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주가 이윤미에게 사고 상황을 만들어 주어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쌓게 하고 싶어 한다 해도 이윤미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 않을 것이다.혹여라도 차가 고장이 났을 때 다른 차량에 의해 추돌당해 차 사고라고 나게 된다면 이윤미가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장담을 하기 어려웠다.겉으로는 이 가주가 여전히 이윤정을 편애하고 친딸을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 이 가주는 핏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이 가주는 친딸을 어렵게 되찾았기에 아무리 모질어도 이윤미의 목숨으로 장난을 치지 않을 것이다.“그건 윤미 씨 일이에요. 우리는 구경이나 하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만약 전호영이 지나가다가 이윤미를 만나게 된다면 나서서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전호영은 늘 자신의 형수 편에 서 있었다.이윤미의 친엄마가 하예정의 외할머니를 죽인 범인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고현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그녀도 전호영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고빈은 돌아왔어요?”전호영이 대답했다.“아니요. 고 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도 집에 안 계세요. 오늘 저녁은 우리 둘만 먹어야 할 것 같아요.”고 아저씨와 고 아주머니가 피할 줄 알았으면 일찍 와서 낭만적인 저녁을 준비하는 건데.고현이 미간을 찌푸렸다.고현은 분명 집에 미리 전화해서 부모님께 돌아와 밥을 먹겠다고 알려주었고 부모님도 알았다고 대답하셨는데도 저녁에 밖으로 나가신 것이다.그녀와 전호영이 단둘이 있을 기회를 주려는 것이 틀림없었다.집 안에는 하인들만 있었다.두 사람이 집안에 들어서자 곧 하인들도 물러갔다.식탁에는 고현이 좋아하는 요리가 많이 차려져 있었다.전호영이 웃었다.“우리 먼저 밥 먹어요. 다 먹고 저랑 영화 보러 갈래요?”“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시간이 없어서.”“그럼 오늘 밤에 저랑 나가서 데이트 제대로 합시다.”전호영은 말하면서 또 고현의 손을 잡으려 했다.전호영은 고현이 휴게실에서 그에게 여성 옷을 갈아입어 보인 것으로 보면 고현도 분명 그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
“좋아요. 오늘 밤 제가 고현 씨가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고현이 전호영과 데이트하는 것을 동의하기만 하면 되었다.고현은 전호영을 보더니 웃으며 말을 건넸다.“호영 씨와 함께 있으면 즐거워요. 당신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전호영은 더 크게 웃었다.전호영의 결혼 상대는 고현이고 또한 고현은 차분한 성격이라 그녀가 전호영과 달콤한 말을 하는 사치는 바라지도 않았다.고현은 달콤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전호영에게는 그 말이 사랑의 말로 들렸다.달콤했다.밥을 먹을 때 전호영은 고현에게 세심하게 배려하다 못해 먹여줄 기세였다.전호영이 짚어준, 눈앞의 산처럼 쌓아 올린 요리를 바라보며 고현이 말했다.“저에게도 손이 있어요. 저 스스로 음식을 짚어 먹을 수 있거든요. 보세요. 제 그릇에 호영 씨가 짚어준 요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제가 밑에 있는 밥을 먹을 수 없잖아요.”고현이 말하자 전호영은 바로 가서 밥 한 그릇을 따로 떠다 주었다.그리고 국 한 그릇도 떠주었다.고현도 공용 젓가락을 들고 전호영 그릇에 요리들을 가득 짚어주었다.전호영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릇에 수북이 쌓인 요리를 먹는 고현을 바라보았다.“밥이나 좀 드세요. 저만 보지 말고.”“저는 고현 씨를 보는 게 더 좋아요. 고현 씨가 저의 그릇 안의 요리인걸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에요.”고현이 이내 말을 이었다.“저 말고도 또 좋아하는 요리들이 많은가 봐요??”“없어요. 절대로 없어요. 저는 당신이 가장 좋아요. 다른 요리들은 다 안 좋아해요.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혼자 먹는 것을 좋아하거든요.”“혼자 먹는 것과 한가지 요리만 먹는 것은 달라요.”“봐봐요. 제가 그렇게 많은 반찬을 짚어주었는데 호영 씨는 다 좋아하잖아요.”전호영은 멈칫했다.그는 음식을 집어 먹던 동작을 잠깐 멈추어 먹어야 할지 말지 망설였다.전호영의 고민하는 모습을 본 고현은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제가 가장 맛있는 요리라고 말하면 되잖아요. 얼른 드세요.”
“아파요. 하지만 제가 이겼으니 고현 씨도 저와 내기를 해야 해요.”고현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전호영을 바라보았다.“그러죠. 저도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편이에요. 약속하죠. 저도 인생을 내걸게요.”고현의 약속을 받아낸 전호영은 바로 일어나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그는 배를 움켜쥐고 서둘러 화장실로 뛰어갔다.고현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하지만 전호영이 그녀에게 진심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전호영이 화장실에서 나왔다.“병원으로 가볼까요?”고현은 걱정스레 물었다.전호영은 허리를 쭉 펴면서 말했다.“아니요. 괜찮아요. 우리 나가서 소화도 좀 시킬 겸 산책하러 가요.”전호영은 여태껏 자라면서 이렇게 많이 먹어본 적 없었다.배가 터지도록 너무 많이 먹었다.다행히 이겼다.고현의 한평생을 이겼다.고현이 평생을 걸고 전호영과 내기를 한다는 의미는 그도 평생을 내걸어 고현과 내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고현은 소파에서 일어나 부드럽게 말했다.“가요. 산책하러 나가요.”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고현은 전호영을 데리고 자기 집 정원에서 산책했다. 다행히 그녀의 정원이 충분히 컸기에 두 바퀴를 걸어 다닌 전호영은 그제야 속이 훨씬 편안해졌다.“아무리 이기고 싶어도 배부르게 먹으면 안 되죠. 아까 화장실 가기 전에 식은땀까지 흘렸잖아요.”“우리 평생의 행복을 위한 일인데 제가 목숨 정도는 내걸어야죠.”전호영은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현은 전호영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가 자신의 손을 잡도록 내버려 두었다.두 사람이 손을 잡고 정원을 산책하는 장면을 본 집사는 가슴이 몹시 아파 났다. 슬기롭고 총명하신 큰 도련님이 결국 이대로 전호영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하지만 고진호 부부는 전호영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심지어 전호영을 사위처럼 생각했다.며느리로 대했을 수도 있었다. 남자 며느리로.집사는 큰 도련님이 전호영에 의해 성향이 바뀐 사실에 대해 매우 비통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표현
고현이 바로 대답했다.“호영 씨도 할머니 덕분에 알았잖아요. 할머니께서 조사하시지 못하셨더라만 호영 씨도 아마 못 알아낼걸요.”전호영은 여전히 웃음만 지었다.“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우리 할머니 덕을 본 셈이죠.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저도 고현 씨가 여자일 줄 몰랐을 것이고 더더욱 고현 씨에게 구애하지 않았을 거예요.”“처음에 할머니께서 고현 씨 사진을 저에게 주시고 고현 씨에게 구애하시라고 하셨을 때 저는 할머니가 저에게 불만이 있는 줄 알았어요. 남자를 선택해주셔서 남자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줄로 알았다니까요.”“저를 동성애자로 만들려고 하는 줄 알았어요. 할머니께서 고현 씨가 여자라고 하셨는데 저는 전혀 믿기지 않았어요. 사진에는 분명 멋진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요.”“그래서 처음에는 거부했어요. 고현 씨에게 구애하기고 싶지 않았고 사람들이 제가 동성애자라고 말하는 것도 두려웠거든요. ”“저는 처음에 고현 씨 여성 신분을 폭로하고 싶었지만 고현 씨가 너무 완벽하게 분장한 바람에 아무런 허점도 찾지 못했어요. 우리 할머니께서도 고현 씨의 여성 신분을 알아내시는 데 엄청 긴 시간이 걸렸을 거예요.”고현은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 말을 건넸다.“어쩐지, 호영 씨가 한동안 저에게 시비 걸면서 제가 여자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다가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가 교제한 횟수도 적었으니까. 그 뒤로는요?“고현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전호영에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인생을 걸고 전호영과 함께 하겠다고 결심한 고현은 그제야 전호영이 어떻게 천천히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고현을 만나 본 사람마다 어김없이 그녀가 남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남자라면 고현을 좋아할 수 없었다.진정으로 동성애자인 남자라 해도, 고현이 마음에 들었다 해도 감히 그녀에게 애정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전호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제 연애 상담사들이 직접 고현 씨에게 구애하라고 조언해주셨거든요.”“연애 상담사요?”“저의 둘째 형과
고현은 이해하며 말했다.“어르신들은 다 그러세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에요. 특히 저를 가장 근심하시거든요.”“우리 부모님께서는 호영 씨를 보면 황금을 보는 것보다 더 기뻐하세요. 제 인생의 가장 큰 일이 드디어 싹이 트는 것 같으시니까요.”전호영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그건 제가 훌륭해서 그런 거에요.”고현은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네네네. 엄청나게 훌륭하시죠. 그럼요.”두 사람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내 고성 호텔에 도착했다.전호영은 지난번처럼 고현과 함께 사람들 몰래 비밀 통로로 맨 위층에 있는 수영장으로 올라갔다.고현은 전호영이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고 한편 이윤미는 마침내 그 사업을 성사시켰다.이윤미는 고객을 호텔 밖으로 배웅했고 고객이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윤미는 호텔 입구에 잠시 서 있다가 방윤림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데리러 오라고 말했다.그녀의 차는 차 수리부에서 수리 중이었다.“밖에 서 있지 마시고 호텔 안에서 기다리세요. 10월인데도 여전히 덥네요.”방윤림은 이윤미에게 당부했다.“알았어요. 호텔 1층 휴게실에서 기다릴게요.”방윤림은 대답하고는 곧 전화를 끊었다.방윤림은 이윤미가 이씨 가문으로 돌아온 뒤 이 가주가 그녀에게 안배해 준 생활 비서였다.방윤림은 성숙하고 침착했으며 일 처리가 깔끔했다. 이윤미는 그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았으나 방윤림이 자신의 능력을 그녀에게 증명한 후에야 이윤미는 비로소 그를 계속 곁에 두고 일을 시켰다.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지금은 너무 익숙해졌다.그리고 방윤림은 이윤미의 밑에서 일 한 뒤로 그녀에게 자신의 태도를 명확히 밝혔다. 더는 이 가주에 복종하지 않고 그가 살아 있는 한 오직 이윤미에게만 충성할 것이라고 말했다.방윤림이 했던 일도 이윤미는 잘 알고 있었다. 1년 넘게 밤낮으로 함께 일 하면서 그녀는 방윤림이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내리라고 믿었다.이윤미가 이씨 가문에 처음
방윤림은 성큼성큼 호텔로 걸어 들어갔다.방윤림은 들어서자마자 호텔 일 층을 한 번 둘러보더니 이내 이윤미를 찾았다.그는 발걸음을 돌려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방 비서.”이윤미는 방윤림을 보더니 휴대전화를 접고 소파에서 일어섰다.“차에 문제가 생기면 저에게 전화로 알려주시면 얼마나 좋아요. 제가 새 차로 안배해 드릴 텐데.”방윤림은 이윤미의 차가 고장 났는데도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윤미도 조용히 말을 이었다.“차에 오르고 얘기해요.”방윤림은 경계하며 주위를 둘러본 뒤 이윤미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호텔을 떠났다.몇 분 뒤 방윤림은 이윤미를 싣고 고성 호텔을 빠져나왔다.“누군가가 이윤미 씨 차에 손을 댄 거 아니에요?”차에서 말하면 누구도 듣지 못해서 시름 놓을 수 있다. 이 차는 방윤림이 이윤미를 태우기 위해 특별히 가져온 차였다.매번 차를 사용하기 전에 방윤림은 차를 여러 번 검사하곤 했다. 누군가가 차에 손대지 않았는지, 녹음 펜 같은 것이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사용했다.그리고 이 차는 방탄 기능도 있어서 매우 안전했다.이윤미가 대답했다.“맞아요. 차가 고장 났을 때 마침 제가 고 대표님을 만났어요. 고 대표님의 운전기사가 차를 수리할 줄 아셔서 봐주셨거든요. 제 차를 누군가가 고의로 고장 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방 비서, 누가 꾸민 일인지 한 번 알아봐 주세요.”“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도 잘 알아봐 주세요. 제 차가 고장 난 걸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사람도 제 차에 직접 손을 댄 사람과 마찬가지로 저에게 의견이 많은 사람이니까.”방윤림은 차를 몰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알아볼게요. 참, 고 대표님을 만났다고요?”방윤림은 고현에 대해 경계심이 있었다.“네, 마침 퇴근하는 길에 고 대표님을 만났거든요. 저를 도와 직접 호텔까지 데려다주셨어요. 아니면 제가 늦을 수도 있어요.”“고객님이 제가 시간관념이 없다고 생각하시면 저에 대한 인상도
이 일은 처리하기 매우 어려웠다.방윤림은 이윤미의 주변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이었기에 이윤미는 그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방윤림이 길러낸 심복들은 하나같이 다 능력이 강했다.방윤림이 미안해하며 대답했다.“제가 쓸모없어서 지금까지 이윤미 씨께서 만족할 만한 진실을 찾지 못했어요.”“방 비서가 쓸모없는 것이 아니에요. 이 일은 수십 년이 지났기에 증거가 있어도 우리 어머니께서 깨끗하게 지우셨을 거예요. 그 당시 이 일을 아는 사람도 아마 다 죽었을걸요. 제대로 조사해서 증거를 얻기에는 정말 쉽지 않을 거예요.”“관성 쪽에도 증거가 없었어요. 그쪽 세력이 더 강하고 인맥이 더 많았거든요.”그녀의 사촌 언니도 관성에서 살고 있었다.“관성 쪽에서는 오랫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어요?”방윤림은 관성 쪽이 너무 조용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이윤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태윤 씨와 예정 씨의 결혼식을 앞두기도 했고 하예진의 새 가게가 막 오픈하고 있었던 터라 이 시점에서 사촌 언니가 모두의 기분을 깨뜨리고 싶지 않으셔서 말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이윤미와 이경혜의 혈연 감정 결과는 이미 오래전에 나왔다.하지만 이경혜는 이윤미를 알려주지 않았다.이윤미는 그들이 이종사촌 동생이라고 추측했다.방윤림이 말을 이었다.“그럴 수도 있어요. 이윤미 씨는 전 대표님의 결혼식에 갈 겁니까?”“전씨 가문이 우리 이씨 가문에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어요.”두 집안은 아무런 친분도 없었다.전씨 가문이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는데 이윤미가 가면, 친어머니가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는 한 갈등이 생기기 쉬웠다.“예정 씨와 예진 씨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저도 마음이 좀 편하네요.”전임 이 가주가 정말로 이윤미의 친어머니에게 살해되었다면 하예정 자매의 어머니는 이 가주의 잔인함과 악랄함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기에 하예정 자매에게 잘못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이경혜도 잘 지내고 하예정 자매도 잘 지내야 이윤미도 죄책감이 덜할 것이다
이윤미의 말을 들은 방윤림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는 지금 이윤미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지만 이윤미의 사적인 일에 너무 간섭하면 안 되었다.어쨌든 이윤미가 고현을 사모하지만 않으면 되였다.방윤림은 이윤미를 태우고 이씨 가문의 큰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씨 가문의 집사가 집 안에서 나오더니 이윤미가 돌아온 것을 보고 웃음을 지으며 맞이했다.“돌아오셨어요.”“네.”이윤미는 차 문을 열어 내려가면서 대답했다.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어머니께서는 집으로 돌아오셨어요?”“사모님께서는 저녁 약속이 없으셔서 퇴근하고 바로 돌아오셨어요.”집사는 이윤미를 따라가면서 이윤미의 질문에 무척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하지만 이윤미는 집사가 연기를 가장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가주가 집에 있을 때 집사의 표현은 매우 좋았다.하지만 뒤에서는 이윤정의 편에 서 있었다.이윤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막 집안에 이르자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온 사람이 이윤미인 것을 보자 웃음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고 그들의 웃고 있었던 표정도 이내 굳어졌다.하지만 이윤미의 안색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집안에는 이윤미의 가족 말고도 그녀가 전에 본 적이 없는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그 남자는 방자한 눈빛으로 그녀의 몸을 훑어보더니 마침내 꽤 만족한 모습을 보였다.이윤미는 속으로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이내 눈치챘다.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가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윤미가 돌아왔구나. 네 엄마가 네가 오늘 밤에 사업 얘기하러 간다고 하길래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줄 알았어.”말을 꺼낸 사람은 정군호였다.정군호는 친딸 이윤미를 줄곧 예뻐하지 않았다. 평소 이윤미를 보면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지만 오늘 밤은 웬일인지 상냥한 얼굴로 맞이했다.이윤미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사업을 성사시키고 나서 바로 돌아왔어요. 아빠는 제가 한밤중까지 일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