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전태윤은 짙은 얼굴로 그를 무시한 채 앞으로 스쳐 지나가더니 차가운 말투로 조 비서에게 분부했다.“임원들 전부 통지해, 회의 진행할 거야!”‘뭐지? 지진이라도 날 셈이야?’소정남이 속으로 구시렁댔다.“알겠습니다.”조 비서는 소정남보다 눈치가 빨랐다. 소정남은 주요하게 절친의 어두운 표정에 매우 놀랐다.전태윤은 사무실에 들어간 지 2분도 안 돼 다시 나오더니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이번엔 소정남도 따라갔다.회의실엔 아무도 없었다.오늘 원래 회의가 없었으니 말이다.다만 전태윤이 조 비서에게 명령하여 임원들을 전부 회의실에 불러왔다.이건 폭풍전야가 틀림없었다!전태윤은 회의실에 들어가 자리에 착석한 후 차가운 표정으로 임원들을 기다렸다.소정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왜 그래 태윤아? 아침부터 누가 널 건드렸어?”그가 가까이 다가가 떠보듯이 물었다.“형수님과 싸웠어?”지난번 하예정과 트러블이 생겼을 때 바로 이 표정이었으니 말이다.회사 전체를 연 며칠 괴롭히더니 결국 어르신이 직접 나서서 부부 사이를 원만하게 화해시켰다. 회사에 드리웠던 먹장구름도 그제야 말끔히 걷혔다.전태윤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꺼내 카톡을 열고 하예정이 보낸 문자를 읽었다.자신과 김진우는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그녀의 해명이었다.한편 그녀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김진우가 좋아한다고 고백했지만 그녀가 단호하게 거절하며 마음을 접으라고 몇 마디 말했을 뿐이라고 했다.절대 남편에게 미안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차기 연인을 찾는 것도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으며 그녀에겐 오직 전태윤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진우가 감히 예정이한테 고백을 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결혼한 유부녀란 걸 뻔히 알면서 고백했단 말이야? 이건 엄연히 나를 향한 도발이야!’“정남아, 우리 회사 김씨 그룹이랑 거래하는 업무 있어?”“본사는 없고 지사가 몇 군데 거래하고 있지.”“어느 지사야? 당장 차단시켜!”“뭐?”전태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태윤은 아무 말이 없었다.“임원들 오기 전에 나한테 얘기해봐. 혼자 끙끙 앓지 말고. 계속 그렇게 참았다간 네 몸도 다치고 회사 직원들한테도 안 좋아.”전태윤이 폭발하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기에 소정남은 지금 회사의 앞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내가 예정이한테 외투를 가져다줬을 때 김진우도 같이 있었어.”말문이 막혀버린 소정남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분명 오해일 거야. 태윤아, 가끔은 눈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지난번처럼 답답하게 혼자 화내지 말고 형수님한테 설명할 기회는 줘야지.”“김진우가 예정이한테 고백했어.”소정남이 말했다.“이제부터 김진우는 내 우상이야. 매우 대담하고 용기도 갸륵해. 역시 김 대표님이 키워내신 훌륭한 후계자야.”전태윤이 째려보자 소정남이 코를 쓱 만지며 웃었다.“태윤이 너 제대로 질투하는구나.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야!”전태윤의 낯빛이 확 굳어졌다.“형수님이 김진우를 받아줬어? 두 사람 뭐라 했는데?”전태윤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예정이 한 손에 빗자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나와서는 쓰레기통에 버리더라고. 그 후에 김진우랑 무슨 얘기 했는지는 못 들었어. 아, 그리고 김진우가 예정이 손을 잡으려 한 것도 봤어...”흥미진진한 상황에 소정남이 반짝이는 두 눈으로 다급하게 물었다.“그래 잡았어?”“아니, 예정이가 빗자루로 걔 손을 툭툭 치더라고.”“그래...”소정남이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말했다.“못 잡았구나. 그런데 왜 질투해? 형수님이 김진우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뜻이잖아.”전태윤은 정색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예정이 김진우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예정도 그에게 수많은 해명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자꾸만 질투 났다.“태윤아, 너마저 형수님을 사랑하게 됐다는 건 형수님한테 그럴만한 매력이 있다는 거야. 네가 형수님을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형수님을
바로 그때 임원들이 하나둘 들어왔다.대표와 이사가 이미 회의실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본 임원들은 저마다 놀란 얼굴들이었다. 갑작스럽게 열린 회의라 절대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전태윤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기 그지없었다.어떤 이들은 전이진에게서 조금이라도 단서를 알아내려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적어도 임시회의의 내용이 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전이진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그도 소정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전이진과 전태윤이 모두 전씨 가문 사람인 건 맞지만 전태윤과 더 가까운 건 소정남이었다.소정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화장실 좀 다녀올게.”그러고는 전이진에게 눈짓했다. 그의 눈짓을 단번에 알아차린 전이진은 아직 사람들이 채 오기 전에 소정남을 따라나섰다.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다 꿰고 있었던 전태윤은 딱히 말리지 않았다. 소정남은 그가 폭발할 때마다 아랫사람들을 못살게 갈군다고 했었다. 이번 기회에 임원들이 어느 정도로 힘들어하는지 똑똑히 볼 셈이었다.임원들이 그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대표님, 저희더러 대체 뭘 어쩌라는 겁니까? 차라리 잘못한 게 있으면 화끈하게 벌을 내리세요. 적어도 이유는 알아야죠.’전이진은 소정남의 뒤를 바짝 따라가 물었다.“이사님, 형 또 왜 저래요?”소정남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나지막이 물었다.“큰형수님 전화번호 알죠?”“알아요.”“그럼 지금 당장 큰형수님한테 연락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오라고 해요. 남편이 지금 질투 나서 눈이 돌았다고. 이 임시 회의는 미리 준비한 게 아니에요. 무조건 채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를 아무거나 꼬투리 잡아서 임원들을 못살게 굴 거예요. 지금 기분이 나빠서 우리한테 화풀이 하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를 구할 분은 형수님밖에 없어요. 이진 씨도 지난번처럼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죠? 이진 씨는 태윤이 동생이라서 반박도 못 하고 집에 가서도 태윤이 눈치를 봐야 하잖아요.”전이진이 잠깐 침묵하
그녀는 전씨 그룹 문 앞에 차를 세운 후 전태윤에게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 내내 전태윤에게 적어도 스무 통은 전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질투에 눈이 먼 그는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예정이 조급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때 다행히 이번에는 전화를 받았다.“태윤 씨, 나 지금 태윤 씨네 회사 앞인데 상사한테 말해서 30분 정도 자리 비우면 안 돼요? 나 할 얘기 있으니까 잠깐 나와봐요.”전태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회의실 창가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회의실 층이 너무 높아 아무리 시력이 좋다고 해도 회사 문 앞에 세워져 있는 차가 하예정의 차인지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태윤 씨, 듣고 있어요? 말 좀 해봐요.”하예정이 다급하게 말했다.“잠깐 나와요. 안 나오면 태윤 씨가 퇴근할 때까지 회사 문 앞에서 기다릴 거예요.”전태윤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잠깐만 기다려. 지금 바로 나갈게.”그는 커튼을 닫고 곧장 회의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전화를 끊은 그가 진지하게 분부했다.“이 회의는 소 이사님이 진행하세요.”소정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역시 내 생각대로 흘러가는군.’하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네, 알겠습니다.”전태윤은 임원들을 뒤로하고 쏜살같이 회의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회사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하예정을 발견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린 채 그가 던지고 간 우산을 쓰고 있었다.우산이 없어 그냥 비를 맞으며 달려 나가려는데 눈치 빠른 프런트 직원이 재빨리 우산을 그에게 건넸다.“대표님, 밖에 비가 많이 와서 이 우산 쓰고 가세요.”“고마워요.”전태윤은 프런트 직원이 건넨 우산을 쓰고 차분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회사 문 앞에 서 있는 하예정을 본 순간 그동안의 질투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는 하예정이 달려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침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맑음으로 바뀌었다.그녀는 전태윤을 신경 쓰고
“당신 정말 나빠요. 어떻게 나한테 설명할 시간도 안 줘요? 태윤 씨가 본 게 다가 아닐 수 있잖아요.”그녀는 그를 밀어내며 화난 얼굴로 그의 팔을 꽉 꼬집었다. 또다시 냉전이 시작되는 줄 알고 너무나도 식겁한 그녀였다.전태윤은 묵묵히 아픔을 견뎌내기만 했다. 너무도 아팠지만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되니까.“진우가 나한테 고백했었는데 내가 거절했어요. 난 이젠 당신 와이프예요. 태윤 씨가 날 버리지 않는 이상 평생 태윤 씨를 떠나지 않아요.”“정말이야?”전태윤은 아직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그녀를 속였다는 걸 알게 되어도 떠나지 않을까?“날 안 믿어요?”전태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예정아, 너랑 김진우가 함께 있는 걸 본 순간 엄청 화났었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냥 본능적으로 피한 거야. 이 일이 네 탓이 아니고 김진우가 일방적으로 널 쫓아다닌다는 걸 나도 알아. 사실... 나 그냥 질투한 거야. 김진우가 널 사랑하고 있고 또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 십여 년이나 됐다는 것만 생각하면 화가 날 정도로 질투 나.”그와 하예정은 알고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십여 년을 알고 지낸 김진우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김진우가 그보다 먼저 그녀를 알게 되었고 먼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정말 어느 것 하나 김진우를 앞선 게 없었다.“나랑 진우... 지난번에도 얘기했었잖아요. 나한테는 그냥 남동생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요. 내가 만약 진우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더라면 태윤 씨랑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죠. 차라리 진우랑 위장 결혼을 해서 언니의 근심을 덜어줬죠.”전태윤은 그녀가 사실대로 솔직하게 얘기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방금 하예정의 말은 이런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김진우를 좋아했더라면 전태윤과는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가 뭘 하든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이었다.“아직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멀리해. 남편이 속이 좁아서 네가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걸 못 보겠어. 김진우가 일방적으로 너한테 매달려도 질투 난단 말이야.”전에도 질투했었지만 그때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녀가 누구와 함께 있든 상관이 없었다. 그녀에게 마음을 준 이후로 화도 났고 이성을 잃는 행동까지 보여줬다.“진우가 오면 쫓아내겠지만 그렇다고 다리를 분질러서 못 오게 할 수는 없잖아요.”전태윤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다시는 널 찾아오지 못 하게 할게.”“뭘 어떻게 하려고요? 어리석은 짓은 절대 해선 안 돼요.”전태윤은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걱정하지 마. 네가 있은 후로 난 절대 어리석은 짓 같은 거 안 해.”그녀와 여생을 함께 보내야 하니 말이다.그는 벌써 김씨 그룹과의 거래를 끊기 시작했고 김씨 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마저 중간에서 가로챘다. 그러면 김씨 그룹에서도 전씨 그룹이 일부러 그러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전태윤은 김씨 그룹의 대표가 직접 찾아와 그 이유를 따져 묻길 기다렸다.하예정이 김진우를 말릴 수는 없어도 김진우의 부모는 그를 말릴 수 있지 않겠는가?“효진이를 봐서라도 너무 심하게 하진 말아요.”심효진 얘기에 전태윤이 자연스럽게 물었다.“효진 씨는 왜 김진우를 말리지 않았대요?”‘설마 효진 씨도 사촌 동생을 도와주려는 건가?’“효진이 열이 나서 병원에 갔어요. 지금 가게에 없어요.”하예정은 그제야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웃음을 터뜨렸다.“설마 효진이가 진우를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효진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진우가 마음을 접길 얼마나 바라는데요.”심효진의 절친으로서 그녀는 누구보다 심효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심효진은 하예정이 김진우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김진우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결과는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김진우가 계속 일방적으로 좋아한다면 나중에 상처받는 사람도 김진우일 것이다.심효진은 김진우의 사촌 누나라 당연히 가
“난 태윤 씨처럼 속 좁지 않아요.”전태윤은 어이가 없었다.“화난 거 맞네 뭐.”“네네네, 화났어요. 내가 문자를 그렇게나 많이 보냈는데 전부 읽씹했잖아요!”하예정은 차에서 내린 후 그를 끌어내리고는 우산을 그에게 건넸다.“얼른 들어가서 일 봐요. 정말 가봐야 해요.”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도 고팠다. 그가 아침 일찍 내려준 대추차도 아직 마시지 못했다. 너무 배고픈 나머지 꼬르륵 하다못해 배까지 아플 정도였다.“네가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성소현 모녀가 성소현 어머니의 여동생 때문에 그녀를 찾아왔기에 그녀를 이곳에 오래 머무르게 할 수도 없었다.하예정은 운전석에 올라탄 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점심때 밥 먹으러 오겠으면 나한테 미리 얘기해줘요. 안 그러면 설거지만 할 수 있어요.”“알았어.”이경혜 모녀가 가게에 있으면 그는 가지 않을 것이다.하예정은 곧바로 차를 운전하여 떠났다. 전태윤은 제자리에 서서 멀어져가는 그녀의 차를 배웅하다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하지만 소정남이 전이진과 함께 망원경으로 회사 앞의 달달한 부부를 지켜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소정남은 임시 회의가 있다고 통지받은 임원들에게 일 얘기를 잠깐 한 후 바로 회의를 마무리했다.“먼 곳의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소정남이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정확히 보이지만 들리지 않아 쌀쌀맞은 대표님이 사모님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차 안에서 애들이 봐서는 안 되는 걸 했겠지, 뭐.’전태윤같이 늘 엄숙하고 차가운 사람도 할 건 다 했다.사랑의 힘이 이토록 대단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질투의 힘이었다.전태윤은 질투에 눈이 멀어 앞뒤도 가리지 않았다.전이진이 피식 웃었다.“형이 왔으니까 이만 가볼게요. 망원경을 형의 책상 서랍에 넣는 거 잊지 말고요. 형한테 들키면 뒤탈은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나가버렸다.그의 말에 소정남은 재빨리 망원경을 챙기고 회의실을 나섰다.
심효진은 엄마의 잔소리를 피하려고 도씨 가문 사모님의 생일 파티에서 드러눕기까지 했다. 그 말인즉슨 집에서 그녀에게 결혼을 심하게 다그친다는 것을 뜻한다.만약 그가 심효진의 병문안을 온 걸 심효진의 어머니가 알게 된다면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비록 심효진이 그의 스타일이긴 하지만 아직 별로 만나보지 못했기에 부모님까지 뵙기에는 너무 일렀다. 소정남은 소지훈 말고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집안 어른들이 알게 된 후 우르르 몰려가 심효진을 놀라게 할까 봐 감히 얘기하지 못한 것이었다.심효진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소정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두 사람은 간단히 몇 마디 주고받은 후 통화를 마쳤다....성소현 모녀는 하예정의 서점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김진우는 성소현 모녀가 온 후에 바로 서점을 나섰다. 왜냐하면 성소현을 만나면 멀리 피하라고 어머니가 귀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씨 가문은 만만치 않은 가문이라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했었다.이경혜는 하예정네 자매가 자신의 조카라고 거의 단정 짓고 있었다. 하예정 가게의 구석구석까지 꼼꼼히 둘러보았고 놓인 물건도 살펴보았다.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딸에게 물었다.“이 서점에 무슨 화장품이 이렇게나 많아?”하예정이 온라인 스토어에서 직접 만든 공예품을 팔고 있다는 건 이경혜도 알고 있었다. 딸이 집으로 가져온 마네키네코를 본 적이 있었는데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었고 딸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었다.이경혜의 질문에 성소현의 얼굴이 화끈거리더니 멋쩍게 말했다.“이건 다 제가 산 거예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필요하든 말든 그냥 싹 다 쓸어 담아서 샀어요. 사고 나서 진정한 다음에 보면 전부 다 필요 없는 물건이고 또 엄마가 뭐라 할까 봐 그냥 예정 씨네 가게에 가져왔어요.”이경혜는 어이가 없었다.“여기가 무슨 수거장인 줄 아나...”성소현은 혀를 날름 내밀더니 엄마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예정 씨가 사촌 동생일 수도 있잖아요. 언니로서 사촌 동생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