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진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의 엄마는 친언니가 수십 년 동안 자신을 찾아 헤맨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몰랐다.그리고 두 자매도 결국 다시 만나지 못했다.“예정아, 소현 씨 어머님 잘 위로해드려. 난 돌아가서 우빈이 봐야 해.”하예진은 아픈 마음을 애써 참으며 동생에게 당부를 남기고 바로 전화를 껐다.그녀는 결국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막은 채 엉엉 울었다.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녀를 힐긋거릴 뿐 아무도 그녈 위해 걸음을 멈추는 이가 없었다.버블티 가게 사장이 그녀가 노트북을 빌려 이혼 합의서를 프린트한 걸 알고 있어 이혼 때문에 속상해하는 줄 알고 티슈를 들고 다가왔다.“이봐요, 아가씨.”사장님은 하예진의 어깨를 톡톡 내리쳤다. 하예진이 머리를 들자 사장님은 티슈를 건네며 위로했다.“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이에요. 그만 놔줘요. 서로를 위해서 놔줘야 해요. 더 멋진 미래가 꼭 다가올 거예요. 너무 힘들면 울어요. 마음속에 담아둔 슬픔 전부 토해내면 조금은 후련해질 거예요.”“고마워요, 사장님.”하예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티슈를 건네받고 눈물을 닦으며 울먹거렸다.“가정폭력에 외도까지 저지르고 나한테 돈 쓰는 걸 인색하는 남자는 이혼이 답이에요. 그 인간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엄마가 생각나서 그랬어요. 우리 엄마는 15년 전의 교통사고로 아빠랑 함께 세상을 떠나셨거든요.”사장님은 동정 어린 눈길로 그녀의 어깨를 다시 두드려주었다.‘참 가여운 사람이야.’누군가는 쉰 살, 예순 살에 이미 저세상으로 떠나셨고 누군가는 앳된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다.어른이 된 후 부모님께 보답할 길이 없어진 그런 아쉬움과 고통은 겪어본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사장님, 저 괜찮아요. 먼저 갈게요, 아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아가씨, 꼭 강해져야 해요.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지는 법이에요. 화이팅!”낯선 이의 위로에 하예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이 세상엔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았다.사장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마친 후 그녀는 스쿠터를
하예진이 본능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다.“며칠 휴가 낸 거 맞아요. 우빈이가 크게 놀라서 아이를 돌봐야 하거든요.”“그런데 여기서 뭐 해? 아이는 어디 있어?”하예진은 말문이 막혔다.‘그냥 솔직하게 말할까?’노동명은 주변을 쭉 훑어보았지만 씩씩하고 늠름한 꼬마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다만 우빈은 늘 노동명이 두려워 마주칠 때마다 하예진의 품에 쏙 안겼다. 마치 그가 악귀인 것처럼 말이다.“우빈이는 집에서 쉬고 있어요. 숙희 아주머니가 돌봐줘요. 저는 볼 일 있어서 잠깐 나왔고요.”노동명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무슨 볼일?”하예진이 말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노동명이 웃으며 대답했다.“불편하면 얘기 안 해도 돼. 지나가다가 우연히 널 마주쳤을 뿐이야. 휴가 냈다고 해서 뭔 일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그만 볼일 보러 가봐. 나도 갈게.”노동명은 스쿠터에 올린 손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살펴 가세요, 대표님.”하예진의 말을 들은 노동명은 머리를 돌리지 않았지만 손을 들어 안녕이란 제스처를 해 보였다.두 사람은 각자 운전하여 자리를 떠났다.호텔 안에서 하예정은 성소현 모녀와 함께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다. 성문철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성소현 모녀는 집으로 돌아갔다.하예정은 그들 모녀를 호텔 문 앞까지 바래다준 후 차에 올라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제 차로 돌아갔다.다만 이제 막 몸을 돌렸는데 한 무리 사람들이 호텔에서 걸어 나왔다.그중 두 사람은 그녀도 아는 사람인데 다름 아닌 전태윤과 도련님 전이진이었다. 다른 한 분도 어디서 뵌 적은 있으나 얼굴까진 기억이 안 났다. 저번에 소이 카페에서 전태윤과 함께 있는 걸 봤었다.아마도 바이어와 미팅 중인 듯싶었다. 왜냐하면 몇 명은 하예정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그들 뒤에서 따라오는 검은색 옷을 입은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은 경호원일까 아니면 전씨 그룹의 직원들일까?전태윤은 처음에 아내를 보지 못했다.경호원들이 먼저 그녀를 발견했
그의 쇼는 계속할 수 있었다.“소정남, 전이진, 다들 먼저 회장님들 모시고 회사로 돌아가. 난 너희들 형수님한테 가봐야겠어.”전태윤은 두 사람에게 나지막이 분부한 후 성큼성큼 하예정에게 걸어갔다.경호원들도 당연히 뒤따라갈 엄두가 안 났다.“전 대표님 아는 분 만나셨나 봐요?”몇몇 회장님들은 낯선 여자에게 다가가는 전태윤을 의아하게 쳐다봤다.그는 가족 의외의 젊은 여자가 3미터 이내에 나타나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래요, 아는 분이에요.”소정남이 웃으며 몇몇 회장님들을 차에 모셨다.그가 말을 아끼자 회장님들도 더 따져 묻지 않았다.“예정아.”전태윤은 그녀 앞에 다가가더니 두 손으로 그녀의 외투를 다듬어주며 관심 조로 물었다.“여긴 무슨 일이야? 내가 바이어랑 미팅 있는 걸 알고 일부러 기다린 거야?”점심에 비가 끊겼지만 여전히 쌀쌀했다.하예정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고급 외제 차를 타고 떠나가는 걸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저분들도 다 태윤 씨 동료분들이에요? 난 소현 씨랑 소현 씨 어머님 모시고 이리로 밥 먹으러 왔는데 당신 마주칠 줄은 몰랐어요.”전태윤은 멀어져가는 고급 외제 차 몇 대를 바라보며 말했다.“회사 동료들 맞아. 오늘 미팅한 바이어가 전부 회장급이라 우리 회사에서도 각별히 중시하며 동료들을 많이 불러왔거든. 소현 씨 어머님은?”“남편분이 전화가 와서 먼저 가셨어요. 태윤 씨, 나 소현 씨 어머님과 함께 유전자확인 검사를 했어요. 며칠 뒤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전태윤은 두 눈이 반짝였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상하게 말했다.“결과 나오고 다시 얘기해. 지금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내.”하예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내는 건 어려워요. 애초엔 소현 씨가 괜히 나를 돈을 노린다고 오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젠 머리가 너무 복잡해졌어요. 엄마가... 아직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겠어요.”전태윤이 팔을 벌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녀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비록
좀 전에 한 무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올 때 하예정은 호텔로 숨어드는 강일구를 발견하지 못했다.그녀의 주변에서 늘 관심해주고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남자가 남우주연상 급의 연기자란 것도 미처 몰랐다.그녀는 전태윤에게 말했다.“아까 언니한테 전화 왔는데 주형인과 이혼 상의가 다 됐대요.”“그래? 어떻게 결정했는데?”“주형인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을 언니와 절반으로 나누기로 했대요. 집과 차는 언니가 나눠 갖지 않았지만 주형인이 따로 언니한테 돈을 배상하기로 했어요. 우빈의 양육권은 언니가 갖고 주형인은 달마다 양육비 60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어요. 그 인간 조건은 바로 자신한테 불리한 증거들을 언니가 빠짐없이 넘겨줘야 하고 이혼 후에도 절대 복수하지 않겠다고 언니에게 약속해달라고 했어요.”전태윤이 물었다.“그래서 너희 언니는 뭐라고 했어?”“전부 들어줬대요. 다만 언니 개개인만 그 인간한테 복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대요. 언니는 우리 둘에게 손을 쓸 기회를 남겨줬어요.”하예정이 말을 이어갔다.“난 주형인이 직장을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현주와 결혼하고 나서 모든 걸 잃었으면 좋겠어요. 부부가 가난하면 행복해지기 어렵다는데 주형인이 빈털터리가 돼도 서현주와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 그 인간 부모님과 언니 모두 보통이 아니잖아요. 서현주는 보니까 우리 언니처럼 순순히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에요. 그때 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면 참 볼만 하겠는데요.”하예정은 쓰레기 같은 형부의 온 가족이 큰코다치길 바랐다.“언니가 이혼해도 예전처럼 자신감 넘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으면 좋겠어요. 두 번째 형부가 될 분은 아내를 엄청 사랑하고 행복한 나날만 보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주형인도 분명 화 나서 미칠 지경일 테고 무자비한 그 집안 사람들도 평생 땅을 치며 후회할 거예요.”전태윤도 맞장구를 쳐주었다.“처형은 반드시 네 소원대로 행복한 삶을 살 거야. 지금부터 살이 빠지고 있잖아.
“처형은 금방 이혼했고 직장도 아직 자리 잡지 못해서 집세는 일단 우리가 내주자.”전태윤은 사실 큰손을 내밀어 처형 모자에게 집 한 채 드리고 싶었다. 처형은 그의 와이프와 가장 친한 사람이니 전태윤도 더 잘해주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두 자매의 성품으로 보아 설사 그가 집을 선물한다 해도 처형이 절대 받지 않을 것이다.“언니가 주형인한테서 위자료를 2억 원 받을 테니 우리가 집세를 먼저 내는 걸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자매는 서로 돕고 살지만 그걸 절대 당연하게 여기진 않는다.서로 돕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관계야말로 진짜 돕고 사는 관계이다.전태윤은 아무 말이 없었다.그들은 곧이어 전씨 그룹에 도착했다.그는 차를 세우고 머리를 갸웃거리며 하예정을 쳐다봤다.하예정도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회사에 도착했는데 왜 차에서 내리지 않고 날 그렇게 봐요?”전태윤은 계속 그녀를 쳐다봤다.하예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기울이고 그의 목을 잡더니 그를 가까이 잡아 당겨와 입술에 살며시 뽀뽀했다.전태윤은 너무 가벼운 뽀뽀가 만족스럽지 않아 더 진한 키스로 보답했다.키스를 마친 후 그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부부의 감정이 승화되는 단계라 단 한 번도 사랑을 느껴본 적 없는 전태윤은 지금 이 시각 껌딱지처럼 하예정에게 달라붙어 한순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다만 아쉽게도 그는 껌딱지로 될 수 없었다.“가게 문 닫았으면 가게로 돌아가지 말고 일단 집에 가서 푹 쉬어.”“나 오더도 준비해야 하고 가게 가서 할 일이 남았어요. 해 질 녘에 학생들 하교하면 물건 사러도 올 거예요.”시험 기간이라 학생들이 주로 사는 물건은 문구용품과 겨울방학 숙제이다.지금 방학 숙제는 선생님이 내주신 것 외에도 학생들이 따로 한 벌 사야 한다. 그녀의 서점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겨울방학 숙제를 팔고 있어 가게 문을 닫으면 다른 서점으로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수입이 대폭 떨어지게 된다.전태윤은 말을
자신을 신경 써주는 그녀의 마음을 느낀 순간 전태윤의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저녁엔 약속 있어서 집에 빨리 못 들어가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단, 내 방에서 자야 해.”마지막 그 한 마디에 전태윤의 얼굴이 빨개졌다.애초에 그녀에게 제 방은 금지구역이니 한 발짝도 들일 생각 말라고 한 장본인인데 지금은 어느덧 자신이 먼저 제 방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한다.하예정이 순순히 대답했다.“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얼른 들어가 봐요. 여기서 찬바람 쐬지 말고.”전태윤은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서 회사로 들어갔다.하예정은 그의 훤칠한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그제야 차를 타고 떠났다.회사 로비에 들어서니 소정남이 한쪽 옆에 서서 배시시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전태윤은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가십 보이야 뭐야!’그는 소정남을 흘겨보고는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소정남은 그의 눈빛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태윤아, 너 이러다 껌딱지 다 되겠어. 종일 형수님 옆에 달라붙고 있잖아.”전태윤이 그를 째려봤다.“외로운 솔로가 뭘 알겠어?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달콤한 사랑을 하는지 말이야.”소정남은 말을 잇지 못했다.“효진 씨 감기 걸려서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너 시간 나면 보러 가봐.”“나도 가고 싶은데 어머님이 옆에 계신대. 우린 아직 부모님을 만날 단계까진 아니라서 안 갔어. 지금 가게에 있으면 한번 보러 갔을 텐데.”친구의 행복에 자극받은 소정남도 심효진에게 적극 구애를 펼쳤다. 어쨌거나 심효진은 그가 처음 관심 가진 여자였다.그녀의 화끈한 성격이 실로 마음에 들었다.“태윤아... 형수님한테 효진 씨가 가게로 돌아왔는지 한번 여쭤볼래?”소정남도 행동파라 결심을 내리면 바로 행동에 옮긴다.심효진의 집에 찾아갈 수 없어도 그녀의 가게에는 병문안을 하러 갈 수 있다.전태윤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소정남은 그를 툭 치며 말했다.“이봐, 네가 선 자리를 마련해줬잖아.
“넌 뭐라 했는데?”“내가 뭐라 할 수 있겠어? 당신의 후계자가 전태윤의 여자를 빼앗으려 한다고 대놓고 얘기할 순 없잖아. 이건 너의 사적인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조 비서한테 스케줄 잡으라고 할게. 김 대표랑 한번 만나 봐.”전태윤이 덤덤하게 말했다.“구정 지나서 다시 보자. 며칠 후에 출장 다녀와야 해.”소정남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출장? 어디로? 형수님이랑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어? 두 사람 지금 한창 가까워지는 중이잖아.”전태윤이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너한테는 얘기해도 괜찮겠어. 어차피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텐데 뭐.”소정남은 구미가 확 당겼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소정남은 귀를 쫑긋하고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무슨 일인데?”“이경혜 씨가 계속 찾아다니던 여동생이 어쩌면 우리 장모님일지도 몰라.”소정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너 장모님이 있었어? 아니, 내 말은 네 장모님 오래전에 돌아가셨잖아.”“우리 장모님이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건 맞아. 그렇다고 언니가 있어선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소정남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이경혜가 여동생을 찾는다는 사실을 관성의 상류층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다. 성기현이 소지훈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단서도 너무 적은 데다가 전씨 그룹의 전태윤을 돕고 있어서 전태윤의 라이벌인 성기현의 부탁을 결국에는 거절했었다.“만약 너의 장모님이 이경혜 씨가 찾는 여동생이라면 형수님이 이경혜 씨의 조카란 말이잖아? 그럼 넌 조카사위고. 성소현 씨는 또 널 엄청 사랑하고 있고...”정리를 마친 소정남은 허벅지를 탁 치며 크게 웃었다.“하하하, 태윤아, 네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지 똑똑히 지켜보겠어.”전태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서 소정남에게 냅다 던졌다.“꺼져!”“좀 더 웃다가 꺼질게. 태윤아, 차라리 오늘 저녁에 형수님한테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 어때?”소정남은 전태윤이 아직도 뭘 망설이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부부
만약 처음부터 하예정에게 전태윤이 전씨 가문 큰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밝혔더라면 하예정은 전태윤과 초고속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전씨 할머니가 먼저 하예정에게 그 사실을 숨긴 거나 다름없다.소정남이 속으로 투덜거렸다.‘누가 한 가족 아니랄까 봐. 아무리 손주 며느리를 원한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그런데 문득 자신도 심효진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소정남은 제 발 저렸다. 하여 다음에 심효진을 만났을 때 자신이 바로 소씨 가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로 했다. 안 그러면 전태윤 꼴이 날 테니까.“네가 알아서 해. 네 일이니 내가 대신 결정할 순 없어. 하지만 형수님의 성격도 만만치 않아서 자칫했다간 정말 이대로 끝날지 몰라.”전태윤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하예정이 이별 선언을 할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 하여 두 사람의 감정이 더 깊어진 다음에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사실 전태윤은 그녀에게 떠보듯이 물은 적이 있었지만 하예정은 그가 억만장자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 지금 솔직하게 얘기했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지도 모른다.“너무 걱정하지 마. 형수님도 너한테 마음이 있어. 단지 요즘 일이 너무 많아 너랑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시간이 없어서 그래. 네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더 잘해주면서 마음을 흔들면 돼. 형수님이 감동해서 널 용서할 수도 있잖아. 게다가 네가 그때 했던 그 결정도 형수님은 이해할 거야. 어쨌거나 그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소정남이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전태윤과 알고 지낸 지 수년이지만 그가 한 여자를 잃을까 봐 얼굴이 사색이 될 정도로 두려워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처음이었다.전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노력해볼게.”“기어코 출장 갈 거야? 출장 가고 싶으면 네가 가. 너 혹은 내가 직접 가서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정말 있긴 있어.”“내가 갈게. 어떻게 하면 예정이가 덜 화를 낼지 생각해봐야겠어.”소정남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난 쉴게. 아직 못 쓴
그 뒤로 이윤미가 그녀의 오빠들과 내연녀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차마 몇 명의 형수님들이 속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형수님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 후로 이윤미의 오빠들과 형수님들이 말다툼하기 시작했다.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고현은 이윤미가 잘했다고 생각했다.바람을 피운 사람이 자기 오빠라고 감싸면서 오빠들을 도와 형수님들을 속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자기 남편이 바람피운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지만, 본인만 모른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때 전호영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군호 씨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을걸요. 이 대표님께서 돌아오신다면 정군호 씨는 틀림없이 나가서 바람피우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 대표님을 도와야 한다고 봐요. 못 봤으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현장을 목격했잖아요. 이 대표님을 만나면 알려줘야 해요. 어쨌든 우리 형수님의 이모시기 때문에 우리 형수님의 친척이나 다름없죠. 안 그래요?”고현은 전호영을 꾸지람했다.“호영 씨도 정말 나쁘네요. 이씨 가문에서 난리가 났으면 좋겠죠? 그런데 저도 호영 씨를 지지할 거에요. 이러고 보니 저도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봐요.”“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죠. 정군호 씨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보세요. 정군호 씨가 잘못한 것을 우리가 바로잡아준 거죠. 이 대표님을 위한 것이지 모함하거나 억울하게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저처럼 일편단심인 남자는 정군호 씨의 이런 행동이 너무 부끄러워요. 만약 집안의 아내가 싫으면 이혼할 것이지... 이혼하기는 싫고 또 밖에서 예쁜 여자들이랑 놀고는 싶고... 두 마리 토끼는 다 잡을 수 없는 법이죠. 하늘 아래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이 있겠어요?”전호영은 정군호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영상을 찍었다. 그리고 하루 호텔도 카메라가 있었기에 정군호가 내연녀를 껴안고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이 꼭 찍혔을 것이다.전호영이 정군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니었다.“이 대표님이 그토록 기가 센데
“저는 배려심이 깊은 신사에요.”고현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면서 전호영의 신사다운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하지만 전호영이 고현의 손을 잡고 함께 호텔로 들어가려고 하자 고현은 거절했다.전호영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시종 전호영과 연인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고현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전호영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앞으로나란히 몇 걸음 걷더니 고현이 갑자기 멈추었다.“왜 그러세요?”전호영이 물었다.‘설마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만났나?’전호영은 앞을 보았지만,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보지 못했다.“정군호 씨예요.”고현은 낮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한 뒤 전호영을 잡아당겨 차 뒤로 숨었다. 그녀의 경호원 팀은 고현이 위험한 줄로 알고 본능적으로 최대한 빨리 고현의 앞으로 돌진하며 위험을 막으려고 했다.“얼른 숨으세요. 저를 막지 마시고!”고현은 나지막이 경호원 팀에게 말했다.고현이 누군가의 가십거리를 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고현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옷을 입은 늙은 남자를 가리켰다. 그 늙은 남자는 천가 같은 얼굴과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그 여성의 곁을 지나가는 남자라면 모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보았다.“저 남자는 이윤미의 친아버지이자 이 대표님의 남편인 정군호 씨예요.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저도 잘 몰라요. 놀랍게도 밖에서 내연녀를 만나고 있었네요. 만약 이 대표님께 들킨다면 정말 정군호 씨를 죽여놓을지도 몰라요.”이은화의 남편이라는 말을 들은 전호영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정군호와 내연녀의 동영상을 찍었다.그리고 말했다.“이 대표님은 우리 큰형의 결혼식에 가신 뒤로 계속 관성에 남아계시거든요. 아마도 정군호 씨는 이 대표님이 없는 틈을 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네요”고현도 말을 이었다.“이 대표님께서 남편을 너무 엄격하게 단속하니까 정군호 씨도 아마 진짜로 바람 피우지는 못할 거에요. 기껏해야 지
고현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저는 어른이 된 후로 여행을 갈 시간이 없었어요. 바빠서 미치겠는데 언제 시간을 내서 놀러 가겠어요? 하지만 출장 다니면서 많은 곳은 가봤어요.”“신혼여행은 어디 가고 싶어요?”전호영이 그녀에게 물었다.고현이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말을 이었다.“저는 물이 맑고 공기가 좋은 산을 좋아해요. 조용하거든요.”“제가 잘 연구해서 산 좋고 물이 맑은 조용한 곳을 찾아볼게요.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우리 둘만의 세상을 잘살아 봐야죠.”알고 보니 고현은 산과 물이 있는 아름다운 곳을 좋아했다.전씨 가문의 서원 리조트가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이 있는 곳이고 평소에도 매우 조용한 곳이었다.“서원 리조트를 좋아해요?”“좋아하죠.그럼 서원 리조트에서 신혼여행을 즐기려고요?”전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고요. 그곳은 우리 미래의 집이고 신혼여행은 당연히 딴 곳으로 가야죠.”이때 고현이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지금 시집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벌써 신혼여행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네요. 호영 씨와 함께하면 쉽게 호영 씨 의도대로 따라간단 말이죠. 저의 총명함과 자제력 모두 호영 씨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니까요.”“현이 씨가 아직도 이 일을 고민하고 있다니. 제가 아직도 부족한가요?”전호영은 자신이 고현을 오랫동안 쫓아다녔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고현을 대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시집을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하여 전호영은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어떤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는지 알고 싶었다.“아니에요. 충분히 잘하셨어요. 우리 데이트도 별로 안 하고 평소에도 일하느라 바빴던 것 같아요. 아직 결혼까지 할 정도로 감정이 깊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말처럼 하루 못 보면 일 년을 못 본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는 몰라요.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는 건 제가 호영 씨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아요. 어
경호원 팀은 그들의 전 대표님이 전호영에게 떠밀려 마이바흐 차에 들어가는 모습을 버젓이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차는 곧 고씨 그룹을 빠져나왔다.고빈이 중얼거렸다.“호영 씨는 정말 내가 본 형부 중 가장 오만방자한 형부였어. 처남인 나에게 조금도 아부하지 않고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니.”고빈은 중얼중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만약 고빈이 정말 친형이 있다면 그는 전호영이 그의 친형을 해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따라갔을 것이다.하지만 그의 친형은 사실 여자였다. 그의 누나 고현은 시집가야 하는 여자였다. 전호영은 그의 누나와 어울리는 남자였기 때문에, 또 전호영이 고빈의 부모님께 고빈이 너무 방해한다고 고자질하면 안 되었기에 고빈은 더는 따라가지 않았다.지금 고씨 가문에서 전호영은 고현 남매보다 체면이 훨씬 섰다.“고빈 씨가 안 따라왔죠?”전호영은 차를 몰면서 조수석에 앉은 고현에게 물었다.고현은 돌아볼 필요도 없이 이내 말을 이었다.“고빈이는 입만 살아서 그렇지 정말 따라오지는 않을 거예요. 호영 씨가 우리 부모님 앞에서 고빈의 고자질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죠. 고빈은 저보다 10분 먼저 태어났지만 지금 정해진 여자친구가 없거든요.”“저도 호영 씨랑 짝을 지으니 저희 부모님의 눈길도 자연스레 고빈의 몸으로 옮겨졌어요. 호영 씨가 제 동생의 고자질하면 저희 부모님은 그를 욕하다가 결국 결혼 재촉 문제로 돌아가거든요. 제 동생은 결혼 재촉을 엄청 무서워하거든요.”고빈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고정된 여자친구를 찾지 못한 일에 관해 고현도 마음이 조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녀에게는 전호영이 있었지만, 고빈의 짝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예전에는 고현은 고빈과 이윤미를 맞세워주려고 했지만, 고빈은 이윤미가 재미없다고 느꼈고 이윤미 또한 고빈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이윤미 곁에 방윤림이 있었다.전호영은 빙그레 웃었다.“저도 항상 고빈 씨의 고자질하고 싶지 않아요.
전호영은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면서 전호영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보습을 보았지만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약 전호영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다.“전 대표님.”다들 마음속으로 아무리 전호영을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전호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그는 고씨네 남매에게 다가갔다.“현이 씨, 퇴근하시죠. 제가 데리러 왔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자, 받아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 앞으로 내밀었다.고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말했어요. 제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매번 올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지 마세요. 제 사무실이 곧 꽃집이 될 것 같으니까요.”전호영은 심지어 하루에 꽃다발을 여러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현은 전호영이 보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전호영은 보복으로 그녀에게 더 많은 꽃을 보냈다.고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곧 먹혀 죽을 것만 같았다.“꽃병을 더 사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저를 꽃병이라고 비아냥거리시려는 거에요? 제 사무실에는 꽃병이 가득 놓여 있거든요.”전호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는 이런 꽃들을 보내지 않고 다루기 쉬운 꽃들로 보낼게요. 현이 씨 사무실에 있는 그 꽃병들을 집으로 몇 개 가져가면 사무실이 꽃병이 줄어들 거 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고빈이 말을 이었다.“우리 형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해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이 꽃들을 저의 여성 지인들이게 줄 테니까요.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을 것 같아요.”“고빈 씨는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의 품에 안겨주며 자연스럽게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빈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설마 이제야 저를 보신 건 아니죠?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잘 고려해 보고 짝을 찾으셔야지 아니면 시각장애인을 고를 수도 있어요.”“그건 제 눈에 현이 씨만
장 대표가 전호영의 차를 얼핏 보더니 말을 이었다.“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차였군요. 셋째 도련님은 정말 매일 고씨 그룹에 가서 고 대표님을 귀찮게 하는군요. 저는 그저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사실이에요. 고 대표님은 우리 장성에서 가장 젊고 우수한 대기업 대표님이죠. 그의 잘생긴 외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로잡았는지 몰라요. 고 대표님은 강성의 모든 젊은 여자들의 이상형일걸요. 여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호영 도련님이 해내게 될 줄은 몰랐네요.”“하지만 외모로 보면 전호영 도련님과 고현 대표님은 참 잘 어울려요. 두 사람 중 한 명이 여자라면 정말 천생연분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 모두 남자네요. 너무 아쉬워요.”두 사람의 만남은 수많은 얼마나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자아냈는지 모른다.강성의 명문 아가씨들도 전호영이라는 남자에게 진 것이 자못 못마땅했다.“두 분이 이미 서로 남녀 관계를 확정하셨나요?”장 대표는 계속해서 물었다.“제가 듣기로는 전호영 도련님이 아직도 고현 대표님께 구애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의 일방적인 짝사랑 아닐까요? 사실 고현 대표님이 정상적인 남자인데 전호영 도련님이 게이일 수도 있죠.”“저도 잘 몰라요. 진실한 사실이 어떠할지 누가 알겠어요. 고 대표님은 냉담한 분으로서 수많은 대표님과 접촉하시지만 진정으로 친한 친구는 얼마 없어요. 고 대표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거든요.”“하지만 고현 대표님께서 전호영 도련님을 점점 더 포용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이 고 대표님을 위해 여성 옷을 입으며 여자로 분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두 사람 중에서 아마 전호영 도련님이 더 비정상인 것 같아요. 고 대표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전호영 도련님이 여성 옷을 입었을 거라고 봐요.”전호영은 여성 옷차림으로 고씨 그룹에 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전호영을 위해 비밀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소문을 퍼뜨리고 그렇게 일파
멀리 장성에 있는 전호영도 전이진이 보낸 카카오 스토리를 보았다. 그는 여운초와 전이진이 혼인 신고서를 받은 모습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다.그는 결국 다시 자리를 떠나 호텔 사무실을 나오더니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이때 고현이 사업에 관한 얘기를 방금 마쳤을 때였다.그녀는 일어나서 손을 뻗어 고객과 악수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장 대표님, 수고하셨어요.”장 대표도 이내 대답했다.“즐거운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고현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네요. 우리 함께 식사하는 건 어때요?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제가 이번에도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곧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거든요. 다음에요. 다음에 제가 고 대표님께 음식 대접해 드릴게요.”고현은 이해하며 말했다.“장 대표님께서 오신다면 당연히 제가 음식 대접해 드려야죠. 다음에 오시면 꼭 저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셔야 해요.”“당연하죠. 약속드릴게요.”장 대표는 웃으며 대답했다.고현이 고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쳐다보자 고빈은 눈치껏 일어나사 미리 준비한 특산품을 장 대표에게 가져다주었다.“장 대표님, 이것은 우리가 장 대표님을 위해 준비한 강성의 특산품이에요. 귀한 물건은 아니고 우리 강성의 특색이에요. 한 번 맛보세요.”장 대표는 사양하다가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고 대표님, 고마워요.”고현과 사업해 본 사람들은 비록 고씨 그룹의 오더를 따내기가 쉽지 않지만, 고현의 인품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했다.고현은 사람이 엄숙하고 차갑지만, 그녀와 사업을 해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칭찬하곤 했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청년 인재가 동성애자라니... 아깝기만 했다.고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많은 대표가 아마 정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고현이 게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자신의 딸과 고현을 맞세워주고 싶어 했다.고현 남매와 고위층 몇 명 인사들이 함께 장 대표를 고씨 그룹 앞까지 배웅하고 장 대표 일행을 미리 준비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엄마가 관성 호텔에 예약해 놓았어. 가서 축하할 겸 밥 먹자. 그리고 모두한테도 관성 호텔에 오라고 전화해 놨어. 할머니께서도 너희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일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운초야, 내가 방금 네 고모도 초대했어. 너와 이진이 결혼에 관해 상의하려고. 아직 설이 몇 달 남았는데 그 전에 결혼식 좀 올리자.”명해은이 무척 급했던 모양이다.전이진과 여운초가 혼인 신고하자마자 바로 결혼에 관한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여운초의 새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아직 감옥에 있는데다 여운초가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명해은은 혼례 문제에 관해서 여준희와 상의하려 했다.하지만 추미자는 결국 여운초의 친어머니였기에 명해은은 여운초의 뜻을 물었다.“운초야, 네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되지 않을까?”명해은은 추미자한테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그냥 결혼 사실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여운초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이진 씨와 함께 감옥으로 만나러 가서 말할게요. 저와 이진 씨 결혼에 대한 모든 일은 저의 작은 고모와 상의하면 돼요. 여씨 가문에 사람들이 수많지만,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건 제 작은고모뿐이거든요.”여천우도 여운초와 사이가 가까웠지만, 아직 어리기에 이런 일에 관해 잘 모를 것이다.명해은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래. 알았어. 네 작은고모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한 사실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오후에 오신다고 하셨어.”여운초 전이진이 약혼한 뒤로 전씨 가문은 여운초의 배후에 서 있게 되었고 눈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준희는 이 가엽고 운이 좋은 조카를 전이진에 맡기게 되니 매우 안심했다.여준희도 그녀의 집안에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친정집에 가는 횟수가 예전보다 줄었다.여운초 남매는 서로 자주 연락했다.여운초는 작은고모를 어머니로 여기고 있었다.그녀는 친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모성애를 여준희에게서 느꼈다.“언제 면회를 하러 가려고?”“오후에 가려고요. 감옥에 가서 보고
전현민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경사야. 우리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진아, 이미 이르지 않으니 어서 운초랑 들어가 절차부터 밟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부모님의 재촉을 받은 전이진은 여운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서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명해은 부부는 돌아가지 않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전현민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이러고 있으니 32년 전에 우리 둘이 이곳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던 날이 생각나네. 마치 어제 발생한 일과 같은데, 벌써 우리 큰아들이 이곳에 오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빨라. 우리도 늙을 때가 되긴 됐나 보네.”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난 당신과 백년해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명해은도 감격해서 말했다.“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난 아직도 자신이 18살인가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벌써 서른이네요. 우린 정말 늙었나 봐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네요.”“당신은 조금도 안 늙었어. 내 눈에는 당신이 관음보살과 같이 해마다 18살이야.”명해은은 몸 관리를 잘해서 전이진과 함께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다.전현민도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전씨 가문의 사업에 몰두했기에 심신이 많이 상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다.은퇴한 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염색은 했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같이 서면 아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사실, 두 내외는 불과 한 살 차였다. 명해은은 남편의 칭찬에 웃음보를 터뜨렸다.“나도 해마다 18살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네요.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한다 해도 늙기 마련인걸요.”“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 갈 테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훨씬 늙어 보여.”명해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두려울 것 없어요.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늘이 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