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은 금방 이혼했고 직장도 아직 자리 잡지 못해서 집세는 일단 우리가 내주자.”전태윤은 사실 큰손을 내밀어 처형 모자에게 집 한 채 드리고 싶었다. 처형은 그의 와이프와 가장 친한 사람이니 전태윤도 더 잘해주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두 자매의 성품으로 보아 설사 그가 집을 선물한다 해도 처형이 절대 받지 않을 것이다.“언니가 주형인한테서 위자료를 2억 원 받을 테니 우리가 집세를 먼저 내는 걸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자매는 서로 돕고 살지만 그걸 절대 당연하게 여기진 않는다.서로 돕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관계야말로 진짜 돕고 사는 관계이다.전태윤은 아무 말이 없었다.그들은 곧이어 전씨 그룹에 도착했다.그는 차를 세우고 머리를 갸웃거리며 하예정을 쳐다봤다.하예정도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회사에 도착했는데 왜 차에서 내리지 않고 날 그렇게 봐요?”전태윤은 계속 그녀를 쳐다봤다.하예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기울이고 그의 목을 잡더니 그를 가까이 잡아 당겨와 입술에 살며시 뽀뽀했다.전태윤은 너무 가벼운 뽀뽀가 만족스럽지 않아 더 진한 키스로 보답했다.키스를 마친 후 그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부부의 감정이 승화되는 단계라 단 한 번도 사랑을 느껴본 적 없는 전태윤은 지금 이 시각 껌딱지처럼 하예정에게 달라붙어 한순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다만 아쉽게도 그는 껌딱지로 될 수 없었다.“가게 문 닫았으면 가게로 돌아가지 말고 일단 집에 가서 푹 쉬어.”“나 오더도 준비해야 하고 가게 가서 할 일이 남았어요. 해 질 녘에 학생들 하교하면 물건 사러도 올 거예요.”시험 기간이라 학생들이 주로 사는 물건은 문구용품과 겨울방학 숙제이다.지금 방학 숙제는 선생님이 내주신 것 외에도 학생들이 따로 한 벌 사야 한다. 그녀의 서점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겨울방학 숙제를 팔고 있어 가게 문을 닫으면 다른 서점으로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수입이 대폭 떨어지게 된다.전태윤은 말을
자신을 신경 써주는 그녀의 마음을 느낀 순간 전태윤의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저녁엔 약속 있어서 집에 빨리 못 들어가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단, 내 방에서 자야 해.”마지막 그 한 마디에 전태윤의 얼굴이 빨개졌다.애초에 그녀에게 제 방은 금지구역이니 한 발짝도 들일 생각 말라고 한 장본인인데 지금은 어느덧 자신이 먼저 제 방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한다.하예정이 순순히 대답했다.“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얼른 들어가 봐요. 여기서 찬바람 쐬지 말고.”전태윤은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서 회사로 들어갔다.하예정은 그의 훤칠한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그제야 차를 타고 떠났다.회사 로비에 들어서니 소정남이 한쪽 옆에 서서 배시시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전태윤은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가십 보이야 뭐야!’그는 소정남을 흘겨보고는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소정남은 그의 눈빛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태윤아, 너 이러다 껌딱지 다 되겠어. 종일 형수님 옆에 달라붙고 있잖아.”전태윤이 그를 째려봤다.“외로운 솔로가 뭘 알겠어?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달콤한 사랑을 하는지 말이야.”소정남은 말을 잇지 못했다.“효진 씨 감기 걸려서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너 시간 나면 보러 가봐.”“나도 가고 싶은데 어머님이 옆에 계신대. 우린 아직 부모님을 만날 단계까진 아니라서 안 갔어. 지금 가게에 있으면 한번 보러 갔을 텐데.”친구의 행복에 자극받은 소정남도 심효진에게 적극 구애를 펼쳤다. 어쨌거나 심효진은 그가 처음 관심 가진 여자였다.그녀의 화끈한 성격이 실로 마음에 들었다.“태윤아... 형수님한테 효진 씨가 가게로 돌아왔는지 한번 여쭤볼래?”소정남도 행동파라 결심을 내리면 바로 행동에 옮긴다.심효진의 집에 찾아갈 수 없어도 그녀의 가게에는 병문안을 하러 갈 수 있다.전태윤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소정남은 그를 툭 치며 말했다.“이봐, 네가 선 자리를 마련해줬잖아.
“넌 뭐라 했는데?”“내가 뭐라 할 수 있겠어? 당신의 후계자가 전태윤의 여자를 빼앗으려 한다고 대놓고 얘기할 순 없잖아. 이건 너의 사적인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조 비서한테 스케줄 잡으라고 할게. 김 대표랑 한번 만나 봐.”전태윤이 덤덤하게 말했다.“구정 지나서 다시 보자. 며칠 후에 출장 다녀와야 해.”소정남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출장? 어디로? 형수님이랑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어? 두 사람 지금 한창 가까워지는 중이잖아.”전태윤이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너한테는 얘기해도 괜찮겠어. 어차피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텐데 뭐.”소정남은 구미가 확 당겼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소정남은 귀를 쫑긋하고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무슨 일인데?”“이경혜 씨가 계속 찾아다니던 여동생이 어쩌면 우리 장모님일지도 몰라.”소정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너 장모님이 있었어? 아니, 내 말은 네 장모님 오래전에 돌아가셨잖아.”“우리 장모님이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건 맞아. 그렇다고 언니가 있어선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소정남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이경혜가 여동생을 찾는다는 사실을 관성의 상류층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다. 성기현이 소지훈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단서도 너무 적은 데다가 전씨 그룹의 전태윤을 돕고 있어서 전태윤의 라이벌인 성기현의 부탁을 결국에는 거절했었다.“만약 너의 장모님이 이경혜 씨가 찾는 여동생이라면 형수님이 이경혜 씨의 조카란 말이잖아? 그럼 넌 조카사위고. 성소현 씨는 또 널 엄청 사랑하고 있고...”정리를 마친 소정남은 허벅지를 탁 치며 크게 웃었다.“하하하, 태윤아, 네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지 똑똑히 지켜보겠어.”전태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서 소정남에게 냅다 던졌다.“꺼져!”“좀 더 웃다가 꺼질게. 태윤아, 차라리 오늘 저녁에 형수님한테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 어때?”소정남은 전태윤이 아직도 뭘 망설이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부부
만약 처음부터 하예정에게 전태윤이 전씨 가문 큰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밝혔더라면 하예정은 전태윤과 초고속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전씨 할머니가 먼저 하예정에게 그 사실을 숨긴 거나 다름없다.소정남이 속으로 투덜거렸다.‘누가 한 가족 아니랄까 봐. 아무리 손주 며느리를 원한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그런데 문득 자신도 심효진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소정남은 제 발 저렸다. 하여 다음에 심효진을 만났을 때 자신이 바로 소씨 가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로 했다. 안 그러면 전태윤 꼴이 날 테니까.“네가 알아서 해. 네 일이니 내가 대신 결정할 순 없어. 하지만 형수님의 성격도 만만치 않아서 자칫했다간 정말 이대로 끝날지 몰라.”전태윤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하예정이 이별 선언을 할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 하여 두 사람의 감정이 더 깊어진 다음에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사실 전태윤은 그녀에게 떠보듯이 물은 적이 있었지만 하예정은 그가 억만장자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 지금 솔직하게 얘기했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지도 모른다.“너무 걱정하지 마. 형수님도 너한테 마음이 있어. 단지 요즘 일이 너무 많아 너랑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시간이 없어서 그래. 네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더 잘해주면서 마음을 흔들면 돼. 형수님이 감동해서 널 용서할 수도 있잖아. 게다가 네가 그때 했던 그 결정도 형수님은 이해할 거야. 어쨌거나 그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소정남이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전태윤과 알고 지낸 지 수년이지만 그가 한 여자를 잃을까 봐 얼굴이 사색이 될 정도로 두려워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처음이었다.전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노력해볼게.”“기어코 출장 갈 거야? 출장 가고 싶으면 네가 가. 너 혹은 내가 직접 가서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정말 있긴 있어.”“내가 갈게. 어떻게 하면 예정이가 덜 화를 낼지 생각해봐야겠어.”소정남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난 쉴게. 아직 못 쓴
사실 그는 입으로 얘기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행동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 입으로만 달콤한 얘기를 하기보다 더 쉬웠다.물론 하예정이 달콤한 말을 좋아한다면 아무리 어색해도 참고 배울 것이다.그때 소정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면서 나지막이 귀띔했다.“심효진 씨도 물어봐 줘.”전태윤은 쭉 내민 소정남의 상체를 밀어내고는 하예정과 몇 마디 더 나누고 나서야 소정남을 대신해 물었다.“예정아, 효진 씨 오후에 가게 왔어? 효진 씨가 아프단 소리를 듣고 내 동료가 걱정돼서 보러 가고 싶대.”그러자 하예정이 대답했다.“효진이 가게 안 왔어요. 집에서 쉬다가 열이 다 내린 다음에 나오라고 했거든요. 태윤 씨 동료분께서 효진이 보고 싶대요? 그럼 전화해서 밖에서 만나라고 해요.”“효진 씨 가뜩이나 아픈데 오늘 기온까지 떨어져서 추워. 괜히 불러냈다가 더 심해지면 내 동료가 자책할 거야. 그럼 효진 씨가 출근하면 그때 다시 나한테 문자 보내줘. 내가 동료한테 얘기할게.”“알았어요. 태윤 씨, 두 사람 왠지 잘 될 것 같지 않아요?”처음으로 주선해준 것이라 두 사람이 좋은 결실을 보길 바랐다.“효진 씨가 내 동료한테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 너한테 얘기 안 했지? 아무튼 내 동료는 효진 씨한테 호감이 있어.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어 해.”“요 이틀 효진이한테 물어볼 시간도 없었어요. 다음날에 물어볼게요. 효진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동료분이 효진이를 좋아하는 건 당연해요.”하예정의 눈에 심효진만한 여자는 없었다.전태윤이 싱긋 웃었다. 소정남이 심효진에게 호감이 생긴 이유가 도씨 가문 사모님의 생일 파티에서 드러누웠기 때문이라는 건 아내에게 얘기하지 않았다.“태윤 씨, 이만 끊을게요. 주문이 밀려서요.”“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저녁 8시쯤에는 집에 가.”전태윤이 신신당부했다.“나 이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은 있는 남자야. 물론 너도 먹여 살리고.”“나 스스로도 잘하니까 먹여 살릴 필요 없
전태윤은 조 비서가 건넨 쇼핑백을 받았다. 안에 빨간 반지 케이스가 두 개 있었는데 전태윤은 그중 하나를 꺼냈다.눈치 빠른 소정남은 어르신이 간직했던 좋은 물건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전태윤이 하예정에게 잘 보이게 하려고 아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었다.소정남은 이토록 혼사를 걱정해주는 할머니가 있는 전태윤이 부러웠다. 게다가 할머니는 전씨 가문의 가장 높은 어른이라 다들 할머니를 공경했다. 할머니가 전태윤과 하예정의 초고속 결혼을 진행한 걸 막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소정남도 이런 할머니가 있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나도 그만 가서 일 볼게.”이 자리에 계속 있었다간 샘만 더 날 것 같았다. 어떤 건 부럽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소정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 비서와 함께 대표 사무실을 나섰다.전태윤은 할머니가 보낸 다이아몬드 반지 두 개를 보며 휴대 전화를 꺼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할머니, 이 다이아몬드 반지는 제가 돈으로 살게요. 우리 결혼반지인데 할머니한테서 공짜로 가질 순 없어요.”그러자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내 손주니까 싸게 줄게. 반지 하나당 200원씩, 총 400원 주면 돼.”“할머니!”전태윤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예정이가 가격을 알았으면 길거리에서 대충 산 줄로 알겠어요.”할머니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알았어. 그럼 네가 알아서 줘. 네가 주는 대로 받을게.”손자가 주는 돈을 나중에 증조할머니가 된 후에 상을 주는 형식으로 하예정에게 다시 주면 된다. 돈은 여전히 그들 부부의 것이나 다름없었다.“고마워요, 할머니.”“이건 또 무슨 뜻일까?”“무슨 뜻이라니요? 그냥 고맙다고요.”할머니는 만족스러운 듯 흐뭇하게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좋을 땐 뭘 하든 화이팅이 넘쳤고 시간도 특히 더 빨리 지나갔다. 방금 점심을 먹은 것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저녁 시간이 되었다.주형인은 저녁 약속까지 미루고 홀로 운전하여 본가로 왔다.
주경진은 그가 무슨 얘기를 할지 대충 눈치챘다. 딱 봐도 하예진과의 이혼 얘기를 하려는 듯싶었다.김은희는 수저를 가져온 후 밥그릇에 밥도 떠주었다.“미리 얘기하지 않아서 네 밥 안 했어. 한 그릇 남은 걸 원래는 개한테 주려고 했는데. 이거 먹고 배 안 부르면 국수도 한 그릇 만들어줄게.”“한 그릇이면 돼.”집안에 들어와서부터 김은희는 주형인에게 수저도 가져다주고 밥도 떠주었다. 주형인은 어머니의 이런 보살핌을 당연하게 여겼다.저녁을 배불리 먹은 후 주형인은 노란 서류 봉투를 아버지에게 건넸다.“이게 뭐야?”주경진은 의아한 얼굴로 서류 봉투를 받고는 안에서 서류와 사진을 꺼냈다. 김은희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바짝 다가왔다. 내용을 훑어보던 부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형인아, 너 뒷돈을 이렇게나 많이 챙겼어?”김은희는 아들에게 이렇게나 많은 돈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주경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들에게 물었다.“예진이가 준 거야?”주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걔는 어떡할 거래?”“내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예진이는 정확히 알고 있어. 이 증거로 이혼 소송을 제기하면 나중에 재산 분할할 때 절반 나눠줘야 해.”주경진의 낯빛이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 아들에게 정확히 얼마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진작부터 하예진 몰래 돈을 모으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절반이나 줘야 한다고?”김은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거의 2억 가까이 되잖아?”“아마 2억이 넘을 거야.”재산을 나눠줄 생각에 김은희는 마음이 쓰라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4천만 준다고 할걸.”그러고는 아들의 등짝을 탁 쳤다.“이런 엄청난 일을 왜 우리한테 얘기 안 했어? 너한테 그 많은 돈이 있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예진이한테 4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을 텐데. 그러면 손해도 적잖아.”“엄마, 소용없어. 예진이 절대 손해 볼 사람이 아니야. 걔가 예전에 무슨 일 했었는지 잊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도 더 독한 여자야.”부모님이 그 증거들을 다 확인한
“그건 애들끼리 싸우다가 일어난 예상치 못한 사고야. 우빈이 우리한테 맡기면 정말로 잘 챙길게. 다시는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할게.”김은희는 마음이 아렸다.“형인아, 이혼하지 마. 엄마 감당 못 하겠어.”아이들의 싸움이 손자의 양육권 문제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혼 소송을 벌이는 집안을 본 적이 없었다. 지인 중에 이혼한 사람이 있긴 했지만 모두 여자가 짐을 챙기고 나갔고 집과 차, 그리고 아이까지 전부 남자가 차지했다.“애들끼리 싸운 건 맞지만 우빈이가 우리랑 함께 있으면 우빈이 성장에 불리하다는 것도 보여줬잖아.”주형인은 인내심 있게 부모님을 설득했다.“엄마, 나 이젠 예진이를 사랑하지 않아. 예진이도 나한테 완전히 마음이 떠났고. 억지로 붙잡고 있어봤자 서로에게 고통만 줄뿐이야. 게다가 예진이도 이대로 대충 사는 거 바라지 않아. 아무튼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은 피하지 못해. 나도 이미 마음을 정했고 엄마 아빠한테 알려주려 온 거야.”서현주의 말대로 이건 그와 하예진의 일이기에 당사자들이 결정하고 부모에게는 통보만 하면 되었다.김은희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기세로 남편을 툭툭 쳤다.“여보, 당신이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안 되겠어요, 서인이한테 전화해서 형인이 설득 좀 하라고 해야겠어요.”그녀가 딸에게 전화하려던 그때 남편이 말렸다.“서인이한테 얘기해봤자 일만 더 복잡해져.”주경진이 언짢은 기색으로 아들에게 물었다.“이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저 사진들이 그렇게나 너한테 불리해?”그는 누구보다 자기 아들을 잘 알고 있었다. 협박을 받은 게 아니라면 아들은 절대 하예진의 말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아빠, 예진이가 이 증거들을 우리 대표님한테 주기라도 하면 난 끝장이야. 결혼 생활을 끝내고 내 앞날을 지키는 게 더 낫지 않겠어?”입을 꾹 다문 주경진과 달리 김은희는 옆에서 욕설을 퍼부었다.“예진이 너무 한 거 아니야? 네 앞날을 망쳐서 걔한테 뭐가 좋을 게 있다고. 우리한테 당한 거
그 뒤로 이윤미가 그녀의 오빠들과 내연녀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차마 몇 명의 형수님들이 속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형수님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 후로 이윤미의 오빠들과 형수님들이 말다툼하기 시작했다.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고현은 이윤미가 잘했다고 생각했다.바람을 피운 사람이 자기 오빠라고 감싸면서 오빠들을 도와 형수님들을 속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자기 남편이 바람피운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지만, 본인만 모른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때 전호영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군호 씨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을걸요. 이 대표님께서 돌아오신다면 정군호 씨는 틀림없이 나가서 바람피우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 대표님을 도와야 한다고 봐요. 못 봤으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현장을 목격했잖아요. 이 대표님을 만나면 알려줘야 해요. 어쨌든 우리 형수님의 이모시기 때문에 우리 형수님의 친척이나 다름없죠. 안 그래요?”고현은 전호영을 꾸지람했다.“호영 씨도 정말 나쁘네요. 이씨 가문에서 난리가 났으면 좋겠죠? 그런데 저도 호영 씨를 지지할 거에요. 이러고 보니 저도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봐요.”“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죠. 정군호 씨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보세요. 정군호 씨가 잘못한 것을 우리가 바로잡아준 거죠. 이 대표님을 위한 것이지 모함하거나 억울하게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저처럼 일편단심인 남자는 정군호 씨의 이런 행동이 너무 부끄러워요. 만약 집안의 아내가 싫으면 이혼할 것이지... 이혼하기는 싫고 또 밖에서 예쁜 여자들이랑 놀고는 싶고... 두 마리 토끼는 다 잡을 수 없는 법이죠. 하늘 아래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이 있겠어요?”전호영은 정군호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영상을 찍었다. 그리고 하루 호텔도 카메라가 있었기에 정군호가 내연녀를 껴안고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이 꼭 찍혔을 것이다.전호영이 정군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니었다.“이 대표님이 그토록 기가 센데
“저는 배려심이 깊은 신사에요.”고현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면서 전호영의 신사다운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하지만 전호영이 고현의 손을 잡고 함께 호텔로 들어가려고 하자 고현은 거절했다.전호영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시종 전호영과 연인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고현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전호영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앞으로나란히 몇 걸음 걷더니 고현이 갑자기 멈추었다.“왜 그러세요?”전호영이 물었다.‘설마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만났나?’전호영은 앞을 보았지만,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보지 못했다.“정군호 씨예요.”고현은 낮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한 뒤 전호영을 잡아당겨 차 뒤로 숨었다. 그녀의 경호원 팀은 고현이 위험한 줄로 알고 본능적으로 최대한 빨리 고현의 앞으로 돌진하며 위험을 막으려고 했다.“얼른 숨으세요. 저를 막지 마시고!”고현은 나지막이 경호원 팀에게 말했다.고현이 누군가의 가십거리를 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고현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옷을 입은 늙은 남자를 가리켰다. 그 늙은 남자는 천가 같은 얼굴과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그 여성의 곁을 지나가는 남자라면 모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보았다.“저 남자는 이윤미의 친아버지이자 이 대표님의 남편인 정군호 씨예요.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저도 잘 몰라요. 놀랍게도 밖에서 내연녀를 만나고 있었네요. 만약 이 대표님께 들킨다면 정말 정군호 씨를 죽여놓을지도 몰라요.”이은화의 남편이라는 말을 들은 전호영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정군호와 내연녀의 동영상을 찍었다.그리고 말했다.“이 대표님은 우리 큰형의 결혼식에 가신 뒤로 계속 관성에 남아계시거든요. 아마도 정군호 씨는 이 대표님이 없는 틈을 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네요”고현도 말을 이었다.“이 대표님께서 남편을 너무 엄격하게 단속하니까 정군호 씨도 아마 진짜로 바람 피우지는 못할 거에요. 기껏해야 지
고현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저는 어른이 된 후로 여행을 갈 시간이 없었어요. 바빠서 미치겠는데 언제 시간을 내서 놀러 가겠어요? 하지만 출장 다니면서 많은 곳은 가봤어요.”“신혼여행은 어디 가고 싶어요?”전호영이 그녀에게 물었다.고현이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말을 이었다.“저는 물이 맑고 공기가 좋은 산을 좋아해요. 조용하거든요.”“제가 잘 연구해서 산 좋고 물이 맑은 조용한 곳을 찾아볼게요.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우리 둘만의 세상을 잘살아 봐야죠.”알고 보니 고현은 산과 물이 있는 아름다운 곳을 좋아했다.전씨 가문의 서원 리조트가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이 있는 곳이고 평소에도 매우 조용한 곳이었다.“서원 리조트를 좋아해요?”“좋아하죠.그럼 서원 리조트에서 신혼여행을 즐기려고요?”전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고요. 그곳은 우리 미래의 집이고 신혼여행은 당연히 딴 곳으로 가야죠.”이때 고현이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지금 시집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벌써 신혼여행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네요. 호영 씨와 함께하면 쉽게 호영 씨 의도대로 따라간단 말이죠. 저의 총명함과 자제력 모두 호영 씨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니까요.”“현이 씨가 아직도 이 일을 고민하고 있다니. 제가 아직도 부족한가요?”전호영은 자신이 고현을 오랫동안 쫓아다녔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고현을 대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시집을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하여 전호영은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어떤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는지 알고 싶었다.“아니에요. 충분히 잘하셨어요. 우리 데이트도 별로 안 하고 평소에도 일하느라 바빴던 것 같아요. 아직 결혼까지 할 정도로 감정이 깊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말처럼 하루 못 보면 일 년을 못 본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는 몰라요.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는 건 제가 호영 씨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아요. 어
경호원 팀은 그들의 전 대표님이 전호영에게 떠밀려 마이바흐 차에 들어가는 모습을 버젓이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차는 곧 고씨 그룹을 빠져나왔다.고빈이 중얼거렸다.“호영 씨는 정말 내가 본 형부 중 가장 오만방자한 형부였어. 처남인 나에게 조금도 아부하지 않고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니.”고빈은 중얼중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만약 고빈이 정말 친형이 있다면 그는 전호영이 그의 친형을 해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따라갔을 것이다.하지만 그의 친형은 사실 여자였다. 그의 누나 고현은 시집가야 하는 여자였다. 전호영은 그의 누나와 어울리는 남자였기 때문에, 또 전호영이 고빈의 부모님께 고빈이 너무 방해한다고 고자질하면 안 되었기에 고빈은 더는 따라가지 않았다.지금 고씨 가문에서 전호영은 고현 남매보다 체면이 훨씬 섰다.“고빈 씨가 안 따라왔죠?”전호영은 차를 몰면서 조수석에 앉은 고현에게 물었다.고현은 돌아볼 필요도 없이 이내 말을 이었다.“고빈이는 입만 살아서 그렇지 정말 따라오지는 않을 거예요. 호영 씨가 우리 부모님 앞에서 고빈의 고자질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죠. 고빈은 저보다 10분 먼저 태어났지만 지금 정해진 여자친구가 없거든요.”“저도 호영 씨랑 짝을 지으니 저희 부모님의 눈길도 자연스레 고빈의 몸으로 옮겨졌어요. 호영 씨가 제 동생의 고자질하면 저희 부모님은 그를 욕하다가 결국 결혼 재촉 문제로 돌아가거든요. 제 동생은 결혼 재촉을 엄청 무서워하거든요.”고빈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고정된 여자친구를 찾지 못한 일에 관해 고현도 마음이 조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녀에게는 전호영이 있었지만, 고빈의 짝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예전에는 고현은 고빈과 이윤미를 맞세워주려고 했지만, 고빈은 이윤미가 재미없다고 느꼈고 이윤미 또한 고빈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이윤미 곁에 방윤림이 있었다.전호영은 빙그레 웃었다.“저도 항상 고빈 씨의 고자질하고 싶지 않아요.
전호영은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면서 전호영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보습을 보았지만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약 전호영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다.“전 대표님.”다들 마음속으로 아무리 전호영을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전호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그는 고씨네 남매에게 다가갔다.“현이 씨, 퇴근하시죠. 제가 데리러 왔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자, 받아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 앞으로 내밀었다.고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말했어요. 제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매번 올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지 마세요. 제 사무실이 곧 꽃집이 될 것 같으니까요.”전호영은 심지어 하루에 꽃다발을 여러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현은 전호영이 보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전호영은 보복으로 그녀에게 더 많은 꽃을 보냈다.고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곧 먹혀 죽을 것만 같았다.“꽃병을 더 사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저를 꽃병이라고 비아냥거리시려는 거에요? 제 사무실에는 꽃병이 가득 놓여 있거든요.”전호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는 이런 꽃들을 보내지 않고 다루기 쉬운 꽃들로 보낼게요. 현이 씨 사무실에 있는 그 꽃병들을 집으로 몇 개 가져가면 사무실이 꽃병이 줄어들 거 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고빈이 말을 이었다.“우리 형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해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이 꽃들을 저의 여성 지인들이게 줄 테니까요.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을 것 같아요.”“고빈 씨는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의 품에 안겨주며 자연스럽게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빈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설마 이제야 저를 보신 건 아니죠?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잘 고려해 보고 짝을 찾으셔야지 아니면 시각장애인을 고를 수도 있어요.”“그건 제 눈에 현이 씨만
장 대표가 전호영의 차를 얼핏 보더니 말을 이었다.“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차였군요. 셋째 도련님은 정말 매일 고씨 그룹에 가서 고 대표님을 귀찮게 하는군요. 저는 그저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사실이에요. 고 대표님은 우리 장성에서 가장 젊고 우수한 대기업 대표님이죠. 그의 잘생긴 외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로잡았는지 몰라요. 고 대표님은 강성의 모든 젊은 여자들의 이상형일걸요. 여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호영 도련님이 해내게 될 줄은 몰랐네요.”“하지만 외모로 보면 전호영 도련님과 고현 대표님은 참 잘 어울려요. 두 사람 중 한 명이 여자라면 정말 천생연분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 모두 남자네요. 너무 아쉬워요.”두 사람의 만남은 수많은 얼마나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자아냈는지 모른다.강성의 명문 아가씨들도 전호영이라는 남자에게 진 것이 자못 못마땅했다.“두 분이 이미 서로 남녀 관계를 확정하셨나요?”장 대표는 계속해서 물었다.“제가 듣기로는 전호영 도련님이 아직도 고현 대표님께 구애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의 일방적인 짝사랑 아닐까요? 사실 고현 대표님이 정상적인 남자인데 전호영 도련님이 게이일 수도 있죠.”“저도 잘 몰라요. 진실한 사실이 어떠할지 누가 알겠어요. 고 대표님은 냉담한 분으로서 수많은 대표님과 접촉하시지만 진정으로 친한 친구는 얼마 없어요. 고 대표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거든요.”“하지만 고현 대표님께서 전호영 도련님을 점점 더 포용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이 고 대표님을 위해 여성 옷을 입으며 여자로 분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두 사람 중에서 아마 전호영 도련님이 더 비정상인 것 같아요. 고 대표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전호영 도련님이 여성 옷을 입었을 거라고 봐요.”전호영은 여성 옷차림으로 고씨 그룹에 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전호영을 위해 비밀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소문을 퍼뜨리고 그렇게 일파
멀리 장성에 있는 전호영도 전이진이 보낸 카카오 스토리를 보았다. 그는 여운초와 전이진이 혼인 신고서를 받은 모습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다.그는 결국 다시 자리를 떠나 호텔 사무실을 나오더니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이때 고현이 사업에 관한 얘기를 방금 마쳤을 때였다.그녀는 일어나서 손을 뻗어 고객과 악수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장 대표님, 수고하셨어요.”장 대표도 이내 대답했다.“즐거운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고현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네요. 우리 함께 식사하는 건 어때요?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제가 이번에도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곧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거든요. 다음에요. 다음에 제가 고 대표님께 음식 대접해 드릴게요.”고현은 이해하며 말했다.“장 대표님께서 오신다면 당연히 제가 음식 대접해 드려야죠. 다음에 오시면 꼭 저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셔야 해요.”“당연하죠. 약속드릴게요.”장 대표는 웃으며 대답했다.고현이 고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쳐다보자 고빈은 눈치껏 일어나사 미리 준비한 특산품을 장 대표에게 가져다주었다.“장 대표님, 이것은 우리가 장 대표님을 위해 준비한 강성의 특산품이에요. 귀한 물건은 아니고 우리 강성의 특색이에요. 한 번 맛보세요.”장 대표는 사양하다가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고 대표님, 고마워요.”고현과 사업해 본 사람들은 비록 고씨 그룹의 오더를 따내기가 쉽지 않지만, 고현의 인품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했다.고현은 사람이 엄숙하고 차갑지만, 그녀와 사업을 해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칭찬하곤 했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청년 인재가 동성애자라니... 아깝기만 했다.고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많은 대표가 아마 정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고현이 게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자신의 딸과 고현을 맞세워주고 싶어 했다.고현 남매와 고위층 몇 명 인사들이 함께 장 대표를 고씨 그룹 앞까지 배웅하고 장 대표 일행을 미리 준비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엄마가 관성 호텔에 예약해 놓았어. 가서 축하할 겸 밥 먹자. 그리고 모두한테도 관성 호텔에 오라고 전화해 놨어. 할머니께서도 너희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일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운초야, 내가 방금 네 고모도 초대했어. 너와 이진이 결혼에 관해 상의하려고. 아직 설이 몇 달 남았는데 그 전에 결혼식 좀 올리자.”명해은이 무척 급했던 모양이다.전이진과 여운초가 혼인 신고하자마자 바로 결혼에 관한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여운초의 새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아직 감옥에 있는데다 여운초가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명해은은 혼례 문제에 관해서 여준희와 상의하려 했다.하지만 추미자는 결국 여운초의 친어머니였기에 명해은은 여운초의 뜻을 물었다.“운초야, 네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되지 않을까?”명해은은 추미자한테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그냥 결혼 사실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여운초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이진 씨와 함께 감옥으로 만나러 가서 말할게요. 저와 이진 씨 결혼에 대한 모든 일은 저의 작은 고모와 상의하면 돼요. 여씨 가문에 사람들이 수많지만,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건 제 작은고모뿐이거든요.”여천우도 여운초와 사이가 가까웠지만, 아직 어리기에 이런 일에 관해 잘 모를 것이다.명해은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래. 알았어. 네 작은고모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한 사실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오후에 오신다고 하셨어.”여운초 전이진이 약혼한 뒤로 전씨 가문은 여운초의 배후에 서 있게 되었고 눈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준희는 이 가엽고 운이 좋은 조카를 전이진에 맡기게 되니 매우 안심했다.여준희도 그녀의 집안에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친정집에 가는 횟수가 예전보다 줄었다.여운초 남매는 서로 자주 연락했다.여운초는 작은고모를 어머니로 여기고 있었다.그녀는 친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모성애를 여준희에게서 느꼈다.“언제 면회를 하러 가려고?”“오후에 가려고요. 감옥에 가서 보고
전현민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경사야. 우리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진아, 이미 이르지 않으니 어서 운초랑 들어가 절차부터 밟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부모님의 재촉을 받은 전이진은 여운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서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명해은 부부는 돌아가지 않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전현민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이러고 있으니 32년 전에 우리 둘이 이곳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던 날이 생각나네. 마치 어제 발생한 일과 같은데, 벌써 우리 큰아들이 이곳에 오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빨라. 우리도 늙을 때가 되긴 됐나 보네.”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난 당신과 백년해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명해은도 감격해서 말했다.“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난 아직도 자신이 18살인가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벌써 서른이네요. 우린 정말 늙었나 봐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네요.”“당신은 조금도 안 늙었어. 내 눈에는 당신이 관음보살과 같이 해마다 18살이야.”명해은은 몸 관리를 잘해서 전이진과 함께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다.전현민도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전씨 가문의 사업에 몰두했기에 심신이 많이 상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다.은퇴한 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염색은 했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같이 서면 아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사실, 두 내외는 불과 한 살 차였다. 명해은은 남편의 칭찬에 웃음보를 터뜨렸다.“나도 해마다 18살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네요.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한다 해도 늙기 마련인걸요.”“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 갈 테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훨씬 늙어 보여.”명해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두려울 것 없어요.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늘이 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