후에야 전태윤은 배가 고파 났다.어젯밤에 저녁을 먹지 않았고 오늘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많은 일을 했으니 배가 더 고팠다.너무 고픈 나머지 손까지 벌벌 떨렸다.그는 얼른 주방에 들어가 라면을 끓여 먹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니 그제야 손이 안 떨렸다.“띠리링...”이때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전화를 받은 후 중저음의 목소리로 대답했다.“3시간 뒤에 도착할게.”그는 전화를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하예정은 그를 나름 잘 그렸는데... 심장 부위를 아주 돋보이게, 그리고 아주 아주 작게 그렸다...그가 속 좁다는 걸 표현하고 싶은 걸까? 삐돌이에 소심한 남편이란 뜻일까?!그의 자화상 뒤엔 호수인지 연못인지 하는 물이 그려져 있었고 수면 위엔 동그란 사물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물속엔 물고기가 없어 물고기의 입에서 나온 거품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연못 뒤엔 알이 하나 덩그러니 그려져 있었다.전태윤은 그림을 들고 걸어가며 생각했다.하예정의 그림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자화상은 전태윤이 틀림없는데 물과 동그라미는 또 무슨 뜻일까?강일구가 아래층에서 그를 기다렸다.“도련님.”“그래.”전태윤이 대답하고는 강일구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차에 탔다.“너희 사모님께서 날 위해 그린 그림이야.”강일구는 그림의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사모님의 그림 솜씨가 뛰어나다는 걸 굳게 믿으며 칭찬을 남발했다.“사모님의 그림은 명화에 가깝죠.”“그래, 날 아주 사진처럼 생동하게 그렸어.”전태윤이 의자에 기대며 수면 위의 동그라미들을 빤히 쳐다봤다.‘이 동그라미들은 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물이 혼탁해졌어. 그러니까... 내 마음이 저 동그라미처럼 작고 동그라미의 개수만큼 자주 삐진다는 거네!”강일구가 의아한 듯 고개 돌려 전태윤에게 물었다.“도련님, 뭐라고 말씀하셨어요?”그는 얼핏 도련님이 스스로 자주 삐진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그가 잘못 들은 걸까?“아니야, 아무것도. 운전해, 시간이 빠듯해.”전태윤은 그녀의 그림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알아내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조심스럽게 그림을 접었다. 비록 하예정이 그를 원망하는 내용이지만 이는 그에게 그려준 첫 그림이었다.의미가 남다르니 정성껏 소장해야 한다.“띠리링...”휴대폰이 또 울렸다.소정남에게 걸려온 전화였다.“태윤아, 너 지금 집이야 아니면 또 출장 갔어?”“출장 가는 길이야.”“너 엄청 고생하네. 주
전태윤이 하찮은 표정을 지었다.“내가 표정 관리가 안 됐으면 좋겠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건데? 예정이가 대놓고 날 나쁜 놈이라고 욕해도 그건 다 사랑해서 그런 거야. 나한테 아무 감정 없으면 쳐다보는 것조차 시간 낭비라고 느낄 텐데 뭣 하러 욕까지 하겠어. 우리 와이프가 처음 그려준 그림인데 찢긴 왜 찢어? 나 꼭 그림틀에 넣어서 소중히 간직할 거야. 나중에 나이 들어서 다시 꺼내 감상해야지. 그땐 또 감회가 새로울 거야.”소정남이 그의 말을 받아쳤다.“너 그림틀에 안 넣기만 해봐, 비겁한 놈이라고 놀려댈 거야!”전태윤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대답했다.“어디 틀에 넣기만 하겠어? 나랑 예정의 방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볼 텐데.”소심하게 사소한 일로 툭하면 하예정과 사이가 틀어지지 말자고 본인을 일깨워줘야 한다.그녀를 화나게 해서도 안 되고, 속상하게 해서도 안 되며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소정남이 입을 삐죽거렸다.“너 그 그림 사무실 벽에 걸 수 있어?”“내가 왜 거기에 걸어야 하는데? 우리 와이프가 그려준 명화야. 우리 부부의 방에 걸어놓아야지 뭣 하러 딴사람들 보여줘? 너도 그 그림의 내용을 싹 다 잊는 게 좋을 거야. 됐어, 그만 얘기해. 나 눈 좀 붙여야겠어.”요즘 2, 3일을 꼬박 새우다 보니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그래, 좀 자.”소정남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전태윤이 그림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한 줄 알고 일부러 전화해 한바탕 놀려주려고 했는데 전부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사랑 타령까지 하며 부부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자랑질만 해댔다.부부는 역시 부부인가보다. 사로가 남들과 다른 걸 보니...하예정은 전태윤이 그녀가 술 마신 것 때문에 밤새 날아왔다가 지금 다시 출장 가는 걸 아예 몰랐다.그녀는 휴대폰 벨 소리에 겨우 잠에서 깼다.깨나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간신히 참으며 전화를 받았다.“예정 씨, 저예요. 깨셨으면 문 좀 열어주실래요?”“아주머니... 잠시만요, 지금 바로 열어드릴게
게다가 꿈에 그녀에게 말을 엄청 많이 했지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꿈에서 그녀는 전태윤에게 안 들린다고 좀 더 높게 말하라고 했지만 전태윤은 입 모양만 할 뿐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안달이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숙희 아주머니는 고개 돌려 그녀를 힐긋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리고 하던 일을 마저 했다.“저는 어제 오후에 예진 씨랑 우빈이 데리고 먼저 돌아갔고 밤에도 예진 씨 집에서 자서 태윤 씨가 왔는지 잘 몰라요.”하예정이 머리를 탁 치며 대답했다.“맞아요, 아주머니 집에 오지 않았어요. 아이고, 머리 아파. 해장탕 끓여주실 수 있어요? 안 되겠다, 나 진통제 먹고 와서 다시 얘기해요.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하예정은 곧바로 주방을 나갔다.그녀는 거실로 걸어가 약상자를 찾아내고는 진통제를 꺼내 분말을 입에 부으려 했다.“머리 아프지?”이때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예정은 놀라서 손이 떨린 바람에 분말이 반쯤 쏟아졌다.“제대로 못 자서 그래. 진통제 먹으면 괜찮아져.”언니에게 들켰으니 대놓고 먹어도 될 듯싶었다.“내가 몇 번을 얘기했어, 술을 먹지 말랬잖아. 주량이 약해서 몇 잔 마시면 바로 취한단 말이야. 내 말은 늘 귓등으로 흘리지. 왼쪽 귀로 들어가서 오른쪽 귀로 털어내는 거야? 태윤 씨가 집에 없어서 아무도 감시하지 않으니 제멋대로 술을 마셔대?”하예진은 속상하고도 화가 나서 동생의 귀를 가볍게 잡아당겼다.“태윤 씨 오면 얘기할 거야. 앞으론 출장 갈 때 가족도 데려갈 수 있으면 널 데리고 가게 해야겠어. 남편이 집에 없다고 술이나 마셔대지 못하게 말이야.”“언니, 태윤 씨는 일 때문에 출장 갔어. 내가 거길 왜 따라가? 술을 두 잔 마신 것뿐이야. 정말 많이 안 마셨다니까.”“누굴 속여? 내가 모를 줄 알아? 주량은 약하면서 술은 엄청 좋아하지. 옆에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네가 몇 병을 마실지 몰라.”하예진이 동생에게 핀잔을 늘여놓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아주머니께 해장탕 끓여달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