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씨 가문에서는 딸의 권력이 더 컸다.이윤미는 이 가주의 단 하나뿐인 딸이다. 이윤미는 지금 확실히 이씨 가문의 친딸이다. 앞으로도 가주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하므로 이 가문에서 정말로 이윤미의 권력이 가장 막강했다.이씨 가문의 남자들은 상속권이 없으니 그 형수님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씨 가문에서 권력이 가장 큰 사람은 이씨 성을 가진 여자이지 이씨 가문으로 시집온, 다른 성씨를 가진 여자에게는 아무런 권세가 없었다.“그만해. 내가 아직도 숨도 쉬고 있는데 뭘 다투고 있는 거야?”이 가주는 목소리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내가 이미 윤미에게 새 차로 바꾸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후회하지 않을 거야. 의견이 있어도 모두 삼켜버리는 게 좋을 거야.”“어쨌든 윤미도 이젠 우리 가문의 딸이야. 종일 낡은 차를 몰고 다니는 것도 창피한 일이지. 윤미는 지금 우리 이씨 가문을 대표하고 있으니 윤미의 체면이 구겨진다는 뜻은 우리 가문의 체면도 서지 않는다는 뜻이야.”“윤미에게 차를 바꾸어주는 것은 우리 가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함이야.”“윤정아, 내일 언니와 함께 차를 고르러 가.”뒤이어 이 가주가 이윤미에게 말을 건넸다.“마음에 드는 차가 있으면 엄마한테 말하면 돼. 엄마가 사람 시켜 돈 보내줄 테니까.”“고마워요. 엄마.”이윤미가 기뻐하며 인사를 건넸다.다른 사람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던지 이윤미는 개의치 않았다.연약한 척 한 지 1년이 넘었다. 가끔은 위세를 떨쳐야 사람들이 그녀를 호락호락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윤미 오늘 오후에 어디 갔었어? 오후 내내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집에 돌아오다니.”이 가주 불쑥 물었다.이윤미는 솔직히 대답했다.“고씨 가문 저택에 가서 고 이사님을 뵈러 갔어요. 고현 도련님과 고빈 도련님도 계셨고요. 저한테 열정적인 태도로 남아서 식사하라고 하시기에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에요.”그 말을 들은 이윤정은 질투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이윤정이 고현에게 접근하고 싶었지만 고현은 그녀와 대화하는 것
이 가주의 남편은 성은 정씨, 이름은 군호였다. 사람들은 모두 정군호를 정 선생이라고 불렀다.아들도 모두 그의 성씨를 따랐다.젊었을 적 정군호가 이 가주의 데릴사위로 되기로 한 날부터 그는 평생 이 가주 앞에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아내에게 눌리면서 살 운명의 길을 걷고 있었다.다행히도 이 가주가 애초에 정군호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두터운 정이 남아있었다.이 가주는 자녀와 하인 앞에서 일반적으로 정군호의 체면과 위신을 세워주곤 했다.정군호도 자식들 앞에서 비로소 어른 행세를 할 수 있었다.이윤미가 아빠의 말을 듣더니 쓴웃음을 지었다.“제가 고현 도련님을 데릴사위로 삼을 생각은 없었어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고 이사님을 뵈러 갔을 때 마침 주말이라 고현 도련님도 집에 있었을 뿐이라고요.”“제가 고현 도련님 때문에 미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요. 걱정하셔야 할 사람은 바로 아빠 귀염둥이 딸 윤정이에요. 윤정이는 지금 고현 도련님 때문에 미칠 지경이거든요.”정군호는 이윤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윤정아, 넌 윤미와 달라. 넌 과감하게 고현 도련님에게 구애할 수 있는걸. 아빠가 지지할 거야. 네가 고현 도련님처럼 훌륭한 남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면 나와 네 엄마도 매우 기뻐할 거야.”이 가주도 웃으면서 한마디 보탰다.“윤정아, 엄마도 말했잖아. 넌 이젠 자유롭게 너의 사랑을 찾아가도 된다고.”“고현 도련님과 이윤정은 정말로 천생연분인걸.”조윤도 칭찬해 주었다.그들 가문의 사람들은 이윤정이 고씨 가문으로 시집가서 고씨 사모님으로 되는 것을 매우 바라고 있었다.하지만 이윤미는 쓸모없는 남자를 데릴사위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능력 있는 남자는 일반적으로 데릴사위로 들어오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윤미의 결혼은 이윤정만큼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모두의 격려에 이윤정은 얼굴이 붉어지며 허리를 곧게 펴고 자랑스러운듯 이윤미를 한번 흘겨보았다.이윤미는 웃을 듯 말 듯 눈웃음을 쳤고 그 모습을 본 이윤정은 또 화가 잔뜩 치밀어 올
이윤정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전호영에게 휘어 잡혀 게이로 될 것을 생각하더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고 이사님 부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죠? 전씨 가문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 관여하지 않는 건 아니겠죠?”“전씨 가문은 단지 관성에서만 권세가 있을 뿐 아무리 관성에 사업이 있다 해도 고씨 가문과 비교할 수 없어요. 고 이사님도 전호영 도련님에게 아부할 필요가 없을 텐데.”“전호영 그놈, 너무 얄밉네요. 우리 강성의 여자 중에서 전호영을 엄청나게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걸요. 살인이 허락되는 세상이라면 전호영은 아마 수천 번 죽었을걸요.”이윤정은 전호영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이 가주는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이런 일은 우리 외부인이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고현 도련님이 진심으로 전호영을 좋아한다면, 세속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면 누구도 고현 도련님을 막을 수 없을거야.”“고 이사님 부부는 늘 자식들의 일에 관여하시지 않는 사상이 진보적인 분들이셔. 두 아들이 무엇을 하든 크게 간섭하지 않으시거든. 고현 도련님... 본래부터 동성애자일 수도 있어.”이 가주는 나지막이 다시 입을 열었다.“고현 도련님을 사모하는 훌륭한 여자들도 그렇게 많은데 한 사람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잖아. 예전 같으면 눈이 너무 높아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 와서 보니 취향 문제일 수도 있겠다 싶어.”“그래서 여자들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고.”이윤정은 조급한 표정으로 물었다.“엄마, 나 어떡해요? 고현 도련님이 미치도록 좋은걸요. 저는 그분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어요. 어떻게 동성애자일 수 있죠?”“다 전호영 때문이에요. 엄마, 전호영을 강성에서 몰아낼 방법은 없어요?”이 가주는 손을 뻗어 이윤정의 머리를 톡 쳤다.“전호영이 보통 사람인 줄 알아? 엄마도 전호영에게 예의 갖춰서 인사드려야 해. 겉으로 보기에는 전씨 그룹이 그의 뒤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전호영의 배후에는 관성 전체의 거물들이
수십 년이 흘러간 오늘날 두 조카딸도 어쩌면 생활의 고충에 시달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도 할머니로 되어 매일 손자 손녀를 돌보느라 바쁠 수도 있다.정말로 찾게 된다해도 이 가주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것이다.이 가주는 사람들이 조카 딸을 찾아 나서는 것을 막아 나서서 경고했을 뿐 두 조카딸이 돌아와서 그녀와 결판을 내고, 권력을 놓고 다투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이 가주는 수십 년 동안 이씨 가문의 가장 노릇을 했기에 가문의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에 넣고 있었다. 두 조카딸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이 자신과 다툴 무기가 없다고 생각했다.설령 두 조카딸이 싸울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 가주는 예전처럼 사람을 시켜 예전에 그들을 버렸던 것처럼 오늘날도 그들을 영원히 이 바닥에서 사라지게 하면 그뿐이었다.이 가주는 은근히 두 조카딸이 비참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거짓말로 조카딸에게 이익을 주면서 얼렁뚱땅 넘어가면 되기 때문이다.그해 사건의 모든 증거는 이 가주에 의해 지워졌고 사정을 아는 사람들도 그녀가 깔끔하게 처리했다.증거가 없으면 모든 강성 사람들이 이 가주가 그 해에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그저 소문으로만 들릴 뿐이다.수십 년이 흘러도 이 가주 이은화를 감옥으로 보낸 사람은 없었다.남편과 가족 모두는 그 당시 일은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 이은화는 결혼하지 않았다.“윤정아, 고현 도련님이 만약 정말 게이라면 너도 이젠 관심 끄는 게 좋을 거야. 목표를 바꿔봐. 강성에도 수많은 가문이 있잖아. 그 몇몇 가문의 사람만 아니라면 엄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도와줄 수 있어.”이윤정은 고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강성 전체를 놓고 보아도 고현만큼 멋진 남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윤정은 고현을 오랫동안 사모해 왔기 때문에 고현을 포기하라고 해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이윤정은 고현이 정말로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지 기회를 찾아 시험해 보기로 했다.고현이 정말로 여자
진작에 이 모든 것을 준비해서 고현이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사실 자신감이 없었다.고현은 20년 넘게 남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갑자기 그 가면을 벗고 여자라는 현실에 맞서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전호영은 고현이 이곳에서 자신이 밤새 수영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도 있다고 짐작했다.전호영은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고현은 나오지 않았다.“설마 마음이 바뀐 건 아니겠지?”전호영은 걱정하며 중얼거렸다.전호영은 일어나서 여자 탈의실에 가보려 했다.이때 탈의실 문이 열렸다.고현은 자신의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수줍어하면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전호영은 그녀의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안에서 주무시는 줄 알고 가보려는데 나오셨네요.”전호영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고현 씨 자신감은 어디로 가신 거죠? 이렇게 수줍어하면서 고개도 못 쳐들고 움츠러드는 모습이 마치 거북이 같네요.”고현은 전호영을 무시한 채 여전히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고 있었지만 더 이상 우물쭈물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그녀는 익숙하지 않았다.고현은 조심스럽게 수여장 옆으로 걸어가더니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물에 들어간 순간에야 비로소 가슴을 감싸던 두 손을 풀었다.오랫동안 수영을 하지 않은 탓인지 고현은 물속에 머리를 박았고 조심하지 않아 물을 삼켜 기침을 몇 번 했다.전호영은 수영장 옆에 서서 피식 웃으며 물었다.“괜찮으세요?”고현은 무시했다.오랫동안 수영을 하지 않았지만 고현은 본능적으로 물에서 한 바퀴 헤엄칠 수 있었다. 하지만 피곤한지 이내 물가로 헤엄쳐 올라가서 앉았다.“준비운동도 안 하고 물에 들어가면 다리에 쥐가 나기 쉬워요.”전호영이 한마디 내뱉었다.고현은 한참을 말이 없다가 그제야 대답했다.“수영을 너무 오래 안 했더니 벌써 피곤하네요.”“앞으로 수영하고 싶으면 저한테 와서 시원함을 맘껏 즐기세요. 물에 들어가면 개운하지 않아요?”전호영은 고현의 옆에 살짝 앉았다.전호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고현
고현이 수영장에서 나와 일어났을 때에야 전호영이 더 일찍 수영장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주위에 없는 것으로 보면 탈의실에 있을 것이다.고현은 별생각 없이 탈의실로 향했다.탈의실에 들어선 고현은 조금 전에 벗어놓았던 남성 옷들과 가짜 가슴 근육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여성복만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고현이 헤엄치는 틈을 타 전호영이 여자 탈의실로 들어와 그녀가 벗어놓은 남자 옷들을 훔쳐 간 것이 분명했다.그 뻔뻔한 남자가 고현에게 치마를 입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다.고현은 치마를 입어본 적이 없었다.고현은 몸을 돌려 여자 탈의실을 빠져나와 남자 탈의실로 가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제 옷과 물건들을 모두 돌려줘요!”“제가 잘 정리해 두었어요. 나중에 집에 가서 돌려드릴게요.”전호영의 뻔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현은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전호영! 당장! 당장 내 옷 돌려줘!”고현이 치마를 입고 집으로 돌아가면 집안의 하인들이 모두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고현은 여자의 신분을 회복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전호영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이놈이 가장하고 싶은 일이 바로 고현의 여자 신분을 회복시켜준 다음 그가 동성애자라는 혐의를 벗게 할뿐더러 그녀를 사모하는 여자들을 모두 단념하게 하는 것이다.“옷 남겨놨어요.”“그건 여자가 입는 옷이잖아요!”“당신도 여자인걸요.”고현은 문득 말문이 막혔다.잠시 후, 고현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전호영 씨, 문을 열지 않으면 문을 부숴버릴 거예요.”“부숴보시든가요. 저 지금 옷을 안 입었거든요. 만약 문을 부수고 들어온다면 저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은걸요.”“그렇게 된다면 고현 씨가 저를 끝까지 책임져야 할걸요. 저한테 장가오지 못하겠으면 시집와도 저는 좋다고 생각해요.”전호영은 그의 뻔뻔함을 유감없이 발휘했다.“전호영!”고현영은 전호영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감히 그 위험을 무릅쓰지는 못했다.정말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그 예쁜 치마는 제가 고현 씨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산 치마인걸요. 입어보지 그래요. 그 치마를 입고 나와보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아요. 저도 고현 씨가 치마 입은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요.”전호영은 고현이 수영하기 전에 벗어놓은 옷을 돌려주며 말을 건넸다.“감기 걸리지 않게 빨리 갈아입고 와요.”고현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옷을 건네받고는 바로 여자 탈의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고현이 화가 난 것은 사실이었다.하지만 자신이 연이어 재채기를 하여 감기에 걸릴까 봐 전호영이 문을 바로 열어주었던 행동들도 고현은 마음에 담고 있었다.이 남자는 뻔뻔할 때는 항상 고현을 화를 치밀어 오르게 했지만 또 그와 반대로 고현을 배려할 때에는 전호영은 따스함으로 고현의 마음을 감싸주곤 했다.고현이 다시 남자로 변장하려면 시간이 좀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옷을 갈아입은 전호영은 수영장에 있는 리클라이너에 누워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적어도 여자 수영복을 입은 모습은 볼 수 있었다.전호영은 이따가 고현을 데려다주고 따뜻한 생강차 한잔을 끓여주고 재워야겠다고 생각했다.30분 후.고현은 그제야 탈의실에서 나왔다.고현이 다시 미남의 모습을 되찾은 것을 보자 전호영이 일어나면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두 사람이 결혼하면 당신은 저의 아내도 되고 저의 형제도 될 수 있겠네요. 문득 이런 모습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네요.”고현은 눈에 힘을 주며 톡 쏘아붙였다.“전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한 적 없거든요.”“당신이 시집오고 싶지 않다면 제가 당신에게 시집가면 되겠네요. 예단비는 얼마나 줄 수 있어요? 부동산 소유증에 저의 이름을 올려줄 수는 있어요?”“결혼하게 되면 누가 돈을 관리해요? 고현 씨가 저에게 예단비를 주는 가치만큼 제가 혼수를 장만해서 가져올게요. 절대로 당신이 손해 보는 일은 없게끔 할게요.”고현이 바로 말을 이었다.“제가 당신과 결혼하면 아이를 낳
고현은 비꼬면서 말했다.“당신 할머니가 발견하지 않으셨다면 당신도 시각장애인이나 다름없거든요. 할머니 공로를 자신에게로 돌릴 생각하지 마세요.”전호영은 말문이 막혔다.사실이기 때문이다.전씨 할머니가 직접 조사하시고 나서 사진을 전호영에게 건네주면서 고현을 아내로 맞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전호영도 애당초 할머니께서 잘생긴 남자와 인연을 맺어주어 자신을 동성애자로 살게 하려는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되었다.고현과 접촉한 후에도 전호영은 그녀가 여자라는 허점을 찾지 못했다. 만약 큰 형수와 둘째 형이 그에게 직접 추구하라고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고현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고현의 부모님 아니었더라면 고현의 여성 신분을 확인받을 수 없었다.전호영이 자신의 말에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고현은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다.“그래도 시름이 안 놓여요. 제가 남자로서 지켜야 할 매너는 지켜야죠.”전호영은 기어코 고현을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고집했다.“직접 집까지 바래다주지 않으면 저도 안심할 수 없어요.”고현은 또 전호영의 속셈을 꿰뚫어라도 본 듯 말했다.“제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 저를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또 밤이 깊어졌으니 호텔로 돌아가지 못한다면서 우리 집에서 자야 한다고 그러실 거잖아요.”전호영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저를 양아치 취급하지 마세요. 고 아저씨도 저를 당신 집에서 하룻밤 묵으라고 초대하셨기도 했고 아주머니도 제가 만든 아침을 좋아하신다고 하셨거든요.”“제가 당신 집에서 하룻밤 묵는 이유가 단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맛있는 아침을 준비해 드리기 위한 거에요.”고현은 또 비꼬며 말했다.“당신이 없는 동안에도 우리가 굶어 죽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우리가 매일 아침 먹는 밥도 매우 맛있거든요.”“제가 만든 아침이 좀 더 맛있을걸요.”고현은 또 말을 잇지 못했다.고현은 전호영의 요리 솜씨를 진심으로 인정해주었다.고현 별장의 요리사마저도 전호영만 오면 모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