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은 계속 말을 이었다.“둘째부터 손댈까 아니면 셋째부터 손댈까?”전태윤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괜히 그때 가서 할머니가 동생들에게 그가 시킨 일이라고 뒤집어씌우면 안 되니까.“둘째가 낫겠지? 둘째한테 누굴 소개해주면 좋을까?”전태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그가 알고 있는 젊은 여자는 안 그래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데 전이진에게 아내감을 소개해주라는 건 아예 그더러 절에 가서 스님이 되라는 것보다 힘들었다.할머니도 전태윤이 마땅한 여자를 추천해줄 거란 기대가 없었다.“안 들어가고 뭐 해?”전태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어르신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곧 출장 가는데 얼른 들어가서 예정이랑 얘기라도 몇 마디 더 나눠야지!”뭐든지 할머니가 미리 가르쳐줘야 했으니...할머니는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해 전태윤을 키울 때 모든 걸 가르쳐줬지만 유독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놓쳐버렸다. 그랬더니 결국 이 녀석은 무뚝뚝한 사내가 되어 여자의 마음을 도통 읽을 줄 모른다.할머니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니 딱히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내 생각이 짧았어. 너무 단순하게 여겼단 말이지.’전태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예정이 지금 날 위해 짐을 싸며 흥얼거리고 있잖아요?”할머니는 입이 쩍 벌어졌다.하예정은 짐 정리를 마친 후 다시 한번 전태윤의 일상용품을 체크하고 나서야 캐리어를 잠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캐리어를 사진까지 찍었다.그녀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캐리어를 끌며 밖으로 나가려는데 두어 걸음 걷다가 문 앞에 서 있는 할머니와 전태윤과 마주쳤다.“할머니.”하예정이 웃으며 인사하고는 캐리어를 끌고 앞으로 다가갔다.“태윤 씨가 출장 가야 해서 제가 대신 짐을 싸줬어요.”손주 며느리가 손주에게 이토록 자상하니 할머니는 마냥 기뻤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다음부턴 태윤이 혼자 정리하게 놔둬. 배고프지? 태윤이가 아침 다 차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전태윤은 또 카톡으로 하예정에게 1000만 원을 보냈다.하예정은 이를 확인하더니 냉큼 말했다.“나 돈 있어요.”그가 준 생활용 카드만 해도 돈이 바닥난 적이 없었다.“내가 출장 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구정이 코앞이라 장만해야 할 것들도 많을 거야. 다 돈 들어갈 일이니 어느 정도 남겨두고 있어. 그리고 네가 알아서 장만해.”전태윤의 이유는 아주 충분했다.“구정 전에 본가로 돌아가서 설 연휴를 보낼 거야. 본가엔 친척들이 많아서 선물을 많이 준비해야 해. 뭘 드리면 좋을지 할머니께 여쭤보고 미리 사놔. 1000만 원으로 부족하면 바로 얘기해. 더 줄게.”그의 대답을 들은 하예정은 1000만 원을 받아야만 했다.혼인 신고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 그는 처음으로 하예정을 데리고 본가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꺼냈다.전에 상견례를 할 때 그는 부모님과 이모 삼촌들에게 이리로 오라고 통보만 했었다.어르신은 전태윤의 말을 듣더니 두 눈을 반짝거릴 뿐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하예정이 발코니에 가서 꽃에 물을 줄 때 어르신은 봄이를 안고 손자 곁에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설에 예정이 데리고 가서 어디서 지내려고?”본가일지 아니면 아무 집이나 찾아서 어물쩍 넘어갈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할머니, 우리 집 진짜 본가 말이에요, 제대로 정리하면 안에 들어가서 지낼 수 있겠죠?”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물론이지. 정리하면 얼마든지 들어가서 지낼 수 있어.”지금의 전씨 일가 저택은 전태윤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직접 쌓아 올린 건물인데 리조트 형식이고 이름은 서원 리조트이다.전씨 가문의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집이야말로 진정한 본가이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물씬 풍긴다. 서원 리조트와도 차로 10분 거리라 매우 가깝다.매년 설마다 할머니는 손자들을 데리고 본가에 돌아가 조상님들께 향을 피운다.“우린 설 때마다 본가에 돌아가 며칠 지내잖아.”진정한 본가는 더욱 저력이 있지만 면적이 서원 리조트보다 작다. 다만 이렇게 되면
고개를 들어 그를 본 순간 하예정은 마지못해 그의 목을 감싸 안고 머리를 살짝 내리더니 가볍게 입맞춤했다.전태윤은 아내의 뽀뽀를 받고 기분 좋게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다정하게 밖으로 나갔다.어르신은 집 아래에서 두 사람이 나오길 기다렸다.어르신과 함께 얘기를 나눠준 사람은 강일구였다.그날 하예진의 이사를 도와줄 때 하예정이 그를 바로 알아봤는데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재치있게 답변했었다. 본인은 돈만 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어르신은 그런 강일구의 모습이 실로 마음에 들었다.“태윤 씨, 예정 씨.”강일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하예정은 방긋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날 깜빡하고 명함을 못 구했네요.”강일구는 재빨리 도련님을 힐긋 쳐다봤다. 도련님이 딱히 표정 변화가 없자 그는 그제야 과감하게 대답했다.“강일구라고 해요.”그리고 바지 주머니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하예정에게 건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날 집에 돌아가니 명함을 다 나눠주고 없더라고요. 아직 미처 추가해서 프린트하지 못했어요. 이건 제 전화번호예요.”하예정은 그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받으며 전태윤에게 말했다.“강일구 씨는 무슨 일이든 다 한대요. 앞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강일구 씨한테 맡겨야겠어요.”안 그래도 질투가 많은 전태윤이니 불필요한 오해는 삼가길 바랐다.전태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일구 씨가 믿음직하긴 하지. 힘든 일 있으면 강일구 씨한테 부탁해.”강일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돈만 주면 저는 무슨 일이든 다 해요. 태윤 씨 어디 출장 가시나 봐요?”전태윤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강일구는 하예정과 전태윤 부부, 그리고 할머니께 인사를 마친 후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를 떠났다.도련님은 이번에 경호원을 반만 데리고 출장을 떠난다. 강일구는 여기 남아서 사모님을 잘 지켜야 한다.도련님과 함께 출장 가지 못하게
전화를 끊은 후 전태윤이 강일구에게 분부했다.“내가 집에 없는 동안 너희 사모님 잘 지켜드려.”“걱정 마십시오, 도련님. 반드시 잘 모시겠습니다.”사모님이 워낙 몸이 날렵하시다 보니 사모님을 보호하는 일은 그야말로 홀가분한 임무였다.게다가 보너스가 두배라니!강일구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이게 바로 사모님 곁에 남아있는 장점이었어!’“사모님이 어려움에 부딪혀 도움이 필요하면 할머니께 말씀드려. 할머니가 알아서 하실 거야. 혹은 전이진한테 얘기해도 돼.”“걱정 마세요, 도련님. 무릇 사모님께서 어려움에 부딪히면 어르신은 반드시 아시게 될 겁니다.”무슨 일이든 어르신의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전태윤도 할머니의 실력을 되새기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가 가장 의외인 것은 한동안 보이지 않던 성소현이 또다시 회사 문 앞에 찾아왔다는 사실이다.그녀는 빨간색 스포츠카에 기댄 채 전태윤의 경호팀 차들이 서서히 들어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기사가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도련님, 성소현 씨가 또 왔습니다.”전태윤이 침묵하다가 기사에게 분부했다.“소현 씨 앞에 거의 도착할 때 잠시 차 세워.”기사와 강일구는 모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성소현과 사모님이 친한 친구 사이로 되었지만 도련님은 늘 성소현에게 싸늘한 태도를 선보였다. 그나마 친절하게 대해주는 건 심효진 씨였다. 왜냐하면 심효진 씨와 도련님이 가장 친분이 깊기 때문이다.게다가 심효진 씨가 사모님을 데리고 함께 서점을 운영했다.운전기사는 도련님의 분부를 따랐다.성소현은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전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뛰쳐나가서 차를 가로막아버려?’다만 이때 전태윤이 탄 롤스로이스가 그녀 앞에서 저절로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전태윤이 안에서 내려왔다.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기고 눈부실 따름이었다.성소현은 넋 나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이 사람은 이젠 유부남이야.’“대표님, 너무 긴장할 거 없어요. 오늘은 대표님한테
성소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다가 고개를 돌려 촉촉해진 눈가를 닦았다. 그렇게 먼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했다. 다시 전태윤을 마주했을 땐 모든 걸 받아들인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태윤 씨 그 한마디면 됐어요. 오랫동안 태윤 씨를 좋아한 게 헛되지는 않았네요.”그녀가 털털하게 악수를 청하자 전태윤도 흔쾌히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태윤 씨, 아내분이랑 평생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요.”“고마워요, 소현 씨.”“나중에 두 분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전태윤이 손을 거두며 진중하게 말했다.“결혼식 날짜 잡으면 성 대표님이랑 소현 씨한테 꼭 청첩장 보낼게요.”“그럼 기다릴게요.”성소현이 웃는 얼굴로 계속하여 말했다.“대표님 바쁘실 텐데 더는 귀한 시간 뺏지 않을게요.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녀는 전태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곧장 스포츠카를 타고 전씨 그룹을 떠났다.처음으로 이토록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다 회복되면 그녀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전태윤이 차에 올라타자 운전기사가 바로 시동을 걸었다.운전기사는 두 사람이 또 한바탕 실랑이를 벌일 거로 생각했는데 성소현이 축복하러 왔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소현 씨는 사랑에 최선을 다했다가 아닌 건 포기할 줄도 아는 참 대단한 여자야.’운전기사든 전태윤의 경호원이든 성소현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적어도 그녀는 더 매달리지 않았다.성소현은 하예정에게 갈 참이었으나 가던 길에 또 갑자기 생각을 바꿨다. 집으로 돌아가 엄마와 함께 유전자 검사 결과를 가지러 유전자 검사 센터로 가야 했다. 하여 성소현은 다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도착했을 땐 벌써 오전 9시가 넘었다.이경혜가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 안절부절못하자 성문철이 말했다.“너무 조급해하지 마. 결과가 나와도 다른 사람이 가져가지 않아.”“한시라도 빨리 예정이가 내 조카가 옳은지 아닌지 결과를 알고 싶어
“그래, 우리 소현이가 훌륭하긴 하지. 성씨 가문 딸은 시집 못 갈 걱정 안 해.”이경혜는 누구보다 딸을 잘 알았다. 성소현이 마음을 접는다고 했으니 꼭 그렇게 할 것이다.그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유청하가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아가씨가 돌아왔나 봐요.”밖으로 나가보니 정말로 시누이였다. 차에서 내린 성소현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새언니에게 다가왔다.“언니, 엄마 아직 집에 있어요?”환하게 웃는 시누이의 모습에 유청하는 마음이 아렸다. 차라리 이렇게 웃지 말고 펑펑 울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성소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 해맑게 웃을수록 그녀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걸 뜻하니까.‘어휴.’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남자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말이다.“네, 아직 집에 있어요. 아가씨, 괜찮아요?”“안 괜찮아 보여요?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마지막 인사를 하고 왔을 뿐인데요, 뭐.”성소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했지만 더는 전태윤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새언니의 팔짱을 다정하게 끼며 말했다.“언니, 그만 들어가요.”성소현이 돌아오자 이경혜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이경혜는 가족들과 함께 유전자 검사 센터로 향했다.떨고 있는 이경혜와 달리 하예정은 무척이나 침착했다.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 공예품을 열심히 만들다가 전씨 할머니와 숙희 아주머니를 힐끗 보고는 심효진에게 말했다.“태윤 씨 출장 갔어. 요 며칠 놀러 갈 데 있으면 나도 끼워줘.”요즘 그녀의 삶은 우울함의 연속이었다. 아무래도 친구들과 신나게 놀면서 기분을 풀어야 할 듯싶다. 가능하다면 언니와 조카도 함께 데려가면 더 좋고.심효진이 웃으며 말했다.“쇼핑하고 맛있는 거 먹는 거 말고 뭐가 있어? 너 상류층의 파티는 싫어하잖아. 소현 씨 실연당했대. 소현 씨랑 술이나 한잔할까?”하예정이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술은 됐어. 나 주량이 별로라 못 마셔. 그리고 언니도 나 술 못
하예정이 피식 웃었다.“소현 씨가 그러는데 소정남 씨는 정보 집안 출신이라 함께 있으면 재미난 구경을 가장 먼저 할 수 있대. 너 그런 거 가장 좋아하잖아. 소정남 씨는 정말 너한테 딱이야. 둘이 아주 잘 어울려.”심효진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가 남자친구를 찾는 게 결혼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재미난 구경을 하기 위해서인가?“예진 언니네 전 시댁 식구들이 또 찾아왔었다고?”심효진은 더는 그녀가 장난하지 못하게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언니가 이혼하고 그 집에서 나오자마자 그 집안사람들이 짐을 챙기고 들어가려고 했대. 그런데 지금은 월세방이나 호텔에서밖에 지내지 못해. 아마 구정도 여기서 보낼 거야. 절대 본가로 돌아갈 사람들이 아니야.”주씨 가문 사람이라면 무조건 올해 설은 시내에서 보낸다고 여기저기 자랑했을 것이다. 하여 머무를 집이 없는 이 상황에 집을 구해서라도 이곳에서 설을 보낼 것이다.하예정은 투명 망토라도 걸치고 그 집안에 들어가 재미난 구경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집 인테리어를 전부 부순 걸 보고 엄청 놀랐을 거야.”하예정이 크게 웃었다.“당연하지.”주씨 가문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각 하 영감을 찾으러 관성 종합병원에 도착했다.하씨 집안 할머니는 수술 후 회복이 꽤 잘 되어 며칠만 더 병원에 있다가 퇴원해도 된다고 한다.김은희가 딸과 사위와 함께 병원으로 쳐들어갔다. 주경진은 호텔에 남아 세 외손주를 챙긴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다. 사실 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창피해서였다.“하 영감!”김은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실 안으로 쳐들어왔다. 하 영감은 딸과 사위와 함께 온 그녀를 보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우리 아들이랑 손자는 어디 간 거야? 저 미친 여자를 말리지도 않고.’“사돈, 이 사람이 아직 병상에 누워있으니 목소리 좀 낮춰요.”하 영감은 따뜻한 물을 한잔 따라 아내에게 먹여준 후 컵을 침대 머리맡 서랍 위에 덤덤하게 내려놓았다.“사돈, 병문안 왔다는 사람이 빈손으로 왔어요? 나이도 먹을 만큼
“하 영감, 당신 분명 내가 준 현금 1200만 원을 받았잖아. 그 돈은 내가 엄청 오랜 시간 모은 비상금이란 말이야. 돈 받을 때 하예정을 설득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내 아들이랑 하예진이 결국 이혼했다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돈 돌려줘.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하 영감이 돈을 받은 걸 인정하지 않자 김은희는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 영감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신고하고 싶으면 해.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돈을 받았으면 뭐? 그건 그때 못 받은 예물이야. 우리 손녀가 당신 아들이랑 결혼할 때 예물 일전 한 푼도 받지 못했어. 예물을 고작 천만 원이 넘는 돈으로 퉁 쳤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사돈, 사돈도 딸이 있잖아. 딸을 시집보낼 때 예물 일전 한 푼 받지 않고 보낼 수 있어?”김은희가 분통을 터뜨렸다.“예물이라니! 당신 예진이를 키운 적이 있어? 무슨 자격으로 예물을 받으려는 건데? 이혼한 마당에 예물을 준다는 게 말이 돼? 당장 돌려줘!”“없어. 남은 건 목숨밖에 없으니까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봐.”하 영감의 당당한 태도에 김은희는 당장이라도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서인이 그런 김은희를 말렸다.“엄마, 저 사람 건드리지 마. 나이가 많아서 바닥에 드러눕기라도 하면 우리만 손해야.”“아이고, 여보. 나 숨을 못 쉬겠어, 너무 힘들어. 저 사람들이 여기서 너무 소리를 질러서 그래. 아이고, 나 죽겠네...”침대에 누워있던 하씨 집안 할머니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하 영감은 재빨리 응급 벨을 눌러 의사와 간호사를 불렀다. 그러고는 김은희 일행을 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우리 아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앞으로의 병원비는 당신들이 책임져야 할 거야.”“지금 아픈 척하는 거잖아요!”주서인은 어머니와 남편을 끌고 병실을 나서며 욕설을 퍼부었다.“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또 올 겁니다.”“돈은 무슨 돈! 없어
이윤미는 제법 잘 꾸민 정군호가 젊어 보이면서도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윤미는 정군호가 이은화보다 십여 세 어린 여자를 껴안은 여자 사진을 보더니 혼자 중얼거렸다.“영감님이 젊었을 때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겠네. 지금도 나이가 들었지만 잘 차려입으니 너무 잘생겼군.”어쩐지 이은화가 매우 엄격하게 다스리더라니.밖에서 아들이 준 돈으로 여자와 바람을 핀 사실을 이은화가 알아버린다면 이은화는 어떤 느낌일까?같은 시간, 관성.관성 호텔에서 서원 리조트로 돌아온 하예정은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잤다.하예정은 여전히 너무 졸렸다.전태윤은 그녀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하예정이 방에 들어가 바로 침대에 올라가서 자려는 모습을 본 전태윤은 침대에 다가가 앉더니 웃으면서 말했다.“졸리면 차에서 자도 되는데. 집에 도착하면 내가 안아서 침대에 눕혀줄 텐데.”“겨우 버티며 왔어요. 여보, 나 좀 잘게. 당신도 잘래요? 안 자면 서재에 가서 책 좀 보시겠어요?”전태윤은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얼른 자. 난 안 졸려.”하예정은 눈을 감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하예정이 몇 분 만에 달콤하게 잠든 것을 보고 전태윤은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뽀뽀해 주었다. 그리고 손을 하예정의 평평한 아랫배에 올려놓으며 그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예정아, 수고했어.”전태윤은 그 자리에서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침에서 나와 작은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책들이 놓여 있었다. 그 책들은 임신에 관한 지식 책이었다. 전태윤은 이미 다 읽었지만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전태윤은 책 한 권의 내용을 모두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하예정이 임신하기 전에 전태윤은 임신에 관한 지식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하예정이 임신한 후에는 비록 많은 사람이 전태윤을 도와 함께 하예정을 돌봤지만, 그는 여전히 직접 아내를 돌보고 싶었다.그리고 서점으로 달려가 임신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사고는 소정남을 찾아가 소정남이 산 책들이 자신이 산 책과 비슷한 것을
이윤정은 전호영을 언급할 때 마다 이를 악물면서 전호영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고현을 빼앗아 갔다면서 욕설을 퍼부었다.“윤미 씨 아버지께서 바람난 일을 전호영 도련님께 맡겨보는 건 어떠세요? 전호영 도련님은 안팎으로 이씨 가문을 괴롭히거든요.”이씨 가문 사람들에게는 전호영이 적수나 다름없다.이씨 가문과 이경혜 자매의 관계, 그리고 이윤미가 관성 쪽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던 방윤림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방윤림은 아마도 이윤미가 관성 쪽의 사람들과 적수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여겼다.이윤미는 이씨 가문의 전임 가주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조사하려고 했다.방윤림은 만약 전임 가주가 이은화의 손에 죽었다는 증거가 나오기만 하면 이윤미가 더는 이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씨 가문을 떠나 그녀의 작은 세계로 돌아가리라 추측했다.아니, 그녀가 반드시 원래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고 확신했다.이윤미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다.사실, 이씨 가문에 돌아가기 전에 이윤미는 이미 사업에 성공한 젊은 여자였다. 이윤미의 양부모가 늘 그녀의 피를 빨아들이려는 생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회사의 대표라는 사실을 계속 숨기고 있었다.이윤미는 사람들이 그녀를 연약하고 무능한 사람인 줄로 알게 하여 이씨 가문의 후계자가 이윤정일 수도 있으리라 추측하게 했다.그러나 이씨 가문의 철칙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일이다.이윤정은 이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기도 했고 또한 이윤정의 능력도 훌륭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윤정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그녀가 이씨 가문의 친딸이 아닌 것이 밝혀진 이상 이씨 가문을 이어받을 자격을 잃게 될 것이다.이윤미가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호영 씨도 이 사실을 알아 버린 이상 모른 체 하지 않을 거예요. 호영 씨는 원래 이씨 가문이 잘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끼어들지 않아도 스스로 그 사실을 터뜨릴 겁니다.”“우리가 아무런 수를 쓰지 않아도 증거가 호영 씨의 손에 있는 이상 가만히 있지
아무튼, 그 여자가 어느 우두머리의 내연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정군호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사람의 내연녀를 건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영상과 사진을 본 이윤미는 방윤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냥 놔둬요. 제 카카오톡 기록도 삭제할 거예요. 제가 만약 저장해 두면 우리 어머니께서 돌아와서 저를 의심하게 되면서 제 휴대전화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방윤림이 회답했다.[제가 이미 저장했습니다. 윤미 씨는 식사하셨어요?”[먹고 있어요. 배달시켰거든요.]방윤림은 눈살을 찌푸렸다.[자꾸 배달 음식을 시키지 마세요. 회사에 식당도 있는데... 정 시간이 안 되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 제가 매일 요리를 해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이윤미는 방윤림이 보낸 메시지를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이씨 가문에 돌아온 뒤로 이윤미는 고군분투했다. 아무도 그녀를 관심해 주지 않았다.이은화조차도 진정으로 이윤미와 한마음이 아니었다.이은화는 이윤미 혼자만의 어머니가 아니었고 오빠와 이윤정이 어머니이기도 했다.이윤정은 이은화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애교를 부릴 수 있었지만, 이윤미는 그런 애교를 부릴 수 없었다.다행히도 방윤림이 이윤미의 곁으로 와주었다.이윤미는 방윤림이 그녀의 곁에 있는 의미를 깨달은 뒤로 그에 대한 믿음이 가족보다 더 깊어졌고 방윤림 또한 그녀를 많이 도와줬다.방윤림이 처음 이윤미의 곁에 왔을 때 이윤미에게 앞으로 누구든 이윤미의 곁은 떠날 수 있겠지만, 방윤림만은 이윤미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방윤림이 이윤미 곁으로 파견된 그 순간부터 그는 죽지 않는 한 이윤미에게 충성하면서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만약 방윤림이 죽는다고 해도 누군가가 재빨리 그를 대신할 것이기 때문에 이윤미의 곁에는 늘 충성을 다 하는 심복이 따라다닐 것이다.방윤림은 모든 것을 할 줄 아는 진정한 능력자였다.물론 요리 실력도 훌륭하기 때문에 그가 한 요리는 매우 맛있었다.이윤미는 타자속도가 너무 늦다고 느껴 음성통화를 걸었다.
고현은 전호영의 옷을 잡아당겼다.전호영은 그녀를 따라 걸으며 말을 했다.“이 대표님도 언제쯤이면 돌아오실지... 정말 이씨 가문의 이 재미있는 연극을 보고 싶네요.”고현은 전호영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설령 이 대표님이 남편이 밖에서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더라고 밖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고 정군호 씨를 데리고 가서 문을 닫고 난리 칠 거예요. 호영 씨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거예요.”전호영이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말을 건넸다.“이윤미 씨가 있잖아요. 이윤미 씨가 이씨 가문 겉면의 평화를 깨뜨렸는데 윤미 씨의 아버지 스캔들을 숨길 수 있겠어요? 저는 믿지 못하겠어요. 윤미 씨도 쉽지 않은 사람이에요. 이씨 가문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기회를 보면서 이씨 가문의 도련님들을 한꺼번에 정리할 생각일 거예요.”“그 문제 덩이 사람들만 없다면 이씨 그룹에서 윤미 씨의 지위는 더 확고해질 수 있잖아요. 역시 이 대표님 친딸답네요. 자신의 가족들을 이토록 모질게 다루다니.”고현은 한참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는 이윤미를 대신해 몇 마디 했다.“윤미 씨는 이씨 가문 여자들의 독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 대표님과는 조금 달라요. 제가 장담하건대 윤미 씨는 윤미 씨의 오빠들을 최대한 이씨 그룹에서 쫓아내지 않을 거예요. 그들이 이씨 그룹에서 파벌을 만드는 것을 방지하고 사적으로 이득을 챙기는 것을 방지할 뿐이죠. 이 대표님처럼 가족들을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전호영은 고현이 이윤미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더니 더는 이윤미에 관한 나쁜 얘기를 이어가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전호영 일행은 호텔에 들어간 뒤 전호영의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으로 갔다. 그 안에는 뷔페가 있었기 때문에 고현은 그녀가 먹고 싶은 음식들을 다 먹을 수 있었다.전호영은 정군호가 내연녀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몰래 사람을 시켜 정군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정군호가 내연녀를 데리고 룸에 들어가면 그들
그 뒤로 이윤미가 그녀의 오빠들과 내연녀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차마 몇 명의 형수님들이 속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형수님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 후로 이윤미의 오빠들과 형수님들이 말다툼하기 시작했다.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고현은 이윤미가 잘했다고 생각했다.바람을 피운 사람이 자기 오빠라고 감싸면서 오빠들을 도와 형수님들을 속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자기 남편이 바람피운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지만, 본인만 모른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때 전호영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군호 씨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을걸요. 이 대표님께서 돌아오신다면 정군호 씨는 틀림없이 나가서 바람피우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 대표님을 도와야 한다고 봐요. 못 봤으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현장을 목격했잖아요. 이 대표님을 만나면 알려줘야 해요. 어쨌든 우리 형수님의 이모시기 때문에 우리 형수님의 친척이나 다름없죠. 안 그래요?”고현은 전호영을 꾸지람했다.“호영 씨도 정말 나쁘네요. 이씨 가문에서 난리가 났으면 좋겠죠? 그런데 저도 호영 씨를 지지할 거에요. 이러고 보니 저도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봐요.”“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죠. 정군호 씨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보세요. 정군호 씨가 잘못한 것을 우리가 바로잡아준 거죠. 이 대표님을 위한 것이지 모함하거나 억울하게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저처럼 일편단심인 남자는 정군호 씨의 이런 행동이 너무 부끄러워요. 만약 집안의 아내가 싫으면 이혼할 것이지... 이혼하기는 싫고 또 밖에서 예쁜 여자들이랑 놀고는 싶고... 두 마리 토끼는 다 잡을 수 없는 법이죠. 하늘 아래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이 있겠어요?”전호영은 정군호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영상을 찍었다. 그리고 하루 호텔도 카메라가 있었기에 정군호가 내연녀를 껴안고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이 꼭 찍혔을 것이다.전호영이 정군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니었다.“이 대표님이 그토록 기가 센데
“저는 배려심이 깊은 신사에요.”고현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면서 전호영의 신사다운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하지만 전호영이 고현의 손을 잡고 함께 호텔로 들어가려고 하자 고현은 거절했다.전호영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시종 전호영과 연인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고현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전호영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앞으로나란히 몇 걸음 걷더니 고현이 갑자기 멈추었다.“왜 그러세요?”전호영이 물었다.‘설마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만났나?’전호영은 앞을 보았지만,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보지 못했다.“정군호 씨예요.”고현은 낮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한 뒤 전호영을 잡아당겨 차 뒤로 숨었다. 그녀의 경호원 팀은 고현이 위험한 줄로 알고 본능적으로 최대한 빨리 고현의 앞으로 돌진하며 위험을 막으려고 했다.“얼른 숨으세요. 저를 막지 마시고!”고현은 나지막이 경호원 팀에게 말했다.고현이 누군가의 가십거리를 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고현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옷을 입은 늙은 남자를 가리켰다. 그 늙은 남자는 천가 같은 얼굴과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그 여성의 곁을 지나가는 남자라면 모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보았다.“저 남자는 이윤미의 친아버지이자 이 대표님의 남편인 정군호 씨예요.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저도 잘 몰라요. 놀랍게도 밖에서 내연녀를 만나고 있었네요. 만약 이 대표님께 들킨다면 정말 정군호 씨를 죽여놓을지도 몰라요.”이은화의 남편이라는 말을 들은 전호영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정군호와 내연녀의 동영상을 찍었다.그리고 말했다.“이 대표님은 우리 큰형의 결혼식에 가신 뒤로 계속 관성에 남아계시거든요. 아마도 정군호 씨는 이 대표님이 없는 틈을 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네요”고현도 말을 이었다.“이 대표님께서 남편을 너무 엄격하게 단속하니까 정군호 씨도 아마 진짜로 바람 피우지는 못할 거에요. 기껏해야 지
고현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저는 어른이 된 후로 여행을 갈 시간이 없었어요. 바빠서 미치겠는데 언제 시간을 내서 놀러 가겠어요? 하지만 출장 다니면서 많은 곳은 가봤어요.”“신혼여행은 어디 가고 싶어요?”전호영이 그녀에게 물었다.고현이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말을 이었다.“저는 물이 맑고 공기가 좋은 산을 좋아해요. 조용하거든요.”“제가 잘 연구해서 산 좋고 물이 맑은 조용한 곳을 찾아볼게요.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우리 둘만의 세상을 잘살아 봐야죠.”알고 보니 고현은 산과 물이 있는 아름다운 곳을 좋아했다.전씨 가문의 서원 리조트가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이 있는 곳이고 평소에도 매우 조용한 곳이었다.“서원 리조트를 좋아해요?”“좋아하죠.그럼 서원 리조트에서 신혼여행을 즐기려고요?”전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고요. 그곳은 우리 미래의 집이고 신혼여행은 당연히 딴 곳으로 가야죠.”이때 고현이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지금 시집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벌써 신혼여행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네요. 호영 씨와 함께하면 쉽게 호영 씨 의도대로 따라간단 말이죠. 저의 총명함과 자제력 모두 호영 씨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니까요.”“현이 씨가 아직도 이 일을 고민하고 있다니. 제가 아직도 부족한가요?”전호영은 자신이 고현을 오랫동안 쫓아다녔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고현을 대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시집을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하여 전호영은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어떤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는지 알고 싶었다.“아니에요. 충분히 잘하셨어요. 우리 데이트도 별로 안 하고 평소에도 일하느라 바빴던 것 같아요. 아직 결혼까지 할 정도로 감정이 깊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말처럼 하루 못 보면 일 년을 못 본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는 몰라요.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는 건 제가 호영 씨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아요. 어
경호원 팀은 그들의 전 대표님이 전호영에게 떠밀려 마이바흐 차에 들어가는 모습을 버젓이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차는 곧 고씨 그룹을 빠져나왔다.고빈이 중얼거렸다.“호영 씨는 정말 내가 본 형부 중 가장 오만방자한 형부였어. 처남인 나에게 조금도 아부하지 않고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니.”고빈은 중얼중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만약 고빈이 정말 친형이 있다면 그는 전호영이 그의 친형을 해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따라갔을 것이다.하지만 그의 친형은 사실 여자였다. 그의 누나 고현은 시집가야 하는 여자였다. 전호영은 그의 누나와 어울리는 남자였기 때문에, 또 전호영이 고빈의 부모님께 고빈이 너무 방해한다고 고자질하면 안 되었기에 고빈은 더는 따라가지 않았다.지금 고씨 가문에서 전호영은 고현 남매보다 체면이 훨씬 섰다.“고빈 씨가 안 따라왔죠?”전호영은 차를 몰면서 조수석에 앉은 고현에게 물었다.고현은 돌아볼 필요도 없이 이내 말을 이었다.“고빈이는 입만 살아서 그렇지 정말 따라오지는 않을 거예요. 호영 씨가 우리 부모님 앞에서 고빈의 고자질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죠. 고빈은 저보다 10분 먼저 태어났지만 지금 정해진 여자친구가 없거든요.”“저도 호영 씨랑 짝을 지으니 저희 부모님의 눈길도 자연스레 고빈의 몸으로 옮겨졌어요. 호영 씨가 제 동생의 고자질하면 저희 부모님은 그를 욕하다가 결국 결혼 재촉 문제로 돌아가거든요. 제 동생은 결혼 재촉을 엄청 무서워하거든요.”고빈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고정된 여자친구를 찾지 못한 일에 관해 고현도 마음이 조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녀에게는 전호영이 있었지만, 고빈의 짝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예전에는 고현은 고빈과 이윤미를 맞세워주려고 했지만, 고빈은 이윤미가 재미없다고 느꼈고 이윤미 또한 고빈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이윤미 곁에 방윤림이 있었다.전호영은 빙그레 웃었다.“저도 항상 고빈 씨의 고자질하고 싶지 않아요.
전호영은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면서 전호영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보습을 보았지만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약 전호영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다.“전 대표님.”다들 마음속으로 아무리 전호영을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전호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그는 고씨네 남매에게 다가갔다.“현이 씨, 퇴근하시죠. 제가 데리러 왔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자, 받아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 앞으로 내밀었다.고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말했어요. 제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매번 올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지 마세요. 제 사무실이 곧 꽃집이 될 것 같으니까요.”전호영은 심지어 하루에 꽃다발을 여러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현은 전호영이 보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전호영은 보복으로 그녀에게 더 많은 꽃을 보냈다.고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곧 먹혀 죽을 것만 같았다.“꽃병을 더 사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저를 꽃병이라고 비아냥거리시려는 거에요? 제 사무실에는 꽃병이 가득 놓여 있거든요.”전호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는 이런 꽃들을 보내지 않고 다루기 쉬운 꽃들로 보낼게요. 현이 씨 사무실에 있는 그 꽃병들을 집으로 몇 개 가져가면 사무실이 꽃병이 줄어들 거 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고빈이 말을 이었다.“우리 형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해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이 꽃들을 저의 여성 지인들이게 줄 테니까요.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을 것 같아요.”“고빈 씨는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의 품에 안겨주며 자연스럽게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빈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설마 이제야 저를 보신 건 아니죠?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잘 고려해 보고 짝을 찾으셔야지 아니면 시각장애인을 고를 수도 있어요.”“그건 제 눈에 현이 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