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태윤 씨처럼 속 좁지 않아요.”전태윤은 어이가 없었다.“화난 거 맞네 뭐.”“네네네, 화났어요. 내가 문자를 그렇게나 많이 보냈는데 전부 읽씹했잖아요!”하예정은 차에서 내린 후 그를 끌어내리고는 우산을 그에게 건넸다.“얼른 들어가서 일 봐요. 정말 가봐야 해요.”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도 고팠다. 그가 아침 일찍 내려준 대추차도 아직 마시지 못했다. 너무 배고픈 나머지 꼬르륵 하다못해 배까지 아플 정도였다.“네가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성소현 모녀가 성소현 어머니의 여동생 때문에 그녀를 찾아왔기에 그녀를 이곳에 오래 머무르게 할 수도 없었다.하예정은 운전석에 올라탄 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점심때 밥 먹으러 오겠으면 나한테 미리 얘기해줘요. 안 그러면 설거지만 할 수 있어요.”“알았어.”이경혜 모녀가 가게에 있으면 그는 가지 않을 것이다.하예정은 곧바로 차를 운전하여 떠났다. 전태윤은 제자리에 서서 멀어져가는 그녀의 차를 배웅하다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하지만 소정남이 전이진과 함께 망원경으로 회사 앞의 달달한 부부를 지켜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소정남은 임시 회의가 있다고 통지받은 임원들에게 일 얘기를 잠깐 한 후 바로 회의를 마무리했다.“먼 곳의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소정남이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정확히 보이지만 들리지 않아 쌀쌀맞은 대표님이 사모님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차 안에서 애들이 봐서는 안 되는 걸 했겠지, 뭐.’전태윤같이 늘 엄숙하고 차가운 사람도 할 건 다 했다.사랑의 힘이 이토록 대단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질투의 힘이었다.전태윤은 질투에 눈이 멀어 앞뒤도 가리지 않았다.전이진이 피식 웃었다.“형이 왔으니까 이만 가볼게요. 망원경을 형의 책상 서랍에 넣는 거 잊지 말고요. 형한테 들키면 뒤탈은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나가버렸다.그의 말에 소정남은 재빨리 망원경을 챙기고 회의실을 나섰다.
심효진은 엄마의 잔소리를 피하려고 도씨 가문 사모님의 생일 파티에서 드러눕기까지 했다. 그 말인즉슨 집에서 그녀에게 결혼을 심하게 다그친다는 것을 뜻한다.만약 그가 심효진의 병문안을 온 걸 심효진의 어머니가 알게 된다면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비록 심효진이 그의 스타일이긴 하지만 아직 별로 만나보지 못했기에 부모님까지 뵙기에는 너무 일렀다. 소정남은 소지훈 말고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집안 어른들이 알게 된 후 우르르 몰려가 심효진을 놀라게 할까 봐 감히 얘기하지 못한 것이었다.심효진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소정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두 사람은 간단히 몇 마디 주고받은 후 통화를 마쳤다....성소현 모녀는 하예정의 서점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김진우는 성소현 모녀가 온 후에 바로 서점을 나섰다. 왜냐하면 성소현을 만나면 멀리 피하라고 어머니가 귀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씨 가문은 만만치 않은 가문이라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했었다.이경혜는 하예정네 자매가 자신의 조카라고 거의 단정 짓고 있었다. 하예정 가게의 구석구석까지 꼼꼼히 둘러보았고 놓인 물건도 살펴보았다.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딸에게 물었다.“이 서점에 무슨 화장품이 이렇게나 많아?”하예정이 온라인 스토어에서 직접 만든 공예품을 팔고 있다는 건 이경혜도 알고 있었다. 딸이 집으로 가져온 마네키네코를 본 적이 있었는데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었고 딸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었다.이경혜의 질문에 성소현의 얼굴이 화끈거리더니 멋쩍게 말했다.“이건 다 제가 산 거예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필요하든 말든 그냥 싹 다 쓸어 담아서 샀어요. 사고 나서 진정한 다음에 보면 전부 다 필요 없는 물건이고 또 엄마가 뭐라 할까 봐 그냥 예정 씨네 가게에 가져왔어요.”이경혜는 어이가 없었다.“여기가 무슨 수거장인 줄 아나...”성소현은 혀를 날름 내밀더니 엄마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예정 씨가 사촌 동생일 수도 있잖아요. 언니로서 사촌 동생
“예정 씨 남편 만난 적이 있어?”이경혜가 딸에게 물었다. 만약 하예정네 자매가 정말로 그녀의 조카라면 이경혜는 두 자매의 이모로서 제대로 알아봐야 했다.“남편분이 너무 바빠서 아직 만난 적이 없어요. 엄마도 아시잖아요. 전씨 그룹에 다니는 사람은 전부 엘리트이고 일도 엄청 바쁘다는 거. 예정 씨 남편분이 직급도 꽤 높은 거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더 바쁘겠죠. 예정 씨가 가끔 남편 얘기를 꺼내는데 얘기를 꺼낼 때마다 표정이 점점 부드러워져요. 아무래도 부부 사이의 정이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아요.”성소현은 하예정의 결혼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어 자그마한 변화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었다.성소현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그런데 아직 진짜 부부까지는 아니고 그냥 명목상 부부예요.”“초고속 결혼은 감정의 기초가 없잖아. 명목상 부부에서 천천히 감정을 키워나가면 돼. 다행인 건 두 사람이 아주 이성적이라는 거야.”아직 조카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이경혜는 저도 모르게 하예정 편을 들었다. 하예정의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모습, 그리고 강한 면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그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예정 씨가 왔나 봐요.”성소현이 서점을 나와 보니 진짜로 하예정이 돌아왔다. 밖에 아직 비가 내린 탓에 성소현은 가게 문 앞에 서서 배시시 웃으며 차에서 내린 후 우산을 쓰고 다가오는 하예정을 바라보았다.“소현 씨,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전태윤에게 설명하고 나니 하예정도 기분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돌아오자마자 활짝 웃는 성소현의 모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문 앞에서 우산의 물방울을 툭툭 턴 후에야 우산을 거두고 성소현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오늘 기온이 많이 떨어졌네요.”성소현이 말했다.“난 그리 추운 것도 모르겠더라고요.”보기에는 그녀가 입은 옷이 그리 두껍지 않았지만 사실은 꽤 따뜻했다.“예정 씨, 우리 엄마예요.”성소현은 하예정에게
“음식이 다 식어서 주방에 가서 좀 데워야겠어요. 소현 씨는 우리 가게 단골이니까 아주머니 좀 잘 대접해드려요.”성소현이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엄마랑 나 우리 집처럼 편하게 있을게요.”그러자 하예정이 속으로 생각했다.‘소현 씨네 재력에 우리 가게가 눈에 들어올까요?’그녀는 전태윤이 사준 아침을 들고 주방에 들어가 따뜻하게 데운 후 먹었다.전태윤이 직접 끓인 대추차는 텀블러에 담겨있어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날이 추운 데다가 생리까지 하는 바람에 손발이 다 차가웠다. 따뜻한 대추차를 마시고 나니 배가 한결 편안해졌다.“따르릉...”휴대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대추차를 마시며 휴대 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전태윤의 전화인 걸 확인하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가게에 도착했어?”전태윤은 시간까지 계산하여 전화했다.“도착했어요.”“지금 뭐 먹고 있어?”“방금 태윤 씨가 사준 아침 다 먹고 지금 태윤 씨가 끓여준 대추차를 마시고 있어요. 향도 짙고 달달하니 맛이 참 좋아요. 아주 꿀보다도 더 단 것 같아요.”전태윤이 한마디 했다.“시간이 몇 시인데 인제 아침을 먹어?”“이게 다 질투쟁이인 누구 때문에 그렇죠. 안 그러면 이 시간에 아침을 먹겠어요?”전태윤이 잠깐 멈칫하다가 말했다.“다 내 탓이야.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할게. 약속해.”“약속하지 말아요. 태윤 씨는 성격이 원래 그러해서 못 고쳐요.”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태윤 씨 체면이 깎이지 않게 하려고 그러죠.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면 얼마나 보기 안 좋아요.”전태윤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체면을 깎을 수 있는 사람은 할머니 말고 하예정 뿐이었다.“점심때 밥 먹으러 올래요? 그런데 나 점심에 밥할 시간이 없어서 밖에 나가 먹을지도 몰라요.”성소현 모녀에게 밖에서 점심을 대접할 생각이었다.“성소현 씨 아직도 가게에 있어?”“네, 이따가 점심 대접하려고요. 소현 씨 날 많이 도와줬잖아요.”전태윤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나
“김진우 씨는 갔어?”전태윤은 아직도 연적을 신경 쓰고 있었다.“내가 왔을 때 가게에 없더라고요. 아직도 질투해요?”전태윤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너도 내 성격이 원래 이렇다고 했잖아. 앞으로 자주 질투할지도 모르겠어.”만약 소정남과 전씨 할머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무조건 비웃을 게 뻔했다. 하예정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태윤 씨 귀여운 면이 있다니까요.”하예정은 질투하는 그의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너도 귀여워.““태윤 씨 입에 꿀이라도 발랐어요? 말 점점 예쁘게 하네요.”전태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는 늘 그가 애정 표현을 할 줄 모른다고 잔소리했었다. 그가 듣기 좋은 소리를 한마디 했을 뿐인데 하예정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그럼 일 봐. 이만 끊을게.”“네.”하예정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전태윤은 휴대 전화 화면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원망 섞인 말투로 투덜거렸다.“보고 싶단 말 한 번도 안 하네.”그는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대추차를 다 마신 하예정은 텀블러를 깨끗하게 씻었다. 그다음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 씻은 후 과일 접시에 담았다.이경혜 모녀가 카운터 밖에 앉아있었다.“아주머니.”하예정은 과일 접시를 이경혜 앞에 내려놓았다.“과일 좀 드세요.”“고마워.”하예정이 자리에 앉자 이경혜는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예정아, 오늘 내가 왜 왔는지 너도 알겠지? 나 여덟 살 되던 해에 여동생이랑 헤어졌는데 벌써 50년이나 지났어. 50년 동안 한순간도 동생을 잊은 적이 없었어. 양부모네 집에서 잘 지내는지, 이 언니를 잊은 건 아닌지 걱정했어. 동생이 입양된 후에 보육원 원장님한테 동생의 근황을 자주 물어봤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고 능력이 된 후에 갖은 방법으로 여동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어. 예전에는 찾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인터넷도 발달하여 쉬울 줄 알았는데 매번 기대와 실망을 거듭했어.”하예
그녀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오는 걸 본 하예정은 재빨리 휴지를 건네며 사과했다.“아주머니, 미안해요.”“예정아.”이경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미안한 건 나야. 아주머니가 능력이 부족해서 지금까지 너희들을 찾지 못했어. 만약 진작 찾았더라면 너희 엄마도 아직 살아있었을 텐데.”만약 여동생을 찾았다면 시내로 데려왔을 것이다. 그러면 시골 도로에서 부부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아직 유전자 검사를 하기 전이지만 이경혜의 말을 들은 하예정도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엄마가 아직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엄마, 울지 말아요. 아빠가 저한테 엄마 울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어제도 종일 우셨잖아요.”성소현은 하예정이 건넨 휴지를 받고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했다.“엄마, 먼저 예정 씨랑 유전자 검사하러 가요. 만약 정말 혈육 관계라면 예정 씨랑 예진 언니가 있잖아요.”이경혜가 눈물을 쓱 닦으며 말했다.“엄마가 감정이 컨트롤 안 돼서 그래.”그때 이경혜 자매의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나이인 그녀는 여동생을 키울 능력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여동생과 헤어져야만 했다.그렇게 한 번의 이별이 50년이나 지속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겨우 소식을 찾았나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하늘나라에 갔다.아무리 강한 이경혜라고 해도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하늘도 참 무심하시지.’성소현과 하예정은 겨우 이경혜를 다독였다. 하예정은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은 후 이경혜와 함께 유전자 검사를 하기로 했다.“가게는 내가 보고 있을게요.”성소현이 자진해서 나섰다. 하예정은 차 키를 챙기고 카운터를 지나며 말했다.“그냥 가게 문 닫는 게 좋겠어요. 이따가 식사 한 끼 대접할게요.”문득 자신이 만든 공예품 생각이 난 그녀는 다시 돌아와 완성한 공예품 몇 개를 이경혜에게 선물했다.“아주머니, 이건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값비싼 건 아니지만 제 마음이니
유전자 검사 센터로 가는 길, 전태윤이 하예정에게 천만 원을 보냈다. 그녀가 받지 않을까 봐 문자까지 보냈다.“예정아, 이 돈 받지 않으면 날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길 거야. 남편은 원래 아내한테 쓰라고 돈을 버는 거야.”그가 보낸 문자를 확인한 하예정이 배시시 웃었다.‘태윤 씨 이젠 이런 말도 할 줄 아네?’그녀는 전태윤이 보낸 돈을 받기로 했다. 검사 센터에 도착한 그녀는 이경혜와 함께 피를 뽑았다.하예정은 남편이 준 돈으로 이경혜 모녀와 5성급 호텔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관성의 5성급 호텔 중에서 하예정이 가장 익숙한 호텔은 관성 호텔이었다.관성 호텔은 전씨 그룹 산하의 호텔이고 전씨 그룹과 성씨 그룹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라이벌 관계였다. 이경혜 모녀와 관성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떠올린 하예정이 미안한 얼굴로 이경혜에게 말했다.“아주머니, 다른 데로 갈까요?”이경혜는 하예정의 뜻을 알아채고는 피식 웃었다.“괜찮아, 예전에 회사에 다닐 때도 여기서 바이어랑 일 얘기하곤 했어.”그러면서 딸에게 눈짓했다. 눈치 빠른 성소현은 엄마의 뜻을 단번에 알아채고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엄마, 그런 우연이 어디 있어요? 만난다고 해도 뭐 어때요?”전태윤이 결혼반지를 낀 걸 본 순간부터 성소현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그에 대한 마음을 접으려 애를 썼다.성소현의 새언니는 이 세상에 널린 게 남자라서 성소현이 전태윤처럼 훌륭하고 그녀만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장담했다.두 모녀가 개의치 않아 하자 하예정은 마음 놓고 함께 들어갔다.호텔 매니저는 하예정을 알아봤지만 감히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친절하게 안내만 할 뿐이었다. 세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난 후 호텔 매니저는 돌아서다가 다시 걸음을 멈추고 엘리베이터를 보며 중얼거렸다.“방금 사모님 옆에 있던 두 분이 이경혜 씨와 성소현 씨 아니야?”낯이 익은 게 이경혜 모녀 같았다.‘내가 잘못 본 거 아니겠지? 사모님 지금 성씨 가문 사람들이랑 같이 있잖
“그래요, 알았어요. 그만 일 보세요.”전이진은 재빨리 일행을 따라가 형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형, 권 매니저님이 그러는데 형수님께서 몇 분 전에 이경혜 모녀랑 VIP 지존룸으로 들어갔대.”VIP 지존룸은 관성 호텔의 가장 고급스러운 VIP 룸인데 웬만한 사람은 지존룸을 택할 생각조차 감히 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은 이경혜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거라 지존룸을 택하는 건 당연했다.“알았어.”전태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라곤 없었다.“마주치진 않을 거야.”전태윤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평소 바이어에게는 맨 꼭대기 층의 로열 스위트룸에서 식사 대접을 한다. 지존룸과 층도 다른 데다가 전용 엘리베이터도 있어 그와 동행한 호텔 손님 말고는 누구도 그 엘리베이터에 탈 수 없었다.두 부부가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딱 마주치지 않는 이상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자신만만해하는 전태윤의 모습에 전이진도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어차피 가난한 척하는 사람도 형이고 형수님에게 딱 걸려서 정체를 들킨다고 해도 그건 형의 일이지 그와는 상관이 없었다.다행히 전태윤 일행은 하예정 일행과 마주치진 않았지만 전태윤이 엘리베이터에 탈 때 다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주형인과 서현주가 그를 보았다.주형인이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라고 잠깐 생각하던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아직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은 경호원들은 주형인이 문 앞에서 힐끔거리는 걸 발견하고는 일제히 주형인을 노려보았다.그 모습에 잔뜩 겁먹은 주형인은 재빨리 서현주를 끌고 호텔을 나섰다.“형인 씨, 방금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봤어요?”“방금 그 남자들 전씨 가문 도련님의 경호원들 아니야?”주형인이 서현주에게 물었다.“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전씨 가문 도련님을 만날 기회도 없었는데 경호원을 알 리가 있겠어요?”전씨 가문 도련님의 경호원을 단번에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전씨 가문 도련님을 자주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서현주는 자신이 그 행운아이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아니었다.그녀는 명
노동명은 하예진이 가슴 아파할까 봐, 또 격려의 말들을 늘어놓을까 봐 자신이 폐인이라는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하예진은 호텔에 비치된 주전자를 씻고 주전자로 물을 끓였다. 그리고 컵을 씻어 녹차 한 봉지를 집어 들고 녹차 한 잔을 타서 가져다주었다.하예진은 찻잔을 침대 머리맡 카운터에 놓고 노동명에게 말했다.“지금은 물이 뜨거워서 좀 이따가 마셔요.”따르릉...하예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더니 노동명에게 말했다.“예정이에요.”그녀는 하예정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며 서둘러 받았다.“예정아, 뭔 일 있어?”“엄마.”전화기 건너편에서 앳된 어린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빈아, 우빈이가 드디어 엄마가 생각났나 보네. 엄마한테 전화할 줄 다 알고.”하예진은 웃으며 우빈을 조롱했다.우빈이 입을 삐죽 내밀며 억울하다는 듯 다시 엄마를 불렀다.아들의 억울한 어조를 알아챈 하예진이 물어보았다.“왜? 기분이 안 좋아? 친구랑 싸웠어?”“아니요. 동명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에요. 정말 나빠요. 저 몰래 아무 말도 없이 엄마 보러 갔어요. 제가 제 친구를 아저씨한테 소개해 주려고 이모한테 부탁해 아저씨 찾으러 왔는데 글쎄 노 할머니께서 아저씨가 엄마 찾으러 가셨다고 한 거 있죠?”우빈 녀석은 너무 서러서 계속해서 말했다.“아저씨는 말도 없이... 제가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저하고 말 좀 하시지. 그럼 저도 아저씨 따라서 엄마한테 갔을 텐데. 아저씨는 약속을 어기는 나쁜 사람이에요.”하예진이 출장을 간 후 노동명은 분명히 우빈에게 나중에 하예진이 보고 싶으면 노동명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강성으로 하예진을 보러 가자고 약속했었다.우빈은 그 당시 노동명이 그의 친아버지보다도 더 잘해준다고 생각했다.주형인은 매번 우빈을 볼 때마다 잘 대해주지만, 우빈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빈은 주형인이 그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고 여겼다.노동명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주형인과 주경진 부부 그리고
노동명은 하예진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예진의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좋아했다.“예진아.”노동명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가까이 가면서 떠보았다.“나... 뽀뽀해도 돼?”하예진은 얼굴이 갑자기 노을처럼 붉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처녀가 아닌 결혼도, 이혼도 해본 아이가 있는 여자였지만, 이런 물음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결국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그 모습을 본 노동명의 마음은 더욱 설레었다.노동명은 하예진을 사랑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녀의 손밖에 잡아보지 못했다.더 깊은 접촉을 해보지 못했다.“예진아, 뽀뽀 해도 돼?”노동명은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잡으면서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도록 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노동명이 다가가니 그의 숨결이 하예진의 얼굴에 닿았다.하예진의 대답을 들을 수 없게 되자 그도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고 그녀가 눈을 감은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그녀를 껴안으며 키스했다.그들은 부드러운 입맞춤으로부터 거친 키스까지 이르렀다.하예진은 문득 눈을 뜨면서 노동명을 밀치고 일어나 말했다.“물이 끓었어요. 따뜻한 물을 드시겠어요? 아니면 차 한잔하실래요?”하예진은 애써 숨을 골랐다.노동명은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녹차 한 잔 줘. 비행기에서 잠시 쉬었으니 더는 쉴 필요 없어. 녹차 한 잔 마시면서 기운 내야겠어.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얼른 해. 내가 따라갈게.”“제가 할 일은 오전에 다 처리했어요. 이따가 이씨 가문에 가서 저 대신 돌아가신 경호원의 유가족을 보러 가려고 해요. 어쨌든 저 대신 차를 몰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요.”설령 이은화의 계략이 맞는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 한 당분간은 사고라고 할 수밖에 없다.이씨 가문 경호원의 죽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하예진을 도와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였다.하예진이 가족을 찾아뵙고 고인을 방문해야
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하예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날 뭐로 보는 거야? 나도 예전에 공원 벤치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거든. 비록 사춘기 때 저지른 일이지만...”하예진은 노동명이 10대 때 반항하여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따라 사회에 뛰쳐 든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다가 그의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잘못을 뉘우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창업하여 노씨 그룹을 설립했다.이미 십여 년이 지난 일이다.그는 할머니가 그리울까 봐 하예진 앞에서 할머니에 관한 얘기를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듣자니 노동명은 형제중 막내라 할머니는 그를 가장 아꼈다.우빈은 노동명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처음에 무척 무서워했다. 그는 당시 수술을 받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받지 않았다.칼자국을 남겨놓은 이유는 그의 반항 때문에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사실을 명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할머니에게 미안했다.“난 안 가려. 이런 룸도 얼마나 좋아.”노동명은 자신의 평소 출장할 때 로얄 스위트룸에 묵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그는 싱글이고 재산도 많기에 마땅히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다.아니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이제 쉬시려고요?”“나 소파에 앉으면 돼.”노동명은 창가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하예진이 그를 밀고 소파 앞으로 다가가서 멈추었다.그녀는 노동명을 부축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어. 이제 두 걸음은 걸을 수 있거든.”매일 재활을 하고 몇 걸음 걷다 보니 그의 다리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더 멀리 가려고 하면 두 다리가 견딜 수 없이 지끈지끈 아파 났고 고통스러워 똑바로 서지 못하고 땅으로 넘어지게 된다.노동명의 두 다리는 넘어지고 부딪혀 멍이 들었다.그는 주위 사람들이 가슴 아파할까 봐 상처를 가리려고 매일 긴 바지를 입고 있고 다녔다.노동명은 누구의 동정심도 필요하지 않았다!하예진은 결국 부축하는 것을 포기했다.노동명은 스스로 일어서서 한 발짝 앞
하예진이 관성을 떠나던 날, 노동명이 심술부린 탓으로 하예진을 공항까지 배웅조차 하지 않았다.심지어 하예진의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에 답장도 하지 않아 그녀가 걱정을 안고 강성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강성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하예진은 여전히 노동명을 걱정했고 전태윤 부부에게 우빈을 데리고 노동명의 집에 가서 그를 위로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그날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노동명은 얼굴이 붉어졌다.하예진은 그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저는 화도 안 났어요. 앞으로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가 동명 씨를 싫어하고 저를 힘들게 할 것 같다면 저는 진작에 동명 씨를 멀리했을 거예요. 이렇게 가까이 지내지도 동명 씨를 믿지도 않을 거란 말이에요.”지난번 노동명이 하예진에게 고백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하지 않았지만, 물처럼 유유하게 감정을 교류했다. 그들은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서로를 지지하고 의지하면서 지내왔고 두 사람 마음도 점점 가까워졌다.지금 노동명은 하예진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그녀도 노동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두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서로가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되였다.다른 사람은 이미 두 사람을 커플로 여기고 있다.요리가 나오자 하예진은 잘 먹지 않고 노동명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미인 옆에서 자신을 잘 보살펴 주는 것을 본 노동명은 너무 행복했고 하마터면 배가 터질 뻔했다.노동명은 몇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왔기에 하예진은 그를 호텔에서 쉬게 한 다음 저녁에 그에게 호텔 근처를 구경시켜주려고 했다.강일구는 노동명 일행에게 룸 세 개를 예약해 주었고 노동명이 하예진의 룸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 하자 강일구는 흔쾌히 노동명과 룸을 바꾸었다.어차피 노동명은 강성에서 하룻밤만 묵고 내일 오후 관성으로 돌아갈 계획이다.연말이 다가오면 노씨 그룹도 정신없이 바쁘기에 노동명은 회사 대표로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쌓인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하예진은 노씨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