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후가 고개를 돌리자, 품에 꽃다발을 안고 문 앞에 서 있는 신하준이 보였다.신하준은 검은색 정장에 흰색 셔츠를 입고 옷깃에는 특별히 정교한 사파이어 브로치까지 하고 있었다.브로치는 매고 있는 넥타이와 같은 색 계열이었다.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장착하고 있었다.딱 봐도 직장 엘리트이자 뭔가 있어 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였다.신하준의 모습을 본 허연후는 화를 참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잘못 찾아오셨네요. 한지혜 씨는 여기 없어요. 여기 저의 집이거든요.”신하준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허연
신하준은 찻잔을 받아 들며 정중하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신하준이 찻잔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허연후가 말을 이었다.“신 대표님, 안 마셔요? 나의 다도 실력을 못 믿는 거예요? 이 방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도의 대가거든요. 차를 우려내는 기술이 아주 숙련되어 있어요.”허연후의 말에 웃음이 터진 신하준은 눈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허연후를 보며 말했다.“제가 보기에도 허 대표님은 확실히 다도의 대가 같네요.”말을 마친 신하준은 고개를 숙여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감탄하며 말했다.“차 맛 좋네요. 그런데 허
허연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손끝에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하지연은 곧바로 살펴보더니 말했다.“오빠, 손에서 피 나요.”허연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많이 나?”하지연은 여기저기 상세하게 살펴보더니 말했다.“아니요, 껍질만 살짝 스쳤어요. 밴드만 붙이면 될 것 같은데 내가 찾아올게요.”“아니, 가서 한지혜 씨한테 내가 다쳤다고 말해.”하지연은 허연후의 상처를 보며 말했다.“오빠, 이 상처 지혜 언니가 도착하기도 전에 다 아물 거 같은데요?”“가라면 갈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하지연은 작은 입을
이것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연이라는 건가.신하준과 한지혜 사이에는 이런 인연이 없었다.신하준은 자조적인 웃음을 띠더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네가 괜찮은 걸 봤으니까 시름 놓았어. 이따가 또 볼일이 있어서 난 이만 일어날게.”말을 마친 신하준은 몸을 일으켜 거실을 나갔다.신하준을 배웅하려고 몸을 일으키는 한지혜를 허연후는 눌어서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다리에 상처도 있는데 배웅은 내가 대신할게요.”허연후는 늘씬한 다리로 신하준의 뒤를 따라 나갔다.마당에 나가 차에 오르는 신하준을 본 허연후는 차 문에 기댄
아무리 게임 속 캐릭터라고 하지만, 이 모습을 본 한지혜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순간적으로 게임을 하던 손을 멈췄다.한지혜는 허연후가 본능적으로 한 행동인지 고의로 한 행동인지 알 수 없었다.한지혜가 멍하니 멈춰있는데 귓가에 허연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놀란 거야? 이리와 오빠가 안아줄게.”게임 속에 있는 오빠는 여자아이를 꼭 껴안더니 큰 손으로 머리를 연속 쓰다듬으며 말했다.“착하지, 무서워하지 마. 오빠가 너희들 지켜줄 거야.”한지혜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한지혜는 이 짐승 같은 남자가 이 기회를 틈타 자기의 사심을
이 혼약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지혜는 집을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겠지.어쩌면 한평생을 부모님 밑에서 공주처럼 살았을 수도 있었다.그랬다면 조수아라는 좋은 친구를 사귈 수도, 그렇게 많은 대단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지난 시간을 떠올리던 한지혜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돌았다.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지.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삶이야말로 멋도 있고 보람도 있지 않을까.한창 추억에 잠겼을 즈음 하지연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지혜 언니, 연이 옆집에 떨어졌어요. 같이 가서 찾아줘요.
집안은 한지혜가 가장 좋아하는 심플하고 모던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가구들은 전부 한지혜가 좋아하는 아이보리 색상이었고 실내 인테리어에 쓰인 색상은 흰색 아니면 연분홍색이었다.다 큰 남자가, 이유 없이 이런 색으로 집을 꾸몄을 리가 없었다.그걸 생각하지 않은 이상...어쩌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한지혜는 가슴이 아파져 왔다.이 별장은 허연후가 기억을 잃기 전에 산 것이었다.하지만 며칠 있어 보지도 못하고 사고가 났다.허연후는 한지혜한테 한 번도 이 별장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만약 정원에 있는
허연후는 한지혜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한지혜의 눈에는 슬픔이 비쳤다.허연후의 기억상실은 한지혜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사진 속의 한지혜는 허연후를 좋아하고 있었다.한지혜는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허연후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의 한지혜가 허연후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냉담함과 불쾌함 뿐이었다.사랑하던 두 사람이 허연후의 기억상실 때문에 헤어졌다.이런 생각이 들자 허연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한지혜 씨, 미안해요.”허연후의 사과에 한지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미안해할 거 없어요. 감정이 그렇
아림은 알 듯 말 듯 큰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작은 두 손은 서로 손가락을 마주 대고 실망한 듯 말했다.“아쉽다. 아저씨처럼 좋은 남자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데.”아림은 차서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위로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요. 내가 꼭 더 좋은 남편을 찾아줄래요.”차서윤은 웃으며 말했다.“됐어. 얼른 씻고 자. 엄마는 해야 할 일이 있어.”침대에 혼자 누워 있던 아림은 생각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아 곧바로 일어나 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천우는 전화를 받자
10여 분 뒤, 송학진이 방문을 밀어젖히자 차서윤이 거울을 보며 피가 흐르는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방안은 한바탕 싸움이 일어난 듯 물건들은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아림은 차서윤의 곁에 서서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모녀의 안쓰러운 모습에 송학진은 가슴이 아파 곧바로 다가가 아림을 품에 안은 채 차서윤을 보며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널 이렇게 때렸어?”차서윤은 놀라며 물었다.“송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대답부터 해. 누가 이런 거냐고?”차서윤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저의
송학진은 두 아이 때문에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결혼을 빨리하라고 아버지한테 결혼 재촉을 받고, 친구들한테는 솔로라고 비웃음당하고, 이제는 두 아이가 대신해서 결혼 상대를 찾아주기까지 하다니.거기다 원 플러스 원?송학진은 육문주한테 눈길을 돌리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이거 다 네가 가르쳐 준 거지? ”육문주는 가볍게 코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가르쳤으면 내가 가르친 거라고 말을 하겠지. 네 조카야, 아직도 몰라? 천우는 말로 죽은 사람도 살려.”“내가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야?”“아니, 넌 사람 축에도 못 가지.
천우는 웃으며 말했다.“아림이가 삼촌을 무서워할까 봐 그런 거잖아요. 외삼촌, 이쪽은 제 친구 아림이라고 해요. 우리 아림이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치마를 사주고 같이 피자 먹어요.”송학진은 그제야 어린 소녀 쪽을 바라보았다.이목구비가 정교하게 생긴 여자아이는 살결이 희고 검고 반짝이는 큰 눈에는 어떤 아픔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여자아이가 좀 낯이 익다고 느껴진 송학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송학진은 허리를 굽혀 아림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날 보고 있었어? 날 알아?”아림은 눈
육문주가 선생님 곁에 서 있던 아림이를 바라보자 어린 소녀는 바지가 흠뻑 젖어있었고 상의도 우유 때문에 얼룩이 져 있었다.등교 첫날부터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천우 때문에 육문주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그는 허리를 굽혀 아림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가 집에 가서 천우 혼내줄게. 그리고 새 옷 한 벌 사줘도 될까?”아림은 검고 반짝이는 큰 눈을 몇 번 깜박거리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천우 탓하지 마세요. 제가 동의해서 한 거예요.”육문주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
천우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육문주와 조수아를 향해 손을 저으며 말했다.“엄마 아빠 잘 가요. 빨리 동생들 보러 가요. 나 이만 들어갈게요.”말을 마치고 천우는 돌아서서 선생님과 함께 떠났다.태연자약한 천우의 모습에 늘 냉정하던 육문주는 코끝이 찡해져 옆에 있던 조수아를 바라보며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여보, 천우는 괜찮은데 왜 내가 슬프지?”조수아도 아쉬운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진 채 육문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천우가 울지 않아서 다행이야. 만약 여기서 울고불고 난리 치면 우리가 마음 아파서 어떡해.”두 사람은 문
아이를 재우고 있던 육문주는 천우의 소리에 화를 내며 그를 노려보고 말했다.“쌍둥이들 겨우 잠들려 그러는데, 네가 소리 지르는 바람에 또 깼잖아.”쌍둥이들은 천우의 말을 알아들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천우를 바라보며 작은 입을 헤벌리고 웃었다.천우는 다가가서 쌍둥이들의 손가락을 잡으며 말했다.“둘째야, 너는 형이 될 거고, 막내 너는 누나가 될 거야. 나는 또 동생이 하나 더 생기는 거야. 너무 기쁘지 않아?”방금까지도 잠이 들락 말락 하던 쌍둥이들은 천우의 말에 이불을 걷어차고 팔다리를 흔들어대며 마치 이 일을 기뻐하며
육연희는 또다시 배우진과의 아이가 생기자 마음이 기쁘면서도 어딘가 씁쓸했다.두 사람은 5년을 헤어져 있다가 결국 다시 만났고 이제는 아이까지 생겼다.오랜만에 느껴지는 행복감에 육연희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소리 없이 울고 있는 육연희를 본 배우진은 가슴이 아파 죽을 것만 같았다.몇 년 전에 잃은 그 아이 때문에 육연희가 혼자서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배우진은 큰 손으로 육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연희 착하지. 울지 마. 자꾸 울면 아이한테 안 좋아.
육연희의 이상한 행동에 배우진은 걱정스럽게 물었다.“연희야, 왜 그래?”육연희는 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최근에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어서 위가 안 좋아졌나 봐.”배우진은 마음이 아파 육연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집에 없으니까 밥도 제대로 안 먹었나 보네. 앞으로 그러면 안 돼. 지켜볼 거야.”배우진은 육연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식당으로 들어가 의자를 끌어당겨 육연희를 자리에 앉혔다.장숙희는 육연희가 좋아하던 음식을 한 상 차려놓고 간장 게장을 육연희의 앞에 가져다 놓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