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가 전태윤의 혼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관성으로 간 지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윤미는 잘 알고 있었고 물론 다른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다.이윤미는 관성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아보게 하고 싶었지만 이은화에게 들킬까 봐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은화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관성은 전씨 가문, 노씨 가문, 소씨 가문, 성씨 가문의 땅이었다. 이 네 가문이 한통속인 이상 이은화가 관성에서 무언가를 하려 해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이윤미가 아직도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이은화의 말투가 온화해졌다.“윤정이한테서 들었어. 네 오빠들이 밖에서 다른 여자를 뒀다고 네가 형수님 앞에 들쑤셨다며? 게다가 윤정이 은행 카드도 동결시켰다며?”이윤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제가 한 거 맞아요. 근데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이미 결혼했으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유부남이라면 가정에 충실하고 결혼생활에 충실해야 하는 거잖아요. 형수님들도 저보다 윤정이를 더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저 체면을 봐서 저한테 잘해주는 거라는 것도 알고 있고요.”“하지만 다 같은 여자잖아요. 그래서 전 형수님이 불쌍해 보여요. 속고 있는 모습을 보고만 있고 싶지도 않고요. 오빠들이 밖에 다른 여자를 두고 있다는 거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요. 형수님들만 모르죠. 어머니도 아시잖아요.”“모른 척하진 못하겠더라고요. 배신당했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반항할 것인지 아닌지는 형수님들 몫이지만요.”“...”“네 오빠들은 그냥 그 여자들을 갖고 노는 것뿐이야. 네 오빠들의 기분을 풀어주는 화풀이 도구일 뿐이라고.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내가 그 여자들이랑 결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이씨 가문 가주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윤미야, 네가 한 건 얼핏 보면 맞는 일이야. 하지만 네 친오빠잖니...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함으로 인해 네 오빠들 결혼생활에 금이 갔잖아. 이 결과가
“윤정이 개인 카드라면 저도 동결할 방법이 없어요. 자기 카드에 있는 돈을 쓰면 되잖아요. 최근에 엄마가 준 카드를 윤정이가 너무 많이 긁어서 제가 동결시킨 거죠.”“윤정이 카드에는 돈이 얼마 없어.”이윤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얼마 없다고요? 그 정도면 많은 거죠. 사람들이 다 부자인 줄 알아요? 평생 번 돈을 다 모아둔다고 해도 그것보다 적은 사람들도 많아요. 윤정이는 그게 적다고 생각한대요? 제가 카드를 동결시켰다고 엄마한테 더 달라고 하던가요?”“윤정이는 고의로 제 차를 망가뜨렸어요. 차를 수리하는 데 몇천만 원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윤정이가 배상해야지 누가 배상하나요? 자매라고요? 그렇게 말하면 윤정이는 이씨 가문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윤정이가 이씨 가문 사람이라고 해도 제가 왜 배상을 요구하지 말아야 하는데요?”이은화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윤정이 명의로 된 집들 임대료만 해도 한 달에 몇백만 원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한 달에 버는 것과 비교하면 몇 배, 십몇 배나 되는 돈이라고요.”“됐어... 윤정이 잘못이 맞긴 해. 내가 돌아가면 윤정이한테 네 차 수리비를 배상하라고 할게. 대신에 내가 준 카드는 돌려줘. 그리고 네가 윤정이 용돈 액수 좀 줄이면 되잖아. 화도 좀 가라앉히고... 또 내가 윤정이를 더 예뻐한다느니 이런 말은 하지 말고.”‘윤정이를 더 예뻐하는 거 맞으면서...’“엄마, 저더러 윤정이 용돈을 깎으라고요? 제가 손을 대면 끝도 없다는 거 아시죠? 이씨 가문 친자식도 아니면서 이씨 가문에서 자랐으니 이젠 그 은혜를 갚아야죠.”“전 아예 용돈을 주지도 않을 거예요. 알아서 돈을 벌라고 할거고요. 이씨 가문에서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는 셈으로 말이죠.”“윤미야, 그렇게 하면 윤정이가 난리를 피울 거야.”“엄마, 윤정이가 소란을 피우는 게 무서우시면 저한테 맡기겠다고 하지 마시든가요...”이은화는 또 목이 메었다.“윤미야,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니?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이윤미는 억울하게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이은화가 말했다.“꽤 독하다니까...”그녀는 친딸이 후계자를 하기에 딱 맞는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안심했다.이윤미는 무자비함과 독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은화는 이씨 가문이 그녀 손에 넘어가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경혜는 하예진을 가주로 삼고 싶어 했지만 하예진이 과연 이윤미랑 비교할 수 있겠는가...게다가 하예진은 싱글맘인 데다가 식당을 두 곳이나 여는 바람에 평소에도 바빠서 장성까지 가서 이윤미와 가주 자리를 다툴 여력이 없을 것이었다.이렇게 생각하자 이은화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하지만 하예진 뿐이 아니었다. 이은화는 다른 사람들도 막아야 했다. 큰 언니의 딸과 외손녀만 처리하면 이은화의 자리는 이윤미에게 넘겨질 것이었다.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그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한편, 이윤미는 이은화가 전화를 끊자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그리고는 검은색 회전의자에 기대어 의자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그때, 이윤미의 휴대폰이 또 울렸다. 비서인 방윤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방윤림은 그녀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공 비서가 관성에 간 건 사실이지만 그날로 비행기를 타고 강성으로 돌아갔대.]그리고 또 이은화가 내일 아니면 모레 돌아올 거라고 전했다.그녀 예상대로 이은화가 계획했던 일들은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은화는 이경혜도 만난 듯했지만 안 좋게 헤어진 것 같았다.이윤미는 방윤림이 보내온 메시지를 받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알겠다고 답장했다.그러자 방윤림이 곧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이윤정이 엄마한테 고자질해서 방금 한바탕 꾸중을 들었거든. 기분이 좋진 않지.]그러자 방윤림이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지금 데리러 갈까? 바람이나 쐬러 가자.]이윤미는 망설이지 않고 알겠다고 답장했다.이윤미는 돌아온 지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항상 그녀 편에 서주는 사람조차 별로 없었다.하지만 그런 그녀가 가장 믿는 사
이윤미는 알겠다고 하며 방윤림에게 말했다.[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오는 길에 길가에 있는 상점에 가서 아이스크림 있는지 봐봐. 브랜드 상관없이 컵에 담긴 거면 돼.]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이면 여기저기 안 흘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윤미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평소 같았으면 방윤림은 그녀에게 찬 음식을 적게 먹으라고 권했을 것이지만 오늘은 그녀의 기분이 안 좋은 것을 생각해 따뜻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이윤미는 그의 대답을 듣고서야 휴대폰을 내려 놓았다.휴대폰을 책상 위에 놓고 이윤미는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갔다.이씨 그룹 사옥은 고씨 그룹 사옥만큼 높지는 않지만 주변에 있는 다른 사옥보다는 몇 층 높았다.이윤미의 사무실은 옥상보다 한층 낮았기에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면 주변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강성은 번화한 도시였다.밤에는 곳곳에서 불빛이 눈 부시고 보이는 거리마다 차들이 빼곡히 들어서서 시끌벅적해 보였다.다른 사람들은 이 밤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비록 이은화가 회사에 없으면 그녀가 회사에서 최고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왕관을 쓴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니었다. 공적인 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방해했다. 특히 세 명의 친오빠는 이윤미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며 그녀의 일에 협조해 주지 않았다.그녀는 고의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친오빠들이 괴롭힐 때마다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고는 울면서 달아났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을 시켜 오빠들을 제압했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했다. 이윤미는 오빠들이 자기에게 아무 권력도 없다고 착각하게끔 했다.오빠들이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만큼, 그녀도 마찬가지로 오빠들을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그들이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내연녀가 생기면서 결혼에 충실하지 않자 이윤미는 그들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형수님들에게 알렸다. 그래서
이윤미가 퇴근시킨 것이었다. 그녀가 야근을 하는 건 자기 회사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씨 그룹에 있는 비서는 도울 수 없는 일이었다.밖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일부 부서는 야근을 하고 있었는데 이윤미의 사무실이 있는 층에는 없었다.그녀는 사무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입구로 향했다.엘리베이터 입구에 도착하자 어떤 남자가 꽃다발을 안고 엘리베이터 입구에 기대어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그는 이윤미와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바로 정군호가 그녀와 엮으려던 강씨 가문 도련님인 강명훈이었다.정군호가 두 사람을 엮어주려 할 때, 그녀는 방윤림에게 부탁해서 강명훈을 조사하라고 했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게 되었다.술을 마시며 놀러 다니는 걸 좋아하는 데다가 여자들이랑 놀기만 하는 도련님을 소개시켜주다니...이은화도 이윤미의 편을 들면서 선을 보지 말라고 거절했지만 그녀를 친딸로 보지 않던 정군호는 끝까지 강명훈과의 만남을 주선했다.“윤미 씨.”강명훈은 똑바로 서더니 꽃다발을 안고 이윤미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웃으며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넸다.“퇴근했어요? 윤미 씨가 회사에서 야근하고 있다는 거 알고 일부러 꽃다발을 사서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어요. 제가 밥 사드릴게요.”이윤미는 그가 건넨 꽃다발을 한 손으로 밀치며 차가운 표정으로 거절했다.“감사합니다만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강명훈의 곁을 지나갔다.“윤미 씨.”강명훈은 이윤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피해버렸다. 그러자 그는 다시 이윤미 앞으로 달려가서는 두 팔을 벌려 그녀 앞을 막는 것이었다.그의 시선은 이윤미의 얼굴로부터 점점 아래를 향했다.정군호는 강명훈에게 그가 아주 마음에 든다면서 그에게 이윤미를 꼬시라고 했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이씨 가문의 사위로 될 수 있다면서 말이다.이씨 가문 여자들은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 데릴사위를 들이는 편이었다. 데릴사위라고 하면 많은 남자들이 수치스
“윤미 씨, 그러지 말고요. 저 윤미 씨한테 첫눈에 반했거든요. 잠깐 얘기 정도는 나눌 수 있잖아요.”강명훈의 시선은 이윤미의 슈트 넥라인에 떨어졌다.‘시골에서 자랐어도 예쁘네... 몸매도 괜찮고. 역시 이씨 가문의 친자식이야. 역시 이런 귀한 기질은 타고난 거라니까. 자란 환경에 영향받지 않았어.’그녀의 좋은 몸매를 보고 있자니 강명훈은 마음이 근질근질해져서 침을 흘렸다. 그는 당장 이윤미에게 달려들고 싶었고 그녀와 몇 번이고 침대에서 구르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이윤미도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이렇게 생각한 강명훈은 사양하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다.이윤미는 그의 건방진 손을 덥석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강명훈은 똑바로 서지 못하고 앞으로 넘어지려 했지만 내친김에 두 팔을 벌려 그녀를 꼭 껴안으려 했다.그러자 이윤미가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연약해 보이는 이윤미가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땅바닥에 심하게 넘어지자 강명훈은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았고 팔이 아픈 데다가 머리도 어지러워서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땅에 넘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이윤미는 발을 들고 그를 걷어차 버렸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었기에 뾰족한 굽으로 몸을 걷어차니 그는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강명훈은 반항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 기회를 놓쳤고 일어나기도 전에 이윤미에게 심하게 걷어차였던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세게 걷어찼고 강명훈은 아파서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얼굴, 입, 손, 그리고 발까지 이윤미에게 안 맞은 곳이 없었다.그녀는 강명훈의 손등을 짓밟았고 그는 너무 아픈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때리지 마요, 때리지 마요... 윤미 씨,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때리지 마세요...”강명훈은 끊임없이 용서를 빌었다.‘어르신이 나를 속이신 건가? 분명 윤미 씨는 연약하고 만만하다고 하셨는데... 억지로 들이대면 넘어올 거라고, 나랑 잠자리만 가지면 결혼하게 될 거라고 했었는데...’‘이 여자가
앞으로 강명훈은 여기에 한 걸음도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었다.비록 이씨 가문의 부귀영화는 매우 매력적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누릴 용기가 없었다.‘이씨 가문의 딸들은 역시 다들 무서운 여자들이야...’방윤림은 강명훈이 도망치듯 뛰쳐나오는 것을 보고 안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짐작했다. 그는 걱정이 돼서 이윤미에게 전화를 하려 했지만 그녀가 천천히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방윤림이 이윤미를 데리러 왔기 때문에 이윤미는 운전을 하지 않았다.“이 대표님.”당직인 경비원이 이윤미가 나오는 것을 보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그녀는 갑자기 멈춰 서서 당직을 서고 있는 경비원 몇 명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그러자 그중 한 경비원이 대담하게 물었다.“이 대표님, 저희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아까 뛰쳐나온 그 남자, 보셨어요?”그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경비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강명훈 씨는 정군호 어르신께서 데리고 들어오신 분입니다. 어르신께서 친구라고 하시면서 회사 구경을 시켜주신다고 하더라고요.”“다만 어르신은 물건을 사러 가신다며 먼저 회사를 떠나셨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그러자 이윤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엄숙하게 말했다.“앞으로 제 동의 없이 강명훈 씨를 회사에 들여보내지 마세요. 누가 데리고 오든 회사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게 하세요.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제가 어떻게 나올지 저조차도 모르거든요.”‘역시 아빠가 회사에 데려온 거였네. 참 아빠 한 명 잘 뒀어. 친 딸한테도 이렇게 대하다니... 윤정이를 편애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정군호는 친 딸이 아닌 이윤정한테는 고현에게 시집가서 편하게 살라고 하면서 친 딸인 이윤미는 강명훈 같은 놈과 엮어줬던 것이었다.경비원들은 또 몇 번이나 서로 마주 보다가 이윤미의 말이 정군호의 말보다 무게가 있다고 생각해서 얼른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이윤미는 그제야 회사를 나왔다.“윤미 씨, 무슨 일이야? 방금 그 남자 강명훈인 것 같던데...”정군호가 이윤미
방윤림은 그녀랑 같이 바람을 쐬러 온 것이었는데 이윤미한테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았다.그저 운전대가 향하는 곳으로 갔다.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후에야 이윤미는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나한테 변태 놈을 주선해 줬는데 말이야. 오늘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그놈을 만났어. 내가 가려는 길을 막으면서 나에게 손을 대려고 하더라고. 네가 가르쳐준 대로 그놈을 쓰러뜨리고 세게 걷어찼지만 말이야.”“다시 찾아오진 않을 것 같아.”방윤림은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이었기에 무술 실력도 뛰어났다.이윤미도 싸울 줄은 알았지만 그저 많이 싸워서 알게 된 것이지 실제로 무술을 배운 적은 없었다.그녀에게 잘해주지도 않는 양부모가 돈을 써서 무술을 배우게 했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이윤미 곁으로 온 방윤림이 그녀가 힘이 세다는 것을 발견하고 몇 번 무술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강명훈을 땅에 내동댕이칠 수 있었고 그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방윤림은 눈빛을 흐리며 차갑게 말했다.“윤미 씨, 진작에 말했어야 했어. 그랬다면 내가 그놈 손을 부러뜨릴 건데...”‘감히 윤미 씨를 갖고 놀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정군호 어르신도 너무했네...”정군호는 이씨 집안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었지만 이윤미의 친아버지라는 건 사실이었다.“윤미 씨, 내가 어르신을 찾아가서 따질까?”방윤림이 지켜야 하는 사람은 이윤미뿐이었고 이은화마저도 그를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정군호 같은 이씨 집안에서 권세가 없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그러자 이윤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 혼자 처리할 수 있거든... 엄마가 며칠 후에 돌아올 거니까.”“몸매는 화끈하지만 생긴 건 천사처럼 착해 보이는 여자 좀 찾아봐. 유흥업소 같은 곳에 틀어박혀서 사는 사람 말이야. 배경도 좋으면 더 좋고. 아버지한테 큰 선물을 해줄 생각이거든.”‘감히 나를 이렇게 대한다고? 똑같은 방식으로 돌려주고 말겠어...’‘배경이 있는 여자를 찾으면 엄마가 돌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