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건물이 하도 많아 임대비용을 받다가 지쳐 쓰러질 정도라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심씨 일가가 바로 이런 재벌 가문이다.“그냥 효진이랑 소 대표님이 계속 만나게 놔둬요. 서로 알고 지내다 보면 사랑이 싹틀 거예요.”성소현한테서 소정남에 관한 얘기를 듣자 심효진과 소정남은 같은 부류의 사람인 듯싶었다. 둘은 모두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고 소정남이 생생 정보통이다 보니 모든 가십거리를 제일 먼저 알게 된다.“소 대표님께 물어봤는데 효진 씨를 아주 좋게 보고 있더라고. 대표님께 시간을 좀 줘. 알아서 움직이실 거야. 인제 곧 구정이라 회사 전체가 바삐 돌아치고 있어. 소 대표님의 직급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설 연휴가 시작되면 대표님도 개인감정을 케어할 시간이 생길 거야.”전태윤이 출장 가는 동안 소정남과 전이진은 함께 회사에 남아 분주히 보내야 한다.하예정은 알겠다며 머리를 끄덕였다. 실은 그녀도 심효진을 멀리 시집 보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심효진과 소 대표가 함께 있으면 전태윤에게도 매우 유리하다. 소 대표의 도움을 받고 승승장구하여 연봉도 오르고 두 사람의 경제조건도 점점 더 여유로워질 테니까.‘나 지금... 친구 팔아서 돈을 벌려는 거야?’그들 부부는 소개팅에 관한 얘기를 한참 나눴다. 하예정은 팩을 뗄 시간이 다 돼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잠시 후 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곧게 침대 머리맡에 다가가 슬리퍼를 벗고 침대에 누우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태윤 씨, 이리 와요. 내 몸 따뜻하게 녹여줘요. 몸이 따뜻해지면 금세 잠들 것 같단 말이에요.”전태윤은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날 핫팩 취급하는 거야?”“핫팩은 충전해야 하잖아요. 당신은 충전할 필요도 없고 핫팩보다 더 따뜻하니 가성비 굿이에요.”전태윤은 말문이 턱 막혔다.그는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향해 누워서 가볍게 이마를 톡 두드렸다.“그럼 난 너한테 핫팩 말곤 다른 용도는 없는 거야?”“당신한테 달라붙어 몸을 녹이는 것 말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알겠다고요. 나 다 기억해요. 금방 혼인 신고했을 때도 아니고 말이야.”하예정이 하품을 해댔다.“태윤 씨, 얼른 자요. 내일 출장 간다면서요. 푹 자야 머리도 맑아져요.”그녀는 고개를 들어 가까이 다가가더니 전태윤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여보, 잘 자요.”전태윤은 순간 짙은 눈빛으로 돌변하여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대론 도저히 놓아줄 수 없었다.그는 깊은 눈동자로 하예정의 예쁜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하예정은 평소 화장기 없이 민얼굴로 자주 나다니지만 피부관리에 엄청 신경 쓰다 보니 얼굴이 매끄럽고 촉감이 좋았다.그녀는 타고난 미모를 지녔다.전태윤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이 점을 바로 인정했다.다만 미인을 너무 많이 봐오다 보니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었을 뿐이다.“예정아, 방금 날 뭐라고 불렀어?”그가 처음 여보라고 불렀을 때 하예정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전태윤은 그 뒤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슴만 답답할 따름이었다.여보라는 애칭이 그다지 닭살 돋지 못하고 가벼운 감정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 두어 마디 부르곤 더 부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여보라고 불렀을 때 감미로운 목소리가 전율처럼 그의 마음을 간지럽혔다.“태윤 씨.”“아니, 날 여보라고 불렀잖아.”“그게 왜요? 여보 맞잖아요. 내 여보.”전태윤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짓누르며 뜨거운 키스로 제 마음을 전달했다.진한 키스를 마친 후 하예정은 그가 떡하니 내려놓은 커다란 손을 뿌리치며 다시 몸을 돌리고 누워 말했다.“자요 얼른,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전태윤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먼저 자. 난, 샤워하고 올게.”그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황급히 욕실로 들어갔다.부부의 감정이 무르익어갈 때 진한 키스는 금물이다. 전태윤은 하마터면 선을 넘을 뻔했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타이밍이 적절치 못했다.추운 겨울 찬물로 샤워하는 기분은 짜릿해서 죽을 지경이었다!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하예정도 다시 반듯하게 누우며 중얼거렸다.“그러게
“예정 씨, 언니는요? 언니더러 전화 좀 받으라고 해요!”김은희의 퉁명스러운 말투를 보아하니 지금 한창 분노에 차 있을 게 뻔했다.“언니는 왜요? 이미 그쪽 집안과 아무 연관이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말하세요, 무슨 일이죠?”하예정이 느긋하게 물었다.아마도 주형인의 부모가 본가에서 이사를 왔는데 집 인테리어가 엉망진창이 되어 홧김에 하예진에게 따져 물을 기세인 듯싶었다.‘반응이 되게 느리네. 하긴, 인제야 알게 된 것도 그럴만하지.’그날 하예진과 주형인이 이혼 절차를 마무리한 후 김은희와 주경진은 택시를 타고 본가로 돌아갔다.다음날 바로 이사 오려고 했는데 주서인의 자녀가 학교에 돌아가 성적 수첩을 가져와야 하는 바람에 하루를 더 머물렀다.오늘 초등학교가 정식으로 방학을 했다.주형인의 부모는 주서인 가족과 함께 차 두 대로 움직여 크고 작은 짐들을 한가득 실은 채 도시에 와서 구정을 보낼 예정이었다.아침 일찍 출발한 것도 다 김은희의 작은 꼼수였다.일찍 오면 서현주더러 그들 한 가족을 위해 아침을 차려놓으라고 할 참이었으니까.시작부터 서현주의 기강을 잡을 생각이었다.다만 크고 작은 짐을 한가득 둘러업고 계단을 올라가 집 문을 열었더니 식겁하여 그만 짐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집을 잘못 들어온 게 아닌지 의심되어 여러 번 확인했지만 아들 집이 맞았다.주서인은 곧바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형인은 요 이틀 협력업체가 갑자기 협력을 취소하는 바람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가족들에게 집 인테리어가 망가졌다는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누나의 전화를 받았을 때도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부모님과 누나네 가족이 모두 도시에 들어왔다는 걸 알게 된 후 주형인은 그제야 이 일을 떠올리며 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김은희는 그 자리에서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가 주씨 집안 사람들을 전부 블랙리스트에 넣은 바람에 연락이 되지 않았다. 김은희는 마지못해 하예정에게 전화했다.“언니랑 함께 있는 거 아니었어요?”김은희가 퉁명스럽게
하예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주서인 씨, 화장실 가서 거울 좀 비춰봐 봐요. 어머, 거울도 없겠다. 우리 언니가 돈 주고 산 거울이라 겨우 다 뜯었거든요. 뭐 그럼 휴대폰 셀카 모드로 얼굴 좀 비춰봐요. 본인이 얼마나 뻔뻔스럽게 생겼는지 보란 말이에요. 우리 언니랑 서인 씨 동생은 인제 이혼해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대체 무슨 체면으로 우리 언니한테 집을 구해달라고 해요? 언니가 당신들 길바닥에 나앉게 했어요? 그거 다 본인들이 자초한 일이잖아요. 자업자득이라고 하죠. 헤어질 때 좋게좋게 얘기해서 언니가 받을 손해배상 비용을 선뜻 줬더라면 지금처럼 길바닥에 나앉을 일은 없었겠죠. 어휴, 오늘 날도 참 추운데 창문까지 다 뜯어버려서 집에 칼바람이 휘몰아칠 거예요. 다들 잠은 제대로 잘 런지나? 뭐 그래도 다들 파렴치한 사람이라 인원수도 많겠다, 똘똘 뭉치면 칼바람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예요.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 이불 안이 너무 따뜻해서 좀 더 자야겠어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하예정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어서 김은희의 휴대폰 번호를 바로 차단해버렸다.괜히 끝까지 들러붙어 전화를 걸어 귀찮게 하면 안 되니까.주서인은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하예정 이게 진짜 죽으려고! 못 된 년, 말발은 또 왜 이렇게 센 건데? 저년 남편은 어떻게 참는대? 엄마, 이젠 우리 어떡하냐고?”주서인이 엄마에게 물었다.“한 가족이 짐을 바리바리 싸서 왔는데, 시댁 식구들한테도 이리로 와서 설 연휴 보낸다고 다 얘기했는데 인제 와서 다시 돌아가라는 거야?”“엄마, 안아줘요.”아빠 품에서 금방 깨난 임정한이 손을 내밀어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했다.주서인은 짜증 섞인 얼굴로 아들을 안고 주경진에게 다시 얘기했다.“아빠,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너무 빨리 하예진의 요구를 들어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계좌 이체하지 말라고 했잖아. 인제 봐봐, 연락 두절이야. 돈을 챙겼으니 우린 아예 안중에도 없다고. 앞으론 우빈이 만나기도 힘들 거야. 다들 그년한테
주경진은 어두운 표정으로 아내를 째려보았다.“당신 사돈댁의 어느 어르신을 찾아갔어?”“누구겠어요? 예정의 친할아버지죠. 걔네 친할머니가 입원해서 병원에 찾아갔더니 내 제안을 듣고 대뜸 2000만 원을 요구하는 거예요. 내가 안 된다고 하자 끈질기게 흥정하다가 결국 1200만 원을 줬어요. 반드시 직접 나서서 예정이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예정이는 제 언니의 이혼을 말리지도 않더라고요. 돈만 받고 약속을 어긴 셈이에요.”김은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주경진이 그녀의 손목을 세차게 내리쳤다.“당신 미쳤어? 예정이네 가족들도 믿는 거야? 심지어 예정이는 제 할아버지와 갈등이 깊다는 걸 당신도 다 알잖아. 찾아도 하필 그 사람들을 찾아가? 당신 정말 똑똑하다가도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모르겠어! 1200만 원, 무려 1200만 원을 날리다니!”주경진은 아내 때문에 화가 나 눈앞이 캄캄해지고 뒤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김은희가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난 그저 예정이랑 말이 안 통해서 그 집 식구들을 내세울 생각이었어요. 싸워도 그 집 식구들끼리 싸울 뿐 난 예정이 때문에 화낼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찾아간 거예요. 그 집 어르신이 마침 병원에서 아내 병원비용을 빨리 내라고 다그친다면서 800만 원이 필요하니 나더러 120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남은 400만 원은 예정이를 설득하는 차원에서 받는 거라면서요.”하씨 집안 할머니의 병원비용은 애초에 본인 돈으로 부담했고 나중엔 자녀들이 가족 단위로 얼마씩 대주었다. 그 돈까지 다 쓰고 나니 800만 원의 비용이 더 불어났고 이때 마침 김은희가 문 앞까지 찾아왔으니 하씨 어르신이 덥석 물지 않을 리가 없다.“당신 진짜 멍청해. 그 집안 사람들은 밑 빠진 독이야. 돈을 줘봤자 절대 돕지 않는다고!”주서인도 한마디 덧붙였다.“엄마는 내가 사람을 찾으랬지 언제 돈을 쓰라고 했어?”한편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엄마한테 언제 이렇게 많은 비상금이 있었대? 보아하니 형인이가 부모님께 돈을 꽤 많이
주서인은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누나, 나 지금 가고 있어.”주형인은 부모님과 누나네 가족이 다 온 걸 알고 얼른 일어나 서현주도 깨워서 대충 씻고 광명 아파트로 향했다.“형인아, 우리 아직 아침도 못 먹었어.”“누나, 나 도착하면 다 함께 아침 먹으러 가.”주서인이 말했다.“너 서현주랑 같이 있는 거 아니야? 걔더러 우리 아침 준비하라고 해! 나가 먹으면 사람이 많아서 몇만 원은 들 거야.”“누나, 우리도 지금 호텔에 묵고 있어. 아직 집을 못 구했단 말이야. 그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밥을 할 수가 없어.”하예진이 그녀만의 방식으로 인테리어 비용을 돌려받았으니 주형인의 집엔 물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게다가 주방용품도 싹 다 옮겨가 텅 빈 주방에서 서현주가 밥을 해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주서인이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예진이가 우릴 모두 차단했어. 넌 어떻게 예진이랑 연락해? 우린 우빈이를 만나고 싶어도 못 보는 거 아니야?”“우빈이는 보통 예정의 가게에 있어. 그리로 가면 볼 수 있으니까 예진이한테 연락 안 해도 돼.”주형인은 예진이가 연락처를 차단한 일에 관하여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하예진이 인테리어를 무너뜨린 일은 그도 몹시 화가 나지만 후회는 전혀 없었다. 이혼 뒤 서현주가 질투할까 봐 그도 실은 하예진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연락 안 해도 돼. 그때 가서 이를 빌미로 우빈의 양육비를 안 줘도 되잖아. 매달 60만 원씩 아끼게 됐네.”주서인은 이렇게 저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다만 주형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가족들에게 이미 아들의 1년 치 양육비를 줬다는 걸 차마 얘기하지 못했다.“누나, 나 지금 운전 중이라 이따가 만나서 얘기해.”“그래.”주서인은 전화를 끊고 부모님께 말했다.“형인이 지금 오고 있대. 집에 물도 안 들어오고 전기도 다 차단해서 밥을 할 수가 없대. 이따가 다 함께 나가서 아침을 먹자고 하던데 우리 찻집에서 모닝 차를 마신 지도 오래됐으니 형인이 오면 찻집이나 가야겠어.
어르신은 계속 말을 이었다.“둘째부터 손댈까 아니면 셋째부터 손댈까?”전태윤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괜히 그때 가서 할머니가 동생들에게 그가 시킨 일이라고 뒤집어씌우면 안 되니까.“둘째가 낫겠지? 둘째한테 누굴 소개해주면 좋을까?”전태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그가 알고 있는 젊은 여자는 안 그래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데 전이진에게 아내감을 소개해주라는 건 아예 그더러 절에 가서 스님이 되라는 것보다 힘들었다.할머니도 전태윤이 마땅한 여자를 추천해줄 거란 기대가 없었다.“안 들어가고 뭐 해?”전태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어르신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곧 출장 가는데 얼른 들어가서 예정이랑 얘기라도 몇 마디 더 나눠야지!”뭐든지 할머니가 미리 가르쳐줘야 했으니...할머니는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해 전태윤을 키울 때 모든 걸 가르쳐줬지만 유독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놓쳐버렸다. 그랬더니 결국 이 녀석은 무뚝뚝한 사내가 되어 여자의 마음을 도통 읽을 줄 모른다.할머니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니 딱히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내 생각이 짧았어. 너무 단순하게 여겼단 말이지.’전태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예정이 지금 날 위해 짐을 싸며 흥얼거리고 있잖아요?”할머니는 입이 쩍 벌어졌다.하예정은 짐 정리를 마친 후 다시 한번 전태윤의 일상용품을 체크하고 나서야 캐리어를 잠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캐리어를 사진까지 찍었다.그녀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캐리어를 끌며 밖으로 나가려는데 두어 걸음 걷다가 문 앞에 서 있는 할머니와 전태윤과 마주쳤다.“할머니.”하예정이 웃으며 인사하고는 캐리어를 끌고 앞으로 다가갔다.“태윤 씨가 출장 가야 해서 제가 대신 짐을 싸줬어요.”손주 며느리가 손주에게 이토록 자상하니 할머니는 마냥 기뻤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다음부턴 태윤이 혼자 정리하게 놔둬. 배고프지? 태윤이가 아침 다 차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전태윤은 또 카톡으로 하예정에게 1000만 원을 보냈다.하예정은 이를 확인하더니 냉큼 말했다.“나 돈 있어요.”그가 준 생활용 카드만 해도 돈이 바닥난 적이 없었다.“내가 출장 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구정이 코앞이라 장만해야 할 것들도 많을 거야. 다 돈 들어갈 일이니 어느 정도 남겨두고 있어. 그리고 네가 알아서 장만해.”전태윤의 이유는 아주 충분했다.“구정 전에 본가로 돌아가서 설 연휴를 보낼 거야. 본가엔 친척들이 많아서 선물을 많이 준비해야 해. 뭘 드리면 좋을지 할머니께 여쭤보고 미리 사놔. 1000만 원으로 부족하면 바로 얘기해. 더 줄게.”그의 대답을 들은 하예정은 1000만 원을 받아야만 했다.혼인 신고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 그는 처음으로 하예정을 데리고 본가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꺼냈다.전에 상견례를 할 때 그는 부모님과 이모 삼촌들에게 이리로 오라고 통보만 했었다.어르신은 전태윤의 말을 듣더니 두 눈을 반짝거릴 뿐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하예정이 발코니에 가서 꽃에 물을 줄 때 어르신은 봄이를 안고 손자 곁에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설에 예정이 데리고 가서 어디서 지내려고?”본가일지 아니면 아무 집이나 찾아서 어물쩍 넘어갈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할머니, 우리 집 진짜 본가 말이에요, 제대로 정리하면 안에 들어가서 지낼 수 있겠죠?”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물론이지. 정리하면 얼마든지 들어가서 지낼 수 있어.”지금의 전씨 일가 저택은 전태윤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직접 쌓아 올린 건물인데 리조트 형식이고 이름은 서원 리조트이다.전씨 가문의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집이야말로 진정한 본가이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물씬 풍긴다. 서원 리조트와도 차로 10분 거리라 매우 가깝다.매년 설마다 할머니는 손자들을 데리고 본가에 돌아가 조상님들께 향을 피운다.“우린 설 때마다 본가에 돌아가 며칠 지내잖아.”진정한 본가는 더욱 저력이 있지만 면적이 서원 리조트보다 작다. 다만 이렇게 되면
그들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대표님, 저는 회사의 프로젝트 협력에 대해 논의하러 왔어요. 방안을 가져왔으니 한번 보도록 하세요.”이윤미는 말하면서 자신 비서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은 뒤 두 손으로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한참 후에 다 훑어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윤미 씨의 방안이 괜찮아 보이지만 이씨 그룹의 실력이 부족해서 별로 협력하고 싶지 않네요.”고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협력업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윤미의 개인 회사와 협력하려 했던 것은 그냥 단순히 이윤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던 것이었다.하예진의 회사도 설립되고 나면 고씨 그룹과 협력할 예정이었다.이윤미가 호탕하게 웃었다.“고 대표님, 우리 이씨 그룹이 귀사에 비해 조금 못하단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이씨 그룹도 강성에서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라서 뿌리가 깊어요. 저도 일부 프로젝트를 책임졌으니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어요. 고 대표님이 저와 협력한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대표님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거고요.”이윤미와 그녀의 비서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현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이씨 그룹을 아무리 추켜세워도 고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자, 이윤미가 말했다.“고 대표님, 협력하지 않더라도 저와의 인연은 끊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비록 우리 이씨 그룹이 대표님의 눈에 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협력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될 거예요.”이씨 가문이 권력에서 물러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이씨 그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씨 가문이 고씨 그룹과의 협력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것이 두려워 고현은 협력하기 싫었던 것이었다.만약 이씨 그룹의 세력이 커진다면 하예진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질 것 같았다.이윤미가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씨 그룹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
고빈은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돌려 이윤미를 쳐다보았다.한동안 보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자신감 넘치는 아우라를 발산하는 이윤미가 전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조금 전에 멈칫했던 것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애초부터 이런 모습이었다면 누나가 내게 소개해 줬을 때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고빈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물론 그녀에게 대시한다 해도 너무 늦지는 않았지만 이씨 가문과 엮이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이씨 가문에 이윤미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이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강인한 성격을 만들 수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상대를 방심하게 하여 허를 찌르는 데 능숙했다.고빈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이윤미처럼 가식이 많고 거짓말을 잘하는 여자가 아니라 순수한 여자였다.‘이윤미 같은 여자는 형에게 적합해. 둘이 함께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면 누구도 당해내지 못해. 형이 이윤미를 높게 평가한 것을 감안할 때 둘이 충분히 한 쌍의 커플로 발전할 수 있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놀아나겠지. 아니구나. 난 형이 없잖아! 강성의 사람들은 내게 형이 없고 누나만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해.’자신과 인사하는 것만으로 고빈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줄을 이윤미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이윤미가 비서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서자, 고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윤미 씨, 뭐 드실래요? 비서에게 준비하라고 말할게요.”“따뜻한 물 한 잔이면 됩니다. 밤에 잠 못 잘까 봐 커피는 감히 마시지 못하겠네요.”고현은 두 사람을 소파에 앉으라고 말한 뒤 따뜻한 물을 따라주라고 자기 비서에게 지시했다.자리에 도로 앉은 고현이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저는 아침과 오후에 한 잔씩 마셔요. 습관 돼서 그런지 밤에 잠을 자는 데 별 지장은 없어요.”그녀는 보통 카페인이 효력이 사라진 자정이 되어서야 자는지라 걱정거리가 없는 한 수면에 큰 영향
“그러면 지금 바로 할머니께 전화할게. 퇴근 후 집에서 샤부샤부 먹겠으니, 집사에게 말하라고 말이야. 사람 좀 있어야 분위기도 나니까 이진 부부도 부를게. ”그러자 하예정이 말했다.“제가 할머니께 전화할 테니 당신은 가서 일 보세요. 아니면 오늘 밤 관성에 있는 사람 중 시간 있는 사람들을 와서 밥 먹으라고 가족 단톡방에 말 보낼게요. 하긴 사람이 많으면 시끌벅적하고 좋긴 하죠.”전태윤이 웃었다.“다들 바쁘니까 오지 못할 거야. 이진 부부만 불러.”“당신 말한 대로 할 테니 얼른 가서 일 보라니까요. 수중의 일부터 빨리 처리해야 나중에 그나마 수월해질 건데.”오랜만에 회사로 출근한 전태윤은 야근하지 않고 퇴근 시간에 맞춰 아내와 함께 집으로 가려 했다.아내의 거듭된 재촉에 전태윤은 마지못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하예정은 할머니에게 전화하여 저녁에 전이진 부부를 불러 샤부샤부를 먹겠다고 말하자,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는 당연히 기뻐하며 바로 승낙했다.강성, 이윤미가 타고 있던 차량이 고씨 그룹으로 향하고 있었다.차가 멈추자, 먼저 차에서 내린 이윤미의 비서는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 이윤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이윤미는 자신의 비서와 함께 사무실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수십 층에 불과한 이씨 그룹의 청사와 달리 중심상업지역에 자리 잡은 고씨 그룹의 청사는 강성의 모든 대기업 중 가장 높은 층수를 자랑했다.이미 오기 전에 고현에게 전화하여 프로젝트 협력에 관해 이야기할 시간이 있는지 물어본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를 데리고 찾아온 것이었다.고현이 자신의 계획을 꿰뚫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윤미는 그래도 이씨 가문 딸의 신분으로 협력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다.만약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 다시 사적으로 회사 대표의 신분으로 얘기해 볼 속셈이었다.고현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윤미는 잘 알고 있었다.그녀와 척을 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윤미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 것이 뻔했다.이윤미가 여러
전태윤의 뒷부분 말을 들은 소정남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말하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지 넌 모를걸. 약속 지켜. 네가 회사로 돌아오면 날 며칠 쉬게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네가 잊을 수 있으니 내가 계속 일깨워 주었을 뿐이야. 그리고 내년에 우리 효진이가 아이를 낳을 때 나에게 출산 휴가를 두 달 주기로 약속한 것도 잊지 마.”전태윤은 그를 꾸지람했다.“네가 아기를 낳는 것도 아닌데. 출산 휴가는 한 달이면 돼. 네 아내의 산후조리만 잘 돌보다가 바로 출근해. 게다가 너의 집에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산후조리가 끝나면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될걸. 내가 두 개월 휴가를 주는 것도 너무 길다고 생각하는데 적게 줬다고 생각하다니.”소정남은 바로 반박했다.“예정 씨가 아기를 낳을 때 네가 매일 회사에 돌아와서 평소처럼 일할 수 있고 예정 씨의 산후조리를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출산 휴가를 한 달만 낼게. 내가 아기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난 남편으로서 효진이가 날 가장 필요로 할 때 내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상황을 보면서 회사가 바쁘지 않으면 내가 3개월 휴가 줄게, 됐지?”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전태윤도 하예정이 출산하면 그녀의 옆에서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산후조리 때 특별히 잘 보살펴야 한다.소정남은 재빨리 말했다.“예정 씨, 들으셨죠? 태윤이가 저에게 출산 휴가 3개월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들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증인으로 되어드릴게요. 태윤 씨가 반드시 약속 지킬 거예요.”심효진의 임신 기간이 하예정보다 길었기에 내년 5월쯤에 아기가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이제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소정남도 그의 상사와 내년 출산 휴가를 미리 상의하고 있었다.소정남은 그제야 시름을 놓으며 일어나 전태윤에게 말했다.“그럼 난 먼저 돌아가서 일할게. 오늘 업무를 전부 처리해 놓아야 내일 휴가를 잘 보낼 수 있을 테니까.”이틀간의 휴가를 얻은 소정남은
“준하 씨와 소현 언니가 바래다주러 가셨어요.”소정남이 말했다.“온 지 이틀도 안 됐는데 벌써 가셨어요? 제가 음식 대접할 시간도 없었네요.”하예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시간 있을 때 A시에 가서 식사 초대하면 되죠. 준하 씨가 이번에 관성으로 온 이유는 단지 용정이가 우빈이와 함께 놀게 하려는 것뿐이에요.”소정남은 전씨 가문의 대표 부인 앞에서 그의 고통을 호소했다.“제가 시간이 전혀 없었어요. 태윤이가 결혼 휴가를 내서 오늘에야 출근했는데... 제가 너무 바빠서 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었어요. 제가 태윤에게 말할 틈이 없었는데 내일 제가 휴가를 내야겠어요. 좀 이따가 태윤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예정 씨가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제가 한 달 동안 푹 쉬지 못했거든요. 내일 휴가를 내는 것도 휴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효진이와 함께 임신 검사받으러 가기 위해서예요.”하예정이 흔쾌히 대답했다.“좋아요. 태윤 씨가 정남 씨의 휴가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제가 도와서 말씀드릴게요. 요즘 정말 수고 많으세요. 필요하시면 제가 태윤 씨에게 휴가 이틀 내주라고 설득할게요. 차라리 휴가 낼 필요 없이 내일 효진이와 함께 검사받으러 가세요.”전태윤 부부가 결혼식 후 편안한 신혼여행을 보내게 되었다. 비록 관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소정남이 전태윤의 업무량을 분담한 덕이다.이제 전태윤이 회사로 돌아왔으니 적절한 시기에 가장 바삐 돌아쳤던 소정남을 쉬게 해야 했다.소정남이 대답했다.“이틀 쉴 수 있다면 더없이 좋죠. 날씨도 추워졌는데 효진이가 샤브샤브를 먹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가 줄곧 데리고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집에서 먹을 수는 있지만, 저의 사촌 누나가 자꾸 잔소리를 늘어놓으셔서 먹는다고 해도 효진이가 불편해해서 늘 나가서 먹고 싶다고 했거든요. 내일 함께 검사를 받고 저녁에 샤브샤브 먹으러 가야겠어요. 효진이가 임신한 뒤로 뭐 먹고 싶을 때마다 즉시 입에 넣고 싶어 하던데 예정 씨도 그
우빈은 형이 될 사람이기 때문에 동생들을 사랑할 줄 알았다.“내가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서너 살밖에 안 되는데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하예정은 웃으며 우빈을 안았다.우빈은 뚱뚱하지 않다.녀석은 정말 졸렸는지 하예정에게 안긴 지 2분도 안 되어 금세 잠이 들었다.30분 후, 차 두 대가 전씨 그룹으로 들어섰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려고 생각했지만 고민 끝에 그를 놀라게 해주기로 했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저녁에 퇴근할 때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언제 올지는 알려주지 않았다.지금 앞당겨 도착한 그녀는 갑자기 그의 사무실에 갑자기 나타나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했다.심효진은 부부가 함께 지내면서 때때로 상대방에게 서프라이즈 해주면 부부 감정을 두텁게 해준다고 말한 적 있다.소설을 많이 본 성소현은 서프라이즈를 해주는 능력이 하예정보다 더 대단했다.하예정은 성소현에게서 이런 것들을 많이 배웠다.“사모님, 제가 우빈을 안아드릴게요.”경호원은 하예정의 품에서 우빈을 안아오려고 했다.그러나 하예정이 거절했다.“괜찮아요. 제가 안으면 돼요. 1층에서 기다리세요. 만약 볼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일을 보셔도 돼요. 태윤 씨가 퇴근하기까지 기다려야 하거든요.”그녀는 남편의 차를 타고 집에 가도 된다고 생각했다.경호원은 공손히 대답했다.“다른 개인적인 일은 없습니다. 큰 사모님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하예정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호원들과 함께 회사 안으로 건물로 들어섰다.들어가는 길에 하예정을 본 직원들은 전부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인사했다.하예정은 우빈을 안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고 경호원들은 1층 귀빈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하예정과 우빈을 싣고 곧장 맨 위층으로 올라갔다.우빈은 너무 정신없이 놀고 피곤한지 아주 달콤하게 잠들었다. 아마 깨우지 않으면 어두워질 때까지 잘 수 있을 것이다.전태윤은 하예정이 일찍 도착할 줄은 몰랐다.전태윤의 비서가 대표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모연정도 맞장구쳤다.“맞아요. 용정은 가끔 혼자 놀 때 아무도 그를 보고 있지 않고 인기척을 듣지 못할 때 용정을 찾아가 보면 분명 사고를 치고 있는 거예요. 한 번은 녀석이 제 립스틱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니까요.”성소현은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가장 많이 접하는 아이가 바로 우빈이였다.성소현은 우빈이가 항상 철이 들고 귀엽고 총명하다고만 느꼈지,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그녀의 눈에는 어린아이들이 전부 천사로 보였다.성소현의 친조카처럼 막 태어났을 때는 그다지 예뻐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갈수록 예뻐지고 있다.그녀는 친조카의 성장 다큐멘터리를 찍어준다며 매일 조카의 사진을 몇 장씩 찍어두었다.다만 눈물이 좀 많을 뿐이다.배가 고프면 울고 응가 해도 울었다. 말을 못 한 탓으로 아기는 입만 벌리면 울었다.모연정과 하예정은 잠시 아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예지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쌍둥이가 깨어난 것을 보자 모연정은 일어나서 아들을 안으러 갔다.딸은 이미 예준성에게 안겨 있었다.예준성은 한 손으로 딸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었는데 예준하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말했다.“형, 내가 도와줄게. 내가 지연이 안아줄게.”예준성은 캐리어를 예준하에게 건네면서 말했다.“캐리어를 밖으로 끌고 나가서 차에 실어줘. 이따가 우리를 서원 리조트로 데려다줘.”그들의 개인 비행기는 서원 리조트에 주차되었다.예준하의 별장에는 예준하 부부의 개인 비행기를 주차할 수 있는 큰 공간이 없다.예준하는 입을 삐쭉 내밀면서 중얼거렸다.“지연이를 안고 싶은데 자꾸 캐리어만 끌게 하다니. 곧 돌아갈 거면서 지연이를 안지도 못하게 해. 살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중얼중얼하던 예준하는 결국 예준성을 도와 캐리어를 끌어갔다.예준성은 딸을 안고 하예정 자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연정이 예지호를 안고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모연정에게 말했다.“연정아, 가자. 용정은?”“밖에서 우빈이와 놀고 있어요. 나가서 불러오면 돼
하예정은 갑자기 점쟁이가 자신과 전태윤의 결혼을 지지하면서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 거라고, 아들딸을 낳을 거라는 말을 떠올렸다.만약 하예정이 딸을 낳으면 과연 잘 자랄 수 있을까?만약 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처럼 딸을 낳아도 잘 키울 수 없다면 그녀는 아이를 낳지 않을지언정 아이가 자신의 앞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서원 리조트의 풍수에 문제가 있는 건가!그러나 점쟁이는 리조트의 풍수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점쟁이는 서원 리조트의 풍수 구조가 사업과 자식들이 번창할 것이라고 말했다.“예정아,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아.”하예정의 안색이 변한 것을 유심히 본 성소현이 걱정스레 물었다.“내가 전씨 가문에서 대대로 낳은 딸이 세상을 뜨는 일을 언급해서 그래? 걱정하지 마. 네 뱃속의 이 아이는 틀림없이 아들일 거야. 우빈이가 말했듯이 네 배 속의 아기는 남자 아기일 거야. 게다가 네가 딸을 낳았다고 해도 현재 의학이 발달하고 임신 중에 그렇게 많은 임신 검사를 받을 수 있어서 분명 건강하게 자랄 거야. 태윤 씨 조상들의 일은 옛날얘기잖아. 청나라 말기 때 의학 기술이 얼마나 뒤처졌는데, 감기에 걸리기만 해도 사람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시기잖아.”고대 궁안의 생활도 아주 좋았지만 죽은 아기들도 얼마나 많았던가!말을 마친 성소현은 일부러 하예정의 어깨를 감싸며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너도 태윤 씨에게 딸을 낳을 만큼 그렇게 좋은 팔자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을걸. 너희들은 아들을 낳을 운명인 거지. 안 좋은 일은 생각하지 마. 너 놀란 것 좀 봐. 잘 들어. 내가 아기에게 준비한 선물들은 전부 남자아이 물건들이니까 꼭 아들을 낳아야 해.”하예정은 겨우 마음을 안정시켰다.아직 딸을 낳지도 않았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걱정할 필요 없었다.게다가 점쟁이는 하예정이 아들딸을 낳을 운명이라고 했기에 그녀가 딸을 낳는다고 해도 반드시 건강하게 키워 안전하게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혹은 둘째를 가
하예정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용정을 예준하 곁으로 먼저 보냈다. 예준성 부부는 관성에 온 뒤로 줄곧 예준하의 별장에 머물렀다.예준하의 집에 도착하여 용정을 모연정 부부의 손에 넘겨주고 나서야 하예정의 긴장했던 신경이 풀리기 시작했다.“아줌마, 저 여기서 좀 더 놀 수 있을까요?”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우빈은 아쉬워하며 용정과 한 시간이라도 더 놀고 싶어 했다.우빈이가 입을 열었다.“용정이가 이번에 떠나게 되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저랑 놀 수 있거든요.”하예정은 모연정을 쳐다보았고 모연정이 말을 건넸다.“저희도 짐을 정리해야 해서 30분 정도 있다가 집으로 갈 거예요. 두 아이를 30분만 더 놀게 해요. 용정도 우빈이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지만 이렇게 계속 놀게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신나게 놀면 마음을 거두어들이기 어려워져요.”“그러게요. 정신없이 놀다 보면 자꾸 놀 생각만 하고 유치원은 가기 싫어질 거예요. 용정과 비교되지 않았다면 우빈은 아마 그의 사촌 이모처럼 강제적으로 차에 태워야 했을걸요.”성소현이 어렸을 때 유치원에 다니는 것을 꺼린 사실이 언급되자 모연정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성소현은 예준성 부부를 배웅하러 왔는데 하예정이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바로 얼굴을 붉히며 하예정을 가볍게 때렸다.“예정아, 너 정말 못된 것만 배운 거 아니야? 누가 어릴 때 유치원에 가고 싶었겠어?”하예정은 히죽히죽 웃었다.“저는 아마 가기 싫어한 적 없을걸요. 어쨌든 우리 부모님께서 내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 가기 싫어했다는 말씀하신 적 없었어요. 우리 언니도 말 한 적 없는걸요.”하예정은 유치원에 간 기억이 없지만, 하예진이 5살 연상이라 하예정이 유치원에 가기 싫어한 경험이 있으면 그녀에게 말했을 것이다.“우빈아, 얼른 놀아. 시간이 30분밖에 없어. 우리 모 아줌마를 배웅해 드려야 해. 그리고 이모부 회사로 가서 이모부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 가서 밥 먹자. 오늘 실컷 놀고 내일부터 유치원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