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은 금방 이혼했고 직장도 아직 자리 잡지 못해서 집세는 일단 우리가 내주자.”전태윤은 사실 큰손을 내밀어 처형 모자에게 집 한 채 드리고 싶었다. 처형은 그의 와이프와 가장 친한 사람이니 전태윤도 더 잘해주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두 자매의 성품으로 보아 설사 그가 집을 선물한다 해도 처형이 절대 받지 않을 것이다.“언니가 주형인한테서 위자료를 2억 원 받을 테니 우리가 집세를 먼저 내는 걸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자매는 서로 돕고 살지만 그걸 절대 당연하게 여기진 않는다.서로 돕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관계야말로 진짜 돕고 사는 관계이다.전태윤은 아무 말이 없었다.그들은 곧이어 전씨 그룹에 도착했다.그는 차를 세우고 머리를 갸웃거리며 하예정을 쳐다봤다.하예정도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회사에 도착했는데 왜 차에서 내리지 않고 날 그렇게 봐요?”전태윤은 계속 그녀를 쳐다봤다.하예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기울이고 그의 목을 잡더니 그를 가까이 잡아 당겨와 입술에 살며시 뽀뽀했다.전태윤은 너무 가벼운 뽀뽀가 만족스럽지 않아 더 진한 키스로 보답했다.키스를 마친 후 그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부부의 감정이 승화되는 단계라 단 한 번도 사랑을 느껴본 적 없는 전태윤은 지금 이 시각 껌딱지처럼 하예정에게 달라붙어 한순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다만 아쉽게도 그는 껌딱지로 될 수 없었다.“가게 문 닫았으면 가게로 돌아가지 말고 일단 집에 가서 푹 쉬어.”“나 오더도 준비해야 하고 가게 가서 할 일이 남았어요. 해 질 녘에 학생들 하교하면 물건 사러도 올 거예요.”시험 기간이라 학생들이 주로 사는 물건은 문구용품과 겨울방학 숙제이다.지금 방학 숙제는 선생님이 내주신 것 외에도 학생들이 따로 한 벌 사야 한다. 그녀의 서점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겨울방학 숙제를 팔고 있어 가게 문을 닫으면 다른 서점으로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수입이 대폭 떨어지게 된다.전태윤은 말을
자신을 신경 써주는 그녀의 마음을 느낀 순간 전태윤의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저녁엔 약속 있어서 집에 빨리 못 들어가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단, 내 방에서 자야 해.”마지막 그 한 마디에 전태윤의 얼굴이 빨개졌다.애초에 그녀에게 제 방은 금지구역이니 한 발짝도 들일 생각 말라고 한 장본인인데 지금은 어느덧 자신이 먼저 제 방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한다.하예정이 순순히 대답했다.“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얼른 들어가 봐요. 여기서 찬바람 쐬지 말고.”전태윤은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서 회사로 들어갔다.하예정은 그의 훤칠한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그제야 차를 타고 떠났다.회사 로비에 들어서니 소정남이 한쪽 옆에 서서 배시시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전태윤은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가십 보이야 뭐야!’그는 소정남을 흘겨보고는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소정남은 그의 눈빛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태윤아, 너 이러다 껌딱지 다 되겠어. 종일 형수님 옆에 달라붙고 있잖아.”전태윤이 그를 째려봤다.“외로운 솔로가 뭘 알겠어?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달콤한 사랑을 하는지 말이야.”소정남은 말을 잇지 못했다.“효진 씨 감기 걸려서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너 시간 나면 보러 가봐.”“나도 가고 싶은데 어머님이 옆에 계신대. 우린 아직 부모님을 만날 단계까진 아니라서 안 갔어. 지금 가게에 있으면 한번 보러 갔을 텐데.”친구의 행복에 자극받은 소정남도 심효진에게 적극 구애를 펼쳤다. 어쨌거나 심효진은 그가 처음 관심 가진 여자였다.그녀의 화끈한 성격이 실로 마음에 들었다.“태윤아... 형수님한테 효진 씨가 가게로 돌아왔는지 한번 여쭤볼래?”소정남도 행동파라 결심을 내리면 바로 행동에 옮긴다.심효진의 집에 찾아갈 수 없어도 그녀의 가게에는 병문안을 하러 갈 수 있다.전태윤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소정남은 그를 툭 치며 말했다.“이봐, 네가 선 자리를 마련해줬잖아.
“넌 뭐라 했는데?”“내가 뭐라 할 수 있겠어? 당신의 후계자가 전태윤의 여자를 빼앗으려 한다고 대놓고 얘기할 순 없잖아. 이건 너의 사적인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조 비서한테 스케줄 잡으라고 할게. 김 대표랑 한번 만나 봐.”전태윤이 덤덤하게 말했다.“구정 지나서 다시 보자. 며칠 후에 출장 다녀와야 해.”소정남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출장? 어디로? 형수님이랑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어? 두 사람 지금 한창 가까워지는 중이잖아.”전태윤이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너한테는 얘기해도 괜찮겠어. 어차피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텐데 뭐.”소정남은 구미가 확 당겼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소정남은 귀를 쫑긋하고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무슨 일인데?”“이경혜 씨가 계속 찾아다니던 여동생이 어쩌면 우리 장모님일지도 몰라.”소정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너 장모님이 있었어? 아니, 내 말은 네 장모님 오래전에 돌아가셨잖아.”“우리 장모님이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건 맞아. 그렇다고 언니가 있어선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소정남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이경혜가 여동생을 찾는다는 사실을 관성의 상류층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다. 성기현이 소지훈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단서도 너무 적은 데다가 전씨 그룹의 전태윤을 돕고 있어서 전태윤의 라이벌인 성기현의 부탁을 결국에는 거절했었다.“만약 너의 장모님이 이경혜 씨가 찾는 여동생이라면 형수님이 이경혜 씨의 조카란 말이잖아? 그럼 넌 조카사위고. 성소현 씨는 또 널 엄청 사랑하고 있고...”정리를 마친 소정남은 허벅지를 탁 치며 크게 웃었다.“하하하, 태윤아, 네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지 똑똑히 지켜보겠어.”전태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서 소정남에게 냅다 던졌다.“꺼져!”“좀 더 웃다가 꺼질게. 태윤아, 차라리 오늘 저녁에 형수님한테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 어때?”소정남은 전태윤이 아직도 뭘 망설이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부부
만약 처음부터 하예정에게 전태윤이 전씨 가문 큰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밝혔더라면 하예정은 전태윤과 초고속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전씨 할머니가 먼저 하예정에게 그 사실을 숨긴 거나 다름없다.소정남이 속으로 투덜거렸다.‘누가 한 가족 아니랄까 봐. 아무리 손주 며느리를 원한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그런데 문득 자신도 심효진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소정남은 제 발 저렸다. 하여 다음에 심효진을 만났을 때 자신이 바로 소씨 가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로 했다. 안 그러면 전태윤 꼴이 날 테니까.“네가 알아서 해. 네 일이니 내가 대신 결정할 순 없어. 하지만 형수님의 성격도 만만치 않아서 자칫했다간 정말 이대로 끝날지 몰라.”전태윤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하예정이 이별 선언을 할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 하여 두 사람의 감정이 더 깊어진 다음에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사실 전태윤은 그녀에게 떠보듯이 물은 적이 있었지만 하예정은 그가 억만장자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 지금 솔직하게 얘기했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지도 모른다.“너무 걱정하지 마. 형수님도 너한테 마음이 있어. 단지 요즘 일이 너무 많아 너랑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시간이 없어서 그래. 네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더 잘해주면서 마음을 흔들면 돼. 형수님이 감동해서 널 용서할 수도 있잖아. 게다가 네가 그때 했던 그 결정도 형수님은 이해할 거야. 어쨌거나 그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소정남이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전태윤과 알고 지낸 지 수년이지만 그가 한 여자를 잃을까 봐 얼굴이 사색이 될 정도로 두려워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처음이었다.전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노력해볼게.”“기어코 출장 갈 거야? 출장 가고 싶으면 네가 가. 너 혹은 내가 직접 가서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정말 있긴 있어.”“내가 갈게. 어떻게 하면 예정이가 덜 화를 낼지 생각해봐야겠어.”소정남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난 쉴게. 아직 못 쓴
사실 그는 입으로 얘기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행동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 입으로만 달콤한 얘기를 하기보다 더 쉬웠다.물론 하예정이 달콤한 말을 좋아한다면 아무리 어색해도 참고 배울 것이다.그때 소정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면서 나지막이 귀띔했다.“심효진 씨도 물어봐 줘.”전태윤은 쭉 내민 소정남의 상체를 밀어내고는 하예정과 몇 마디 더 나누고 나서야 소정남을 대신해 물었다.“예정아, 효진 씨 오후에 가게 왔어? 효진 씨가 아프단 소리를 듣고 내 동료가 걱정돼서 보러 가고 싶대.”그러자 하예정이 대답했다.“효진이 가게 안 왔어요. 집에서 쉬다가 열이 다 내린 다음에 나오라고 했거든요. 태윤 씨 동료분께서 효진이 보고 싶대요? 그럼 전화해서 밖에서 만나라고 해요.”“효진 씨 가뜩이나 아픈데 오늘 기온까지 떨어져서 추워. 괜히 불러냈다가 더 심해지면 내 동료가 자책할 거야. 그럼 효진 씨가 출근하면 그때 다시 나한테 문자 보내줘. 내가 동료한테 얘기할게.”“알았어요. 태윤 씨, 두 사람 왠지 잘 될 것 같지 않아요?”처음으로 주선해준 것이라 두 사람이 좋은 결실을 보길 바랐다.“효진 씨가 내 동료한테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 너한테 얘기 안 했지? 아무튼 내 동료는 효진 씨한테 호감이 있어.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어 해.”“요 이틀 효진이한테 물어볼 시간도 없었어요. 다음날에 물어볼게요. 효진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동료분이 효진이를 좋아하는 건 당연해요.”하예정의 눈에 심효진만한 여자는 없었다.전태윤이 싱긋 웃었다. 소정남이 심효진에게 호감이 생긴 이유가 도씨 가문 사모님의 생일 파티에서 드러누웠기 때문이라는 건 아내에게 얘기하지 않았다.“태윤 씨, 이만 끊을게요. 주문이 밀려서요.”“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저녁 8시쯤에는 집에 가.”전태윤이 신신당부했다.“나 이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은 있는 남자야. 물론 너도 먹여 살리고.”“나 스스로도 잘하니까 먹여 살릴 필요 없
전태윤은 조 비서가 건넨 쇼핑백을 받았다. 안에 빨간 반지 케이스가 두 개 있었는데 전태윤은 그중 하나를 꺼냈다.눈치 빠른 소정남은 어르신이 간직했던 좋은 물건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전태윤이 하예정에게 잘 보이게 하려고 아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었다.소정남은 이토록 혼사를 걱정해주는 할머니가 있는 전태윤이 부러웠다. 게다가 할머니는 전씨 가문의 가장 높은 어른이라 다들 할머니를 공경했다. 할머니가 전태윤과 하예정의 초고속 결혼을 진행한 걸 막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소정남도 이런 할머니가 있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나도 그만 가서 일 볼게.”이 자리에 계속 있었다간 샘만 더 날 것 같았다. 어떤 건 부럽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소정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 비서와 함께 대표 사무실을 나섰다.전태윤은 할머니가 보낸 다이아몬드 반지 두 개를 보며 휴대 전화를 꺼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할머니, 이 다이아몬드 반지는 제가 돈으로 살게요. 우리 결혼반지인데 할머니한테서 공짜로 가질 순 없어요.”그러자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내 손주니까 싸게 줄게. 반지 하나당 200원씩, 총 400원 주면 돼.”“할머니!”전태윤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예정이가 가격을 알았으면 길거리에서 대충 산 줄로 알겠어요.”할머니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알았어. 그럼 네가 알아서 줘. 네가 주는 대로 받을게.”손자가 주는 돈을 나중에 증조할머니가 된 후에 상을 주는 형식으로 하예정에게 다시 주면 된다. 돈은 여전히 그들 부부의 것이나 다름없었다.“고마워요, 할머니.”“이건 또 무슨 뜻일까?”“무슨 뜻이라니요? 그냥 고맙다고요.”할머니는 만족스러운 듯 흐뭇하게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좋을 땐 뭘 하든 화이팅이 넘쳤고 시간도 특히 더 빨리 지나갔다. 방금 점심을 먹은 것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저녁 시간이 되었다.주형인은 저녁 약속까지 미루고 홀로 운전하여 본가로 왔다.
주경진은 그가 무슨 얘기를 할지 대충 눈치챘다. 딱 봐도 하예진과의 이혼 얘기를 하려는 듯싶었다.김은희는 수저를 가져온 후 밥그릇에 밥도 떠주었다.“미리 얘기하지 않아서 네 밥 안 했어. 한 그릇 남은 걸 원래는 개한테 주려고 했는데. 이거 먹고 배 안 부르면 국수도 한 그릇 만들어줄게.”“한 그릇이면 돼.”집안에 들어와서부터 김은희는 주형인에게 수저도 가져다주고 밥도 떠주었다. 주형인은 어머니의 이런 보살핌을 당연하게 여겼다.저녁을 배불리 먹은 후 주형인은 노란 서류 봉투를 아버지에게 건넸다.“이게 뭐야?”주경진은 의아한 얼굴로 서류 봉투를 받고는 안에서 서류와 사진을 꺼냈다. 김은희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바짝 다가왔다. 내용을 훑어보던 부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형인아, 너 뒷돈을 이렇게나 많이 챙겼어?”김은희는 아들에게 이렇게나 많은 돈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주경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들에게 물었다.“예진이가 준 거야?”주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걔는 어떡할 거래?”“내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예진이는 정확히 알고 있어. 이 증거로 이혼 소송을 제기하면 나중에 재산 분할할 때 절반 나눠줘야 해.”주경진의 낯빛이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 아들에게 정확히 얼마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진작부터 하예진 몰래 돈을 모으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절반이나 줘야 한다고?”김은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거의 2억 가까이 되잖아?”“아마 2억이 넘을 거야.”재산을 나눠줄 생각에 김은희는 마음이 쓰라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4천만 준다고 할걸.”그러고는 아들의 등짝을 탁 쳤다.“이런 엄청난 일을 왜 우리한테 얘기 안 했어? 너한테 그 많은 돈이 있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예진이한테 4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을 텐데. 그러면 손해도 적잖아.”“엄마, 소용없어. 예진이 절대 손해 볼 사람이 아니야. 걔가 예전에 무슨 일 했었는지 잊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도 더 독한 여자야.”부모님이 그 증거들을 다 확인한
“그건 애들끼리 싸우다가 일어난 예상치 못한 사고야. 우빈이 우리한테 맡기면 정말로 잘 챙길게. 다시는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할게.”김은희는 마음이 아렸다.“형인아, 이혼하지 마. 엄마 감당 못 하겠어.”아이들의 싸움이 손자의 양육권 문제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혼 소송을 벌이는 집안을 본 적이 없었다. 지인 중에 이혼한 사람이 있긴 했지만 모두 여자가 짐을 챙기고 나갔고 집과 차, 그리고 아이까지 전부 남자가 차지했다.“애들끼리 싸운 건 맞지만 우빈이가 우리랑 함께 있으면 우빈이 성장에 불리하다는 것도 보여줬잖아.”주형인은 인내심 있게 부모님을 설득했다.“엄마, 나 이젠 예진이를 사랑하지 않아. 예진이도 나한테 완전히 마음이 떠났고. 억지로 붙잡고 있어봤자 서로에게 고통만 줄뿐이야. 게다가 예진이도 이대로 대충 사는 거 바라지 않아. 아무튼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은 피하지 못해. 나도 이미 마음을 정했고 엄마 아빠한테 알려주려 온 거야.”서현주의 말대로 이건 그와 하예진의 일이기에 당사자들이 결정하고 부모에게는 통보만 하면 되었다.김은희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기세로 남편을 툭툭 쳤다.“여보, 당신이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안 되겠어요, 서인이한테 전화해서 형인이 설득 좀 하라고 해야겠어요.”그녀가 딸에게 전화하려던 그때 남편이 말렸다.“서인이한테 얘기해봤자 일만 더 복잡해져.”주경진이 언짢은 기색으로 아들에게 물었다.“이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저 사진들이 그렇게나 너한테 불리해?”그는 누구보다 자기 아들을 잘 알고 있었다. 협박을 받은 게 아니라면 아들은 절대 하예진의 말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아빠, 예진이가 이 증거들을 우리 대표님한테 주기라도 하면 난 끝장이야. 결혼 생활을 끝내고 내 앞날을 지키는 게 더 낫지 않겠어?”입을 꾹 다문 주경진과 달리 김은희는 옆에서 욕설을 퍼부었다.“예진이 너무 한 거 아니야? 네 앞날을 망쳐서 걔한테 뭐가 좋을 게 있다고. 우리한테 당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