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이 피식 웃었다.“소현 씨가 그러는데 소정남 씨는 정보 집안 출신이라 함께 있으면 재미난 구경을 가장 먼저 할 수 있대. 너 그런 거 가장 좋아하잖아. 소정남 씨는 정말 너한테 딱이야. 둘이 아주 잘 어울려.”심효진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가 남자친구를 찾는 게 결혼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재미난 구경을 하기 위해서인가?“예진 언니네 전 시댁 식구들이 또 찾아왔었다고?”심효진은 더는 그녀가 장난하지 못하게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언니가 이혼하고 그 집에서 나오자마자 그 집안사람들이 짐을 챙기고 들어가려고 했대. 그런데 지금은 월세방이나 호텔에서밖에 지내지 못해. 아마 구정도 여기서 보낼 거야. 절대 본가로 돌아갈 사람들이 아니야.”주씨 가문 사람이라면 무조건 올해 설은 시내에서 보낸다고 여기저기 자랑했을 것이다. 하여 머무를 집이 없는 이 상황에 집을 구해서라도 이곳에서 설을 보낼 것이다.하예정은 투명 망토라도 걸치고 그 집안에 들어가 재미난 구경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집 인테리어를 전부 부순 걸 보고 엄청 놀랐을 거야.”하예정이 크게 웃었다.“당연하지.”주씨 가문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각 하 영감을 찾으러 관성 종합병원에 도착했다.하씨 집안 할머니는 수술 후 회복이 꽤 잘 되어 며칠만 더 병원에 있다가 퇴원해도 된다고 한다.김은희가 딸과 사위와 함께 병원으로 쳐들어갔다. 주경진은 호텔에 남아 세 외손주를 챙긴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다. 사실 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창피해서였다.“하 영감!”김은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실 안으로 쳐들어왔다. 하 영감은 딸과 사위와 함께 온 그녀를 보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우리 아들이랑 손자는 어디 간 거야? 저 미친 여자를 말리지도 않고.’“사돈, 이 사람이 아직 병상에 누워있으니 목소리 좀 낮춰요.”하 영감은 따뜻한 물을 한잔 따라 아내에게 먹여준 후 컵을 침대 머리맡 서랍 위에 덤덤하게 내려놓았다.“사돈, 병문안 왔다는 사람이 빈손으로 왔어요? 나이도 먹을 만큼
“하 영감, 당신 분명 내가 준 현금 1200만 원을 받았잖아. 그 돈은 내가 엄청 오랜 시간 모은 비상금이란 말이야. 돈 받을 때 하예정을 설득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내 아들이랑 하예진이 결국 이혼했다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돈 돌려줘.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하 영감이 돈을 받은 걸 인정하지 않자 김은희는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 영감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신고하고 싶으면 해.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돈을 받았으면 뭐? 그건 그때 못 받은 예물이야. 우리 손녀가 당신 아들이랑 결혼할 때 예물 일전 한 푼도 받지 못했어. 예물을 고작 천만 원이 넘는 돈으로 퉁 쳤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사돈, 사돈도 딸이 있잖아. 딸을 시집보낼 때 예물 일전 한 푼 받지 않고 보낼 수 있어?”김은희가 분통을 터뜨렸다.“예물이라니! 당신 예진이를 키운 적이 있어? 무슨 자격으로 예물을 받으려는 건데? 이혼한 마당에 예물을 준다는 게 말이 돼? 당장 돌려줘!”“없어. 남은 건 목숨밖에 없으니까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봐.”하 영감의 당당한 태도에 김은희는 당장이라도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서인이 그런 김은희를 말렸다.“엄마, 저 사람 건드리지 마. 나이가 많아서 바닥에 드러눕기라도 하면 우리만 손해야.”“아이고, 여보. 나 숨을 못 쉬겠어, 너무 힘들어. 저 사람들이 여기서 너무 소리를 질러서 그래. 아이고, 나 죽겠네...”침대에 누워있던 하씨 집안 할머니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하 영감은 재빨리 응급 벨을 눌러 의사와 간호사를 불렀다. 그러고는 김은희 일행을 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우리 아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앞으로의 병원비는 당신들이 책임져야 할 거야.”“지금 아픈 척하는 거잖아요!”주서인은 어머니와 남편을 끌고 병실을 나서며 욕설을 퍼부었다.“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또 올 겁니다.”“돈은 무슨 돈! 없어
고급 자동차 여러 대가 관성 중학교 정문을 지나 하예정의 서점 문 앞에 멈춰 섰다.옆집 정씨 아저씨네에서 수다를 떨던 전씨 할머니는 자동차를 보자마자 바로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차에서 내린 사람이 전씨 할머니를 알아보면 안 되니까.“예정 씨, 예정 씨.”차에서 내린 성소현은 하예정의 이름을 부르며 서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옆집 가게 문 앞에 있는 전씨 할머니를 발견하지 못했다.뒤따라 내리던 성문철은 눈물범벅인 아내를 부축하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유청하는 경호원들에게 문 앞을 잘 지키라고 분부한 뒤 들어갔다.한창 날개를 펼친 독수리를 만들고 있던 하예정은 성소현의 부름에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성소현을 올려다보았다.“소현 씨, 왔어요? 밥은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으면...”성문철의 부축을 받으며 눈물범벅인 채로 들어오는 이경혜를 본 순간 하예정은 바로 알아챘다.‘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왔구나.’이경혜의 표정만 봐도 그녀와 이경혜가 혈연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예정아.”이경혜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하예정을 품에 끌어안으며 목놓아 울었다.“이모가 얼마나 오래 찾아다녔는지 알아?”그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고 그저 하예정을 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하예정은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딱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내 여동생 가여워서 어떡해.”일찍 세상 떠난 여동생 생각에 이경혜는 계속하여 목놓아 울었다. 하예정도 그런 그녀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심효진과 주우빈, 숙희 아주머니는 먼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 상황을 알 리 없었던 주우빈은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성소현과 유청하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성문철이 앞으로 다가가 아내를 부축하며 다정하게 위로했다.“그만 울어. 조카를 찾은 건 얼마나 좋은 일인데 기뻐해야지, 울어서야 하겠어?”이경혜는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여동생과 두 조카가 그동안 겪은 고초만 생각하면 마음이 칼로 도려내듯이 아파 가슴을 마구 내리쳤다.“내가 애들
성문철과 성소현은 이경혜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유청하가 잊지 않고 검사 결과를 챙겼다.유청하가 검사 결과를 하예정에게 건넸다. 결과를 본 하예정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결과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예정아, 넌 내 조카고 난 네 이모야.”이번 생에 여동생과 만날 기회는 없지만 두 조카를 찾은 것만으로도 이경혜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그녀는 하예정의 손을 잡으며 이제부턴 이모라고 부르라고 했다.“예진이랑 우빈이는?”이경혜는 다른 조카를 떠올렸다.“언니 점심에는 안 와요. 저녁 5시 30분에 퇴근해서 와요.”하예정은 얘기하며 심효진에게 눈짓을 보냈다. 심효진이 주우빈을 안고 오자 하예정이 주우빈을 안았다.“아주머니...”하예정이 입을 열자마자 이경혜가 말했다.“예정아, 이모라고 불러야지. 이모는 꿈에서도 너희들을 찾아다녔어. 인제 겨우 찾았는데 왜 낯설게 아주머니라고 불러.”하예정은 잠깐 침묵하다가 이모라고 호칭을 바꿨다.유전자 검사 결과 그녀와 이경혜가 혈연관계가 있다는 건 이경혜가 그녀의 이모란 뜻이었다.이런 드라마틱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이모라는 소리에 이경혜의 눈시울이 또 붉어지자 성소현이 재빨리 말했다.“엄마, 그만 울어요. 우빈이도 여기 있는데 엄마가 울면 우빈이 놀란단 말이에요.”심효진과 숙희 아주머니가 생수와 과일을 내왔다.이경혜가 주우빈을 안으려 하자 주우빈은 몸을 틀며 하예정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우빈아, 난 우빈이 이모할머니야.”이경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우빈을 달랬다.“이모할머니가 우리 우빈이 안아봐도 될까?”그러자 주우빈이 그녀의 손을 밀쳐내며 엉엉 울었다.“싫어요, 싫어요. 이모가 안아줘요.”주우빈의 격한 반응에 이경혜는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 주우빈이 당한 일을 떠올린 그녀가 매섭게 말했다.“그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이 우빈이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절대 가만 안 둬!”큰 조카와 주형인이 이혼했고 그녀와 하예정 자매의 관계도 밝혀졌다. 이경혜는 지금이라도 나서서 뭐라도 하
그녀는 나중에서야 자신이 얼마나 재미있는 구경을 놓쳤는지 알게 되었고 자신을 부르지 않은 심효진과 하예정에게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다.심효진은 하예정에게 성소현을 부르는 게 어떻겠냐고 귀띔했었지만 부잣집 따님인 성소현에게 난폭한 장면을 보여줄 수 없다면서 하예정이 거절했다고 말했다.성소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부잣집 딸인 건 맞지만 난 성소현이야. 관성의 상류 사회에서 나의 명성이 좋지 않은 걸 모르나? 다들 날 무지막지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런 내가 난폭한 걸 두려워하겠어? 기분 나쁠 땐 일부러 난폭하게 굴기도 하는데.’“받아야 하는 건 다 받았는데 인테리어 비용만 돌려주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언니 부탁을 받고 사람을 데려다가 인테리어를 전부 다 부숴버렸어요.”이경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당연히 그래야지. 주씨 가문이 날로 먹게 해서는 안 되지.”그러더니 또 이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가 진작 알았더라면 친정집 식구로서 사람들을 데려가 인테리어 비용을 받아냈을 텐데. 이젠 명분도 있어 당당하게 요구해도 되니까.”하예정은 갑자기 성소현의 성격이 이경혜와 그야말로 판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예정아, 잠깐만, 이따가 가게 문 닫고 우리 집으로 가서 같이 밥 먹자. 아 참, 네 남편은 시간이 돼? 시간 되면 같이 가고.”하예정이 말했다.“남편이 오늘 출장 가서 며칠 후에 올 거예요. 남편이 오면 그때 이모 뵈러 갈게요.”“출장 갔구나. 그럼 할 수 없지, 오면 봐야지.”조카사위를 지금 당장 만날 수 없어도 이경혜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두 조카에게 있었으니까.조카를 찾았으니 조카에게도 뒷받침해주는 든든한 이모가 생겼다. 나중에 조카사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제대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예진이가 5시 30분에 퇴근한다고 했지?”“네.”이경혜가 시간을 확인했다.“어느 회사 다녀?”“노씨 그룹이요.”이경혜가 고개를 끄덕였다.“노씨 그룹은 발전할 공간이 커. 노동명은 장사 머리가 좋
나이 많은 사람 중에 아직도 이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많다. 딸은 시집가면 그만이기에 딸에게는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아들과 손자에게만 물려주려 했다.하여 아들이 없는 집에서는 사돈의 팔촌까지 그 집 재산을 노리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이 힘들게 쌓아온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어 그렇게 아들을 낳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둘째 사촌 오빠라면 하지문?”이경혜는 하지문에 대해 인상이 조금 있었다. 그녀 회사의 계열사에서 임원 자리까지 올라 연봉이 2억이 훨씬 넘었다.그녀에게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그녀의 조카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여동생의 부동산까지 빼앗으려 하다니! 이러니 하지문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나중에 큰아들에게 하지문을 억압하여 빈털터리로 만들어버리라고 해야겠다.“네, 맞아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지문 오빠를 가장 예뻐해요. 손주 중에서 제일 잘났다면서 우리 부모님이 남긴 부동산을 물려주려고 제멋대로 우리 집안 대를 이어받게 했어요. 구정이 지난 후에 언니랑 나랑 가서 부모님이 남긴 집을 되찾으려고요. 팔아버릴지언정 절대 그 사람들한테 주지 않을 거예요.”어쩌면 또 한바탕 소송할지도 모른다. 이제 곧 구정이고 언니도 금방 이혼한 상황이라 하예정은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부모님이 남겨주신 건물은 90년대 초에 지어진 것이라 사실 별로 값어치는 없었지만 땅이 비쌌다. 땅의 규모만 해도 수백 평은 되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다른 사람과 땅을 조금씩 바꿔 모으다가 수백 평까지 모으게 되었다.어릴 적 어머니는 두 자매가 커서 능력이 되면 땅을 똑같게 나눠주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두 자매가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게 집도 지어주겠다고 했었다.“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어. 내 여동생의 재산을 딸이 아니라 조카가 물려받는다고? 예정아, 걱정하지 마. 이모가 네 부모님의 부동산을 반드시 되찾아줄게. 아 참, 집문서는 있어?”“토지 사용증이 있는데 그건 언니한테 있어요. 하도 언니가 똑똑해서 쫓겨날 때 토지 사용증을 몰래 훔쳤거든요.”그
“너희 둘이 어디 가서 괴롭힘이나 당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걸 이모도 알아. 이모는 지금 여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거야.”하예정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온 오후 얘기를 나눴다.저녁 5시, 이경혜가 하예정과 함께 하예진을 데리러 노씨 그룹에 가겠다고 하자 하예정은 어쩔 수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녀는 주우빈과 이경혜 일행을 차에 태우고 호기롭게 노씨 그룹으로 향했다.심효진과 숙희 아주머니는 동행하지 않았다.한창 가던 중에 하예정은 갑자기 전씨 할머니가 떠올랐다. 온 오후 할머니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예정은 재빨리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전씨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하예정이 물었다.“할머니, 온 오후 어디 갔었어요?”“그냥 여기저기 구경 다녔어. 퇴근했어? 그럼 나도 차 타고 집에 갈게.”사실 할머니는 줄곧 정씨 아저씨네 가게에 숨어서 나오질 못했다. 혹시라도 이경혜에게 들키면 큰일이니까.“할머니,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혈연관계가 있대요. 이모가 저녁에 이모 집에 가서 밥을 먹자고 해서 지금 우빈이 데리고 언니를 데리러 가는 길이에요. 할머니랑 숙희 아주머니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세요.”“정말이야? 이모 찾은 거 축하해, 예정아.”할머니가 먼저 하예정에게 축하를 건넸다.“이진이한테 퇴근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면 되니까 나랑 숙희 걱정은 안 해도 돼. 이모 집에 오래 있다가 와. 이모가 수십 년 만에 너희들을 힘들게 찾았잖아. 이모네 집에서 자고 와도 돼. 자고 오겠으면 할머니한테 미리 알려만 줘.”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네, 이모네 집에서 자게 되면 할머니한테 연락할게요.”통화를 마친 하예정이 중얼거렸다.“온 오후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또 나가 돌아다니셨구나.”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애가 되는 것 같다.그 시각 하예진은 여동생이 보낸 문자를 받고 이경혜가 이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동생과 이경혜가 함께 데리러 온다는 소리에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그녀는 재빨리 맡은 바
하예진은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녀의 진상 시누이 주서인이었다.김은희는 딸과 함께 노씨 그룹으로 찾아왔다. 점심시간에 하예진은 회사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 후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였다. 그리고 오후에 계속 일한 바람에 회사를 나간 적이 없었다.두 모녀는 하는 수 없이 회사 문 앞에서 그녀가 나오길 온 오후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으로 이미 분노가 극에 달했다.회사에서 나온 하예진을 본 순간 주서인은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많든 적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 바람에 수많은 이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쏠렸고 어떤 이는 가던 길까지 멈추고 구경했다.하예진이 비록 재무팀의 사원이긴 하지만 노 대표가 직접 채용한 사람이라 회사 내에서 꽤 이름이 있었다.재무 총괄 담당자마저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불안해했다. 하예진이 예전에 재무 총괄 담당자 경력이 있다는 소리에 상사로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노 대표가 직접 채용한 직원이라 더더욱 경계했고 눈엣가시로 여겼다. 대놓고 하예진을 내쫓을 수 없어 몰래 손을 쓰기도 했다. 재무팀 사람에게서 듣기로 하예진의 상사가 그녀를 내쫓으려고 함정을 파놓은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다행히 전에 일한 경험이 있어 상사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피했다.“여긴 왜 왔어요?”하예진은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췄다. 전 시어머니와 전 시누이가 가지 못하게 그녀 앞을 막아섰다.“왜 왔냐고?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 거 아니야. 감히 내 동생 집을 다 망가뜨려? 당장 물어내! 인테리어 비용 물어내지 않으면 소송할 거야!”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주서인은 구경꾼들이 점점 늘어나자 일부러 더 소리를 높여 하예진이 했었던 일을 얘기했다.“이 여자 당신들 회사 다니는 하예진이라고 해요. 나의 전 동서인데 얼마나 모진 사람인지 몰라요. 결혼 후에 일전 한 푼도 벌지 못했으면서 이혼할 때 내 동생한테 2억 원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