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다고요. 나 다 기억해요. 금방 혼인 신고했을 때도 아니고 말이야.”하예정이 하품을 해댔다.“태윤 씨, 얼른 자요. 내일 출장 간다면서요. 푹 자야 머리도 맑아져요.”그녀는 고개를 들어 가까이 다가가더니 전태윤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여보, 잘 자요.”전태윤은 순간 짙은 눈빛으로 돌변하여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대론 도저히 놓아줄 수 없었다.그는 깊은 눈동자로 하예정의 예쁜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하예정은 평소 화장기 없이 민얼굴로 자주 나다니지만 피부관리에 엄청 신경 쓰다 보니 얼굴이 매끄럽고 촉감이 좋았다.그녀는 타고난 미모를 지녔다.전태윤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이 점을 바로 인정했다.다만 미인을 너무 많이 봐오다 보니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었을 뿐이다.“예정아, 방금 날 뭐라고 불렀어?”그가 처음 여보라고 불렀을 때 하예정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전태윤은 그 뒤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슴만 답답할 따름이었다.여보라는 애칭이 그다지 닭살 돋지 못하고 가벼운 감정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 두어 마디 부르곤 더 부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여보라고 불렀을 때 감미로운 목소리가 전율처럼 그의 마음을 간지럽혔다.“태윤 씨.”“아니, 날 여보라고 불렀잖아.”“그게 왜요? 여보 맞잖아요. 내 여보.”전태윤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짓누르며 뜨거운 키스로 제 마음을 전달했다.진한 키스를 마친 후 하예정은 그가 떡하니 내려놓은 커다란 손을 뿌리치며 다시 몸을 돌리고 누워 말했다.“자요 얼른,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전태윤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먼저 자. 난, 샤워하고 올게.”그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황급히 욕실로 들어갔다.부부의 감정이 무르익어갈 때 진한 키스는 금물이다. 전태윤은 하마터면 선을 넘을 뻔했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타이밍이 적절치 못했다.추운 겨울 찬물로 샤워하는 기분은 짜릿해서 죽을 지경이었다!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하예정도 다시 반듯하게 누우며 중얼거렸다.“그러게
“예정 씨, 언니는요? 언니더러 전화 좀 받으라고 해요!”김은희의 퉁명스러운 말투를 보아하니 지금 한창 분노에 차 있을 게 뻔했다.“언니는 왜요? 이미 그쪽 집안과 아무 연관이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말하세요, 무슨 일이죠?”하예정이 느긋하게 물었다.아마도 주형인의 부모가 본가에서 이사를 왔는데 집 인테리어가 엉망진창이 되어 홧김에 하예진에게 따져 물을 기세인 듯싶었다.‘반응이 되게 느리네. 하긴, 인제야 알게 된 것도 그럴만하지.’그날 하예진과 주형인이 이혼 절차를 마무리한 후 김은희와 주경진은 택시를 타고 본가로 돌아갔다.다음날 바로 이사 오려고 했는데 주서인의 자녀가 학교에 돌아가 성적 수첩을 가져와야 하는 바람에 하루를 더 머물렀다.오늘 초등학교가 정식으로 방학을 했다.주형인의 부모는 주서인 가족과 함께 차 두 대로 움직여 크고 작은 짐들을 한가득 실은 채 도시에 와서 구정을 보낼 예정이었다.아침 일찍 출발한 것도 다 김은희의 작은 꼼수였다.일찍 오면 서현주더러 그들 한 가족을 위해 아침을 차려놓으라고 할 참이었으니까.시작부터 서현주의 기강을 잡을 생각이었다.다만 크고 작은 짐을 한가득 둘러업고 계단을 올라가 집 문을 열었더니 식겁하여 그만 짐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집을 잘못 들어온 게 아닌지 의심되어 여러 번 확인했지만 아들 집이 맞았다.주서인은 곧바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형인은 요 이틀 협력업체가 갑자기 협력을 취소하는 바람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가족들에게 집 인테리어가 망가졌다는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누나의 전화를 받았을 때도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부모님과 누나네 가족이 모두 도시에 들어왔다는 걸 알게 된 후 주형인은 그제야 이 일을 떠올리며 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김은희는 그 자리에서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가 주씨 집안 사람들을 전부 블랙리스트에 넣은 바람에 연락이 되지 않았다. 김은희는 마지못해 하예정에게 전화했다.“언니랑 함께 있는 거 아니었어요?”김은희가 퉁명스럽게
하예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주서인 씨, 화장실 가서 거울 좀 비춰봐 봐요. 어머, 거울도 없겠다. 우리 언니가 돈 주고 산 거울이라 겨우 다 뜯었거든요. 뭐 그럼 휴대폰 셀카 모드로 얼굴 좀 비춰봐요. 본인이 얼마나 뻔뻔스럽게 생겼는지 보란 말이에요. 우리 언니랑 서인 씨 동생은 인제 이혼해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대체 무슨 체면으로 우리 언니한테 집을 구해달라고 해요? 언니가 당신들 길바닥에 나앉게 했어요? 그거 다 본인들이 자초한 일이잖아요. 자업자득이라고 하죠. 헤어질 때 좋게좋게 얘기해서 언니가 받을 손해배상 비용을 선뜻 줬더라면 지금처럼 길바닥에 나앉을 일은 없었겠죠. 어휴, 오늘 날도 참 추운데 창문까지 다 뜯어버려서 집에 칼바람이 휘몰아칠 거예요. 다들 잠은 제대로 잘 런지나? 뭐 그래도 다들 파렴치한 사람이라 인원수도 많겠다, 똘똘 뭉치면 칼바람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예요.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 이불 안이 너무 따뜻해서 좀 더 자야겠어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하예정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어서 김은희의 휴대폰 번호를 바로 차단해버렸다.괜히 끝까지 들러붙어 전화를 걸어 귀찮게 하면 안 되니까.주서인은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하예정 이게 진짜 죽으려고! 못 된 년, 말발은 또 왜 이렇게 센 건데? 저년 남편은 어떻게 참는대? 엄마, 이젠 우리 어떡하냐고?”주서인이 엄마에게 물었다.“한 가족이 짐을 바리바리 싸서 왔는데, 시댁 식구들한테도 이리로 와서 설 연휴 보낸다고 다 얘기했는데 인제 와서 다시 돌아가라는 거야?”“엄마, 안아줘요.”아빠 품에서 금방 깨난 임정한이 손을 내밀어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했다.주서인은 짜증 섞인 얼굴로 아들을 안고 주경진에게 다시 얘기했다.“아빠,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너무 빨리 하예진의 요구를 들어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계좌 이체하지 말라고 했잖아. 인제 봐봐, 연락 두절이야. 돈을 챙겼으니 우린 아예 안중에도 없다고. 앞으론 우빈이 만나기도 힘들 거야. 다들 그년한테
주경진은 어두운 표정으로 아내를 째려보았다.“당신 사돈댁의 어느 어르신을 찾아갔어?”“누구겠어요? 예정의 친할아버지죠. 걔네 친할머니가 입원해서 병원에 찾아갔더니 내 제안을 듣고 대뜸 2000만 원을 요구하는 거예요. 내가 안 된다고 하자 끈질기게 흥정하다가 결국 1200만 원을 줬어요. 반드시 직접 나서서 예정이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예정이는 제 언니의 이혼을 말리지도 않더라고요. 돈만 받고 약속을 어긴 셈이에요.”김은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주경진이 그녀의 손목을 세차게 내리쳤다.“당신 미쳤어? 예정이네 가족들도 믿는 거야? 심지어 예정이는 제 할아버지와 갈등이 깊다는 걸 당신도 다 알잖아. 찾아도 하필 그 사람들을 찾아가? 당신 정말 똑똑하다가도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모르겠어! 1200만 원, 무려 1200만 원을 날리다니!”주경진은 아내 때문에 화가 나 눈앞이 캄캄해지고 뒤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김은희가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난 그저 예정이랑 말이 안 통해서 그 집 식구들을 내세울 생각이었어요. 싸워도 그 집 식구들끼리 싸울 뿐 난 예정이 때문에 화낼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찾아간 거예요. 그 집 어르신이 마침 병원에서 아내 병원비용을 빨리 내라고 다그친다면서 800만 원이 필요하니 나더러 120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남은 400만 원은 예정이를 설득하는 차원에서 받는 거라면서요.”하씨 집안 할머니의 병원비용은 애초에 본인 돈으로 부담했고 나중엔 자녀들이 가족 단위로 얼마씩 대주었다. 그 돈까지 다 쓰고 나니 800만 원의 비용이 더 불어났고 이때 마침 김은희가 문 앞까지 찾아왔으니 하씨 어르신이 덥석 물지 않을 리가 없다.“당신 진짜 멍청해. 그 집안 사람들은 밑 빠진 독이야. 돈을 줘봤자 절대 돕지 않는다고!”주서인도 한마디 덧붙였다.“엄마는 내가 사람을 찾으랬지 언제 돈을 쓰라고 했어?”한편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엄마한테 언제 이렇게 많은 비상금이 있었대? 보아하니 형인이가 부모님께 돈을 꽤 많이
주서인은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누나, 나 지금 가고 있어.”주형인은 부모님과 누나네 가족이 다 온 걸 알고 얼른 일어나 서현주도 깨워서 대충 씻고 광명 아파트로 향했다.“형인아, 우리 아직 아침도 못 먹었어.”“누나, 나 도착하면 다 함께 아침 먹으러 가.”주서인이 말했다.“너 서현주랑 같이 있는 거 아니야? 걔더러 우리 아침 준비하라고 해! 나가 먹으면 사람이 많아서 몇만 원은 들 거야.”“누나, 우리도 지금 호텔에 묵고 있어. 아직 집을 못 구했단 말이야. 그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밥을 할 수가 없어.”하예진이 그녀만의 방식으로 인테리어 비용을 돌려받았으니 주형인의 집엔 물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게다가 주방용품도 싹 다 옮겨가 텅 빈 주방에서 서현주가 밥을 해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주서인이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예진이가 우릴 모두 차단했어. 넌 어떻게 예진이랑 연락해? 우린 우빈이를 만나고 싶어도 못 보는 거 아니야?”“우빈이는 보통 예정의 가게에 있어. 그리로 가면 볼 수 있으니까 예진이한테 연락 안 해도 돼.”주형인은 예진이가 연락처를 차단한 일에 관하여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하예진이 인테리어를 무너뜨린 일은 그도 몹시 화가 나지만 후회는 전혀 없었다. 이혼 뒤 서현주가 질투할까 봐 그도 실은 하예진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연락 안 해도 돼. 그때 가서 이를 빌미로 우빈의 양육비를 안 줘도 되잖아. 매달 60만 원씩 아끼게 됐네.”주서인은 이렇게 저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다만 주형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가족들에게 이미 아들의 1년 치 양육비를 줬다는 걸 차마 얘기하지 못했다.“누나, 나 지금 운전 중이라 이따가 만나서 얘기해.”“그래.”주서인은 전화를 끊고 부모님께 말했다.“형인이 지금 오고 있대. 집에 물도 안 들어오고 전기도 다 차단해서 밥을 할 수가 없대. 이따가 다 함께 나가서 아침을 먹자고 하던데 우리 찻집에서 모닝 차를 마신 지도 오래됐으니 형인이 오면 찻집이나 가야겠어.
어르신은 계속 말을 이었다.“둘째부터 손댈까 아니면 셋째부터 손댈까?”전태윤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괜히 그때 가서 할머니가 동생들에게 그가 시킨 일이라고 뒤집어씌우면 안 되니까.“둘째가 낫겠지? 둘째한테 누굴 소개해주면 좋을까?”전태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그가 알고 있는 젊은 여자는 안 그래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데 전이진에게 아내감을 소개해주라는 건 아예 그더러 절에 가서 스님이 되라는 것보다 힘들었다.할머니도 전태윤이 마땅한 여자를 추천해줄 거란 기대가 없었다.“안 들어가고 뭐 해?”전태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어르신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곧 출장 가는데 얼른 들어가서 예정이랑 얘기라도 몇 마디 더 나눠야지!”뭐든지 할머니가 미리 가르쳐줘야 했으니...할머니는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해 전태윤을 키울 때 모든 걸 가르쳐줬지만 유독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놓쳐버렸다. 그랬더니 결국 이 녀석은 무뚝뚝한 사내가 되어 여자의 마음을 도통 읽을 줄 모른다.할머니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니 딱히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내 생각이 짧았어. 너무 단순하게 여겼단 말이지.’전태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예정이 지금 날 위해 짐을 싸며 흥얼거리고 있잖아요?”할머니는 입이 쩍 벌어졌다.하예정은 짐 정리를 마친 후 다시 한번 전태윤의 일상용품을 체크하고 나서야 캐리어를 잠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캐리어를 사진까지 찍었다.그녀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캐리어를 끌며 밖으로 나가려는데 두어 걸음 걷다가 문 앞에 서 있는 할머니와 전태윤과 마주쳤다.“할머니.”하예정이 웃으며 인사하고는 캐리어를 끌고 앞으로 다가갔다.“태윤 씨가 출장 가야 해서 제가 대신 짐을 싸줬어요.”손주 며느리가 손주에게 이토록 자상하니 할머니는 마냥 기뻤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다음부턴 태윤이 혼자 정리하게 놔둬. 배고프지? 태윤이가 아침 다 차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전태윤은 또 카톡으로 하예정에게 1000만 원을 보냈다.하예정은 이를 확인하더니 냉큼 말했다.“나 돈 있어요.”그가 준 생활용 카드만 해도 돈이 바닥난 적이 없었다.“내가 출장 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구정이 코앞이라 장만해야 할 것들도 많을 거야. 다 돈 들어갈 일이니 어느 정도 남겨두고 있어. 그리고 네가 알아서 장만해.”전태윤의 이유는 아주 충분했다.“구정 전에 본가로 돌아가서 설 연휴를 보낼 거야. 본가엔 친척들이 많아서 선물을 많이 준비해야 해. 뭘 드리면 좋을지 할머니께 여쭤보고 미리 사놔. 1000만 원으로 부족하면 바로 얘기해. 더 줄게.”그의 대답을 들은 하예정은 1000만 원을 받아야만 했다.혼인 신고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 그는 처음으로 하예정을 데리고 본가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꺼냈다.전에 상견례를 할 때 그는 부모님과 이모 삼촌들에게 이리로 오라고 통보만 했었다.어르신은 전태윤의 말을 듣더니 두 눈을 반짝거릴 뿐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하예정이 발코니에 가서 꽃에 물을 줄 때 어르신은 봄이를 안고 손자 곁에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설에 예정이 데리고 가서 어디서 지내려고?”본가일지 아니면 아무 집이나 찾아서 어물쩍 넘어갈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할머니, 우리 집 진짜 본가 말이에요, 제대로 정리하면 안에 들어가서 지낼 수 있겠죠?”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물론이지. 정리하면 얼마든지 들어가서 지낼 수 있어.”지금의 전씨 일가 저택은 전태윤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직접 쌓아 올린 건물인데 리조트 형식이고 이름은 서원 리조트이다.전씨 가문의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집이야말로 진정한 본가이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물씬 풍긴다. 서원 리조트와도 차로 10분 거리라 매우 가깝다.매년 설마다 할머니는 손자들을 데리고 본가에 돌아가 조상님들께 향을 피운다.“우린 설 때마다 본가에 돌아가 며칠 지내잖아.”진정한 본가는 더욱 저력이 있지만 면적이 서원 리조트보다 작다. 다만 이렇게 되면
고개를 들어 그를 본 순간 하예정은 마지못해 그의 목을 감싸 안고 머리를 살짝 내리더니 가볍게 입맞춤했다.전태윤은 아내의 뽀뽀를 받고 기분 좋게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다정하게 밖으로 나갔다.어르신은 집 아래에서 두 사람이 나오길 기다렸다.어르신과 함께 얘기를 나눠준 사람은 강일구였다.그날 하예진의 이사를 도와줄 때 하예정이 그를 바로 알아봤는데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재치있게 답변했었다. 본인은 돈만 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어르신은 그런 강일구의 모습이 실로 마음에 들었다.“태윤 씨, 예정 씨.”강일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하예정은 방긋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날 깜빡하고 명함을 못 구했네요.”강일구는 재빨리 도련님을 힐긋 쳐다봤다. 도련님이 딱히 표정 변화가 없자 그는 그제야 과감하게 대답했다.“강일구라고 해요.”그리고 바지 주머니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하예정에게 건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날 집에 돌아가니 명함을 다 나눠주고 없더라고요. 아직 미처 추가해서 프린트하지 못했어요. 이건 제 전화번호예요.”하예정은 그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받으며 전태윤에게 말했다.“강일구 씨는 무슨 일이든 다 한대요. 앞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강일구 씨한테 맡겨야겠어요.”안 그래도 질투가 많은 전태윤이니 불필요한 오해는 삼가길 바랐다.전태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일구 씨가 믿음직하긴 하지. 힘든 일 있으면 강일구 씨한테 부탁해.”강일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돈만 주면 저는 무슨 일이든 다 해요. 태윤 씨 어디 출장 가시나 봐요?”전태윤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강일구는 하예정과 전태윤 부부, 그리고 할머니께 인사를 마친 후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를 떠났다.도련님은 이번에 경호원을 반만 데리고 출장을 떠난다. 강일구는 여기 남아서 사모님을 잘 지켜야 한다.도련님과 함께 출장 가지 못하게
이윤미는 제법 잘 꾸민 정군호가 젊어 보이면서도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윤미는 정군호가 이은화보다 십여 세 어린 여자를 껴안은 여자 사진을 보더니 혼자 중얼거렸다.“영감님이 젊었을 때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겠네. 지금도 나이가 들었지만 잘 차려입으니 너무 잘생겼군.”어쩐지 이은화가 매우 엄격하게 다스리더라니.밖에서 아들이 준 돈으로 여자와 바람을 핀 사실을 이은화가 알아버린다면 이은화는 어떤 느낌일까?같은 시간, 관성.관성 호텔에서 서원 리조트로 돌아온 하예정은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잤다.하예정은 여전히 너무 졸렸다.전태윤은 그녀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하예정이 방에 들어가 바로 침대에 올라가서 자려는 모습을 본 전태윤은 침대에 다가가 앉더니 웃으면서 말했다.“졸리면 차에서 자도 되는데. 집에 도착하면 내가 안아서 침대에 눕혀줄 텐데.”“겨우 버티며 왔어요. 여보, 나 좀 잘게. 당신도 잘래요? 안 자면 서재에 가서 책 좀 보시겠어요?”전태윤은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얼른 자. 난 안 졸려.”하예정은 눈을 감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하예정이 몇 분 만에 달콤하게 잠든 것을 보고 전태윤은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뽀뽀해 주었다. 그리고 손을 하예정의 평평한 아랫배에 올려놓으며 그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예정아, 수고했어.”전태윤은 그 자리에서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침에서 나와 작은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책들이 놓여 있었다. 그 책들은 임신에 관한 지식 책이었다. 전태윤은 이미 다 읽었지만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전태윤은 책 한 권의 내용을 모두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하예정이 임신하기 전에 전태윤은 임신에 관한 지식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하예정이 임신한 후에는 비록 많은 사람이 전태윤을 도와 함께 하예정을 돌봤지만, 그는 여전히 직접 아내를 돌보고 싶었다.그리고 서점으로 달려가 임신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사고는 소정남을 찾아가 소정남이 산 책들이 자신이 산 책과 비슷한 것을
이윤정은 전호영을 언급할 때 마다 이를 악물면서 전호영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고현을 빼앗아 갔다면서 욕설을 퍼부었다.“윤미 씨 아버지께서 바람난 일을 전호영 도련님께 맡겨보는 건 어떠세요? 전호영 도련님은 안팎으로 이씨 가문을 괴롭히거든요.”이씨 가문 사람들에게는 전호영이 적수나 다름없다.이씨 가문과 이경혜 자매의 관계, 그리고 이윤미가 관성 쪽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던 방윤림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방윤림은 아마도 이윤미가 관성 쪽의 사람들과 적수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여겼다.이윤미는 이씨 가문의 전임 가주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조사하려고 했다.방윤림은 만약 전임 가주가 이은화의 손에 죽었다는 증거가 나오기만 하면 이윤미가 더는 이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씨 가문을 떠나 그녀의 작은 세계로 돌아가리라 추측했다.아니, 그녀가 반드시 원래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고 확신했다.이윤미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다.사실, 이씨 가문에 돌아가기 전에 이윤미는 이미 사업에 성공한 젊은 여자였다. 이윤미의 양부모가 늘 그녀의 피를 빨아들이려는 생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회사의 대표라는 사실을 계속 숨기고 있었다.이윤미는 사람들이 그녀를 연약하고 무능한 사람인 줄로 알게 하여 이씨 가문의 후계자가 이윤정일 수도 있으리라 추측하게 했다.그러나 이씨 가문의 철칙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일이다.이윤정은 이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기도 했고 또한 이윤정의 능력도 훌륭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윤정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그녀가 이씨 가문의 친딸이 아닌 것이 밝혀진 이상 이씨 가문을 이어받을 자격을 잃게 될 것이다.이윤미가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호영 씨도 이 사실을 알아 버린 이상 모른 체 하지 않을 거예요. 호영 씨는 원래 이씨 가문이 잘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끼어들지 않아도 스스로 그 사실을 터뜨릴 겁니다.”“우리가 아무런 수를 쓰지 않아도 증거가 호영 씨의 손에 있는 이상 가만히 있지
아무튼, 그 여자가 어느 우두머리의 내연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정군호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사람의 내연녀를 건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영상과 사진을 본 이윤미는 방윤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냥 놔둬요. 제 카카오톡 기록도 삭제할 거예요. 제가 만약 저장해 두면 우리 어머니께서 돌아와서 저를 의심하게 되면서 제 휴대전화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방윤림이 회답했다.[제가 이미 저장했습니다. 윤미 씨는 식사하셨어요?”[먹고 있어요. 배달시켰거든요.]방윤림은 눈살을 찌푸렸다.[자꾸 배달 음식을 시키지 마세요. 회사에 식당도 있는데... 정 시간이 안 되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 제가 매일 요리를 해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이윤미는 방윤림이 보낸 메시지를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이씨 가문에 돌아온 뒤로 이윤미는 고군분투했다. 아무도 그녀를 관심해 주지 않았다.이은화조차도 진정으로 이윤미와 한마음이 아니었다.이은화는 이윤미 혼자만의 어머니가 아니었고 오빠와 이윤정이 어머니이기도 했다.이윤정은 이은화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애교를 부릴 수 있었지만, 이윤미는 그런 애교를 부릴 수 없었다.다행히도 방윤림이 이윤미의 곁으로 와주었다.이윤미는 방윤림이 그녀의 곁에 있는 의미를 깨달은 뒤로 그에 대한 믿음이 가족보다 더 깊어졌고 방윤림 또한 그녀를 많이 도와줬다.방윤림이 처음 이윤미의 곁에 왔을 때 이윤미에게 앞으로 누구든 이윤미의 곁은 떠날 수 있겠지만, 방윤림만은 이윤미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방윤림이 이윤미 곁으로 파견된 그 순간부터 그는 죽지 않는 한 이윤미에게 충성하면서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만약 방윤림이 죽는다고 해도 누군가가 재빨리 그를 대신할 것이기 때문에 이윤미의 곁에는 늘 충성을 다 하는 심복이 따라다닐 것이다.방윤림은 모든 것을 할 줄 아는 진정한 능력자였다.물론 요리 실력도 훌륭하기 때문에 그가 한 요리는 매우 맛있었다.이윤미는 타자속도가 너무 늦다고 느껴 음성통화를 걸었다.
고현은 전호영의 옷을 잡아당겼다.전호영은 그녀를 따라 걸으며 말을 했다.“이 대표님도 언제쯤이면 돌아오실지... 정말 이씨 가문의 이 재미있는 연극을 보고 싶네요.”고현은 전호영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설령 이 대표님이 남편이 밖에서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더라고 밖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고 정군호 씨를 데리고 가서 문을 닫고 난리 칠 거예요. 호영 씨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거예요.”전호영이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말을 건넸다.“이윤미 씨가 있잖아요. 이윤미 씨가 이씨 가문 겉면의 평화를 깨뜨렸는데 윤미 씨의 아버지 스캔들을 숨길 수 있겠어요? 저는 믿지 못하겠어요. 윤미 씨도 쉽지 않은 사람이에요. 이씨 가문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기회를 보면서 이씨 가문의 도련님들을 한꺼번에 정리할 생각일 거예요.”“그 문제 덩이 사람들만 없다면 이씨 그룹에서 윤미 씨의 지위는 더 확고해질 수 있잖아요. 역시 이 대표님 친딸답네요. 자신의 가족들을 이토록 모질게 다루다니.”고현은 한참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는 이윤미를 대신해 몇 마디 했다.“윤미 씨는 이씨 가문 여자들의 독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 대표님과는 조금 달라요. 제가 장담하건대 윤미 씨는 윤미 씨의 오빠들을 최대한 이씨 그룹에서 쫓아내지 않을 거예요. 그들이 이씨 그룹에서 파벌을 만드는 것을 방지하고 사적으로 이득을 챙기는 것을 방지할 뿐이죠. 이 대표님처럼 가족들을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전호영은 고현이 이윤미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더니 더는 이윤미에 관한 나쁜 얘기를 이어가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전호영 일행은 호텔에 들어간 뒤 전호영의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으로 갔다. 그 안에는 뷔페가 있었기 때문에 고현은 그녀가 먹고 싶은 음식들을 다 먹을 수 있었다.전호영은 정군호가 내연녀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몰래 사람을 시켜 정군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정군호가 내연녀를 데리고 룸에 들어가면 그들
그 뒤로 이윤미가 그녀의 오빠들과 내연녀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차마 몇 명의 형수님들이 속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형수님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 후로 이윤미의 오빠들과 형수님들이 말다툼하기 시작했다.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고현은 이윤미가 잘했다고 생각했다.바람을 피운 사람이 자기 오빠라고 감싸면서 오빠들을 도와 형수님들을 속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자기 남편이 바람피운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지만, 본인만 모른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때 전호영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군호 씨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을걸요. 이 대표님께서 돌아오신다면 정군호 씨는 틀림없이 나가서 바람피우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 대표님을 도와야 한다고 봐요. 못 봤으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현장을 목격했잖아요. 이 대표님을 만나면 알려줘야 해요. 어쨌든 우리 형수님의 이모시기 때문에 우리 형수님의 친척이나 다름없죠. 안 그래요?”고현은 전호영을 꾸지람했다.“호영 씨도 정말 나쁘네요. 이씨 가문에서 난리가 났으면 좋겠죠? 그런데 저도 호영 씨를 지지할 거에요. 이러고 보니 저도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봐요.”“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죠. 정군호 씨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보세요. 정군호 씨가 잘못한 것을 우리가 바로잡아준 거죠. 이 대표님을 위한 것이지 모함하거나 억울하게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저처럼 일편단심인 남자는 정군호 씨의 이런 행동이 너무 부끄러워요. 만약 집안의 아내가 싫으면 이혼할 것이지... 이혼하기는 싫고 또 밖에서 예쁜 여자들이랑 놀고는 싶고... 두 마리 토끼는 다 잡을 수 없는 법이죠. 하늘 아래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이 있겠어요?”전호영은 정군호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영상을 찍었다. 그리고 하루 호텔도 카메라가 있었기에 정군호가 내연녀를 껴안고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이 꼭 찍혔을 것이다.전호영이 정군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니었다.“이 대표님이 그토록 기가 센데
“저는 배려심이 깊은 신사에요.”고현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면서 전호영의 신사다운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하지만 전호영이 고현의 손을 잡고 함께 호텔로 들어가려고 하자 고현은 거절했다.전호영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시종 전호영과 연인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고현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전호영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앞으로나란히 몇 걸음 걷더니 고현이 갑자기 멈추었다.“왜 그러세요?”전호영이 물었다.‘설마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만났나?’전호영은 앞을 보았지만,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보지 못했다.“정군호 씨예요.”고현은 낮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한 뒤 전호영을 잡아당겨 차 뒤로 숨었다. 그녀의 경호원 팀은 고현이 위험한 줄로 알고 본능적으로 최대한 빨리 고현의 앞으로 돌진하며 위험을 막으려고 했다.“얼른 숨으세요. 저를 막지 마시고!”고현은 나지막이 경호원 팀에게 말했다.고현이 누군가의 가십거리를 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고현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옷을 입은 늙은 남자를 가리켰다. 그 늙은 남자는 천가 같은 얼굴과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그 여성의 곁을 지나가는 남자라면 모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보았다.“저 남자는 이윤미의 친아버지이자 이 대표님의 남편인 정군호 씨예요.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저도 잘 몰라요. 놀랍게도 밖에서 내연녀를 만나고 있었네요. 만약 이 대표님께 들킨다면 정말 정군호 씨를 죽여놓을지도 몰라요.”이은화의 남편이라는 말을 들은 전호영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정군호와 내연녀의 동영상을 찍었다.그리고 말했다.“이 대표님은 우리 큰형의 결혼식에 가신 뒤로 계속 관성에 남아계시거든요. 아마도 정군호 씨는 이 대표님이 없는 틈을 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네요”고현도 말을 이었다.“이 대표님께서 남편을 너무 엄격하게 단속하니까 정군호 씨도 아마 진짜로 바람 피우지는 못할 거에요. 기껏해야 지
고현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저는 어른이 된 후로 여행을 갈 시간이 없었어요. 바빠서 미치겠는데 언제 시간을 내서 놀러 가겠어요? 하지만 출장 다니면서 많은 곳은 가봤어요.”“신혼여행은 어디 가고 싶어요?”전호영이 그녀에게 물었다.고현이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말을 이었다.“저는 물이 맑고 공기가 좋은 산을 좋아해요. 조용하거든요.”“제가 잘 연구해서 산 좋고 물이 맑은 조용한 곳을 찾아볼게요.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우리 둘만의 세상을 잘살아 봐야죠.”알고 보니 고현은 산과 물이 있는 아름다운 곳을 좋아했다.전씨 가문의 서원 리조트가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이 있는 곳이고 평소에도 매우 조용한 곳이었다.“서원 리조트를 좋아해요?”“좋아하죠.그럼 서원 리조트에서 신혼여행을 즐기려고요?”전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고요. 그곳은 우리 미래의 집이고 신혼여행은 당연히 딴 곳으로 가야죠.”이때 고현이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지금 시집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벌써 신혼여행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네요. 호영 씨와 함께하면 쉽게 호영 씨 의도대로 따라간단 말이죠. 저의 총명함과 자제력 모두 호영 씨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니까요.”“현이 씨가 아직도 이 일을 고민하고 있다니. 제가 아직도 부족한가요?”전호영은 자신이 고현을 오랫동안 쫓아다녔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고현을 대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시집을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하여 전호영은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어떤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는지 알고 싶었다.“아니에요. 충분히 잘하셨어요. 우리 데이트도 별로 안 하고 평소에도 일하느라 바빴던 것 같아요. 아직 결혼까지 할 정도로 감정이 깊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말처럼 하루 못 보면 일 년을 못 본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는 몰라요.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는 건 제가 호영 씨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아요. 어
경호원 팀은 그들의 전 대표님이 전호영에게 떠밀려 마이바흐 차에 들어가는 모습을 버젓이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차는 곧 고씨 그룹을 빠져나왔다.고빈이 중얼거렸다.“호영 씨는 정말 내가 본 형부 중 가장 오만방자한 형부였어. 처남인 나에게 조금도 아부하지 않고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니.”고빈은 중얼중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만약 고빈이 정말 친형이 있다면 그는 전호영이 그의 친형을 해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따라갔을 것이다.하지만 그의 친형은 사실 여자였다. 그의 누나 고현은 시집가야 하는 여자였다. 전호영은 그의 누나와 어울리는 남자였기 때문에, 또 전호영이 고빈의 부모님께 고빈이 너무 방해한다고 고자질하면 안 되었기에 고빈은 더는 따라가지 않았다.지금 고씨 가문에서 전호영은 고현 남매보다 체면이 훨씬 섰다.“고빈 씨가 안 따라왔죠?”전호영은 차를 몰면서 조수석에 앉은 고현에게 물었다.고현은 돌아볼 필요도 없이 이내 말을 이었다.“고빈이는 입만 살아서 그렇지 정말 따라오지는 않을 거예요. 호영 씨가 우리 부모님 앞에서 고빈의 고자질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죠. 고빈은 저보다 10분 먼저 태어났지만 지금 정해진 여자친구가 없거든요.”“저도 호영 씨랑 짝을 지으니 저희 부모님의 눈길도 자연스레 고빈의 몸으로 옮겨졌어요. 호영 씨가 제 동생의 고자질하면 저희 부모님은 그를 욕하다가 결국 결혼 재촉 문제로 돌아가거든요. 제 동생은 결혼 재촉을 엄청 무서워하거든요.”고빈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고정된 여자친구를 찾지 못한 일에 관해 고현도 마음이 조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녀에게는 전호영이 있었지만, 고빈의 짝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예전에는 고현은 고빈과 이윤미를 맞세워주려고 했지만, 고빈은 이윤미가 재미없다고 느꼈고 이윤미 또한 고빈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이윤미 곁에 방윤림이 있었다.전호영은 빙그레 웃었다.“저도 항상 고빈 씨의 고자질하고 싶지 않아요.
전호영은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면서 전호영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보습을 보았지만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약 전호영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다.“전 대표님.”다들 마음속으로 아무리 전호영을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전호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그는 고씨네 남매에게 다가갔다.“현이 씨, 퇴근하시죠. 제가 데리러 왔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자, 받아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 앞으로 내밀었다.고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말했어요. 제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매번 올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지 마세요. 제 사무실이 곧 꽃집이 될 것 같으니까요.”전호영은 심지어 하루에 꽃다발을 여러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현은 전호영이 보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전호영은 보복으로 그녀에게 더 많은 꽃을 보냈다.고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곧 먹혀 죽을 것만 같았다.“꽃병을 더 사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저를 꽃병이라고 비아냥거리시려는 거에요? 제 사무실에는 꽃병이 가득 놓여 있거든요.”전호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는 이런 꽃들을 보내지 않고 다루기 쉬운 꽃들로 보낼게요. 현이 씨 사무실에 있는 그 꽃병들을 집으로 몇 개 가져가면 사무실이 꽃병이 줄어들 거 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고빈이 말을 이었다.“우리 형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해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이 꽃들을 저의 여성 지인들이게 줄 테니까요.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을 것 같아요.”“고빈 씨는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의 품에 안겨주며 자연스럽게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빈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설마 이제야 저를 보신 건 아니죠?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잘 고려해 보고 짝을 찾으셔야지 아니면 시각장애인을 고를 수도 있어요.”“그건 제 눈에 현이 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