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은 말하면서 하예정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아직 태윤이랑 결혼식도 안 올렸으니 나중에 결혼식 치르고 나서 아이 가져도 충분해. 그동안은 둘만의 시간을 마음껏 보내.”부부가 피임만 안 하면 아이는 조만간 생길 테니까.하예정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도 순리에 맡길 뿐 전혀 조급하지 않았다.“태윤아.”할머니가 불쑥 운전하는 전태윤을 불렀다.“이진이는 움직이기 시작했어?”“제가 어떻게 알아요? 저는 그저 걔 회사에 있을 때만 지켜보지 퇴근한 후에는 뭘 하든 상관 안 해요.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인데 언제까지 제가 맏형이라고 지켜보겠어요.”할머니는 말문이 턱 막혔다.“할머니 지금 여운초 씨 말씀하시는 거예요?”하예정이 물었다.“저 그분 뵀어요.”할머니는 그녀가 여운초를 만난 걸 진작 알고 계셨다. 하예정이 연회에서 여운초를 도운 일도 모조리 알고 있다. 단지 그녀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 모른 척할 뿐이다.하예정이 연회에서 여운초를 도와 선뜻 나섰고 다음 날 바로 누군가 장소민에게 전화를 걸어 이간질했다. 장소민에게 된통 혼 난 온씨 사모님은 뜻밖에도 그녀가 며느리를 엄청 아낀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다.곧이어 장소민이 며느리를 매우 아낀다는 소문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 대다수 사람들은 장소민과 하예정이 사이가 별로 안 좋다고 여기지만 아무도 감히 장소민 앞에서 하예정을 험담하진 못했다.어르신은 며느리 장소민의 처리 방식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제집 며느리가 아무리 탐탁지 않아도 결국 집안 사정인 것을, 외부인이 쪼르르 달려와 설왕설래할 자격은 없다.전씨 일가가 오래 부귀하려면 가정이 화목해야 해고 그중에서 며느리를 들이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 집안에 현명한 여자가 들어와야 훌륭한 자식을 키울 수 있다. 어르신은 아들들에게 신붓감을 골라줄 때 집안 배경은 안 볼 테니 성품이 좋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해 두셨다.그녀의 며느리들은 전부 성품이 올곧다. 이젠 손주며느리 차례인데 여전히 애초에 며느리를 고르던 표준으로 선택
할머니는 리조트 대문이 활짝 열리자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뒤돌아보니 노동명의 차에 하예진과 주우빈이 타고 있었다.그의 차 뒤에는 성씨 일가 세 가족이 따라왔다.성기현은 임신한 아내를 보살펴야 한다. 유청하는 슬슬 입덧이 시작되어 먹는 음식을 죄다 토한다. 그녀는 종일 침대에 누워 움직이기 싫어하니 외출하기가 불편했다.성씨 일가의 둘째 도련님은 집에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 이경혜는 작은아들을 부르지 않았다. 이경혜 부부만 나서도 충분하니까.전태윤은 뭇사람들을 데리고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리조트의 집사 양씨 아저씨가 눈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전태윤이 차 문을 열고 안에서 내리자 양 집사는 할머니를 도와 차 문을 열어주고 부축하려 했지만 할머니가 필요 없다면서 그의 손을 밀쳤다.그렇게 하면 괜히 허약해 보이니까. 할머니는 아직도 한창이신데 말이다.“어르신.”양 집사가 웃으며 공손하게 인사했다.할머니는 하예정이 옆에 다가오자 그녀에게 말했다.“예정아, 이분은 서원 리조트의 양 집사야. 우리 리조트에서 20여 년간 일했고 태윤이네 사촌 형제들이 커가는 걸 지켜봐 오신 분이야.”양 집사는 총집사라 아래에 수많은 작은 집사들을 관리하고 있다. 리조트의 역할 구분이 아주 명확하여 직종마다 담당 집사를 한 명씩 두고 있다. 그들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생기면 그때 양 집사에게 전달해 처리하도록 한다.서원 리조트의 관리 방식은 전씨 그룹과 같다고 할 수 있다.“안녕하세요, 집사님.”양 집사는 리조트에 20여 년간 몸담으며 전씨 일가의 몇몇 도련님들이 커가는 걸 지켜봐 왔기에 이 리조트의 어르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예정은 후배로서 양 집사에게 먼저 인사를 올렸다.“안녕하세요, 사모님.”양 집사가 웃으며 반겼지만 하예정은 그가 지금 자신을 아래위로 훑어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리조트에서 본인이 꽤 유명해진 듯싶었다.노동명이 주우빈을 안고 가까이 다가왔다.“이모.”우빈이는 곧 울 것처럼 입을 삐죽거리다가 하예정을 보자 두 팔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앉아있는 중이다.장소민은 다정하게 하예진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예진 씨, 이후엔 그냥 오시면 돼요. 이렇게 많이 사 오실 필요 없어요.”하예진도 미소 지었다.“별로 산 것도 없어요. 조촐하게나마 준비한 것뿐이에요.”장소민은 하예정의 품에 안긴 주우빈을 보며 활짝 웃었다.“우빈이 한번 안아봐도 돼?”하예진을 도와 크고 작은 짐들을 들어주던 노동명이 한마디 끼어들었다.“아줌마, 우빈이 사람 엄청 가려요. 아무튼 나한텐 안기지 않으려고 했어요.”장소민은 두 손 가득 물건을 들고 있는 노동명이 마치 하예진의 짐꾼 같아 보였다. 사실 양 집사가 진작 마중 왔었다. 하예진과 이경혜가 물건을 아무리 많이 사 왔어도 양 집사가 알아서 아랫사람들에게 분부해 집안으로 옮길 수 있다. 굳이 손님으로 온 노동명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다.노동명은 지금 잘 보이려고 애쓰는 걸까?현명한 사람은 진작 눈치챘지만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 장소민은 웃으며 노동명에게 말했다.“동명아, 우빈이는 네가 너무 무섭게 생겨서 너한테 안 안기려는 거야. 부디 너희 엄마 말씀대로 그 칼자국 좀 지워.”전씨 일가와 노씨 일가는 사이가 매우 돈독하여 장소민도 윤미라가 아들에게 수없이 권유한 걸 잘 알고 있다. 작은 성형수술로 칼자국만 지우면 기존의 잘생긴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장가 못 갈 걱정도 없을 테고 36살까지 싱글로 지낼 리도 없다.전에 두 엄마가 함께 모이면 각자 제 아들이 무드가 없다고 원망할 따름이다. 여자한테 대시하는 법이 없어 평생 노총각으로 지낼까 봐 걱정이었는데 어느덧 전태윤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소정남마저 전태윤이 선 자리를 주선한 덕분에 심효진과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는 중인데 노동명만 여태껏 아무런 목표가 없다. 윤미라는 마음이 초조해 흰머리가 날 지경이고 자신이 원수를 낳았다고 망언까지 내뱉었다.우빈이는 장소민에게 너무 잘 맞춰주었다. 장소민이 두 팔을 벌리자 아이는 냉큼 그녀 품에 안겼다.
이경혜는 서로 편히 대화하려고 집안에 들어간 후 하예진 옆에 나란히 앉았다.그녀는 어르신의 손에서 종잇장을 건네받고 하예진과 함께 쭉 훑어보더니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날짜로 골랐다.“사돈 어르신, 이날로 하시죠.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으니 우리 모두 준비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이경혜는 하예진과 함께 고른 날짜를 가리키며 어르신께 말했다.동생이 없으니 이경혜가 가장 역할을 담당해 조카의 결혼식을 책임졌다.아무도 하예정을 얕잡아보지 않게, 무조건 으리으리하게 시집보내야 한다.어르신과 장소민 일행은 이경혜가 선택한 날짜에 아무 의견이 없었다. 사돈이 어느 날을 선택하든 전부 할머니가 고심 끝에 고르신 좋은 날들이니까.마침내 전태윤과 하예정의 의견도 물었다.하예정은 아무 의견이 없었고 전태윤은 양가 어르신이 선택한 날짜를 보더니 속으로 묵묵히 계산해 보았는데 결혼식 당일은 하예정의 마법의 날이라 첫날밤을 보낼 수 없어 그에게 불리했다.그는 불쑥 반대표를 내던졌다.“이날은 안 돼요. 다른 날로 바꿔요.”어르신이 의아한 듯 물었다.“왜 안 돼? 가장 가까운 날은 고작 열흘 뒤라 시간이 빠듯할 거야. 이날이 딱 좋아. 우리 양쪽 모두 충분히 준비할 수 있다고. 이날 뒤에 날짜는 또 너무 멀어서 가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 네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도 아무 의견 없어.”전태윤은 가을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막 설이 지났는데 가을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그럼 첫 번째 날로 해요. 열흘 뒤에 3월 중순이라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결혼하기 딱 좋아요.”할머니는 열흘 사이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는 건 실로 조급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그다지 변경하고 싶지 않았다.“태윤아, 너희 처형이랑 이모님이 골라주신 날짜가 왜 안되는지 한번 말해봐 봐! 이 날짜들은 할미가 작년에 스님을 모시고 정성껏 고른 좋은 날들이야.”스님은 당연히 전태윤과 하예정이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할머니께 자주 말씀드렸던 그분일 것이다.할머니는
소정남의 옆에 앉아있던 심효진이 머리를 갸웃거리고 막연한 표정을 지은 노동명을 보더니 입을 막고 웃었다.노동명과 전태윤이야말로 한 부류의 사람이다.소정남은 IQ와 EQ 모두 높아서 그들과 함께 있으면 고문 역할을 담당한다.한편 성소현과 예준하도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성소현이 함께 얘기를 나눠줬으니 망정이지 예준하는 진작 의자에서 일어나 터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안고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그는 이런 자리를 제일 두려워한다. 어르신을 보면 그의 할머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그의 할머니도 종일 그들 형제의 혼사만 신경 쓰고 계신다.다행히 예준하의 할머니는 전씨 할머니처럼 고생을 감수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맏형수에게 전적으로 이 일을 맡겼다.모연정은 중매인이 될 잠재력이 있으니까.소정남은 노동명을 노려보다가 말했다.“이렇게 꽉 막혀서 대체 뭘 할래.”“난 꽉 막히지도 않았고 딱히 할 일도 없어.”소정남은 고개를 홱 돌려 심효진과 알콩달콩 얘기를 나눌 뿐 더는 노동명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노동명은 어안이 벙벙했다.소정남은 대체 무슨 뜻인 걸까?잠시 몸을 숨겼던 양 집사가 다시 나타났다.그는 전태윤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말했다.“도련님, 오븐과 식자재 전부 준비해 놓았어요.”전태윤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하예정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어르신들께 말했다.“할머니, 저희 그럼 바비큐 하러 갈게요.”“그래.”전태윤은 이경혜 부부에게도 여쭤보았고 그들 부부가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하예정과 친구들을 데리고 집 안에서 나왔다.그림 같은 풍경의 정원을 거닐면서 성소현이 하예정 옆으로 다가왔고 전태윤도 마침 하예정의 손을 놓아주었다. 두 자매가 함께 얘기 나눌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주었고 그는 이참에 예준하에게 다가갔다.예준하를 초대한 건 전태윤인데 여태껏 제대로 맞이하지도 못했다.“예정아, 너랑 태윤 씨 결혼식이 뒤로 미루어졌으니 나도 선뜻 투자에 관해 얘기할 수 있게 됐어. 안 그러
“준하 씨, 쟤네 둘 웃는 게 조금 이상해 보이지 않아요?”친구가 뒤따라오지 않자 성소현은 예준하와 나란히 걸으며 가끔 고개 돌려 두 친구를 힐긋거렸다.그녀들이 이미 사랑하는 사람과 속닥거리는 모습에 성소현은 실로 부러울 따름이었다.가장 부러운 건 그래도 하예정이었다.하예정의 남편이 그녀가 수년간 짝사랑해 온 전태윤이니까. 전태윤은 성소현에게 얼음장처럼 차갑고 눈길 한번 안 줬다. 하여 그가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평생 자상함이라곤 모르는 남자라고 여겼었다.다만 하예정을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본 후에야 성소현은 깨달았다. 전태윤은 자상함을 모르는 게 아니라 오직 하예정에게만 자상하다는 것을.물론 부러운 건 부러운 거고, 성소현은 인제 전태윤에 대한 마음을 철저하게 접었다.그가 하예정을 위해 성소현을 선뜻 누나라고 부를 때, 이 남자는 더이상 본인 소유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좋은 남자가 많고 많으니 성소현도 굳이 전태윤에게 목을 매달 이유가 없다.전태윤이 하예정에게 잘해만 준다면 그녀는 부부가 백년해로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할 것이다.예준하는 봄날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난 이상한 줄 모르겠는데요.”“내가 괜한 생각했나 봐요.”성소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물었다.“태윤 씨가 준하 씨 초대했죠?”“네. 저랑 태윤 씨 꽤 친하거든요. 제가 홀로 관성에서 외로울까 봐 태윤 씨가 이리로 불렀어요. 함께 모여서 재미있게 놀자고 하데요.”예준하는 사실 소정남과 더 친하다.두 회사의 비즈니스 왕래는 기본적으로 소정남이 책임지고 있으니까.“저는 또 준하 씨가 주말마다 A시로 돌아가는 줄 알았어요. 비행기 타고 두 시간 남짓하면 금방 도착하잖아요.”“그건 그렇죠. 하지만 관성 쪽 사업을 장기적으로 책임지고 있다 보니 집에 별일 없으면 거의 안 돌아가요. 오가는 것도 피곤하잖아요. 주말에 휴식할 때면 종일 집에 누워 자거나 친구들 몇 명 불러 등산 혹은 축구를 즐기는 편이고, 오늘처럼 바비큐 파티를 하는 것도 나름 괜찮은 것 같아요. 여름이면
“좋아요.”“준하 씨네 집도 리조트겠죠?”예준하가 머리를 끄덕였다.“우리 편하게 말 놓을까요? 앞으로 이웃으로 지낼 텐데 가까운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그래, 그럼 말 놓을게.”예준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집도 태윤 씨네 집처럼 리조트 형식이야. 이름은 예진 리조트야.”그는 주변 풍경을 쭉 둘러보면서 성소현에게 말했다.“태윤 씨네 할머니랑 우리 할머니의 안목과 취향이 다 비슷한 것 같아. 모두 같은 세대 사람들이라 미적 관념이 동일한가 봐. 우리 예진 리조트와 서원 리조트가 엄청 비슷하거든.”굳이 차이점을 따지자면 예진 리조트가 좀 더 크다.성소현도 주변 풍경을 쭉 둘러보았다.“난 예전에 꿈에서라도 이런 곳에 살고 싶었어.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져 조용하고 아늑하잖아. 경치도 일품이고 면적도 엄청 커서 한 달 동안 지내도 갑갑하지 않을 것 같아.”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이 바로 전태윤의 집이기 때문이다.그녀는 한때 전태윤을 깊이 사랑해 서원 리조트의 여주인으로 되고 싶었다.예준하가 다정하게 말했다.“나중에 기회 되면 우리 예진 리조트로 가서 구경도 하고 며칠 지내도록 해.”성소현은 사색에서 빠져나와 웃으며 답했다.“A시에 관광지가 많아 나 자주 놀러 가. 너희 집안에서도 펜션을 꾸렸잖아. 나 매번 놀러 갈 때마다 너희 집 펜션에서 숙박하는 걸 좋아하거든.”다만 그땐 예준하를 몰랐다.“나중에 또 A시로 놀러 오면 언제든지 연락해. A시에서의 모든 비용은 내가 쏠게. 공짜로 가이드도 해주고, 모든 관광지를 구경시켜 주고 맛있는 음식도 실컷 먹게 해줄게.”성소현은 별생각 없이 바로 대답했다.“그래, 그럼 그때 가서 예정이랑 효진 씨도 불러야겠어. 두 사람 식탐 왕이니까 함께 맛집 돌아다니면 우리도 덩달아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야.”“좋아.”예준하는 성소현이 뭐라 말하든 전부 오케이였다.성소현은 그가 대가족 출신이다 보니 교양 있고 온화하며 의젓하다고 생각했다.큰오빠는 그녀에게 예준하가
“나중에 보다 못한 신선 어르신이 속세에 내려와 제자의 뒷수습을 도왔어요. 원래 부부의 인연이 있던 남녀에게 다시 빨간 실을 묶어주었죠. 그땐 왜 그렇게 신기하던지. 나이가 어려서 사랑을 모르지만 빨간 실로 딴사람 발목을 묶는 게 너무 재미있어 보였어요.”전태윤이 물었다.“그런 드라마도 있었어? 난 전혀 기억 안 나는데. 드라마를 볼 시간이 거의 없거든.”그는 상속자라 어릴 때부터 동년배들보다 더 다양한 지식을 배우고 각종 프로그램과 훈련을 받아야 했기에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었다.“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드라마를 자주 봤어요. 엄마, 아빠랑 함께 봤거든요. 예전에는 다 흑백 텔레비전이었어요. 가장 재미있게 본 건 ‘피구왕 통키’였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언니랑 단둘이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해서 몇 년간은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었어요. 사회에 발을 들인 후에야 종종 봐왔어요.”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나중에 보고 싶은 드라마 생기면 나랑 같이 봐.”하예정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더니 금세 반듯한 자세로 돌아왔다. 사람이 많으니 알콩달콩하기엔 부적절해 보였으니까.다들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다 보니 리조트의 바비큐장에 금방 도착했다.양 집사가 미리 준비를 마쳐서 다들 바비큐장에 도착했을 때 더 차릴 것도 없었다.남자들은 서로 잘 보이려고 오븐 앞에 섰고 여자들은 먹기만 하면 됐다.전씨 일가의 다른 도련님들은 큰 형네 테이블 사람들이 모두 짝을 이룬 걸 보더니 묵묵히 오븐을 바꿔서 거리를 벌렸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쉽게 타격받을뿐더러 내심 부러우니까.전호영은 다 구운 양꼬치 한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전이진에게 물었다.“형, 안 부러워?”“날 엮을 생각 하지도 마. 부러우면 할머니 지시를 따르던가. 우리 집 강성 쪽에도 호텔이 있잖아. 너 출장 가서 미래의 예비 신부나 보고 와.”전호영은 전이진의 손에 쥔 닭 날개를 덥석 뺏으며 말했다.“먹고 싶으면 혼자 구워 먹어.”그는 고현이 싫다.보이쉬한 그녀
이날 저녁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돌아오는 날은 일요일이었다.휴식날인데 우빈이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우빈이는 일어난 후 곧장 하예정이 자는 방으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렸다. 전태윤이 안에서 방문을 열어주었다.“이모부, 이모 일어났어요? 들어가서 이모랑 같이 놀래요.”전태윤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꼬맹이와 화내지 말자고 스스로 가슴을 달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우빈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좀 더 자지? 평소에 어린이집 가야 하는 날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더니 쉬는 날만 되면 아주 일찍 일어나더라.”우빈이가 입을 뾰족이 내밀면서 말했다.“이모부, 나는 한 번 깨어나면 더는 못 자요. 나랑 놀아 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심심해요. 이모 찾아와서 노는 수밖에 없어요.”현재 우빈이는 시 중심에 자리 잡은 전태윤의 개인 별장에서 지내고 있다. 서원 리조트에 있을 때는 그나마 함께 놀아 주는 어린이들이 있었기에 이모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전태윤은 하는 수 없이 두 팔로 우빈이를 부쩍 들어 품에 안으면서 말했다.“이모는 아직도 자고 있어. 이모부가 우빈이랑 같이 놀아 줄게. 뭐 놀까?”“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집에서 장난감 가지고 놀면 좋지 않을까?”우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싫어요. 혼자 놀면 재미가 없어요. 이모부는 장난감도 안 놀 거잖아요.”전태윤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알았어. 이모부랑 같이 아침 조깅하러 나갈까? 이모부가 가서 운동복을 갈아입고 나올 테니 얌전하게 기다려야 해?”그는 우빈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려놓으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신신당부했다.“침실에 들어가서 이모를 깨우면 안 돼. 알았지? 이모부가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우빈이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전태윤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서 먼저 운동복 바지부터 바꿔 입고 우빈이가 그사이에 침실에 들어가서 하예정을 깨울까 봐 걱정되어 웃옷을 입으면서 밖으로 나왔다.우빈이가 조용하게 제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야 전태윤은 안도의
윤미라는 아들 노동명이 무서웠다.“알았어. 꾸준히 재활 치료할 거야. 네가 돌아올 때면 내가 2~3m나 걸을 수 있을지도 몰라. 참, 언제 돌아올 거야?”하예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대답했다.“설까지 있을 계획에요. 설날이 되면 제가 돌아갈게요.”“그렇게 오래 있겠다고? 우빈이는 어쩌려고?”“예정이가 돌봐주기 때문에 괜찮아요. 제가 보고 싶을 때마다 주말에 시간을 내서 우빈이 보러 가주세요. 시간이 없으면 제부한테 부탁해서 우빈이를 저한테 데려오라고 하는 수밖에 없고요.”하예진은 점점 더 바빠질 것이다.당분간 아들 우빈과 함께할 시간이 적을 것이다.“우빈이가 태어날 때부터 예정이가 곁에서 보살펴서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설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요.”“사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 그래!”노동명이 한 마디 내뱉었다.우빈이는 핑계일 뿐, 사실 노동명이 그녀가 그리웠다.시간이 그토록 오래 걸리면 노동명은 자신이 하예진이 무척 보고싶을 것으로 예상했다.전화도 하고 영상통화도 할 수 있지만 그리움의 고통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우빈은 어려서부터 녀석을 키워준 하예정이 있어서 하예진이 곁에 없다고 해도 바로 적응할 수 있지만 노동명은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요즘 그는 매일 하예진을 보는 것에 익숙했다.“예진아,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내가 혼자 널 보러 가도 돼? 걱정하지 마. 우리 집에 개인 비행기가 있어서 내가 그 비행기를 타고 경호원들과 함께 가면 돼. 경호원들이 날 돌봐줄 거야. 네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거고. 널 보러 갈 뿐이야. 너랑 밥 먹고 얘기도 하면서 말이야. 내가 주말마다 널 보러 갔다가 월요일에 돌아올게. 나도 출근해야 하니까.”하예진은 마음이 따듯해졌다.“그럼 주말에 우빈이도 데리고 오세요.”“난 너와 단둘이 주말을 보내고 싶은데 우빈이 녀석도 데리고 가야 해?”하예진은 얼굴이 빨개졌고 이내 웃으면서 대답했다.“동명 씨가 혼자 온 걸 알게 되면 우빈이가 삐질걸
“앞으로 더는 허튼 생각 하지 말아요. 저는 단 한 번도 동명 씨를 싫어한 적이 없어요. 제가 돼지처럼 뚱뚱하고 못생겼을 때도 동명 씨는 저를 싫어하지 않았던 것처럼요.”노동명은 급히 끼어들었다.“넌 못생기지 않았어. 전혀! 예전에 통통할 때도 못생긴 편은 아니었거든. 복스러워 보였어.”“못생긴 거 맞아요. 저는 거울만 봐도 뚱뚱한 제가 너무 싫었어요.”바보 같은 짓은 한 번만 하면 충분했다. 하예진은 다시는 예전처럼 폭식하지 않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다.살을 빼기 전에 하예진은 살이 너무 많이 쪄서 지방간뿐만 아니라 요산 수치도 높았다.체중 감량 후 요산뿐만 아니라 지방간 수치도 모두 많이 좋아졌다.“하예진아, 우빈한테 장난감도 사주고 옷도 사줬는데 나한테는 뭐 사준 거 없어?”노동명이 화제를 바꾸어 질투하기 시작했다.“동명 씨는 부족한 게 없잖아요. 우빈이는 아이라서 너무 빨리 커요. 해마다 새 옷을 사줘야 하지만 동명 씨는 이젠 다 큰 성인이라 작년의 옷을 올해에도 입을 수 있잖아요. 돌아가게 되면 강성의 특산 제품을 가져다드릴게요.”노동명은 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우빈이는 크면 남의 집 남편으로 되어 우빈의 아내가 그를 걱정하고 보살피게 될걸. 결국, 내가 영원히 네 곁에 있을 텐데 나를 더 관심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도 새 옷 사줘. 네가 사준 옷이면 난 다 좋아.”하예진은 하예정에게 거의 선물을 주지 않았다.지난번 하예진은 재혼하고 싶지 않다며 노동명의 감정을 거절했다.그러나 지금, 하예진이 시집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연인이나 다름없다. 모두의 눈에는 두 사람이 연인으로 보였다.노동명도 자연스레 하예진의 남편 역할을 하고 있었다.노동명은 하예진의 여생을 함께하려고 한다.하예정이 끝까지 노동명에게 시집가지 않더라도, 그가 여전히 그녀의 곁을 지키면서 지금처럼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고 남은 인생을 그녀와 함께할 것이다.노동명은 하예진에게 선물을 너무 받고 싶었다. 가격을 따지
이윤미가 말을 꺼냈다.“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헤어스타일을 바꿨을 뿐이에요. 사람들을 몰래 예진 씨를 따르라고 한 것은 감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뒤를 따라가서 예진 씨의 몸매를 익히게 하려고 그런 거예요. 앞으로 예진 씨가 변장하더라도 그녀의 몸매에 대한 인상으로 분장한 예진 씨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해요. 제가 예진 씨와 만날 때마다 예진 씨의 안전을 반드시 책임져야 하니까요.”“만약 그녀가 저를 만나러 오는 도중에 사고가 나면 하예정 일행은 아마 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리고 예진 씨가 강성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몰래 그녀를 도와주세요. 그저 우리 엄마와 그 늙은 남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도와주면 돼요.”이윤미가 말하는 늙은 남자는 정군호가 아닌 이은화의 특별 비서였다.방윤림은 예의 갖추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아가씨, 밤이 점점 깊어지는데 얼른 돌아가세요.”이윤미는 한숨을 쉬었다.“정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 집에는 따뜻함이 없어요. 서로 다투고 경쟁하고 눈치 보면서... 좋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방윤림은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랐다.주인의 집안이 어떤 상황인지 일개 비서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했다.이윤미는 곧 방윤림과 함께 떠났다.한 시간 후.하루 호텔로 돌아온 하예진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다시 착용한 뒤 가발을 쓰고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이윤미가 선물한 인간 얼굴 가죽을 쓰기 아까웠다.그렇게 전업적인 도구는 가장 필요한 곳에 써야 낭비하지 않는다.하루 호텔은 전호영이 강성에서 소유하고 있는 호텔 본점이다. 하예진이 분장한 이유는 전호영에게 폐를 끼치게 하고 싶지 않을 뿐, 그를 경계하려는 목적이 아니었기에 그 가죽을 쓸 필요 없었다.하예정은 그녀가 묵고 있던 룸으로 돌아와 방문을 잠근 뒤에야 휴대전화를 꺼내 노동명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노동명이 전화를 받았다.“동명 씨, 이렇게 늦었는데 아직도 주무세요?
하예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부부 사이에 한쪽이 바람을 피우면 금방 금이 생기게 되는 법이죠. 이혼을 안 했어도 서로 고된 삶을 살 테니,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나아요. 저의 전남편도 바람을 피우고 저를 폭행하여 이혼했잖아요. 한번이 있으면 두 번, 세 번이 있을 수 있으니 그들이 고치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나아요. 이혼하면 죽는 것도 아닌데.”이윤미가 말을 이었다.“우리 아버지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아버지는 자신이 이혼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아시거든요. 정씨 집안의 친척들도 우리 가문에서 아무런 이익도 보지 못할걸요. 어쩌면 전에 받은 혜택들도 전부 토해내야 할지도 몰라요. 어쨌든 요즘 우리 가문은 편안할 날이 없어요. 저는 왠지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아요.”이은화의 모진 마음으로는 정말 해낼 수 있을 것이다.하예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이경혜가 하예진을 강성으로 빨리 오게 한 것은 아마도 이씨 가문이 요즘 혼란스러워 이은화가 하예진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하예진이 그 틈을 타 사업을 일으킬 수 있고 옛날 사고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 있었다.이 기회를 잡아 이씨 가문의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민심을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 것과 다름없다.하예진은 비록 이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고 강성에서도 사업이 없지만, 그녀의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들이 서 있다. 그리고 하예진의 외할머니는 이씨 가문의 전임 가주였다. 이씨 가문의 친척들을 끌어들여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일이 쉽게 풀릴 것이다.“예진 씨, 비행기를 몇 시간 타고 방금 도착하셔서 힘드실 텐데 얼른 가서 쉬세요. 일이 있으면 그 번호로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하예진이 관심하며 물었다.“저랑 같이 안 갈실래요?”이윤미는 입을 오므리다가 대답했다.“여기 좀 더 있고 싶어요. 마음도 추스를 겸 조용히 있고 싶거든요. 집으로 돌아가도 엉망진창이에요.”“그
수십 년이 지난 탓으로 법률조차도 이은화의 사형을 선고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이윤미는 적어도 그녀가 큰이모의 후손에게 주인 자리를 돌려줄 수 있었다.그녀는 이씨 가문을 떠나 자신의 회사로 돌아가 생활해도 좋다고 생각했다.이윤미는 이런 원한과 복수에 관한 일을 멀리하고 싶었고 그녀의 소소한 삶을 더 좋아했다.이은화가 옛날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이윤미는 이은화가 그 해에 정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고 믿었다.단지 가주 자리의 권력을 탐내는 것뿐만이 아닌 사랑 때문에 벌인 짓일 수도 있다.이은화는 지금 70세이고 정군호와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났으며 아들딸도 네 명이나 낳았다.하지만 이은화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그 능력이 뛰어난 남자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은숙의 특별 비서일 것이다.“제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요. 저는 제 행동으로 제가 우리 엄마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게요.”하예진은 한참 동안 이윤미를 바라보며 웃었다.“윤미 씨의 진지한 얼굴은 정말 멋있고 아름다워요. 당신 엄마가 보신다면 눈에 거슬릴지도 모르지만요. 이씨 가문의 상황은 어때요? 윤미 씨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다가 이 대표님께 붙잡혔다고 들었는데. 요 며칠 동안 윤미 씨 아버지는 모습조차 내놓지 않는다면서요.”하예진은 이은화와 정군호의 일을 알고 있었다.강성에서 이 불륜 사건은 빅뉴스였다.평소에 정군호랑 같이 다니던 늙은 남자들은 대부분 정군호에게 동정심을 품었다. 이은화가 정군호를 너무 엄하게 관리하여 그에게 자유로울 틈도 주지 않고 용돈도 적게 준다고 생각했다.아무리 사이좋은 부부 사이라도 오랜 시간 동안 작은 일에 얽매이게 되면 감정이 깨지기도 한다.여자들은 대부분 이은화의 편을 들었다. 이은화가 남편을 관리하는 것이 좀 엄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군호가 만약 이은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닌 이은화에게 이혼을 제기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정군호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우리 엄마가 예진 씨가 오신 것을 알게 되면 아무것도 안 할 리가 없는데. 조심하세요. 아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제가 다 알려드릴게요. 제가 모르는 일은 할 수 없지만요.”하예진은 웃음을 거두며 한참 동안 이윤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윤미 씨, 우리 만난 적 있잖아요. 저도 윤미 씨가 정의롭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대표님 결국 윤미 씨와 피가 섞인 모녀지간인데, 저는 윤미 씨가 이 대표님과 맞서지 못한다고 생각해요.”이윤미의 웃음도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글쎄요. 우리 두 사람은 모녀 맞아요. 저를 저의 어머니와 같은 편에 서지 말라고 하면 제가 분명 스트레스도 받고 또 엄청나게 큰 용기도 필요하겠죠. 예진 씨가 저를 경계하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저는 정말 예진 씨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마음이 너무 독하세요. 해본 말이 아니에요. 예진 씨가 여전히 저를 경계하면 저도 더는 묻지 않을게요. 그런데 여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맞서게 되면 저를 찾아오셔도 돼요. 제가 최대한 도와드릴 테니까.”“사실 저와 엄마는 모녀간의 정이 별로 없어요. 저는 엄마의 곁에서 자라지 않았고 또 이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스무 살이 넘었거든요. 윤정이가 아직 이씨 가문에 남겨졌고 여전히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요. 제가 저의 엄마와 모녀간의 정이 별로 없다고 해도 우리 두 사람이 친 모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저도 잘 알아요.”“만약 당신들이 없다면 제 생각에는 제가 이씨 가문의 주인 자리를 짊어지고 리더가 되어 우리 가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을 거예요.”이윤미는 이씨 가문의 규정을 수정하고 싶었다.그렇게 딱딱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비록 대가가 좀 클 수도 있지만, 이씨 가문을 더 멀리, 더 잘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수정하고 싶었다.이윤미는 명함 한 장을 꺼내 하예진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은 제 다른 전화번호에요. 아는 사람이 적으니 무슨
“그럼 안전에 유의하시고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저에게 전화하세요.”방윤림이 이윤미에게 당부했다.이윤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항상 방 비서에게 의지할 수는 없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암살을 당하더라도 이윤미는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능력을 갖추었다.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면 이렇게 자라지 못하고 일찍이 양어머니의 학대를 받아 죽었을 것이다.방윤림과의 통화를 마친 이윤미는 곧바로 약속 장소로 차를 몰았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하예진은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하예진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누군가의 차가 오는 것을 보더니 창문을 조금 눌렀고 이윤미가 하예진의 차 옆에 주차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선글라스를 먼저 벗은 이윤미는 얼굴의 가죽을 벗어 던져 본모습을 드러냈고 차에서 내려 하예진과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하예진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어떻게 저인 것을 알았어요? 두렵지 않아요?”“지금 이 시각에, 또 이렇게 외진 곳에 주변에 주택도 없는데 겁이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 밤에 이런 곳으로 오지 못할걸요. 그리고 저기에 묘지도 있는데 이런 곳에 예진 씨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겁니다.”하예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윤미가 온 후에야 약속 장소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발견했다.하예진도 한참 후에야 차를 세울 곳을 찾아 이윤미가 오기를 기다렸다.지금 그녀들이 주차한 곳은 방윤림이 그녀들에게 준 주소에서 수백 미터 떨어져 있었다.“묘지에서 이렇게 가까운 줄은 몰랐어요. 만약 제가 알았더라면 아마 혼자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귀신이 무서워서요.”이윤미도 웃었다.“귀신이 뭐가 무서워요? 사람이 더 무섭죠.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예진 씨 분장 기술도 꽤 좋네요. 제가 제 부하들을 하루 호텔 입구에 보내 예진 씨를 기다리게 했거든요. 여기로 오시는 길에 예진 씨를 몰래 보호하라고 지시했는데 예진 씨가 나오는 것을 못 봤다고 하더라고요.”
곧 하예진은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에서 나왔다.하예진은 방윤림이 그녀에게 준 그 주소대로 내비게이션을 켜고 차를 몰았다.노동명이 전화했다.하예진은 차의 속도를 늦춘 다음 노동명의 전화를 받았다.“동명 씨, 저 지금 나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려고 해요. 지금 운전 중이니 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알았어. 운전 조심하고.”“네.”하예진은 하예정과 달리 천천히 차를 몰았다.다행히 하예정이 시내에 살고 있어서 차를 빨리 몰지 못했다. 만약 차가 적은 외진 곳으로 가게 되면 하예정은 비행기를 운전하는 것처럼 매우 빨리 몰 것이다. 전태윤이 그 모습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지, 그가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면 아마 하예정이 운전대조차 잡지 못하게 할 것이다.차를 몰고 있는 하예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동명은 이내 전화를 끊었다.하예진이 변장하고 남몰래 혼자 차를 몰고 이윤미를 만나러 간 것을 알면 노동명은 아마도 걱정되는 마음에 바로 비행기를 타고 올지도 모른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고 있어서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방윤림이 준 그 주소는 가까운 곳이 아닌 꽤 외진 곳에 있었기에 내비게이션에는 차로 한 시간 이상 가야 도착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하예진이 차를 몰고 호텔을 나서자 이윤미가 방윤림에게 물었다.“예진 씨 나오는 거 봤어요?”방윤림이 대답했다.“제가 종업원에게 부탁해서 쪽지를 보냈으니 바로 떠날 겁니다. 하예진 씨가 방금 관성에서 왔기 때문에 낯선 곳이고 차량도 없으니 택시를 탈 것 같습니다. 아가씨도 출발하시면 됩니다. 하예진 씨가 곧 약속 장소로 갈 겁니다.”방윤림은 하예진을 만난 적 있었는데 하예진이 대담하고 세심하다고 추측했다. 하예진이 강성으로 온 목적이 이씨 가문과 연관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방윤림은 하예진이 이씨 가문 때문에 강성으로 왔으니, 이윤미가 만나자고 하면 반드시 만나러 갈 것으로 생각했다.“사람을 시켜 예진 씨를 은밀히 보호하라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