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고현 씨는 이목구비가 부드러워 남자 행세를 하기에는 늘 남성스러움이 부족해요. 여성 옷으로 갈아입으면 정말 경국지색일 텐데.”“고현 씨는 원래 여자잖아요. 자, 우리 옷 바꿔입어 봐요. 제가 고현 씨를 위해 이 옷을 입고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르실 거예요.”“여장하고 다니지 말고 휴게실에서 여성 옷으로 갈아입고 저한테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데...”고현은 어이가 없었다.전호영이 여성 옷을 입고 왔다니!게다가 그 차림으로 고현의 회사까지 달려왔다.고현은 전호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넸다.“전 대표, 여성 옷을 입은 모습이 예쁘긴 예쁜데 너무 남성적이네요.”“저는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 행세를 한다 해도 남자 같죠 . 하지만 고현 씨는 여자잖아요. 20년 넘게 남자로 분장한다 해도 여전히 여자인걸요.”“저는 고현 씨가 저처럼 여성 옷을 입고 밖에서 돌아다니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우리 휴게실에서 옷 좀 교환해 입어 봐요. 저한테 고현 씨가 여성 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될까요?”“고현 씨가 여성 옷을 입은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알고 싶어서 그래요.”전호영은 그윽한 눈빛으로 고현을 바라보며 기대를 품었다.고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저는 여성 옷을 입지 않을 거예요. 너무 습관이 안 되거든요. 호영 씨는 지금 여성 옷을 입고 있는데 편하세요? 안 불편해요? 불편하잖아요. 하이힐을 신고 걸을 때 신을 던지고 달려오고 싶지 않았어요?”전호영은 고현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전호영은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아 심지어 그 하이힐을 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했다.하지만 전호영은 남자가 아닌가!“저는 제가 여자라는 것을 인정해요. 제가 몇 년을 남자로 살았어도 여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죠. 하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20년 넘게 남자로 분장했고 이런 생활과 이런 옷차림에 익숙해졌어요.”“여성 옷으로 갈아입거나 하이힐을 신고 가발을 쓰거나 머리를 기르라고 하면 제가 너무 불편할 것 같아요.”“호영 씨가 정말 저를
하지만 전호영이 웃길 때면 고현은 정말 즐겁다고 느꼈다.한 가지만은 확신했다.전호영은 처음에는 할머니의 주선으로 고현에게 접근했지만 지금은 고현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그 감정 변화가 매우 뚜렷했다.잠시 앉아 있던 고현은 몸을 일으켜 책상을 에돌아 휴게실로 향했다.전호영은 그의 평상시 복장으로 갈아입었지만 신발이 없었다. 그의 구두는 차에 있었기 때문이다.전호영은 하이힐을 보더니 허리를 굽혀 들어 올려 쓰레기통에 버리려 했다.“왜 버려요? 남겨 두지 그래요. 그래도 호영 씨가 신었던 하이힐인데.”고현은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전호영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바라보니 문에 기대어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현을 발견했다.“그 치마도 버리지 말고 보관하세요. 너무 아쉽네요. 제가 호영 씨 여성 옷을 입고 가발을 쓴 모습을 사진 찍어 놨어야 했는데.”고현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녀는 휴게실 안으로 들어와서 전호영에게 다가가더니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두 손을 꺼내 전호영의 옷을 정리해 주었다.“호영 씨는 역시 남자 옷을 입어야 멋지네요.”“멋있어요?”“맞아요, 멋져요. 몸매가 좋아서 남자 모델처럼 어떤 옷을 입어도 멋지네요.”전호영은 자신의 옷깃을 정리해 주는 고현의 두 손을 잡고 검은 눈동자로 그녀의 이목구비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사진 찍어 주려고요? 제가 다시 치마로 갈아입고 가발과 하이힐을 다시 신을게요. 고현 씨가 원하는 만큼 찍게 해드릴게요.”“됐어요. 호영 씨 얼굴은 멋있지만 여성 옷을 입으면 여자처럼 느껴지지 않거든요.”고현은 손을 빼내고 전호영의 넓고 평평한 가슴을 건방지게 두드리며 농담했다.“여기가 여자처럼 느껴지지 않거든요.”전호영은 잠시 할 말을 이었다.그는 좀 더 비슷하게 꾸미고 싶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흠... 전호영은 뻔뻔하지만 그 정도로 꾸미기에는 너무 창피하다고 생각했다.고현은 허리를 굽혀 휴게실의 침대 위에서 전호영이 내려놓은
“호영 씨.”고현은 무뚝뚝한 얼굴로 소리쳤다.전호영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그는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다.“움직이지 마세요. 호영 씨 휴대전화를 들어요. 사진 두 장만 찍도록 허락할게요. 그리고 제가 바로 제 옷으로 갈아입을 것이고 아마 앞으로 제가 다시 여성 옷을 입을 일은 없을 거예요.”전호영는 휴대전화를 꺼내며 대답했다.“알겠어요. 알겠어요. 바로 사진 찍을 테니 옷 갈아입지 마세요.”그는 서둘러 휴대전화로 그녀를 향해 사진을 찍었다.고현은 화장하지 않았지만 타고난 미모로 만약 여성 옷으로 갈아입고 가발까지 쓴다면 정말로 전호영의 상상대로 엄청나게 아름다울 것이다.전호영은 사진을 몇 장 찍었다.뒤이어 고현은 몸을 돌려 화장실로 들어갔다.전호영은 또 서둘러 그녀가 치마 입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찍었다.너무 아름답다!사진을 찍고 난 전호영은 얼굴에 걸려있는 함박웃음을 거두어들이지 못했다.그는 몇 번이고 고현의 치마 입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골라서 그의 휴대전화의 배경화면으로 설정했다.매번 휴대전화로 그녀의 사진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좀 큰 사이즈 사진으로 씻어내서 자신의 방의 곳곳에 모두 걸어놓으려고 했고 크기가 아주 작은 사진도 씻어내서 액자에 넣어 열쇠고리에 끼워 넣으려고 했다.어쨌든 전호영은 고현의 아름다운 모습을 언제든지 감상하려고 했다.고현의 여성 옷을 입은 사진을 찍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전호영은 그녀가 왜 갑자기 여성 옷을 갈아입으려 했는지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단지 고현이 여성 옷을 입을 기회가 이번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앞으로 그녀가 여성 옷을 입은 모습을 보려면 아마 무척 어려울 것이다.오늘의 일을 통해 전호영은 고현에게 다시 여성 옷을 입으라고 강요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고현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이제 남자 행세를 하는 것에, 이런 옷차림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치마와 하이힐을 신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전호영 스스로 입는 것마저
동생이 여기로 와서 구경거리를 보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고현은 한숨을 쉬며 앞으로 걸어 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돌아갔다.고빈은 이내 사무실 문을 열었다.“형, 전 대표님은? 전 대표가 여자로 변장해서 우리 회사로 왔다면서?”고빈은 구경거리를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하여 그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현장에서 여자로 변장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전호영은 여자로 변장하고는 사람들에게 전호영의 쌍둥이 누나라고 속일 줄 이야!전씨 가문은 몇 대째 딸이 없었다.전호영이 쌍둥이 누나가 있다면 다른 사람이 모를 리 없었다.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아마 그 딸을 응석받이로 키웠을 것이다.고현은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누가 그런 말을 했어?”“사람들이 다 말하고 있어. 내가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여기로 달려왔지. 형, 전 대표님이 여성 옷을 입었다는 게 사실이야? 아름다워? 예뻐?”“전 대표님이 형을 위해 여자로 변장할 줄은 몰랐어. 여성 옷을 입다니! 하하하, 웃겨 죽을 것 같아!”“형, 감동했어? 전 대표님은 사실 좋은 사람이야. 설령 전 대표님이 처음에 형에게 접근한 것이 전씨 할머니 때문일지 몰라도 그 뒤로는 형한테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을 나까지도 보아낼 수 있었어.”“우리 부모님도 경험이 많으셔서 발견하셨을 것이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전 대표님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한 번 생각해 봐. 그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잖아.”“부모님께서 우리보다 오랜 세월을 더 보내오셨어. 게다가 딸을 시집보내고 싶어 하시는 거 사실이지만 그래도 누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셔.”뒤에 이 말은 밖에 있는 비서가 들을까 봐 고빈은 아주 작게 말했다.“누나, 전 대표를 고려해 보는 건 어때? 기회를 한 번 줘.”고빈은 이 말을 더 작게 말했다.고현은 남동생을 바라보았다.“호영 씨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혜택을 준 거야? 왜 호영 씨 대신 좋은 말을 해?”고빈은 히쭉 웃었다.“아니야!
고빈이 너털웃음을 지었다.“하하! 누나, 그거 봐. 전 대표님은 항상 누나 위주로 말씀하시잖아.”“닥쳐!“고현은 동생을 꾸짖었다.고빈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웃었지만 감히 아까처럼 호탕하게 웃지는 못했다.고현은 두 눈을 부릅뜨며 전호영을 노려보았다.전호영은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었고 고현이 아무리 노려봐도 화를 내지 않았다.“전 대표님, 다들 대표님께서 여자 분장하셨다고 하는데 저는 대표님이 우리 누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거든요. 혹시 실제 행동으로 증명해 보실 의향이 있으신지요?”전호영은 고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처남에게 증명할 필요는 없죠. 고현 씨가 저를 믿으면 되니까요.”고빈은 전호영의 어깨를 덥석 껴안고 소파 쪽으로 걸으면서 말을 건넸다.“저는 전 대표님의 미래 처남인걸요. 저에게 보여주면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보았는데 제가 못 본다면 얼마나 아쉬워요.”전호영은 고빈의 손을 잡아당기며 소파에 주저앉았다.“처남이 복이 없어서 그래요. 누구 탓할 입장은 아니죠. 고현 씨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한 저는 다시는 여성 옷을 입지 않을 겁니다.”고현이 전호영의 소원을 들어주었으니 전호영도 앞으로 여성 옷을 입는 일에 관해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다.고빈이 아무리 설득해도 전호영은 더는 여자 분장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빈은 아쉬워하며 누나에게 물었다.“전 대표님이 여자로 분장한 모습을 찍었어?”고현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다시 바쁘게 일했다.고현은 동생의 물음에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아니.”전호영의 치마를 입고 가발을 쓴 모습은 이미 고현의 마음속에 콕 박혀 들어갔다.사진 찍을 필요 없었다.전호영처럼 사진을 찍어서 저장하지 않아도 되었다.전호영은 그 모습을 찍어서 남겨두려고 했다. 고현은 여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 신분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전호영은 진정한 남자였기 때문에 고현은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다. 여러 방면으로 고려한 결과일 것이고 전호영
임 대표님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는 전호영을 쳐다보고는 또다시 눈앞의 고현을 보더니 눈가에 고현을 동정하는 눈빛을 머금고 있었다.고현은 임 대표가 만나본 최고의 청년 인재였다. 만약 그에게도 딸이 있다면 그 딸을 고현과 이어주려고 했을 정도였다.하지만 고현이 불행하게도 전호영에게 매달릴 줄은 몰랐다.전호영은 뻔뻔스럽게도 고현이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전호영은 여전히 고현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었다.고현을 사모하는 여자들도 모두 전호영을 이길 수 없다고 전해 들었다. 모두 하나같이 실패하고 말았다. 주로 그녀들이 전호영의 뻔뻔함이 없었기도 했고 고현이 그녀들에게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하여 고현을 사모하는 여자들은 전호영이 이가 갈리도록 미웠지만 그렇다고 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네, 고 대표님이 퇴근하고 나서 저녁에 같이 밥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어요.”전호영은 임 대표가 그를 어떤 눈빛으로 보든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사람들은 전호영이 동성애자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들이 모두 고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누구도 몰랐다.“고현 씨, 저는 방해하지 않고 이만 VIP룸에 가서 기다릴게요.”전호영은 자상하게 고현에게 말하고는 옆에 있는 VIP룸으로 걸어갔다.전호영이 자리를 떠난 뒤 고현은 임 대표를 소파에 앉으라고 표시했다.임 대표가 앉은 자리가 마침 전호영이 앉았던 자리였다.전호영이 입고 온 긴 치마와 하이힐이 모두 한 가방 안에 들어있었고, 물론 그 가방도 전호영이 앉았던 자리 옆에 놓여있었다.임 대표님은 그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그 가방 안에 들어있는 치마와 하이힐을 발견했다.고현은 황급히 그 가방을 들어 탁자 밑에 쑤셔 넣었다.“고 대표님, 이 일은 고 대표님의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을 저도 잘 알지만 제가 이 말은 꼭 해드려야겠어요. 저는 고 대표님께서 전 대표님에 대해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해요.”“고 대표님은 정상적인 남자이고 동성애자가 아니잖아요. 저는 고 대표님께서 끝까지 거절하여 전 대표님께 어떠
고현과 임 대표가 사업상의 일을 다 이야기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임 대표님, 수고하셨어요.”고현은 일어나서 임 대표와 악수했다.임 대표는 웃으면서 악수했다.“수고하셨어요.”“임 대표님, 함께 식사해요. 제가 한턱 낼게요.”고현은 시간을 보더니 임 대표님을 초대해서 같이 식사하려고 했으나 임 대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임 대표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고마워요, 전 대표. 다음에 약속 잡죠. 오늘은 저와 저의 아내의 15주년 기념일이라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어야 하거든요.”“암요.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셔서 아내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셔야죠. 다음 기회에 제가 식사 한 번 대접해 드리죠.”고현은 더는 고집하지 않고 직접 임 대표를 대표 사무실 문 앞부터 1층까지 배웅해 드렸다.“전 대표님, 더 이상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만 먼저 가볼게요.”임 대표는 사무실 건물 입구에서 멈춰서서 고현에게 말을 건넸다.고현은 제자리에 서서 임 대표가 회사를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임 대표의 차가 고씨 그룹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고현은 그제야 비로소 몸을 돌려 들아갔다.“전 대표님.”“전 대표님.”퇴근 시간 때라 다들 밖으로 나갔지만 유독 고현만 안으로 들어갔다.고현을 만난 사람마다 모두 그녀에게 공손한 태도로 안부를 물었다.착각인건지 예민한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할 때 항상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아직도 VIP룸에서 기다리고 있는 전호영을 떠올린 고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직원들이 그녀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전호영 때문이다.여자로 변장하여 회사로 들어와 고현을 찾으러 왔으니 분명 많은 직원이 알아보았을 테고 따라서 회사 구석구석에 이미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형.”마침 고빈이 내려왔다.회사 안으로 들어가는 누나를 본 고빈은 발걸음을 멈추어 누나를 불렀다.“임 대표님께서 가셨어?”고빈이 물어보았다.고현은 양복 외투를 벗은 동생을 보며 물었
비서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현이 돌아온 모습을 보자 비서가 일어서며 그녀를 일깨워주었다.“고 대표님, 전 대표님께서 아직도 VIP룸에 계십니다.”“알겠어요. 오늘 저녁 일정은 취소하고 먼저 퇴근하세요.”“알겠습니다.”고현의 저녁 일정이 취소하라는 말에 비서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고현이 저녁에 약속이 없다는 뜻은 비서가 저녁 내내 쉬면서 여자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전 대표의 비서로서 남 비서는 매일 바쁘게 돌아쳤다. 평소 아침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해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여자친구도 이에 대해 불만이 매우 많았다.비서에게 저녁 일정을 취소하라고 지시한 고현은 VIP룸 입구로 가서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전호영은 소파에 앉아 한 손에 차 한 잔을 들고 마시면서 다른 손으로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을 뒤적거렸다.그의 안색이 매우 평온해 보였고 오래 기다렸다고 귀찮아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눈치챈 전호영은 고개를 들어 보았는데 고현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고현에게 관심하며 물었다.“사업 얘기는 다 끝났어요? 어때요?“고현이 바로 대답했다.“우리 그룹과 임씨 그룹의 협력은 거의 성사된 거나 다름없어요. 오늘 임 대표님께서 오셔서 저와 오후 내내 얘기를 한 결과 그 사업을 끝내 성사시켰어요.”전호영이 기뻐하며 말했다.“축하드려요.”고현도 즐거운 표정으로 인사했다.“고마워요.”고현은 아까 전호영이 보던 신문과 찻잔을 보면서 물었다.“신문 읽었어요?”“네. 신문도 보고도 차도 마시며 사랑하는 여인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너무 행복한 것 같아요.”고현은 그를 노려보았다.“누가 당신 여자예요!”“고현 씨는 제가 사랑하는 여인이 맞잖아요. 제 말이 틀린 말 했어요?”고현은 할 말을 잃었다.잘못 알아듣고 재빨리 대답했던 모양이다.“퇴근했죠? ”고현의 말문이 막힌 모습을 보니 전호영은 또 자신이 이겼다는
“제가 만약 아저씨와 결혼하게 되면 나가서 살 거예요. 시부모님과 거리를 두는 것도 좋아요.”윤미연은 잠자코 있다가 말을 꺼냈다.“만약 지훈 씨의 어머님이 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시댁과 함께 살지 않는다고 해도 너의 결점을 들추어내고 너희 부부의 감정을 깨뜨리려고 할 거야. 시어머니는 지훈 씨의 친어머니기 때문에 지훈 씨가 친어머니와 인연을 끊을 수는 없잖아?”정윤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엄마, 아저씨의 마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씀이세요? 원래는 잘 정리해 놓았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또 혼라스러워져요. 혼자 있는 것도 좋긴 해요. 그렇게 복잡한 관계를 처리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제 성격도 심술궂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못해요. 다들 재벌 가문의 시어머니들과 어울리기 힘들다고 하던데. 예정 씨와 효진 씨네 시어머니처럼 사리에 밝은 사람은 많지 않더라고 하던데. 제가 듣기로는 전태윤 씨와 예정 씨가 금방 함께 있었을 때 시어머니는 사실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예정 씨 시어머니는 상처를 주거나 부부의 관계를 틀어놓는 일을 한 적이 없대요. 오히려 아들 부부의 일이 남의 입에 오르내릴 때마다 공개적으로 감싸주며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욕설까지 퍼부으셨대요. 예정 씨 시어머니는 우아하고 고상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며느리를 위해 상대방을 욕하기까지 하셨대요. 예정 씨와 그녀의 시어머니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지만, 시부모님을 특히 존경하고 있거든요. 저는 현실 속에서 그런 시어머니는 드물다고 생각해요.”윤미연은 딸을 나무랐다.“넌 아직 지훈 씨의 부모님을 만나본 적도 없는데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 꼭 한번 만나 뵙고 그때 가서 다시 논의하자.”“그런데 아저씨랑 연애하고 정이 이미 깊어졌을 때 그분들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면 저는 엄청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이럴 바에야 처음부터 관계를 이루지 않고 현재 생활을 유지하면서 지금처럼 친구로
윤미연은 정윤하와 마음을 나누고 싶어 했다.“샤브샤브를 먹기 때문에 별로 준비할 것도 없어. 밥은 진작 했지. 너와 지훈 씨가 잘 지내는 것 같던데. 그분도 너에게 진심인 것 같으니 며칠 동안 잘 생각해 보고 답을 주렴.”정윤하가 말을 이었다.“엄마, 아저씨가 일시적인 호기심 때문에 갑자기 저에게 고백한 건 아닐까요? 아저씨 집에 돈도 많고 부잣집 도련님인데 만나본 미녀들도 수두룩할 거 아니에요. 저의 미모로 아저씨를 반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냥 놀고 싶은 건 아닐까요? 어쩌면 지금은 저에게도 진심일 수도 있겠지만 결혼 후에는 마음이 변해서 바람을 피울 수도 있는데 바람피우거나 밖에서 내연녀랑 가정을 이룬다면 저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때 가서 제가 아저씨를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관성에서 엄마의 도움도 받지 못하면 어떡하죠?”윤미연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해 주었다.“글쎄... 하지만 결혼 생활은 두 사람이 서로 잘 가꾸어야 하는 법이야. 너희 두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잘 가꾸어 나가면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다만 그 집안 부모님이 널 마음에 들어 하실지 모르겠어.”정씨 가문은 연성에서도 이름이 있는 가문이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정합 도장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수조 원의 재벌가는 아니지만 겨우 수백억 원을 넘는 자산 정도는 갖고 있다.소씨 가문과 비하면 너무 많이 차이가 나지만 말이다.만약 소지훈의 부모님이 정씨 가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관성에 갔을 때 지훈 씨 부모님을 본 적이 있어? 너에 대한 태도는 어땠어? 태도가 좋고 잘 웃으신다면 그래도 희망은 있을 텐데. 차갑거나 공손한 태도로 임한다면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만약 그의 부모님이 싫어하신다면 우리는 단념하자. 아빠 엄마가 널 평생 책임질 수 있으니까. 네가 그 가문으로 가서 괴롭힘당하는 꼴을 우린 못 봐.”윤미연은 평소에 딸을 욕할 때 몇 번이고 그녀의 친딸이 아니라고 하지만 누군가가 정윤하를 괴
정윤하의 얼굴은 노을처럼 빨개졌다.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방금 아저씨가 도장으로 바비큐를 가져왔거든요. 엄마, 제가 먹자고 한 것이 아니라 저희 학생들이 먹고 싶다고 했어요. 아저씨도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바비큐를 사다 준 거예요. 제가 바비큐를 먹고 있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거예요. 친구 사이가 아닌 남녀 간의 사랑이라면서 저를 사랑한다고 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거 있죠. 참, 그리고 저에게 꽃다발도 선물해줬어요. 그 꽃을 받으니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묻길래 꽃 떡이 먹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대답했어요.”윤미연은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부릅뜨고 딸을 노려보았다.그 모습을 본 정윤하는 점점 작은 소리로 무고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아저씨가 저에게 장미꽃을 선물했길래 그렇게 많은 장미꽃 앞에서는 장미꽃 떡만 생각났다니까요. 무슨 심정이냐며 묻길래 사실대로 대답한 것뿐이에요.”윤미연은 정윤하의 이마를 쿡쿡 찌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왜 이렇게 멍청해? 종일 먹을 생각만 하다니. 네가 바비큐를 좋아하니까 지훈 씨가 그렇게 많은 바비큐를 포장해 간 거 아니야? 날씨가 춥다고 바비큐를 먹으면 소화가 잘될 줄 알았어? 내가 이따가 차 한 잔 끓여 줄게.”“엄마, 괜찮아요. 아저씨가 모두에게 보이차도 사줬어요. 보이차도 소화가 잘되는걸요. 학생들도 바비큐를 먹는 데 익숙해져서 소화도 잘될걸요.”윤미연은 그제야 시름 놓으며 말을 건넸다.“지훈 씨는 보이차를 사줄 줄도 알고 역시 자상하구나.”윤미연은 말을 마친 후 정윤하를 노려보더니 한참 뒤에야 정윤하에게 물었다.“지훈 씨가 갑자기 고백하는 바람에 이렇게 일찍 집으로 달려온 거야?”정윤하는 덤벙대며 줄곧 소지훈을 형제로 대했는데 갑자기 고백을 받고 놀란 것도 당연한 일이다..“거절한 건 아니지?”윤미연은 긴장하며 물었다.“당분간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데 바로 거절하지는 마. 여지를 남겨두어야 해. 너도 이제 스물네다섯 살이나 되었는데, 너를
“지훈 씨가 회사 대표는 맞지만 신분이 단순하지 않을 거야. 분명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우리에게 말하지 않을 뿐이지.”“누구나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걸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거요.”정윤하가 소지훈의 편을 들어주었다.윤미연은 또 말을 꺼냈다.“잘 생각해 봐. 네가 지훈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싸울 줄 모르는 것처럼 하지 않았어? 네가 도와준 뒤로 은인이라고 떠들면서 너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무척 잘해줬잖아. 엄마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럴 수도 있는데 나는 지훈 씨가 처음부터 너를 겨냥하고 너에게 접근한 것 같아. 작전을 세워서 너를 지훈 씨의 은인으로 만들면 당당하게 너에게 접근하면서 잘해줘도 네가 의심하지 않잖아. 어쩌면 네가 지훈 씨를 구해주던 날의 일도 지훈 씨가 꾸민 일일지도 몰라. 지금 관성의 환경이 얼마나 안전한데 건달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출몰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거든. 관성의 경찰들이 그들을 나와서 행패 부리게 내버려둘 리가 있겠어?”정윤하는 설마 하는 생각에 다시 말을 이었다.“엄마,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셔서 생각이 많으신 거 아니에요? 아저씨가 저에게 접근해서 뭐 할 게 있다고. 우리 집은 엄청난 부자도 아니고 저도 우리 도장에서 일하는 일개 직원일 뿐인데. 저의 전 재산을 내놓는다고 해도 아저씨가 하루에 버는 돈보다도 적을 텐데. 저를 겨냥한 건 아닐 거예요. 게다가 아저씨를 도와준 그날 밤은 확실히 제가 아저씨를 처음 만난 날 맞아요. 서로 초면인데 이유 없이 저에게 접근해서 뭐 하게요? 아저씨는 아주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인데 어쩌다가 남의 미움을 사서 복수 당할 수도 있죠. 누군가가 건달들을 시켜 아저씨를 해치려고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정윤하는 소지훈이 그녀를 위해 이런 일들을 꾸밀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만약 정윤하의 집이 수백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소지훈이 무언가 꾸며도 믿을 법도 하다.그러나 그녀는 겨우 200만 정도의 월급쟁이에 집에 재산이 많다고 해
결국, 정윤하는 설탕 생강차가 담긴 잔을 들고 방안의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윤하야,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윤미연은 정윤하의 뒤를 따라가 그녀의 옆에 앉으며 관심 있게 물었다.“아니요.”정윤하는 윤미연에게 들킬까 봐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그녀는 생강차를 가볍게 한 모금 마시더니 너무 매워서 혀를 내둘렀다.“엄마, 집에 있는 생강을 다 넣었어요? 너무 매워요. 아! 너무 맵네요. 맛도 없고 마시고 싶지 않아요.”“네 생리통 주기가 이상해서 그래. 생강차 좀 마시고 추위를 좀 쫓아내.”정윤하는 그제야 사실대로 말했다.“엄마, 사실 제가 거짓말한 거에요. 저는 지금 생리 기간이 아녜요.”“거짓말이라고? 이 계집애! 건강 문제로 어떻게 엄마를 속일 수 있어? 엄마는 너에게 몸조리 좀 시키려고 한약까지 지어줘야 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어린 나이에 아직 시집도 안 갔는데 생리 주기가 이상하면 반드시 병원에 가서 몸조리를 잘해야 앞으로 배 속에 아기가 잘 들어서지. 여자들은 생리 주기를 잘 유의해야 해. 부끄러워하지 말고 바로바로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야 한다니까.”정윤하가 말을 이었다.“엄마, 내가 부끄럼을 잘 타는 사람으로 보여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제가 일찍 돌아오면 엄마가 제가 게으르다고 혼낼까 봐, 아빠한테 제 월급을 깎으라고 할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 거짓말로 엄마를 속인 거예요.”다행히 윤미연의 행동이 빠르지 않았다.만약 정말로 정윤하에게 이것저것 사주면서 몸조리를 시키고 심지어 병원으로 데려간 뒤에야 아까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면 윤미연은 아마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을 수도 있었다.윤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네가 뻔뻔한 사람이 아니지. 부끄러움 탈 애가 아니야. 그럼 뭔데? 걱정거리라도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봐. 괜찮아. 참, 오늘 지훈 씨는 아직 안 왔지? 평소 이 시간이면 집에 도착했을 텐데.”정윤하는 입을 오므리다가 말을 꺼냈다.“엄마, 아저씨는 회사 대표라서 바빠. 저녁에 약속 잡혔을지도 몰라. 자꾸 걱
소지훈을 처음 만났을 때, 정윤하는 소지훈을 보더니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헛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알고 지낸지 오래되면 도장의 코치 선배들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고 이내 두근거림도 사라졌고 헛된 생각도 하지 않았다.정윤하는 그녀와 소지훈이 사이도 친구와 같은 사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소지훈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할 줄은 전혀 몰랐다.정윤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더니 스스로 가볍게 얼굴을 치며 혼잣말을 했다.“정윤하, 부끄러워하는 거야? 어떤 남자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이렇게 기뻐한 거야? 좀 진정해. 진정하자고.”소지훈은 정윤하의 소개팅 상대들처럼 그녀가 나중에 가정폭력을 행사할까 봐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소지훈은 정혁주까지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무술 실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남자였다.정윤하조차도 정혁주를 이기지 못하는데.소지훈이 정혁주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소지훈의 무술 실력이 정윤하보다 더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소지훈이 걱정할 게 뭐가 있을까!오히려 앞으로 소지훈과 싸울 때 그에게 터져 맞아 땅에 짓눌리지 않게 정윤하가 걱정해야 할 것이다.정윤하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던 정윤하는 자신 있게 웃으며 중얼거렸다.“못생기지는 않았는데! 아저씨가 역시 보는 눈이 있네.”단 정윤하는 자신과 소지훈이 어울리는지 잘 몰랐다.소지훈은 대기업의 대표이고 집안도 재벌가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재력이 강하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정씨 가문은 가난하지 않고 연성에서도 부자에 속했지만 소씨 가문과 비교하면 그래도 차이가 컸다.정윤하는 소지훈이 보통 여자들과 다른 자신을 가지고 놀다가 질려버리면 자신을 버리고 딴 여자를 좋아할까 봐 무척 걱정했다.남자는 돈이 있으면 나빠지고 여자가 나빠지면 돈이 많아지게 되는 법!소지훈은 부자인 데다 잘생겼기에 여자에게 심장까지 꺼내어 잘해주면 그 여자는 분명 그에게 퐁
“형, 그럼 제가 뭘 하면 될까요?”정혁주가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을 본 소지훈은 그를 자신의 편으로 생각하며 물었다.정혁주가 대답했다.“여기 남아서 지켜보든지, 아니면 돌아가서 우리 어머니를 도와 요리를 하든지 하세요. 어쨌든 정윤하가 뭘 하든 상관하지 마세요. 저녁에 돌아올 테니까요. 돌아오면 두 사람 다시 얘기해 봐요. 소 대표님이 하신 얘기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만 믿게 하면 돼요.”“네. 정말 감사해요. 그럼 저는 돌아가서 이모님을 도와 요리할게요.”윤미연에게 잘 보이면 정윤하의 마음을 훔치는 이 길은 훨씬 쉬워질 테니까.정윤하는 소지훈의 고백에 놀란 것이 아니라 별로 믿기지 않아서였다. 어떤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도장에서 나와 찬 바람을 쐬고 추워지니 머리가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정윤하도 밖에서 오래 돌아다니지 않고 곧 집으로 돌아갔다.다행히 도장은 집에서 매우 가까웠다.윤미연은 오늘 밤 샤브샤브를 먹을 요리들을 준비하고 있었다.추운 날에는 역시 샤브샤브를 먹어야 속이 편안할 것이다.집이 난방이 안 되면 그녀도 이렇게 편하게 있지는 못한다.겨울이 되면 윤미연은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 장 보는 것도 자식들에게 맡기곤 한다.그녀는 따뜻한 도시에서 정씨 가문으로 시집온 사람이다. 그녀는 너무 추위를 타서 연성에 시집온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겨울만 되면 여전히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좋아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문 앞으로 향하던 윤미연은 정윤하인 것을 확인하더니 바로 물었다.“이 시간이면 수업해야 할 시간 아니야? 왜 돌아왔어? 밖에 여전히 눈이 오지? 부엌에 뜨거운 생강차를 끓여놨는데 한 잔 마셔.”윤미연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왜 혼자 왔어? 너희 오빠들은?”윤미연은 바쁘게 일하면서도 정윤하에게 물어보았다.정윤하가 대답했다.“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왔어요. 엄마, 아빠는요?”“네 아빠가 약속 있어서 나가셨어. 저녁에 밥 먹으러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서
소지훈이 일어나 정윤하를 쫓아가려 하였으나 정혁주가 가로막았다.그는 고개를 돌려 정혁주인 것을 확인하더니 성깔 좋게 말했다.“형, 제가 나가 볼게요.”“지금 가지 말고 윤하에게 혼자 생각하게 시간 좀 줘요. 윤하가 지금 소 대표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소식을 소화해야 할 거예요. 윤하는 지금 친구 감정이 아닌 이 남녀 간의 감정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밖이 추운데... 눈이 내리면 추워질까 걱정돼요.”그러나 정혁주는 친여동생의 모든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소 대표님은 추울지 몰라도 윤하는 연성 토박이라 어렸을 때부터 이런 추위에 익숙해요. 그러나 소 대표님은 아니죠. 당신은 관성에서 왔으니 관성 쪽에는 겨울이 없다고 볼 수 있죠. 윤하가 추워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나가서 바람 좀 쐬게 내버려 둬요. 마음을 다잡고 잘 생각해 보게 내버려 둬요. 갑자기 고백하니, 윤하는 심리 준비도 하지 않아 혼란스러워졌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소 대표님도 그래요. 때가 되면 고백하셔야지... 꽃다발 하나로 윤하가 소 대표님 마음을 알 거로 생각하세요?”소지훈은 입을 오므리다가 대답했다.“윤하 씨에게 꽃다발을 선물해도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하기에 그래서 직접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모를 것 같아서요. 제가 한 트럭의 꽃을 선물한다고 해도 윤하 씨 성격으로는 이 꽃들로 얼마나 많은 꽃 떡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할 테니까요.”정혁주도 공감하며 입을 열었다.“그... 그럴 수도 있겠네요.”정윤하도 분명 감히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를 사랑한다면 확실히 말해야 했다. 그녀가 알도록 명확하게 알려줘야 할 것이다.“형, 윤하 씨가 이렇게 황급하게 나갔는데 정말 저를 피하는 거 아니에요? 윤하 씨는 제가 너무 늙었다고 싫어하지 않을까요? 저는 윤하 씨보다 10세 4개월이나 많은데.”그의 나이는 그녀보다 11살 많다고 말은 했지만 진지하게 계산하면 10년 4개월 연상이다.정
정윤하는 그렇게 하면 소지훈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말을 내뱉으려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어 말을 건넸다.“그럼 그때 가서 신세 좀 질게요.”소지훈이 연성에 있을 때 정윤하가 그에게 잘 접대했으니 그녀가 관성으로 가게 되면 소지훈이 잘 접대해 주면 서로에게 빚지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윤하 씨, 꽃 떡 말고도 또 다른 생각은 없었어요?”소지훈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정윤하가 소지훈을 쳐다보니 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정윤하가 입을 열었다.“제가 또 무슨 생각 해야 하죠? 아저씨가 저에게 꽃을 선물했으니 저를 좋아한다는 생각 해야 돼요? 아저씨가 저를 좋아하고 저도 아저씨가 좋아요. 우리가 서로 좋아하지 않으면 친구로 될 수도 없는걸요.”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소지훈이 그 정적을 깨뜨렸다.“윤하 씨는 제가 윤하 씨에 대해 좋아함이 우정이 아닌 남녀 간의 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아저씨가 남자고, 저는 여자인데 아저씨가 저를 좋아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요? 뭐가 달라요?”“제 말은 윤하 씨, 저는 윤하 씨를 사랑하고 있어요. 윤하 씨에게 구애하고 싶단 의미에요. 형제 사이가 아닌 윤하 씨 남편이 되고 싶다는 뜻이에요.”소지훈은 단숨에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정윤하의 되묻는 물음에 화가 난 것이다.소지훈도 충동적으로 그 뜻을 똑똑히 해석해 준 것뿐인데...그녀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소지훈이 그녀에게 고백해야 정윤하가 그의 감정을 알 수 있다고 소정남이 알려주었다.그가 말하지 않는데 털털한 정윤하가 어찌 알 도리가 있겠는가?목소리가 좀 커진 소지훈은 그제야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웅성거리던 도장은 순간 조용해졌고 다들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소지훈은 그들을 쳐다보고는 다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정윤하를 바라보았다.그의 잘생긴 얼굴은 점점 붉은 구름이 떠 올랐다.그는 도장이 아닌 단둘이 있는 곳을 찾아 로맨틱하게 현장을 꾸민 다음 정윤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