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전에 한 무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올 때 하예정은 호텔로 숨어드는 강일구를 발견하지 못했다.그녀의 주변에서 늘 관심해주고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남자가 남우주연상 급의 연기자란 것도 미처 몰랐다.그녀는 전태윤에게 말했다.“아까 언니한테 전화 왔는데 주형인과 이혼 상의가 다 됐대요.”“그래? 어떻게 결정했는데?”“주형인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을 언니와 절반으로 나누기로 했대요. 집과 차는 언니가 나눠 갖지 않았지만 주형인이 따로 언니한테 돈을 배상하기로 했어요. 우빈의 양육권은 언니가 갖고 주형인은 달마다 양육비 60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어요. 그 인간 조건은 바로 자신한테 불리한 증거들을 언니가 빠짐없이 넘겨줘야 하고 이혼 후에도 절대 복수하지 않겠다고 언니에게 약속해달라고 했어요.”전태윤이 물었다.“그래서 너희 언니는 뭐라고 했어?”“전부 들어줬대요. 다만 언니 개개인만 그 인간한테 복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대요. 언니는 우리 둘에게 손을 쓸 기회를 남겨줬어요.”하예정이 말을 이어갔다.“난 주형인이 직장을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현주와 결혼하고 나서 모든 걸 잃었으면 좋겠어요. 부부가 가난하면 행복해지기 어렵다는데 주형인이 빈털터리가 돼도 서현주와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 그 인간 부모님과 언니 모두 보통이 아니잖아요. 서현주는 보니까 우리 언니처럼 순순히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에요. 그때 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면 참 볼만 하겠는데요.”하예정은 쓰레기 같은 형부의 온 가족이 큰코다치길 바랐다.“언니가 이혼해도 예전처럼 자신감 넘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으면 좋겠어요. 두 번째 형부가 될 분은 아내를 엄청 사랑하고 행복한 나날만 보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주형인도 분명 화 나서 미칠 지경일 테고 무자비한 그 집안 사람들도 평생 땅을 치며 후회할 거예요.”전태윤도 맞장구를 쳐주었다.“처형은 반드시 네 소원대로 행복한 삶을 살 거야. 지금부터 살이 빠지고 있잖아.
“처형은 금방 이혼했고 직장도 아직 자리 잡지 못해서 집세는 일단 우리가 내주자.”전태윤은 사실 큰손을 내밀어 처형 모자에게 집 한 채 드리고 싶었다. 처형은 그의 와이프와 가장 친한 사람이니 전태윤도 더 잘해주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두 자매의 성품으로 보아 설사 그가 집을 선물한다 해도 처형이 절대 받지 않을 것이다.“언니가 주형인한테서 위자료를 2억 원 받을 테니 우리가 집세를 먼저 내는 걸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자매는 서로 돕고 살지만 그걸 절대 당연하게 여기진 않는다.서로 돕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관계야말로 진짜 돕고 사는 관계이다.전태윤은 아무 말이 없었다.그들은 곧이어 전씨 그룹에 도착했다.그는 차를 세우고 머리를 갸웃거리며 하예정을 쳐다봤다.하예정도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회사에 도착했는데 왜 차에서 내리지 않고 날 그렇게 봐요?”전태윤은 계속 그녀를 쳐다봤다.하예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기울이고 그의 목을 잡더니 그를 가까이 잡아 당겨와 입술에 살며시 뽀뽀했다.전태윤은 너무 가벼운 뽀뽀가 만족스럽지 않아 더 진한 키스로 보답했다.키스를 마친 후 그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부부의 감정이 승화되는 단계라 단 한 번도 사랑을 느껴본 적 없는 전태윤은 지금 이 시각 껌딱지처럼 하예정에게 달라붙어 한순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다만 아쉽게도 그는 껌딱지로 될 수 없었다.“가게 문 닫았으면 가게로 돌아가지 말고 일단 집에 가서 푹 쉬어.”“나 오더도 준비해야 하고 가게 가서 할 일이 남았어요. 해 질 녘에 학생들 하교하면 물건 사러도 올 거예요.”시험 기간이라 학생들이 주로 사는 물건은 문구용품과 겨울방학 숙제이다.지금 방학 숙제는 선생님이 내주신 것 외에도 학생들이 따로 한 벌 사야 한다. 그녀의 서점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겨울방학 숙제를 팔고 있어 가게 문을 닫으면 다른 서점으로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수입이 대폭 떨어지게 된다.전태윤은 말을
자신을 신경 써주는 그녀의 마음을 느낀 순간 전태윤의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저녁엔 약속 있어서 집에 빨리 못 들어가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단, 내 방에서 자야 해.”마지막 그 한 마디에 전태윤의 얼굴이 빨개졌다.애초에 그녀에게 제 방은 금지구역이니 한 발짝도 들일 생각 말라고 한 장본인인데 지금은 어느덧 자신이 먼저 제 방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한다.하예정이 순순히 대답했다.“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얼른 들어가 봐요. 여기서 찬바람 쐬지 말고.”전태윤은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서 회사로 들어갔다.하예정은 그의 훤칠한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그제야 차를 타고 떠났다.회사 로비에 들어서니 소정남이 한쪽 옆에 서서 배시시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전태윤은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가십 보이야 뭐야!’그는 소정남을 흘겨보고는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소정남은 그의 눈빛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태윤아, 너 이러다 껌딱지 다 되겠어. 종일 형수님 옆에 달라붙고 있잖아.”전태윤이 그를 째려봤다.“외로운 솔로가 뭘 알겠어?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달콤한 사랑을 하는지 말이야.”소정남은 말을 잇지 못했다.“효진 씨 감기 걸려서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너 시간 나면 보러 가봐.”“나도 가고 싶은데 어머님이 옆에 계신대. 우린 아직 부모님을 만날 단계까진 아니라서 안 갔어. 지금 가게에 있으면 한번 보러 갔을 텐데.”친구의 행복에 자극받은 소정남도 심효진에게 적극 구애를 펼쳤다. 어쨌거나 심효진은 그가 처음 관심 가진 여자였다.그녀의 화끈한 성격이 실로 마음에 들었다.“태윤아... 형수님한테 효진 씨가 가게로 돌아왔는지 한번 여쭤볼래?”소정남도 행동파라 결심을 내리면 바로 행동에 옮긴다.심효진의 집에 찾아갈 수 없어도 그녀의 가게에는 병문안을 하러 갈 수 있다.전태윤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소정남은 그를 툭 치며 말했다.“이봐, 네가 선 자리를 마련해줬잖아.
“넌 뭐라 했는데?”“내가 뭐라 할 수 있겠어? 당신의 후계자가 전태윤의 여자를 빼앗으려 한다고 대놓고 얘기할 순 없잖아. 이건 너의 사적인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조 비서한테 스케줄 잡으라고 할게. 김 대표랑 한번 만나 봐.”전태윤이 덤덤하게 말했다.“구정 지나서 다시 보자. 며칠 후에 출장 다녀와야 해.”소정남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출장? 어디로? 형수님이랑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어? 두 사람 지금 한창 가까워지는 중이잖아.”전태윤이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너한테는 얘기해도 괜찮겠어. 어차피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텐데 뭐.”소정남은 구미가 확 당겼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소정남은 귀를 쫑긋하고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무슨 일인데?”“이경혜 씨가 계속 찾아다니던 여동생이 어쩌면 우리 장모님일지도 몰라.”소정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너 장모님이 있었어? 아니, 내 말은 네 장모님 오래전에 돌아가셨잖아.”“우리 장모님이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건 맞아. 그렇다고 언니가 있어선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소정남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이경혜가 여동생을 찾는다는 사실을 관성의 상류층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다. 성기현이 소지훈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단서도 너무 적은 데다가 전씨 그룹의 전태윤을 돕고 있어서 전태윤의 라이벌인 성기현의 부탁을 결국에는 거절했었다.“만약 너의 장모님이 이경혜 씨가 찾는 여동생이라면 형수님이 이경혜 씨의 조카란 말이잖아? 그럼 넌 조카사위고. 성소현 씨는 또 널 엄청 사랑하고 있고...”정리를 마친 소정남은 허벅지를 탁 치며 크게 웃었다.“하하하, 태윤아, 네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지 똑똑히 지켜보겠어.”전태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서 소정남에게 냅다 던졌다.“꺼져!”“좀 더 웃다가 꺼질게. 태윤아, 차라리 오늘 저녁에 형수님한테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 어때?”소정남은 전태윤이 아직도 뭘 망설이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부부
만약 처음부터 하예정에게 전태윤이 전씨 가문 큰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밝혔더라면 하예정은 전태윤과 초고속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전씨 할머니가 먼저 하예정에게 그 사실을 숨긴 거나 다름없다.소정남이 속으로 투덜거렸다.‘누가 한 가족 아니랄까 봐. 아무리 손주 며느리를 원한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그런데 문득 자신도 심효진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소정남은 제 발 저렸다. 하여 다음에 심효진을 만났을 때 자신이 바로 소씨 가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로 했다. 안 그러면 전태윤 꼴이 날 테니까.“네가 알아서 해. 네 일이니 내가 대신 결정할 순 없어. 하지만 형수님의 성격도 만만치 않아서 자칫했다간 정말 이대로 끝날지 몰라.”전태윤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하예정이 이별 선언을 할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 하여 두 사람의 감정이 더 깊어진 다음에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사실 전태윤은 그녀에게 떠보듯이 물은 적이 있었지만 하예정은 그가 억만장자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 지금 솔직하게 얘기했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지도 모른다.“너무 걱정하지 마. 형수님도 너한테 마음이 있어. 단지 요즘 일이 너무 많아 너랑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시간이 없어서 그래. 네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더 잘해주면서 마음을 흔들면 돼. 형수님이 감동해서 널 용서할 수도 있잖아. 게다가 네가 그때 했던 그 결정도 형수님은 이해할 거야. 어쨌거나 그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소정남이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전태윤과 알고 지낸 지 수년이지만 그가 한 여자를 잃을까 봐 얼굴이 사색이 될 정도로 두려워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처음이었다.전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노력해볼게.”“기어코 출장 갈 거야? 출장 가고 싶으면 네가 가. 너 혹은 내가 직접 가서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정말 있긴 있어.”“내가 갈게. 어떻게 하면 예정이가 덜 화를 낼지 생각해봐야겠어.”소정남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난 쉴게. 아직 못 쓴
사실 그는 입으로 얘기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행동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 입으로만 달콤한 얘기를 하기보다 더 쉬웠다.물론 하예정이 달콤한 말을 좋아한다면 아무리 어색해도 참고 배울 것이다.그때 소정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면서 나지막이 귀띔했다.“심효진 씨도 물어봐 줘.”전태윤은 쭉 내민 소정남의 상체를 밀어내고는 하예정과 몇 마디 더 나누고 나서야 소정남을 대신해 물었다.“예정아, 효진 씨 오후에 가게 왔어? 효진 씨가 아프단 소리를 듣고 내 동료가 걱정돼서 보러 가고 싶대.”그러자 하예정이 대답했다.“효진이 가게 안 왔어요. 집에서 쉬다가 열이 다 내린 다음에 나오라고 했거든요. 태윤 씨 동료분께서 효진이 보고 싶대요? 그럼 전화해서 밖에서 만나라고 해요.”“효진 씨 가뜩이나 아픈데 오늘 기온까지 떨어져서 추워. 괜히 불러냈다가 더 심해지면 내 동료가 자책할 거야. 그럼 효진 씨가 출근하면 그때 다시 나한테 문자 보내줘. 내가 동료한테 얘기할게.”“알았어요. 태윤 씨, 두 사람 왠지 잘 될 것 같지 않아요?”처음으로 주선해준 것이라 두 사람이 좋은 결실을 보길 바랐다.“효진 씨가 내 동료한테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 너한테 얘기 안 했지? 아무튼 내 동료는 효진 씨한테 호감이 있어.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어 해.”“요 이틀 효진이한테 물어볼 시간도 없었어요. 다음날에 물어볼게요. 효진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동료분이 효진이를 좋아하는 건 당연해요.”하예정의 눈에 심효진만한 여자는 없었다.전태윤이 싱긋 웃었다. 소정남이 심효진에게 호감이 생긴 이유가 도씨 가문 사모님의 생일 파티에서 드러누웠기 때문이라는 건 아내에게 얘기하지 않았다.“태윤 씨, 이만 끊을게요. 주문이 밀려서요.”“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저녁 8시쯤에는 집에 가.”전태윤이 신신당부했다.“나 이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은 있는 남자야. 물론 너도 먹여 살리고.”“나 스스로도 잘하니까 먹여 살릴 필요 없
전태윤은 조 비서가 건넨 쇼핑백을 받았다. 안에 빨간 반지 케이스가 두 개 있었는데 전태윤은 그중 하나를 꺼냈다.눈치 빠른 소정남은 어르신이 간직했던 좋은 물건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전태윤이 하예정에게 잘 보이게 하려고 아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었다.소정남은 이토록 혼사를 걱정해주는 할머니가 있는 전태윤이 부러웠다. 게다가 할머니는 전씨 가문의 가장 높은 어른이라 다들 할머니를 공경했다. 할머니가 전태윤과 하예정의 초고속 결혼을 진행한 걸 막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소정남도 이런 할머니가 있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나도 그만 가서 일 볼게.”이 자리에 계속 있었다간 샘만 더 날 것 같았다. 어떤 건 부럽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소정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 비서와 함께 대표 사무실을 나섰다.전태윤은 할머니가 보낸 다이아몬드 반지 두 개를 보며 휴대 전화를 꺼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할머니, 이 다이아몬드 반지는 제가 돈으로 살게요. 우리 결혼반지인데 할머니한테서 공짜로 가질 순 없어요.”그러자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내 손주니까 싸게 줄게. 반지 하나당 200원씩, 총 400원 주면 돼.”“할머니!”전태윤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예정이가 가격을 알았으면 길거리에서 대충 산 줄로 알겠어요.”할머니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알았어. 그럼 네가 알아서 줘. 네가 주는 대로 받을게.”손자가 주는 돈을 나중에 증조할머니가 된 후에 상을 주는 형식으로 하예정에게 다시 주면 된다. 돈은 여전히 그들 부부의 것이나 다름없었다.“고마워요, 할머니.”“이건 또 무슨 뜻일까?”“무슨 뜻이라니요? 그냥 고맙다고요.”할머니는 만족스러운 듯 흐뭇하게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좋을 땐 뭘 하든 화이팅이 넘쳤고 시간도 특히 더 빨리 지나갔다. 방금 점심을 먹은 것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저녁 시간이 되었다.주형인은 저녁 약속까지 미루고 홀로 운전하여 본가로 왔다.
주경진은 그가 무슨 얘기를 할지 대충 눈치챘다. 딱 봐도 하예진과의 이혼 얘기를 하려는 듯싶었다.김은희는 수저를 가져온 후 밥그릇에 밥도 떠주었다.“미리 얘기하지 않아서 네 밥 안 했어. 한 그릇 남은 걸 원래는 개한테 주려고 했는데. 이거 먹고 배 안 부르면 국수도 한 그릇 만들어줄게.”“한 그릇이면 돼.”집안에 들어와서부터 김은희는 주형인에게 수저도 가져다주고 밥도 떠주었다. 주형인은 어머니의 이런 보살핌을 당연하게 여겼다.저녁을 배불리 먹은 후 주형인은 노란 서류 봉투를 아버지에게 건넸다.“이게 뭐야?”주경진은 의아한 얼굴로 서류 봉투를 받고는 안에서 서류와 사진을 꺼냈다. 김은희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바짝 다가왔다. 내용을 훑어보던 부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형인아, 너 뒷돈을 이렇게나 많이 챙겼어?”김은희는 아들에게 이렇게나 많은 돈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주경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들에게 물었다.“예진이가 준 거야?”주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걔는 어떡할 거래?”“내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예진이는 정확히 알고 있어. 이 증거로 이혼 소송을 제기하면 나중에 재산 분할할 때 절반 나눠줘야 해.”주경진의 낯빛이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 아들에게 정확히 얼마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진작부터 하예진 몰래 돈을 모으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절반이나 줘야 한다고?”김은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거의 2억 가까이 되잖아?”“아마 2억이 넘을 거야.”재산을 나눠줄 생각에 김은희는 마음이 쓰라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4천만 준다고 할걸.”그러고는 아들의 등짝을 탁 쳤다.“이런 엄청난 일을 왜 우리한테 얘기 안 했어? 너한테 그 많은 돈이 있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예진이한테 4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을 텐데. 그러면 손해도 적잖아.”“엄마, 소용없어. 예진이 절대 손해 볼 사람이 아니야. 걔가 예전에 무슨 일 했었는지 잊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도 더 독한 여자야.”부모님이 그 증거들을 다 확인한
노동명은 하예진이 가슴 아파할까 봐, 또 격려의 말들을 늘어놓을까 봐 자신이 폐인이라는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하예진은 호텔에 비치된 주전자를 씻고 주전자로 물을 끓였다. 그리고 컵을 씻어 녹차 한 봉지를 집어 들고 녹차 한 잔을 타서 가져다주었다.하예진은 찻잔을 침대 머리맡 카운터에 놓고 노동명에게 말했다.“지금은 물이 뜨거워서 좀 이따가 마셔요.”따르릉...하예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더니 노동명에게 말했다.“예정이에요.”그녀는 하예정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며 서둘러 받았다.“예정아, 뭔 일 있어?”“엄마.”전화기 건너편에서 앳된 어린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빈아, 우빈이가 드디어 엄마가 생각났나 보네. 엄마한테 전화할 줄 다 알고.”하예진은 웃으며 우빈을 조롱했다.우빈이 입을 삐죽 내밀며 억울하다는 듯 다시 엄마를 불렀다.아들의 억울한 어조를 알아챈 하예진이 물어보았다.“왜? 기분이 안 좋아? 친구랑 싸웠어?”“아니요. 동명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에요. 정말 나빠요. 저 몰래 아무 말도 없이 엄마 보러 갔어요. 제가 제 친구를 아저씨한테 소개해 주려고 이모한테 부탁해 아저씨 찾으러 왔는데 글쎄 노 할머니께서 아저씨가 엄마 찾으러 가셨다고 한 거 있죠?”우빈 녀석은 너무 서러서 계속해서 말했다.“아저씨는 말도 없이... 제가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저하고 말 좀 하시지. 그럼 저도 아저씨 따라서 엄마한테 갔을 텐데. 아저씨는 약속을 어기는 나쁜 사람이에요.”하예진이 출장을 간 후 노동명은 분명히 우빈에게 나중에 하예진이 보고 싶으면 노동명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강성으로 하예진을 보러 가자고 약속했었다.우빈은 그 당시 노동명이 그의 친아버지보다도 더 잘해준다고 생각했다.주형인은 매번 우빈을 볼 때마다 잘 대해주지만, 우빈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빈은 주형인이 그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고 여겼다.노동명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주형인과 주경진 부부 그리고
노동명은 하예진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예진의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좋아했다.“예진아.”노동명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가까이 가면서 떠보았다.“나... 뽀뽀해도 돼?”하예진은 얼굴이 갑자기 노을처럼 붉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처녀가 아닌 결혼도, 이혼도 해본 아이가 있는 여자였지만, 이런 물음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결국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그 모습을 본 노동명의 마음은 더욱 설레었다.노동명은 하예진을 사랑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녀의 손밖에 잡아보지 못했다.더 깊은 접촉을 해보지 못했다.“예진아, 뽀뽀 해도 돼?”노동명은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잡으면서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도록 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노동명이 다가가니 그의 숨결이 하예진의 얼굴에 닿았다.하예진의 대답을 들을 수 없게 되자 그도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고 그녀가 눈을 감은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그녀를 껴안으며 키스했다.그들은 부드러운 입맞춤으로부터 거친 키스까지 이르렀다.하예진은 문득 눈을 뜨면서 노동명을 밀치고 일어나 말했다.“물이 끓었어요. 따뜻한 물을 드시겠어요? 아니면 차 한잔하실래요?”하예진은 애써 숨을 골랐다.노동명은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녹차 한 잔 줘. 비행기에서 잠시 쉬었으니 더는 쉴 필요 없어. 녹차 한 잔 마시면서 기운 내야겠어.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얼른 해. 내가 따라갈게.”“제가 할 일은 오전에 다 처리했어요. 이따가 이씨 가문에 가서 저 대신 돌아가신 경호원의 유가족을 보러 가려고 해요. 어쨌든 저 대신 차를 몰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요.”설령 이은화의 계략이 맞는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 한 당분간은 사고라고 할 수밖에 없다.이씨 가문 경호원의 죽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하예진을 도와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였다.하예진이 가족을 찾아뵙고 고인을 방문해야
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하예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날 뭐로 보는 거야? 나도 예전에 공원 벤치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거든. 비록 사춘기 때 저지른 일이지만...”하예진은 노동명이 10대 때 반항하여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따라 사회에 뛰쳐 든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다가 그의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잘못을 뉘우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창업하여 노씨 그룹을 설립했다.이미 십여 년이 지난 일이다.그는 할머니가 그리울까 봐 하예진 앞에서 할머니에 관한 얘기를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듣자니 노동명은 형제중 막내라 할머니는 그를 가장 아꼈다.우빈은 노동명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처음에 무척 무서워했다. 그는 당시 수술을 받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받지 않았다.칼자국을 남겨놓은 이유는 그의 반항 때문에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사실을 명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할머니에게 미안했다.“난 안 가려. 이런 룸도 얼마나 좋아.”노동명은 자신의 평소 출장할 때 로얄 스위트룸에 묵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그는 싱글이고 재산도 많기에 마땅히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다.아니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이제 쉬시려고요?”“나 소파에 앉으면 돼.”노동명은 창가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하예진이 그를 밀고 소파 앞으로 다가가서 멈추었다.그녀는 노동명을 부축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어. 이제 두 걸음은 걸을 수 있거든.”매일 재활을 하고 몇 걸음 걷다 보니 그의 다리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더 멀리 가려고 하면 두 다리가 견딜 수 없이 지끈지끈 아파 났고 고통스러워 똑바로 서지 못하고 땅으로 넘어지게 된다.노동명의 두 다리는 넘어지고 부딪혀 멍이 들었다.그는 주위 사람들이 가슴 아파할까 봐 상처를 가리려고 매일 긴 바지를 입고 있고 다녔다.노동명은 누구의 동정심도 필요하지 않았다!하예진은 결국 부축하는 것을 포기했다.노동명은 스스로 일어서서 한 발짝 앞
하예진이 관성을 떠나던 날, 노동명이 심술부린 탓으로 하예진을 공항까지 배웅조차 하지 않았다.심지어 하예진의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에 답장도 하지 않아 그녀가 걱정을 안고 강성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강성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하예진은 여전히 노동명을 걱정했고 전태윤 부부에게 우빈을 데리고 노동명의 집에 가서 그를 위로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그날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노동명은 얼굴이 붉어졌다.하예진은 그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저는 화도 안 났어요. 앞으로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가 동명 씨를 싫어하고 저를 힘들게 할 것 같다면 저는 진작에 동명 씨를 멀리했을 거예요. 이렇게 가까이 지내지도 동명 씨를 믿지도 않을 거란 말이에요.”지난번 노동명이 하예진에게 고백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하지 않았지만, 물처럼 유유하게 감정을 교류했다. 그들은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서로를 지지하고 의지하면서 지내왔고 두 사람 마음도 점점 가까워졌다.지금 노동명은 하예진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그녀도 노동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두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서로가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되였다.다른 사람은 이미 두 사람을 커플로 여기고 있다.요리가 나오자 하예진은 잘 먹지 않고 노동명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미인 옆에서 자신을 잘 보살펴 주는 것을 본 노동명은 너무 행복했고 하마터면 배가 터질 뻔했다.노동명은 몇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왔기에 하예진은 그를 호텔에서 쉬게 한 다음 저녁에 그에게 호텔 근처를 구경시켜주려고 했다.강일구는 노동명 일행에게 룸 세 개를 예약해 주었고 노동명이 하예진의 룸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 하자 강일구는 흔쾌히 노동명과 룸을 바꾸었다.어차피 노동명은 강성에서 하룻밤만 묵고 내일 오후 관성으로 돌아갈 계획이다.연말이 다가오면 노씨 그룹도 정신없이 바쁘기에 노동명은 회사 대표로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쌓인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하예진은 노씨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