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을 들은 하예진은 바로 이혼하러 가지 못해 살짝 아쉬웠지만 하루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묵념하며 허락했다.그녀는 서명을 다 한 두 부의 이혼 합의서를 주형인에게 건넸다.“문제없는지 확인하고 바로 사인해.”주형인은 그녀의 손에서 이혼 합의서를 건네받았다.방금 그녀가 말한 몇 가지 사항을 제외하고도 이혼 당일에 그녀 수중에 있는 증거들을 전부 없애버리고 그를 향한 복수도 일절 없을 거라고 담보했다.주형인은 그저 단번에 그녀에게 2억 원 남짓한 위자료를 나눠주는 것과 아들의 양육권을 포기하는 것밖에 아쉬울 게 없었다.다만 그 대신 직장을 잃지 않고 돈도 계속 벌 수 있으니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했다.“사인할게.”주형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내일 봐.”하예진도 알겠다고 했다.그는 하예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서현주를 껴안고 자리를 뜨려 했다.두어 걸음 걸어가더니 그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 돌려 하예진에게 물었다.“예진아, 그 증거 자료들 다 누가 너한테 줬어? 나한테 말해줄래?”그가 했던 짓을 모조리 조사하고 증거까지 손에 넣다니, 실로 섬뜩할 따름이었다. 하예진에게 이런 조력자가 있다는 걸 생각하니 그는 저절로 가슴이 움찔거렸다.주형인은 너무 갑작스럽게 협박을 받았다. 단지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예진의 배후에 조력자가 있다는 생각에 바로 그녀의 이혼 조건을 들어준 것이다.“그게 그렇게 중요해? 이혼하고 다 돌려준다고 했잖아. 복사본도 남기지 않겠다고.”주형인은 그녀가 끝까지 말하려 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서현주를 껴안고 떠났다.다만 얼마 못 가 상사의 전화를 받았는데 뭐라고 얘기했는지 서현주를 풀어주며 구시렁대더니 두 사람 모두 차 앞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다.그리고 곧바로 차를 몰고 떠났다.하예진은 제자리에 서서 주형인의 차가 떠나는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겨우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을 꺼내 동생에게 전화했다.“예정아.”하예진은 흐뭇한 기분으로 말했다.“나 주형인과 얘기 다 했어. 내 요구대로 재
하예진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의 엄마는 친언니가 수십 년 동안 자신을 찾아 헤맨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몰랐다.그리고 두 자매도 결국 다시 만나지 못했다.“예정아, 소현 씨 어머님 잘 위로해드려. 난 돌아가서 우빈이 봐야 해.”하예진은 아픈 마음을 애써 참으며 동생에게 당부를 남기고 바로 전화를 껐다.그녀는 결국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막은 채 엉엉 울었다.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녀를 힐긋거릴 뿐 아무도 그녈 위해 걸음을 멈추는 이가 없었다.버블티 가게 사장이 그녀가 노트북을 빌려 이혼 합의서를 프린트한 걸 알고 있어 이혼 때문에 속상해하는 줄 알고 티슈를 들고 다가왔다.“이봐요, 아가씨.”사장님은 하예진의 어깨를 톡톡 내리쳤다. 하예진이 머리를 들자 사장님은 티슈를 건네며 위로했다.“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이에요. 그만 놔줘요. 서로를 위해서 놔줘야 해요. 더 멋진 미래가 꼭 다가올 거예요. 너무 힘들면 울어요. 마음속에 담아둔 슬픔 전부 토해내면 조금은 후련해질 거예요.”“고마워요, 사장님.”하예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티슈를 건네받고 눈물을 닦으며 울먹거렸다.“가정폭력에 외도까지 저지르고 나한테 돈 쓰는 걸 인색하는 남자는 이혼이 답이에요. 그 인간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엄마가 생각나서 그랬어요. 우리 엄마는 15년 전의 교통사고로 아빠랑 함께 세상을 떠나셨거든요.”사장님은 동정 어린 눈길로 그녀의 어깨를 다시 두드려주었다.‘참 가여운 사람이야.’누군가는 쉰 살, 예순 살에 이미 저세상으로 떠나셨고 누군가는 앳된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다.어른이 된 후 부모님께 보답할 길이 없어진 그런 아쉬움과 고통은 겪어본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사장님, 저 괜찮아요. 먼저 갈게요, 아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아가씨, 꼭 강해져야 해요.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지는 법이에요. 화이팅!”낯선 이의 위로에 하예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이 세상엔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았다.사장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마친 후 그녀는 스쿠터를
하예진이 본능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다.“며칠 휴가 낸 거 맞아요. 우빈이가 크게 놀라서 아이를 돌봐야 하거든요.”“그런데 여기서 뭐 해? 아이는 어디 있어?”하예진은 말문이 막혔다.‘그냥 솔직하게 말할까?’노동명은 주변을 쭉 훑어보았지만 씩씩하고 늠름한 꼬마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다만 우빈은 늘 노동명이 두려워 마주칠 때마다 하예진의 품에 쏙 안겼다. 마치 그가 악귀인 것처럼 말이다.“우빈이는 집에서 쉬고 있어요. 숙희 아주머니가 돌봐줘요. 저는 볼 일 있어서 잠깐 나왔고요.”노동명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무슨 볼일?”하예진이 말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노동명이 웃으며 대답했다.“불편하면 얘기 안 해도 돼. 지나가다가 우연히 널 마주쳤을 뿐이야. 휴가 냈다고 해서 뭔 일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그만 볼일 보러 가봐. 나도 갈게.”노동명은 스쿠터에 올린 손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살펴 가세요, 대표님.”하예진의 말을 들은 노동명은 머리를 돌리지 않았지만 손을 들어 안녕이란 제스처를 해 보였다.두 사람은 각자 운전하여 자리를 떠났다.호텔 안에서 하예정은 성소현 모녀와 함께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다. 성문철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성소현 모녀는 집으로 돌아갔다.하예정은 그들 모녀를 호텔 문 앞까지 바래다준 후 차에 올라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제 차로 돌아갔다.다만 이제 막 몸을 돌렸는데 한 무리 사람들이 호텔에서 걸어 나왔다.그중 두 사람은 그녀도 아는 사람인데 다름 아닌 전태윤과 도련님 전이진이었다. 다른 한 분도 어디서 뵌 적은 있으나 얼굴까진 기억이 안 났다. 저번에 소이 카페에서 전태윤과 함께 있는 걸 봤었다.아마도 바이어와 미팅 중인 듯싶었다. 왜냐하면 몇 명은 하예정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그들 뒤에서 따라오는 검은색 옷을 입은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은 경호원일까 아니면 전씨 그룹의 직원들일까?전태윤은 처음에 아내를 보지 못했다.경호원들이 먼저 그녀를 발견했
그의 쇼는 계속할 수 있었다.“소정남, 전이진, 다들 먼저 회장님들 모시고 회사로 돌아가. 난 너희들 형수님한테 가봐야겠어.”전태윤은 두 사람에게 나지막이 분부한 후 성큼성큼 하예정에게 걸어갔다.경호원들도 당연히 뒤따라갈 엄두가 안 났다.“전 대표님 아는 분 만나셨나 봐요?”몇몇 회장님들은 낯선 여자에게 다가가는 전태윤을 의아하게 쳐다봤다.그는 가족 의외의 젊은 여자가 3미터 이내에 나타나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래요, 아는 분이에요.”소정남이 웃으며 몇몇 회장님들을 차에 모셨다.그가 말을 아끼자 회장님들도 더 따져 묻지 않았다.“예정아.”전태윤은 그녀 앞에 다가가더니 두 손으로 그녀의 외투를 다듬어주며 관심 조로 물었다.“여긴 무슨 일이야? 내가 바이어랑 미팅 있는 걸 알고 일부러 기다린 거야?”점심에 비가 끊겼지만 여전히 쌀쌀했다.하예정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고급 외제 차를 타고 떠나가는 걸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저분들도 다 태윤 씨 동료분들이에요? 난 소현 씨랑 소현 씨 어머님 모시고 이리로 밥 먹으러 왔는데 당신 마주칠 줄은 몰랐어요.”전태윤은 멀어져가는 고급 외제 차 몇 대를 바라보며 말했다.“회사 동료들 맞아. 오늘 미팅한 바이어가 전부 회장급이라 우리 회사에서도 각별히 중시하며 동료들을 많이 불러왔거든. 소현 씨 어머님은?”“남편분이 전화가 와서 먼저 가셨어요. 태윤 씨, 나 소현 씨 어머님과 함께 유전자확인 검사를 했어요. 며칠 뒤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전태윤은 두 눈이 반짝였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상하게 말했다.“결과 나오고 다시 얘기해. 지금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내.”하예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내는 건 어려워요. 애초엔 소현 씨가 괜히 나를 돈을 노린다고 오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젠 머리가 너무 복잡해졌어요. 엄마가... 아직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겠어요.”전태윤이 팔을 벌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녀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비록
좀 전에 한 무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올 때 하예정은 호텔로 숨어드는 강일구를 발견하지 못했다.그녀의 주변에서 늘 관심해주고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남자가 남우주연상 급의 연기자란 것도 미처 몰랐다.그녀는 전태윤에게 말했다.“아까 언니한테 전화 왔는데 주형인과 이혼 상의가 다 됐대요.”“그래? 어떻게 결정했는데?”“주형인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을 언니와 절반으로 나누기로 했대요. 집과 차는 언니가 나눠 갖지 않았지만 주형인이 따로 언니한테 돈을 배상하기로 했어요. 우빈의 양육권은 언니가 갖고 주형인은 달마다 양육비 60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어요. 그 인간 조건은 바로 자신한테 불리한 증거들을 언니가 빠짐없이 넘겨줘야 하고 이혼 후에도 절대 복수하지 않겠다고 언니에게 약속해달라고 했어요.”전태윤이 물었다.“그래서 너희 언니는 뭐라고 했어?”“전부 들어줬대요. 다만 언니 개개인만 그 인간한테 복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대요. 언니는 우리 둘에게 손을 쓸 기회를 남겨줬어요.”하예정이 말을 이어갔다.“난 주형인이 직장을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현주와 결혼하고 나서 모든 걸 잃었으면 좋겠어요. 부부가 가난하면 행복해지기 어렵다는데 주형인이 빈털터리가 돼도 서현주와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 그 인간 부모님과 언니 모두 보통이 아니잖아요. 서현주는 보니까 우리 언니처럼 순순히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에요. 그때 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면 참 볼만 하겠는데요.”하예정은 쓰레기 같은 형부의 온 가족이 큰코다치길 바랐다.“언니가 이혼해도 예전처럼 자신감 넘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으면 좋겠어요. 두 번째 형부가 될 분은 아내를 엄청 사랑하고 행복한 나날만 보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주형인도 분명 화 나서 미칠 지경일 테고 무자비한 그 집안 사람들도 평생 땅을 치며 후회할 거예요.”전태윤도 맞장구를 쳐주었다.“처형은 반드시 네 소원대로 행복한 삶을 살 거야. 지금부터 살이 빠지고 있잖아.
“처형은 금방 이혼했고 직장도 아직 자리 잡지 못해서 집세는 일단 우리가 내주자.”전태윤은 사실 큰손을 내밀어 처형 모자에게 집 한 채 드리고 싶었다. 처형은 그의 와이프와 가장 친한 사람이니 전태윤도 더 잘해주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두 자매의 성품으로 보아 설사 그가 집을 선물한다 해도 처형이 절대 받지 않을 것이다.“언니가 주형인한테서 위자료를 2억 원 받을 테니 우리가 집세를 먼저 내는 걸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자매는 서로 돕고 살지만 그걸 절대 당연하게 여기진 않는다.서로 돕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관계야말로 진짜 돕고 사는 관계이다.전태윤은 아무 말이 없었다.그들은 곧이어 전씨 그룹에 도착했다.그는 차를 세우고 머리를 갸웃거리며 하예정을 쳐다봤다.하예정도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회사에 도착했는데 왜 차에서 내리지 않고 날 그렇게 봐요?”전태윤은 계속 그녀를 쳐다봤다.하예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기울이고 그의 목을 잡더니 그를 가까이 잡아 당겨와 입술에 살며시 뽀뽀했다.전태윤은 너무 가벼운 뽀뽀가 만족스럽지 않아 더 진한 키스로 보답했다.키스를 마친 후 그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부부의 감정이 승화되는 단계라 단 한 번도 사랑을 느껴본 적 없는 전태윤은 지금 이 시각 껌딱지처럼 하예정에게 달라붙어 한순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다만 아쉽게도 그는 껌딱지로 될 수 없었다.“가게 문 닫았으면 가게로 돌아가지 말고 일단 집에 가서 푹 쉬어.”“나 오더도 준비해야 하고 가게 가서 할 일이 남았어요. 해 질 녘에 학생들 하교하면 물건 사러도 올 거예요.”시험 기간이라 학생들이 주로 사는 물건은 문구용품과 겨울방학 숙제이다.지금 방학 숙제는 선생님이 내주신 것 외에도 학생들이 따로 한 벌 사야 한다. 그녀의 서점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겨울방학 숙제를 팔고 있어 가게 문을 닫으면 다른 서점으로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수입이 대폭 떨어지게 된다.전태윤은 말을
자신을 신경 써주는 그녀의 마음을 느낀 순간 전태윤의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저녁엔 약속 있어서 집에 빨리 못 들어가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단, 내 방에서 자야 해.”마지막 그 한 마디에 전태윤의 얼굴이 빨개졌다.애초에 그녀에게 제 방은 금지구역이니 한 발짝도 들일 생각 말라고 한 장본인인데 지금은 어느덧 자신이 먼저 제 방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한다.하예정이 순순히 대답했다.“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얼른 들어가 봐요. 여기서 찬바람 쐬지 말고.”전태윤은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서 회사로 들어갔다.하예정은 그의 훤칠한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그제야 차를 타고 떠났다.회사 로비에 들어서니 소정남이 한쪽 옆에 서서 배시시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전태윤은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가십 보이야 뭐야!’그는 소정남을 흘겨보고는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소정남은 그의 눈빛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태윤아, 너 이러다 껌딱지 다 되겠어. 종일 형수님 옆에 달라붙고 있잖아.”전태윤이 그를 째려봤다.“외로운 솔로가 뭘 알겠어?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달콤한 사랑을 하는지 말이야.”소정남은 말을 잇지 못했다.“효진 씨 감기 걸려서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너 시간 나면 보러 가봐.”“나도 가고 싶은데 어머님이 옆에 계신대. 우린 아직 부모님을 만날 단계까진 아니라서 안 갔어. 지금 가게에 있으면 한번 보러 갔을 텐데.”친구의 행복에 자극받은 소정남도 심효진에게 적극 구애를 펼쳤다. 어쨌거나 심효진은 그가 처음 관심 가진 여자였다.그녀의 화끈한 성격이 실로 마음에 들었다.“태윤아... 형수님한테 효진 씨가 가게로 돌아왔는지 한번 여쭤볼래?”소정남도 행동파라 결심을 내리면 바로 행동에 옮긴다.심효진의 집에 찾아갈 수 없어도 그녀의 가게에는 병문안을 하러 갈 수 있다.전태윤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소정남은 그를 툭 치며 말했다.“이봐, 네가 선 자리를 마련해줬잖아.
“넌 뭐라 했는데?”“내가 뭐라 할 수 있겠어? 당신의 후계자가 전태윤의 여자를 빼앗으려 한다고 대놓고 얘기할 순 없잖아. 이건 너의 사적인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조 비서한테 스케줄 잡으라고 할게. 김 대표랑 한번 만나 봐.”전태윤이 덤덤하게 말했다.“구정 지나서 다시 보자. 며칠 후에 출장 다녀와야 해.”소정남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출장? 어디로? 형수님이랑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어? 두 사람 지금 한창 가까워지는 중이잖아.”전태윤이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너한테는 얘기해도 괜찮겠어. 어차피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텐데 뭐.”소정남은 구미가 확 당겼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소정남은 귀를 쫑긋하고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무슨 일인데?”“이경혜 씨가 계속 찾아다니던 여동생이 어쩌면 우리 장모님일지도 몰라.”소정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너 장모님이 있었어? 아니, 내 말은 네 장모님 오래전에 돌아가셨잖아.”“우리 장모님이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건 맞아. 그렇다고 언니가 있어선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소정남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이경혜가 여동생을 찾는다는 사실을 관성의 상류층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다. 성기현이 소지훈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단서도 너무 적은 데다가 전씨 그룹의 전태윤을 돕고 있어서 전태윤의 라이벌인 성기현의 부탁을 결국에는 거절했었다.“만약 너의 장모님이 이경혜 씨가 찾는 여동생이라면 형수님이 이경혜 씨의 조카란 말이잖아? 그럼 넌 조카사위고. 성소현 씨는 또 널 엄청 사랑하고 있고...”정리를 마친 소정남은 허벅지를 탁 치며 크게 웃었다.“하하하, 태윤아, 네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지 똑똑히 지켜보겠어.”전태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서 소정남에게 냅다 던졌다.“꺼져!”“좀 더 웃다가 꺼질게. 태윤아, 차라리 오늘 저녁에 형수님한테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 어때?”소정남은 전태윤이 아직도 뭘 망설이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