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영은 한참을 말이 없다가 그제야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당신에게도 비밀통로가 있듯이 저에게도 비밀통로가 있거든요. 누구한테도 우리가 호텔로 들어가는 걸 들키지 않게 할게요.”전호영은 언젠가 고현이 스스로 대중들에게 여자의 신분을 공개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공개한다는 뜻은 곧 고현이 전호영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여인의 신분을 회복하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하여 전호영 일찍이 고현이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여성 신분을 들키지 않게 신분을 감추어 주었다.“가고 싶으시면 지금 바로 같이 가요.”“좀 생각해 볼게요.”고현은 마음이 흔들렸다.그녀도 이 무더운 날씨에 시원함을 즐기고 싶었다.다만 고현이 마음껏 물에서 수영하고 나면 또다시 남자로 분장하는 데 시간이 꽤 많이 걸릴 뿐이다.고현은 평소 매일 밤 집에 도착한 뒤로 외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분장을 해제하고 여자의 신분으로 돌아오곤 했다.그리고 욕실에 있는 큰 욕조에서 시원하게 목욕하며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풀었다.그리고 매일 아침, 고현은 일찍 일어나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남자로 변장하고 나서 어떠한 허점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방문을 나섰다.이런 나날들은 사실 매우 피곤했다.하지만 고현은 이런 생활에 이미 익숙해졌다.“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로 약속할게요. 더 이상 고려할 필요 없어요. 더 생각하다가 밤이 깊어지면 우리가 호텔에서 밤을 보내야 할지도 몰라요.”고현이 되물었다.“오늘 밤 정말로 우리 집에서 묵을 생각인 거예요?”“제가 고 아저씨와 함께 내일 아침 일찍 운동하기로 약속했거든요. 제가 호텔에 묵고 있어 새벽에 못 오는 것을 아셨는지 고 아저씨께서 저보고 오늘 밤 여기서 묵으라고 하셨어요.”고현의 얼굴은 순간 굳어졌다.전호영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저는 객실에서 잘 테니 안심하세요. 이렇게 하죠. 만약 고현 씨가 저를 환영하지 않는다면 우리 수영하러 갔다가 제가 집으로 데려다줄게요. 그리고 제가
전호영 도련님이 뻔뻔하게 들이대도 내버려 두는 것으로 보면 고현 도련님도 사실 전호영 도련님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집사는 가슴 아파하면서 말을 이었다.“난 어르신과 사모님 그리고 둘째 도련님께서 이 일에 대하는 태도가 더 원망스러워. 우리 큰 도련님은 매우 훌륭하신 분인데...”“큰 도련님이 만약 여자라면, 혹은 전호영 도련님이 전씨 가문의 셋째 아가씨라면 두 사람이 사귀게 되어도 내가 환호하면서 찬성하고 축복해줄 텐데. 하지만 두 분은 모두 남자잖아.”부모님조차 안타까워하지 않는데 집사가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파 났다.경호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경호원들은 아마 그들의 큰 도련님이 정말로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만 평소 깊이 숨기면서 다녔기에 아무도 몰랐을 뿐이다.큰 도련님을 사모하는 여인들은 매우 많았지만 아무도 큰 도련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것으로 보면 큰 도련님이 정말로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수도 있었다.여자가 싫으면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고씨 가문에서 돌아온 이윤미가 어머니와 동생의 차가 저택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도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이윤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윤정의 차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아가씨, 오셨어요?”집사가 다가와서 공손하게 물었다. 이윤정의 차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모습을 본 집사는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둘째 아가씨 차 주위를 돌면서 뭐 하세요?”이윤미는 이윤정의 차를 톡톡 두드리면서 입을 열었다.“윤정의 차가 제 차보다 훨씬 낫네요.”이 집사는 이윤정의 친아빠가 이 가주에 의해 감옥으로 보내진 뒤로 새로 모셔온 집사 진숙녀였다.비록 집사를 한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진숙녀는 이 큰 저택에서 둘째 아가씨가 큰 아가씨보다 더 예쁨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두 아가씨가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고 둘째 아가씨도 더 이상 후계자로 여겨지지 않았자먼, 큰 아가씨가 본래 그녀의 모든 것을 되찾은 것 같았지만
이윤정은 멍해졌다. 평소 집에서 그녀의 괴롭힘에도 흔들리지도 않고 꼬박꼬박 대들던 이윤미가 이번에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억울해하면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버렸다!‘억울한 표정으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어머니께 일러바치려는 거 아니야?’여기까지 생각한 이윤정은 서둘러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윤미가 먼저 어머니께 일러바칠 기회를 빼앗게 해서는 안 되었다.‘촌뜨기 이윤미가 사랑을 다투는 방법을 바꾼 건 아니겠지?’이윤정 집으로 들어갔을 때 이윤미는 이미 어머니 옆에 앉아서 뭐라고 말하고 있었고 이윤정이 들어 오자 이윤미는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이윤미가 어머니께 일러바친 것이 틀림없었다.부모와 오빠 그리고 형수의 표정도 묘하게 변했다.“엄마.”이윤정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이윤미와 어머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서 이윤미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이윤정은 두 손으로 다정하게 어머니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엄마, 언니 말을 믿으시면 안 돼요. 언니가 제 차를 마구 걷어차는 바람에 제 차가 계속 울려서 몇 마디 했을 뿐이에요.”이 가주가 대답했다.“그랬구나. 그런데 윤미는 아무 말도 안 했어.”이윤미는 고개를 돌려 이윤미를 바라보면서 어머니께 말씀드렸다.“언니가 어머니께 고자질하는 게 아니었어요? 방금 억울한 표정으로 들어오면서,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그러는지.”이 가주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는 친딸을 한번 쳐다보더니 친딸 대신 해명해 주었다.“고발한 게 아니야. 윤미가 섭섭한 표정으로 들어와서 자신이 낡은 차만 몰고 다닌다고, 네 차가 윤미 차보다 훨씬 더 좋다고 섭섭하다고 말하고 있었어.”“윤미야, 내일 윤정이랑 함께 가서 새 차를 골라 봐. 네가 사고 싶은 차로 골라서 사. 내가 네 동생만 편애한다고 말하지 말고.”이 가주가 귀찮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윤미에게 새 차로 바꾸어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그리고 이윤정에게 이윤미와 함께 차를 고르러 가라고 권했다.이윤미에게 새 차를 사줄 거라는 어머니의 말에 이윤정은 질투가 났고 입을 삐죽
하지만 이씨 가문에서는 딸의 권력이 더 컸다.이윤미는 이 가주의 단 하나뿐인 딸이다. 이윤미는 지금 확실히 이씨 가문의 친딸이다. 앞으로도 가주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하므로 이 가문에서 정말로 이윤미의 권력이 가장 막강했다.이씨 가문의 남자들은 상속권이 없으니 그 형수님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씨 가문에서 권력이 가장 큰 사람은 이씨 성을 가진 여자이지 이씨 가문으로 시집온, 다른 성씨를 가진 여자에게는 아무런 권세가 없었다.“그만해. 내가 아직도 숨도 쉬고 있는데 뭘 다투고 있는 거야?”이 가주는 목소리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내가 이미 윤미에게 새 차로 바꾸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후회하지 않을 거야. 의견이 있어도 모두 삼켜버리는 게 좋을 거야.”“어쨌든 윤미도 이젠 우리 가문의 딸이야. 종일 낡은 차를 몰고 다니는 것도 창피한 일이지. 윤미는 지금 우리 이씨 가문을 대표하고 있으니 윤미의 체면이 구겨진다는 뜻은 우리 가문의 체면도 서지 않는다는 뜻이야.”“윤미에게 차를 바꾸어주는 것은 우리 가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함이야.”“윤정아, 내일 언니와 함께 차를 고르러 가.”뒤이어 이 가주가 이윤미에게 말을 건넸다.“마음에 드는 차가 있으면 엄마한테 말하면 돼. 엄마가 사람 시켜 돈 보내줄 테니까.”“고마워요. 엄마.”이윤미가 기뻐하며 인사를 건넸다.다른 사람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던지 이윤미는 개의치 않았다.연약한 척 한 지 1년이 넘었다. 가끔은 위세를 떨쳐야 사람들이 그녀를 호락호락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윤미 오늘 오후에 어디 갔었어? 오후 내내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집에 돌아오다니.”이 가주 불쑥 물었다.이윤미는 솔직히 대답했다.“고씨 가문 저택에 가서 고 이사님을 뵈러 갔어요. 고현 도련님과 고빈 도련님도 계셨고요. 저한테 열정적인 태도로 남아서 식사하라고 하시기에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에요.”그 말을 들은 이윤정은 질투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이윤정이 고현에게 접근하고 싶었지만 고현은 그녀와 대화하는 것
이 가주의 남편은 성은 정씨, 이름은 군호였다. 사람들은 모두 정군호를 정 선생이라고 불렀다.아들도 모두 그의 성씨를 따랐다.젊었을 적 정군호가 이 가주의 데릴사위로 되기로 한 날부터 그는 평생 이 가주 앞에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아내에게 눌리면서 살 운명의 길을 걷고 있었다.다행히도 이 가주가 애초에 정군호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두터운 정이 남아있었다.이 가주는 자녀와 하인 앞에서 일반적으로 정군호의 체면과 위신을 세워주곤 했다.정군호도 자식들 앞에서 비로소 어른 행세를 할 수 있었다.이윤미가 아빠의 말을 듣더니 쓴웃음을 지었다.“제가 고현 도련님을 데릴사위로 삼을 생각은 없었어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고 이사님을 뵈러 갔을 때 마침 주말이라 고현 도련님도 집에 있었을 뿐이라고요.”“제가 고현 도련님 때문에 미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요. 걱정하셔야 할 사람은 바로 아빠 귀염둥이 딸 윤정이에요. 윤정이는 지금 고현 도련님 때문에 미칠 지경이거든요.”정군호는 이윤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윤정아, 넌 윤미와 달라. 넌 과감하게 고현 도련님에게 구애할 수 있는걸. 아빠가 지지할 거야. 네가 고현 도련님처럼 훌륭한 남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면 나와 네 엄마도 매우 기뻐할 거야.”이 가주도 웃으면서 한마디 보탰다.“윤정아, 엄마도 말했잖아. 넌 이젠 자유롭게 너의 사랑을 찾아가도 된다고.”“고현 도련님과 이윤정은 정말로 천생연분인걸.”조윤도 칭찬해 주었다.그들 가문의 사람들은 이윤정이 고씨 가문으로 시집가서 고씨 사모님으로 되는 것을 매우 바라고 있었다.하지만 이윤미는 쓸모없는 남자를 데릴사위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능력 있는 남자는 일반적으로 데릴사위로 들어오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윤미의 결혼은 이윤정만큼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모두의 격려에 이윤정은 얼굴이 붉어지며 허리를 곧게 펴고 자랑스러운듯 이윤미를 한번 흘겨보았다.이윤미는 웃을 듯 말 듯 눈웃음을 쳤고 그 모습을 본 이윤정은 또 화가 잔뜩 치밀어 올
이윤정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전호영에게 휘어 잡혀 게이로 될 것을 생각하더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고 이사님 부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죠? 전씨 가문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 관여하지 않는 건 아니겠죠?”“전씨 가문은 단지 관성에서만 권세가 있을 뿐 아무리 관성에 사업이 있다 해도 고씨 가문과 비교할 수 없어요. 고 이사님도 전호영 도련님에게 아부할 필요가 없을 텐데.”“전호영 그놈, 너무 얄밉네요. 우리 강성의 여자 중에서 전호영을 엄청나게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걸요. 살인이 허락되는 세상이라면 전호영은 아마 수천 번 죽었을걸요.”이윤정은 전호영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이 가주는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이런 일은 우리 외부인이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고현 도련님이 진심으로 전호영을 좋아한다면, 세속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면 누구도 고현 도련님을 막을 수 없을거야.”“고 이사님 부부는 늘 자식들의 일에 관여하시지 않는 사상이 진보적인 분들이셔. 두 아들이 무엇을 하든 크게 간섭하지 않으시거든. 고현 도련님... 본래부터 동성애자일 수도 있어.”이 가주는 나지막이 다시 입을 열었다.“고현 도련님을 사모하는 훌륭한 여자들도 그렇게 많은데 한 사람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잖아. 예전 같으면 눈이 너무 높아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 와서 보니 취향 문제일 수도 있겠다 싶어.”“그래서 여자들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고.”이윤정은 조급한 표정으로 물었다.“엄마, 나 어떡해요? 고현 도련님이 미치도록 좋은걸요. 저는 그분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어요. 어떻게 동성애자일 수 있죠?”“다 전호영 때문이에요. 엄마, 전호영을 강성에서 몰아낼 방법은 없어요?”이 가주는 손을 뻗어 이윤정의 머리를 톡 쳤다.“전호영이 보통 사람인 줄 알아? 엄마도 전호영에게 예의 갖춰서 인사드려야 해. 겉으로 보기에는 전씨 그룹이 그의 뒤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전호영의 배후에는 관성 전체의 거물들이
수십 년이 흘러간 오늘날 두 조카딸도 어쩌면 생활의 고충에 시달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도 할머니로 되어 매일 손자 손녀를 돌보느라 바쁠 수도 있다.정말로 찾게 된다해도 이 가주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것이다.이 가주는 사람들이 조카 딸을 찾아 나서는 것을 막아 나서서 경고했을 뿐 두 조카딸이 돌아와서 그녀와 결판을 내고, 권력을 놓고 다투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이 가주는 수십 년 동안 이씨 가문의 가장 노릇을 했기에 가문의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에 넣고 있었다. 두 조카딸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이 자신과 다툴 무기가 없다고 생각했다.설령 두 조카딸이 싸울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 가주는 예전처럼 사람을 시켜 예전에 그들을 버렸던 것처럼 오늘날도 그들을 영원히 이 바닥에서 사라지게 하면 그뿐이었다.이 가주는 은근히 두 조카딸이 비참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거짓말로 조카딸에게 이익을 주면서 얼렁뚱땅 넘어가면 되기 때문이다.그해 사건의 모든 증거는 이 가주에 의해 지워졌고 사정을 아는 사람들도 그녀가 깔끔하게 처리했다.증거가 없으면 모든 강성 사람들이 이 가주가 그 해에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그저 소문으로만 들릴 뿐이다.수십 년이 흘러도 이 가주 이은화를 감옥으로 보낸 사람은 없었다.남편과 가족 모두는 그 당시 일은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 이은화는 결혼하지 않았다.“윤정아, 고현 도련님이 만약 정말 게이라면 너도 이젠 관심 끄는 게 좋을 거야. 목표를 바꿔봐. 강성에도 수많은 가문이 있잖아. 그 몇몇 가문의 사람만 아니라면 엄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도와줄 수 있어.”이윤정은 고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강성 전체를 놓고 보아도 고현만큼 멋진 남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윤정은 고현을 오랫동안 사모해 왔기 때문에 고현을 포기하라고 해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이윤정은 고현이 정말로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지 기회를 찾아 시험해 보기로 했다.고현이 정말로 여자
진작에 이 모든 것을 준비해서 고현이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사실 자신감이 없었다.고현은 20년 넘게 남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갑자기 그 가면을 벗고 여자라는 현실에 맞서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전호영은 고현이 이곳에서 자신이 밤새 수영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도 있다고 짐작했다.전호영은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고현은 나오지 않았다.“설마 마음이 바뀐 건 아니겠지?”전호영은 걱정하며 중얼거렸다.전호영은 일어나서 여자 탈의실에 가보려 했다.이때 탈의실 문이 열렸다.고현은 자신의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수줍어하면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전호영은 그녀의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안에서 주무시는 줄 알고 가보려는데 나오셨네요.”전호영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고현 씨 자신감은 어디로 가신 거죠? 이렇게 수줍어하면서 고개도 못 쳐들고 움츠러드는 모습이 마치 거북이 같네요.”고현은 전호영을 무시한 채 여전히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고 있었지만 더 이상 우물쭈물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그녀는 익숙하지 않았다.고현은 조심스럽게 수여장 옆으로 걸어가더니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물에 들어간 순간에야 비로소 가슴을 감싸던 두 손을 풀었다.오랫동안 수영을 하지 않은 탓인지 고현은 물속에 머리를 박았고 조심하지 않아 물을 삼켜 기침을 몇 번 했다.전호영은 수영장 옆에 서서 피식 웃으며 물었다.“괜찮으세요?”고현은 무시했다.오랫동안 수영을 하지 않았지만 고현은 본능적으로 물에서 한 바퀴 헤엄칠 수 있었다. 하지만 피곤한지 이내 물가로 헤엄쳐 올라가서 앉았다.“준비운동도 안 하고 물에 들어가면 다리에 쥐가 나기 쉬워요.”전호영이 한마디 내뱉었다.고현은 한참을 말이 없다가 그제야 대답했다.“수영을 너무 오래 안 했더니 벌써 피곤하네요.”“앞으로 수영하고 싶으면 저한테 와서 시원함을 맘껏 즐기세요. 물에 들어가면 개운하지 않아요?”전호영은 고현의 옆에 살짝 앉았다.전호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고현
“이모! 아저씨!”우빈이가 달려 나왔다.그는 멀리서 하예정과 노동명을 보자마자 바로 선생님의 손을 뿌리치고 작은 가방을 멘 채로 빠르게 달려왔다.선생님은 깜짝 놀라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아왔다.“우빈아, 너무 빨리 뛰지 마. 넘어져! 조심해야지.”하예정이 몇 발짝 앞으로 나가며 소리쳤다.눈 깜짝할 사이에 우빈은 하예정의 곁으로 달려갔다.하예정은 쪼그리고 앉아 그를 안아 주었다. 그러다가 곧 몸부림치며 내려왔다.“이모 뱃속에는 제 동생이 있어요. 동생이 지금 자라는 중이라 이모가 저를 안아 주면 제가 이 동생을 누를지도 몰라요.”우빈은 가끔 이모의 배를 만지면서 하예정 배속의 동생과 인사 나누기도 했다.심지어 배속의 동생에게 왜 여동생이 아니고 남동생이냐고 묻기까지 했다.안타깝게도 그 동생은 아직 그에게 답을 줄 수가 없었다.하예정은 녀석에게 한 달 후, 동생에게 인사를 건네면 움직일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그때면 태아의 움직임이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하예정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괜찮아. 우리 우빈이 전혀 무겁지 않은걸. 동생을 누르지 않을 거야.”임신해도 우빈이 정도는 거뜬하게 안을 수 있었다.다만 다들 우빈이가 함부로 움직여 실수로 그녀의 배를 다치게 할까 봐 안게 하지 못했을 뿐이다.우빈도 철이 든 아이였다.하예진이 그에게 다시는 하예정 품에 안기지 말라고 한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아까는 너무 기뻐서 참지 못하고 하예정에게 안긴 것이다. 하하!“아저씨.“우빈은 즐겁게 노동명의 앞으로 뛰어갔다.그는 자연스레 노동명의 허벅지에 올라가 두 손으로 노동명의 목을 껴안으며 달콤하게 소리쳤다.“아저씨, 보고 싶었어요.”“아저씨도 우리 우빈 너무 보고 싶었어.”노동명은 어린 녀석을 껴안으며 마음이 따스해졌다.“어제 아저씨를 못 봤더니 태윤 이모부가 말씀하신 것처럼 하루 못 봤더니 일... 일...”우빈은 전태윤이 한 말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그 뒷부분의 구절이 기억나지 않았다.“하루 못 보니 일 년이나
하예정의 차는 노씨 그룹 입구에 멈춰 서서 노동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노동명은 하예정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2분도 채 되지 않아 차를 타고 나왔다.“예정 씨.”노동명은 차창을 내리누르고는 웃으며 말했다.“우빈의 여행용 가방은 저에게 맡기면 돼요.”하예정이 대답했다.“어차피 저도 바래다 드려야 해요. 오빠, 우빈이 물건들도 전부 제 차에 있으니 먼저 우빈이 데리러 유치원에 가보세요. 유치원에서 곧 하학해요.”“네.”그러자 노동명이 물었다.“태윤이는 안 왔어요?”“너무 바빠서 얘기도 안 꺼냈어요.”노동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는 정말 바쁜 친구였다.하예정이 먼저 차를 몰았고 노동명의 차도 곧 뒤를 따랐다.그런데 유치원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여운별을 만나게 되었다.여운별은 매일 유치원 입구에서 하예정과 우연히 만날 기회를 잡고 있었다.“사모님, 또 조카 데리러 오신 거예요?”여운별은 입가에 우아한 웃음을 머금으며 걸어오는 하예정에게 물었다.하예정과 함께 있는 노동명을 보는 여운별은 아름다운 눈을 반짝거렸다. 하예정이 가까이 오지 않았다면 여운별은 아마 노동명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을 것이다.전태윤이 하예정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는데, 그녀가 그의 좋은 형제와 함께 다니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가!“네, 사모님도 시누이를 데리러 오신 거예요?”“네, 유치원에 다니는 동안만 매일 제가 데려다줘야 하거든요. 내일 주말이니까 이틀 쉬어도 되겠네요. 참, 쉬지도 못하겠네요. 애가 자꾸 놀이터에 가겠다고 조를 테니까요. 저희 시부모님께서는 집에서 쉬고는 계시지만 매일 수많은 사업을 해야 하거든요. 손님께 음식 대접도 해야 하고 고객과 함께 골프도 치러 가야 해서 너무 바쁘세요.”여운별은 거짓말을 점점 더 자연스럽게 했다.너무 잘해서 그런지 자신조차 사실 같다고 느껴졌다.마치 그녀가 정말로 용씨 사모님인 듯, 정말로 시누이와 시동생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우리 시누이도 시부모님과 함께 놀지 않고 매일 저에게 달라붙어서
여운초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아주 꿀이 떨어지네요.”하예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웃음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자꾸 새어 나왔다.그녀도 가볍게 답장을 보냈다.“운초 씨도 도련님 사랑 듬뿍 받으시잖아요.”둘은 마치 꿀단지에 잠긴 듯, 사랑의 달콤함에 흠뻑 젖어 있었다.여운초가 바빠 보였기에 하예정은 더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그녀가 천천히 제 차로 돌아와 막 차에 오르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주형인이 서 있었다.“처제.”주형인은 다가오며 그녀가 혼자인 것을 보고 물었다.“우빈이는 안에 데려다줬어?”“네. 우빈이 보고 싶으세요?”주형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손님 모시고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빈이 얼굴이나 볼까 해서 왔어. 아직 안 왔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일찍일 줄이야.”“우빈이는 잘 지내요.”하예정은 전 형부에게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주형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우빈이는 잘 지낼 거라 믿어. 네가 돌보고 있으니 나랑 너희 언니도 마음 놓고 있어. 우빈이한테 들었는데 너희 언니 출장 갔다며? 오래 걸린다고 하던데.”“그건 왜요?”“아, 별일은 아니고 그냥 물어봤어.”잠시 침묵하던 주형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출장, 정말 오래 걸려?”“정확히는 몰라요.”“아, 그렇구나.”주형인의 얼굴엔 아쉬움이 스쳤다.하예정은 차갑게 말했다.“더 할 얘기 없으시면, 저 먼저 가볼게요.”“아, 그래.”주형인은 무언가 말하려다 끝내 삼켰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하예정이 차에 올라 떠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자신의 차로 향했다.주형인은 그때 이후로 다시 회사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젠 갈 곳도, 그를 받아줄 곳도 없었다. 변변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관성시에서 그는 이미 유명했다. 나쁜 쪽으로 유명했다. 그 이름에 따라붙는 것은 조롱뿐이었다.사람들은 그를 두고 인과응보라며 혀를 찼다. 뿌린 대로 거
그래서 녀석의 짐은 미리 노동명에게 맡겨야 했다.하예정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우빈이가 선생님의 손을 잡고 점점 멀어지자 하예정은 그제야 주차해 둔 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때, 막 차에 오르는 용씨 가문 사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의 곁을 바짝 지키고 있었다.한 경호원이 공손히 차 문을 열어주며 예의를 갖췄다.용씨 가문 사모님은 살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고는 하예정을 발견하자 미소를 머금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예의상 하예정도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잠시 후 여운별을 태운 고급 승용차는 부드럽게 하예정의 시야에서 멀어졌다.하예정은 시선을 거두며 휴대폰을 꺼내 여운초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운초 씨, 용 사모님을 또 만났어요. 그나저나 동생분께서 찾아와 귀찮게 굴지는 않으셨나요?”여운초는 아직 집을 나서지 않은 상태였다. 오전에는 화상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꽃집에 들를 틈이 없었다.회사에도 처리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통화로 해결할 업무가 많이 남아 있었다.어쨌든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저녁이 되면 남편과 함께 여유롭게 서원 리조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그렇게 또 주말이 다가왔다.주말에는 대체로 업무에서 손을 뗐다. 급한 일이 생기면 한동호가 대신 해결해 주곤 했다.꽃집도 믿음직한 직원들이 지키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주말을 남편과 함께 오롯이 둘만의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다.내일 밤은 시어머니와 함께 연회에 참석할 계획이었다.“네, 괜찮아요. 곧 있다 올지도 모르겠네요.”여운초는 하예정에게 답장을 보냈다.“제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 용씨 가문 사모님과 여운별이 제 눈에 너무 겹쳐 보이더라고요. 목소리도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여운별은 지금 남자친구도 없고 경호원을 둘 형편도 안 돼요. 고급 승용차라니, 여운별이 타는 차는 제가 익히 알아요.”여운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다음에 용씨 가문 사모님을
하지만 하예정은 아직 용씨 가문 사모님과 여운별이 한자리에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가 여운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두 사람이 동시에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의혹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여운별은 애초에 하예정을 기다리지 않았다.지금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어야 했다. 만약 그녀가 미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너무 작위적으로 보였을 것이다.지나친 의도는 하예정의 의심을 부추겼을 것이다.하예정이 그녀를 조사하고 있다고 용태호가 알려준 적이 있었다.물론, 아무리 뒤져도 쓸 만한 정보는 나오지 않을 터였다.하예정은 이미 그녀가 여운별일 거라고 의심하고 있었다.여운별은 문득 가장 증오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언젠가 마주했던 언니의 목소리, 그 익숙한 울림이. 하예정의 의심을 부추긴 것은 분명 여운초의 말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다행히도 용태호는 능수능란한 사람이었다.하예정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찾아낼 수 있는 건 모두 그의 손끝에서 빚어진 허상일 뿐이었다.그러나 하예정이 심효진과 친밀한 사이라는 점은 우려할 만했다. 심효진은 소씨 가문의 며느리였고, 소씨 가문은 정보망이 촘촘하기로 유명했다.하예정이 누구를 조사하려면 소씨 가문의 손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하예정은 빈손이었다. 여운별이 여씨 가문의 둘째 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운별은 마음 한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그리고 그 여유는 곧 그녀의 표정에 스며들어 하예정을 마주할 때면 그녀는 점점 더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다.마치 자신이 진짜 용씨 가문 사모님인 것처럼, 여운별이라는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말이다.용태호는 그녀한테 내일 밤에 있을 연회에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참석하라고 말했다. 용씨 가문 사모님의 신분으로 참석하라는 것이었다.그 연회에는 관성시 상류 사회의 귀부인들이 모일 터였다.전씨 가문의 명해은도 내일 밤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며 며느리인 여운초도 데려갈
하예정이 자주 타는 차는 이미 집 앞에 멈춰 서 있었다.경호원은 우빈에게 차 문을 열어주곤 그를 차에 태운 뒤 안전벨트를 매주었다.하예정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하이힐을 벗고 편안한 신발을 갈아 신고는 말했다. “우빈이 안전벨트 다 맸어?”하예정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아저씨가 우빈이 도와서 안전벨트 다 매주셨어요. 작은이모, 이제 출발하셔도 돼요.”하예정은 웃으며 고개를 돌린 뒤 시동을 걸었다.20분 뒤 두 대의 차가 유치원 앞 주차장에 멈춰 섰다.하예정은 차에서 내렸다.우빈이는 이미 스스로 안전벨트를 풀고 작은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하예정이 차 문을 열자 우빈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이모, 오후에 아저씨가 데리러 올 때 내 캐리어도 챙겨달라고 부탁해 주세요.”“집에 먼저 들르지 않을 거니?”하예정이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집에 가서 밥부터 먼저 먹고 갈래?”우빈은 큰 눈을 반짝이며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아저씨는 절대 나를 배고프게 하지 않아요. 아저씨랑 가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우빈에게 있어서 노동명은 이미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이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거대한 나무와 같아서 그 곁에 있으면 세상 어떤 두려움도 사라지게 된다.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우빈이 노동명에게 전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하예정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노동명과 하예진이 결혼을 한다면 세 사람은 분명히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하지만 이혼 후 아이를 홀로 키우며 재혼하는 여자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두 번째 남편 또는 그의 가족들이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받아들인다 해도 그 아이를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명과 그의 가족들은 우빈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바로 하예진이 노동명에게 마음을 열게 된 이유였다.노씨 가문은 노동명이 평생토록 우빈만을 아들처럼 생각하며 지내도 괜찮다는 마음이었다.비록 우빈은 노동명의 친아들이
“잘 자요.”하예정은 남편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넨 뒤, 문을 살며시 닫았다.전태윤은 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그가 먼저 서재에서 자겠다고 말했지만 아내에게 밀려 나가며 문이 닫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쫓겨난 기분이 들었다.전태윤은 콧등을 문지르며 어쩔 수 없이 서재로 발걸음을 돌렸다.그날 밤은 그렇게 고요하게 보냈다.다음 날 아침, 전태윤이 일어났을 때 그의 아내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를 위한 꿀물도 준비해 놓았다.“여보, 좋은 아침이에요.”하예정은 조카 우빈이가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우빈의 작은 책가방을 들고 우빈이와 부엌을 나오던 참에 막 내려온 전태윤을 마주쳤다.그녀는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꿀물을 준비했어요. 마시는 거 잊지 마요.”전태윤은 어젯밤 술에 취하지 않았지만 독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다.숙취로 인한 두통을 걱정한 하예정은 그를 위해 세심하게 꿀물을 준비한 것이다.전태윤이 이렇게 다정하고 배려 깊은 아내를 만난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하예정은 그렇게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알겠어, 좀 있다 마실게. 오늘 꽤 일찍 일어났네.”평소에는 항상 그가 먼저 일어났었다.“네, 우빈이가 일찍 일어나서요.”“이모부!”우빈은 맑은 목소리로 전태윤을 불렀다.전태윤은 다가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유치원에서 말 잘 들어야 해.”우빈은 대답했다.“저 말 잘 들어요. 아주 잘 듣고 있어요. 선생님과 친구들이 저를 엄청 좋아해요.”“그래, 그래, 모두가 너를 좋아하고말고.”전태윤은 웃으며 우빈의 작은 얼굴을 가볍게 꼬집었다.우빈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그럼요, 남녀노소 누구나 다 저를 좋아해요. 관성에서 가장 잘나가는 어린이라고요.”하예정은 웃음을 터뜨리며 우빈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그거, 지율 삼촌한테서 배운 거지?”전지율은“관성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가”를 늘 입에 달고 다녔다.우빈은 전지율과 자주 놀았기 때문에 그에게서 이런 말장난을 배운
“술 냄새도 별로 안 나요. 제가 잠들면 천둥이 쳐도 깨지 못할걸요. 이렇게 고생스레 서재에서 밤을 보낼 필요 없어요.”하예정은 그녀의 아랫배에 올려놓은 전태윤의 큰 손을 잡으며 말했다.“내가 샤워도 하고 따뜻한 물도 마시고 껌 두 알을 먹어서 술 냄새를 좀 없앴어... 창빈이가 그러는데 내 몸에 술 냄새가 심하다고 그러던데.”하예정은 작은 소리로 전창빈을 몇 마디 욕했다.전창빈은 진실만 말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전창빈은 전태윤이 입만 열면 술 냄새가 확 난다고 느꼈다. 그리고 전태윤 본인도 자신의 몸에서 술 냄새가 풍겨 하예정이 맡을까 봐 걱정한다고 생각했다.“창빈 도련님이 태윤 씨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만났어요?”하예정이 물었다.전태윤이 대답했다.“응. 원림성의 A시로 선우씨 가문에서 가정 요리사에 지원하겠다고 했어. 예정아, 할머니께서 창빈에게 골라주신 아내가 바로 선우씨 가문의 큰손녀 선우민아 씨라고 해.”“저도 알아요. 어머님이 이 사실을 얘기하자마자 우리 할머니가 창빈 도련님을 위해 아내를 정해주셨다는 사실을 눈치챘어요..”전태윤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역시 내 아내답게 똑똑하네.”“저는 멍청하지 않거든요.”“그럼. 내 아내는 늘 똑똑하지.”만약 멍청하다면 전태윤의 마음에 들지도 않을 것이다.“우리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사람은 전부 멀리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하예정과 여운초만 관성 출신이었다.전태윤은 한참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할머니께서는 나와 이진이를 가장 아끼셨구나. 우리에게 관성의 아내를 골라주셨잖아.”그는 말하면서 또 하예정의 입술에 몇 번 뽀뽀했다.전태윤은 사랑하는 아내를 침대에 데려가고 싶었다.그러나 아기를 위해 그는 또 애써 참았다.“이혁 도련님과 전우 도련님의 아내는 어디 분이세요?”“몰라.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어. 어차피 관성의 사람 아닐 거야. 요즘 두 사람 다 관성에 있는 걸 못 봤어.”전태윤은 하예정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는 아내를 방으로 데려다주며 부드럽게 말을 건
“형, 너무 늦었어. 형도 힘들 텐데 그만 쉬어 나도 이만 돌아갈게.”전태윤과 얘기를 다 마친 전창빈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전태윤이 말을 건넸다.“너무 늦었는데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가. 묵을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전창빈이 말을 이었다.“안 멀어. 여기 방은 있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그래. 그리고 잠자리를 바꾸면 잠도 잘 안 오고.”전창빈은 장소를 옮기면 새로운 거주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침대를 가리는 사람이 잠자리를 바꾸면 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곤 한다.전창빈의 개인 별장이 그리 멀지 않고 잠자리를 가리는 전창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태윤도 더는 전창빈을 만류하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천천히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가 문자를 보내라고 당부했다.“그럼 얼른 쉬어.”전태윤은 배웅하러 일어나지 않았다.전창빈이 멀리 떠난 뒤 전태윤은 물을 반 잔 더 마시고는 다시 몸의 냄새를 맡았지만, 여전히 술 냄새가 났다.그는 하예정에게 영향을 줄까 봐, 그녀가 깨어날까 봐 서재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그는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 입구로 돌아갔다. 그러나 문을 밀어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잠시 안을 바라만 보다가 몸을 돌려 서재로 들어갔다.하예정은 한밤중까지 자고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야 했다.자기 전에 우유 한 잔을 마시면 한밤중에 일어나곤 한다.화장실에 다녀온 하예정은 잠에서 깼다.그녀는 그제야 전태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침대 앞으로 돌아와 앉아 침대 머리맡에서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보니 이미 새벽 세 시가 넘었다.전태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돌아오지 않은 건가? 언제 돌아오는지 문자도 없고.’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참 후에야 전태윤이 전화를 받았다.“여보, 아직 안 왔어요? 많이 바빠요?”하예정은 관심 있게 물었다.그는 예전에 아무리 바빠도 새벽에는 반드시 집에 돌아왔다.그러나 지금 새벽 3시가 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사업에 관한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