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만실 문이 열렸다.문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모두 몰려들었다.한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웃으며 성기현에게 물었다.“유청하 보호자세요?”“네, 맞아요. 제 아내가 아기를 낳았어요? 제 아내는 어때요? 들어가서 아내를 좀 볼 수 있을까요? 제 아내는 언제 나올 수 있어요?”성기현은 연이어 물음을 내던지며 그의 아내에 관한 물음을 계속해서 물었다.하예진은 두 집안 어르신들에게 밀려 뒤로 물러났다. 성기현이 유청하를 관심하는 모습을 본 하예진은 유청하가 그의 사촌 오빠에게 시집가는 것이 행운스럽다고 마음속으로 연신 감탄했다.간호사가 웃으며 대답했다.“산모는 상태가 매우 좋아요. 아들을 낳으셨어요. 모자가 모두 안전해요. 아기가 3.3kg에요. 좀 이따가 상모가 곧 나올 거예요. 아기가 먼저 나왔어요.”모자가 무사하다는 말을 들은 이경혜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유청하 모자가 무사하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맴돌았고 그제야 이제 막 이 세상에 온 새 생명을 보러 가려고 했다.성기현은 간호사의 품에서 아들을 넘겨받아 한 번 보고는 장모님에게 건네며 말했다.“어머님, 아기 먼저 안고 방으로 가세요. 제가 여기서 청하 씨를 기다릴게요.”외손자를 받아 안은 유청하의 어머니 최연수는 어린 외손자가 딸을 닮았다고 기뻐하며 말했다.“나도 여기서 기다릴게.”성씨 가문의 손자는 나왔지만, 그녀의 딸은 아직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최연수는 외손자를 이경혜 부부에게 맡기며 이경혜 가족들이 아기를 안고 방으로 돌아가서 유청하를 기다리라고 부탁했다.아기가 나오자 분만실 앞을 지키는 사람이 절반으로 줄었다.그러나 이경혜와 하예진은 곧 산후 회복실에서 나와 분만실 문 앞으로 돌아와 유청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성소현 부녀와 예준하는 산후 회복실에서 아기를 지키고 있었다.전태윤은 하예정을 데리고 급히 도착했고 이내 이경혜와 하예정에게 인사했다.하예정이 물었다.“사촌 형수님께서 아기를 낳으셨어요?”“왜 왔어? 임신 중이고 신혼여행이라고 들었는데
다행히 유청하는 남편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고 곧 의사와 간호사에게 밀려 분만실에서 나왔다.“여보.”성기현은 가장 먼저 아내에게 달려갔다.유청하는 머리가 헝클어지고 입술이 터진 채로 밀려 나왔다.다행히 유청하의 정신상태가 아주 좋았다. 모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는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기현 씨, 제가 아들을 낳았는데 저를 많이 닮았다고 하네요.”최연수가 말을 이었다.“아들이 어머니를 많이 닮으면 좋다고 했어.”성기현은 허리를 굽혀 사랑하는 아내의 이마에 뽀뽀했다.“여보, 고생 많았어요. 앞으로 우리 다신 낳지 맙시다. 아기 한 명이면 충분해요.”유청하의 친정 식구들은 그녀가 아들을 낳기를 바라고 있었다.성씨 가문의 사업이 엄청나게 크고 성기현이 또 아이 한 명만 낳는다고 했다. 다행히 유청하는 맏며느리로서 손자를 낳았으니 그녀의 새댁 가족들에게 후계자를 낳아 준 셈이다. 그렇게 되면 유청하가 성씨 가문에서의 지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오늘 출산을 경험하게 된 유청하도 자신이 아들을 낳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들이 앞으로 그녀가 겪었던 출산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그러자 유청하도 이내 대답했다.“그래요. 낳지 말아요.”그녀도 낳고 싶지 않았다. 너무 아팠다!경험해보지 못한, 상상 그 이상의 아픔이었다.산후 회복실로 돌아온 유청하는 침대에 누워 쉬면서 아기를 둘러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우리 아기를 안고 저한테 와줘요. 저도 좀 볼래요.”이 아기는 그녀가 임신 10월 만에 엄청난 통증을 겪고 낳은 아이였기에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분만실에서 아기가 태어나자 간호사가 아기를 깨끗하게 씻겨주었고 분만실 밖으로 보내기 전에 유청하가 아기를 뽀뽀하게 해주었다.성기현은 허리를 굽혀 아기 침대에서 아기를 안아 들었다.단지 갓 태어난 아기였기에 작고 말랑말랑해서 안아 보면 무게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성기현은 특별히 조심스럽게 안았다.아들을 안은 성기현은 동작이 너무 커
유청하는 아들을 안고 몇 번이고 뽀뽀하며 웃었다.“제가 낳았으니 당연히 저를 닮아야죠. 입은 기현 씨를 닮았네요.”그녀는 남편을 한 번 쳐다보았다.“아기는 우리 두 사람 아기이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을 골고루 닮아야 해요. 근데 저를 더 닮았네요.”성기현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당신이 더 예뻐. 난 당신만큼 예쁘지 않아.”다들 웃음보가 터졌다.유청하와 성기현은 외모가 나무랄 데 없이 잘 생겼다. 지금 아기가 너무 작아서 티가 나지는 않지만 좀 더 자라면 분명 멋진 아이로 자라날 것이다.유청하는 금방 출산했기에 휴식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병원에서 잠시 앉아 있다가 모두 병원을 떠났다.성기현과 최연수가 병원에 남아 유청하와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병원에서 나오자 하예정 부부는 성씨 가문으로 따라갔다.성씨 가문에 손자가 태어났으니 모두 매우 기뻐했다.하예정 자매는 많은 영양제를 사서 성씨 가문으로 보냈다.이경혜는 두 조카에게 말을 건넸다.“이렇게 많은 영양제를 사 오다니. 우리 집에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청하가 방금 임신했을 때 사 온 보양식들도 아직 다 못 먹었어. 고급 보양식들이 너무 많아 둘 곳도 없어.”유청하는 임신 중에도 비싼 보양식들을 많이 먹었지만, 너무 많아서 다 먹을 수 없었다.하예정이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유청하는 시어머니를 보며 집에 있는 그 보양식을 하예정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다.하예정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건 저와 예정의 작은 성의에요. 사촌 형수님께서도 이제 아기를 낳으셨으니 더는 토하지 않으시겠네요. 이 영양제들로 몸보신하셔야 해요. 임신 기간에 사촌 형수님은 배만 컸지 형수님 몸에 살이 찌는 걸 못 봤어요.”유청하는 토를 심하게 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 뒤로도 밥 먹을 때마다 토하지는 않았지만 배만 커지고 살이 찌지 않았다.지금 뱃속의 짐을 내려놓았으니 산후조리 기간에 보양식으로 잘 보양해야 하기에 가장 좋은 보양식을 선물했다.“청하 대신 내가 감사 인사할게.”
그는 요즘 임신 관련 서적을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임산부도 종일 누워있거나 앉아 있기보단 적당히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다. “큰이모는 네가 아주 믿음직스럽단다.” 이경혜는 이 조카사위가 무척 맘에 들었다. 하예진을 바라 보고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작은 조카는 운 좋게도 아내 바라기 전태윤을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큰 조카는 이경혜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녀의 생활이 이혼 후 좀 나아지나 싶었다. 게다가 노동명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은 마치 하예진과 장난이라도 치듯이 노동명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쳤다. 비록 재활 치료를 하고 있으나 언제 완전히 회복될지는 그 아무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노동명이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경혜는 하예진과 노동명의 교제를 반대할 심산이다. 큰 조카딸은 지난 몇 년 동안 잘 지내지 못했다. 그녀는 하예진의 남은 인생이 하예정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애인과 행복하고 즐겁기를 바란다. 그녀를 속물이라 욕하지 말기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기적이기 마련이다. 윤미라도 노동명이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진 이혜진과의 교제를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노동명이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자 이혜진을 길길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예진의 친이모인 이경혜가 하예진부터 고려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경혜는 마음속 솔직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의사는 노동명이 재활 치료를 열심히 받고 있으니 완전히 회복될 기회가 있다고 하였다. 게다가 하예진도 노동명한테 조금 감정이 생긴 것 같다. 그리하여 이경혜는 우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자고 생각했다. “노 대표는 요즘 어때?” 이경혜가 넌지시 물었다. 하예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오전마다 재활 치료를 하고 오후엔 회사로 가서 일해요. 가끔 저녁에 취소할 수 없는 미팅이 생길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저한테 시간 나면 같이 미팅에 참석해달라고 부탁해요.” 가끔 노동명과
이혜진은 이경혜의 말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언젠가 세계 각지에서 저의 브랜드를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언니, 그날이 언젠간 꼭 올 거야.” 하예정은 언니한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녀는 하예진이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경혜도 웃으며 말했다. “이씨 가문의 딸은 하나같이 다 대단하단다.” 그중 장녀의 능력이 제일 출중했다. 몇십 년 전 거의 멸문할 뻔한 그 사건만 없었더라면 하예진은 이경혜 동생의 장녀였을 거다. 이씨 주 가문의 맏딸은 이제껏 다들 능력이 출중하였다. 혹여 외동딸이라 할지라도 어느 누구한테 뒤처지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윤미 그녀도 만만치 않다. 그녀는 양의 탈을 뒤집어쓴 늑대다. 현재도 이씨 가문의 대부분 이들이 그녀의 나약한 겉모습에 속고 있다. 그런 그녀의 진짜 모습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녀의 친엄마인 이씨 가주뿐일 거다. 하예정은 입을 뻥긋거리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니는 해낼 만한 능력이 있다. 하지만 권력을 추구하는 길이 치열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두 세대 간의 원한이 얽혀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씨 가주 역시 잔혹하기 그지없다. 친언니가 그녀를 업어 키우다시피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친언니의 일가를 몰살하려 하였고 두 조카딸마저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의 엄마와 큰이모의 운이 좋아 살해당하지 않았다. 보육원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지만, 살아있는 것이 어딘가. 그녀의 엄마는 나중에 입양된 후에도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러다가 아빠한테 시집간 후에야 안정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하예정 기억 속 부모님은 서로 극진히 은애하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엄마가 연이어 두 딸만 낳았다고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두 딸한테 단 한 번도 싫은 티 낸 적 없고 남들처럼 몰래 아들을 낳으려 하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그들의 모든 사랑을 두 자매에게 쏟아부었다. 그 교통사고만 없었다면 부모님은 금실 좋은 부부로 백년해로하였을
이경혜는 방금 하예정이 입을 달싹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하예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동생이 강성 이씨 가문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리라고 짐작하였다. 자매가 밖으로 나가니 홀에는 성문철, 전태윤 그리고 예준하만 남았다. 전씨 할머니는 전태윤 부부를 따라 병원에 왔으나 성씨 가문에는 따라오지 않았다. 전태윤은 사람을 시켜 할머니를 리조트로 돌려보냈다. 전태윤은 전씨 할머니가 도중에 다른 곳에 들릴지 말지를 알 길이 없다. 설사 알았다 해도 관여할 수 없다. 전씨 할머니는 조용히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지는 못하는 그런 노인이다. 세 사내는 차를 마시며 사업 이야기를 나눴다. 본채에서 나와 계단에서 내려올 때 하예진이 하예정을 부축하려고 하자 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 “언니, 나 아직 세 개월도 안 되어서 몸에 아직 아무런 변화도 없어. 그저 얼마 전에 입덧하니까 내가 확실히 임신했구나 하고 실감이 갔을 뿐이야. 지금은 잘 먹고 잘 자요. 그러니까 굳이 부축해 줄 필요는 없어.” 하예진도 웃었다. “어떻게 한 임신인데, 조심할수록 좋지. 특히 첫 세 개월은 더더욱 조심해야 해. 그리고 예전에 내가 수빈이를 임신했을 때 너도 날 이렇게 보살폈었잖아.” “시간 참 빨리 지나간다. 언니가 수빈이를 임신한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세 살이 넘었어.” “그러게, 시간 참 빨리 간다. 예전에 울음보였던 네가 벌써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니. 너도 어른이 되어가고 나도 점점 늙어가네.” 하예진의 말에 하예정이 발끈하며 말했다. “언니가 늙었다니, 이제 겨우 30대 초반인데. 지금 사람은 다 장수해서 이후에 아마도 60대 이후에나 퇴직할 수 있을 거야. 언닌 아직 젊거든.” 그녀는 다정하게 언니의 팔짱을 끼고 언니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스스로 늙었다고 하지 마. 언닌 나보다 5살 많잖아. 언니가 늙었으면 나도 늙어가고 있다는 거겠지. 하하하, 우린 아직 젊었어.” “그래, 그래. 우린 아직 젊어. 우린 아직 해야 할
하예진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윤미 씨도 지금 몹시 힘든데 갑자기 돌아간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이윤미는 심지어 지금 이씨 가문 가주의 딸이다. 만약 그녀가 바꿔치기 당하지 않았고, 어렸을 적부터 이씨 가문의 후계자로 배양되었다면, 계승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지난 20여 년간을 집사의 집에서 커왔다. 받은 교육이나 견식 그 어느 것 하나도 이씨 가문과 비길 수 없다. 이윤미가 이씨 가문으로 돌아갔지만, 가짜 딸인 이윤정은 계속 이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로 남아있다. 그러니 외부인의 눈에는 이씨 가문 일가가 이윤정을 편애하는 것처럼 보였다. 필경 20여 년을 함께한 감정이 있으니 말이다. 이씨 가주는 이윤정이 가짜 딸인 것을 모르고 그녀를 성심성의껏 키웠다. 이윤정이 특별히 출중하지 않더라도 방금 이씨 가문으로 돌아온 이윤미보다는 나았다. 이씨 가문 사람들은 이윤정이 커가는 모습을 봐왔다. 이씨 가문으로 돌아온 지 2년도 채 안 되어서일까, 이윤미는 아직 이씨 가문에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씨 가문 가주가 이윤미를 대하는 태도도 별로 좋지 않았다. 이윤미를 자주 꾸짖었고 이윤정을 편애하는 듯하였다. 이런 행동들이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르지 못할 거라는 느낌을 주었다. 하예정이 말하였다. “만약 언니가 이씨 가문을 물려받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언니를 도울 거야. 게다가 난 언니의 능력을 믿어. 자신감을 가져, 언니는 해낼 수 있어!” “만약 언니가 진짜 가주가 되면 우빈이한테 여동생 하나 낳아줘야 해. 만약 동명 씨가 괜찮다고 결혼을 고려해 봐도 좋을 것 같아. 다만 노씨 가문에서 그들의 손녀가 엄마의 성을 따르는 것을 동의할진 모르겠네.” 하예진은 얼굴을 붉히며 동생한테 화난 척 말하였다. “김칫국 그만 마셔. 내가 이씨 가문을 물려받을지 말지는 아직 미지수야. 내가 말했다시피 윤미 씨 꽤 괜찮아. 윤미 씨도 지금 가주의 직무를 배우고 있잖아. 비록 윤미 씨의 엄마가 바로 우리 외할머니
만약 별로인 사람한테 시집간다면 그건 혼자 살기만 못하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른 법이다. “나와 태윤 씨의 결혼식에서 이씨 가문 가주를 보았어. 관성에 온 뒤 이내 떠나가지 않더라고. 이 가주가 큰이모를 만나러 갈 줄 알았는데 지금 6개월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미동도 없어.” 하예정은 전에 이 가주를 본 적이 없다. 결혼식에서 전태윤이 그녀한테 알려주었다. 이 가주를 불러 결혼 축하주를 마시게 한 건 하예정의 계획이었다. 그녀는 큰이모가 이 가주의 얼굴을 확인해 보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설사 이경혜와 이윤미가 친자확인 검사를 했을지언정 말이다. 반드시 반복적으로 확인하여야 한다. 복수를 하려면 당사자의 얼굴 정도는 확실히 알아둬야 하기 마련이다. “도둑이 제 발 저려서일 수도 있고, 이미 돌아갔을 수도 있어.” 하예진은 동생의 결혼식 일로 바쁘다 보니 이 가주한테 신경 쓰지 못하였다. 그녀는 심지어 동생의 결혼식에서 이 가주를 보지도 못하였다. “난 이 가주가 큰이모와 외할머니를 조사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예정이 추측하며 말했다. “전임 가주의 두 딸이 관성에 있다는 소문이 강성에 쫙 퍼졌어. 윤미 씨도 큰이모를 찾아냈는데 이 가주처럼 총명한 사람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이 가주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잖아. 필시 조사를 하는 것이 분명해. 혹은 몰래 큰이모를 관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그리고 우리 둘도 말이야. 나는 아빠를 닮아서 이 가주가 피로연에서 나를 봤어도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을 거야. 하지만 이 가주가 언니를 보았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하예정은 아빠를 닮았고 하예진은 엄마를 많이 닮았다. 이경혜가 말하기를 그녀들의 엄마는 외할머니를 많이 빼닮았다고 한다. 큰이모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반반씩 닮았다. 그래서인지 이경혜와 이윤미의 얼굴은 서로 약간 닮았다. “며칠 뒤에 난 강성으로 가서 그곳에서 시장조사를 할 생각이야.” 하예진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작정이다. 이후에 이씨 가문을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