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후가 다시 병실에 돌아왔을 때 한지혜는 이미 밥을 다 먹은 뒤였다.그녀가 깔끔하게 비운 도시락통을 발견한 허연후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제 요리에 맛 들이면 다른 음식은 이제 못 먹을걸요. 근데 제가 매일 해주면 되니까 괜찮아요.”그는 웃으며 한지혜에게 물을 건넸다.“절 때리기도 했고 밥도 맛있게 먹었고 이제 약 좀 발라줄 수 있겠어요?”한지혜는 저기 거울이 있으니 혼자 바르라며 손가락으로 화장실 쪽을 가리켰다.하지만 허연후는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욕실에서 발라주겠다고요? 진짜 약 발라주려는 거예요,
허연후는 한걸음에 한지혜의 침대 옆에 다가가 허리를 살짝 굽히고 그녀에게 말했다.“한지혜 씨, 전 지혜 씨를 다시 무대에 세울 겁니다. 이대로 당신이 어렵게 이뤄낸 성과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걸 전 두고 볼 수 없어요!”아까까지의 껄렁거림과 반대로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고 한지혜의 마음도 어느새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러다가 다시 입 모양으로 그에게 말을 전했다.“절 동정할 필요 없어요. 다른 마음 먹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허연후가 그녀의 입 모양을 알아채고는 쓴웃음을 지었다.“한지혜 씨, 예전에 지혜 씨 입
강소연은 뒤쫓아가는 척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지혜 씨, 가속 버튼 그만 누르고 빨리 멈춰요!”하지만 이미 속도가 붙은 휠체어는 빠르게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높이도 30여 개의 계단으로 된 꽤 높은 길이였는데 한지혜는 두 다리를 움직일 수도 갈비뼈가 다쳐 일어날 수도 없어 꼼짝없이 휠체어와 같이 굴러떨어지게 되었다.그렇게 얼굴과 몸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고 병원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저마다 경악하며 달려왔다.조수아가 다시 돌아왔을 때 한지혜는 이미 아래로 떨어진 채 꼼짝하지 않고 바닥에 누워있었다.깜짝 놀란 그녀는
한지혜는 차가운 표정으로 허연후를 노려봤다.“연후 씨, 지금 제 걱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소연 씨가 연후 씨를 차지하려고 여러 번 저를 죽이려고 시도한 혐의로 경찰에 이송됐어요. 연후 씨를 이렇게나 좋아하는 후배가 잡혀갔는데 얼른 가보지 그래요?”한지혜는 그 말을 끝으로 휠체어를 끌고 나가려 하자 허연후는 그녀를 냉큼 잡았다.“방금 뭐라고 했어요? 경찰들이 왜 소연이를 잡아가는 거예요?”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인 허연후를 보며 한지혜는 한쪽 입꼬리를 피식 올리며 말했다.“그러게요. 소연 씨가 의사인
허순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말했다.“근데 너 한 번도 그 집 손녀를 본 적 없잖아. 오늘 마침 그 아이도 온다고 하니까 한번 얼굴이라도 봐. 혹시 없던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나와 한용건의 유일한 소원이야. 한용건이 어찌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앓아누웠겠어.”“무작정 부담 주지 말아요. 나중에 그 집 손녀딸이 남자 친구가 없어서 급하다면 제가 소개팅 앱에 그 사진과 개인 프로필을 올려 어떻게든 남자 친구를 찾아줄게요. 아니면 여기저기 다니면서 괜찮은 남자가 있는지 찾아봐도 되잖아요. 왜 하필이면 저예요?”허연후는
허연후는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한지혜가 바로 그의 약혼녀였다니, 어떻게 그동안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어이가 없기도 했다.허연후는 반쯤 넋이 나가서 허순철을 바라보았다.“할아버지, 지혜 씨가 전에 매일 참새처럼 재잘대던 그 아이예요?”허순철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지혜가 그 아이가 맞든 아니든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이윽고 허순철은 한지혜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물었다.“지혜야, 나는 순철 할아버지야. 나를 기억하겠어?”한지혜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조병윤의 목소리를 들은 한용건은 크고 따뜻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참 잘됐네, 잘 됐어. 수아도 이제 드디어 마음 놓을 수 있겠네. 2년 전 우리 모두 너보다도 수아가 버티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이 역경도 결국에는 잘 이겨내서 다행이야.”그들은 서로 간단히 안부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강미자와 한건우는 일찍부터 호텔에 연락해 방을 파티 분위기로 바꿔 달라고 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천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와, 완전 이뻐요! 너무 화려해서 이모가 결혼식을 연 줄 알았어요.”한지혜는 싱긋 웃으며
줄곧 가벼운 이미지였던 연후가 이렇게 진지한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그는 길게 찢어진 눈을 부릅뜨며 한지혜를 빤히 바라봤다.반면 한지혜는 허연후의 솔직한 고백에도 조금도 마음 흔들리는 기색 하나 없었다.뒤통수를 세게 맞고서야 비굴하게 용서를 비는 모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심지어 한지혜는 강소연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기에 전혀 고백을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허연후가 일부러 강소연을 자극하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이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강소연에게 되지도 않는 희망을 준 건 허연후였다.그가 무정하게 그
이미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송학진한테 차서윤의 말은 마치 휘발유처럼 그를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송학진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선물?”차서윤은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말했다.“먼저 씻어요. 조금 후면 알게 될 거예요.”송학진은 차서윤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여보,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잖아. 저쪽 칸에서 씻을 테니까 자기가 여기서 씻어. 씻고 나왔을 때 선물이 날 실망하게 하지 않길 바랄게.”“그럴 일 없어요.”차서윤은 송학진을 방에서 밀어내고 물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송학진
“외삼촌이 그럴 리가 없어요. 외숙모와 아림이도 나 때문에 만난 거잖아요. 만약 유치원에서 내가 아림의 치마를 적시지 않았다면 외삼촌이 외숙모를 만날 일이 있었을까요?”천우의 말을 잠깐 생각해보던 육문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만약 천우가 아니었다면 송학진은 어쩌면 아직도 솔로였을 수도 있었다.갑자기 뿌듯해진 육문주는 잔을 들고 자리에 있는 형제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너희들 우리 아들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천우가 아니었으면 우리 이 축하주를 언제 마셨을지도 모를 일이야.”곽명원은 웃으며 말했다.“천우가 아니었
박서준은 웃으며 말했다.“배은망덕한 건 아닌 것 같네. 보살펴준 보람이 있어. 왔던 김에 가족들이랑 며칠 시간 좀 보내다 갈 거야.”박서준의 말에 곽서연은 즉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정말요? 그럼 우리 그동안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박서준은 곽서연을 흘려보며 말했다.“삼촌이랑 헤어지는 게 그렇게 싫어?”“네. 매일 매일 삼촌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왜 이렇게 달라붙는 거야? 천우보다 더하네?”곽서연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삼촌은 내가 달라붙는 게 싫어요?”박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싫다고 그러면 또 울
곽서연과 박서준이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곽명원이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박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형네 집 공주님께서 발을 삐끗해서 울고 계시잖아.”곽명원은 별생각 없이 곽서연 곁으로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그녀의 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마구잡이로 잡고 돌리는 턱에 아파 난 곽서연은 바로 소리를 질렀다.“아! 삼촌 살살 좀 해요.”곽서연은 참을 수 없는 아픔에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곽명원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아프다고? 어릴 때처럼 아픈 척하
송학진의 차가운 태도에 화가 난 강한나는 눈시울을 붉히고 입술을 깨물며 경호원을 바라보고 말했다.“내 발로 나갈 테니까 비켜요.”말을 마친 강한나는 도도한 걸음으로 이곳을 떠났다. 많은 사람이 뒤에서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모든 것이 끝나고 송학진은 차서윤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와 예복을 갈아입었다.송학진은 차서윤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서윤아, 이제 내가 있으니까 누구도 감히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송학진은 차서윤이 이십여 년간 저런 아버지 밑에서 보내다 겨우 그
차경훈은 한순간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차서윤이 모든 증거를 모으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차경훈은 울며 빌었다.“서윤아, 아빠가 그때는 정신이 없었어. 앞으로 안 그럴 테니까 고소만 하지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차서윤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고소뿐만 아니라 부녀지간의 관계까지 끊을 거니까 앞으로 다시는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세요. 더는 꿈에서조차 보기 싫으니까. 우리 이젠 죽을 때까지 연락하지 말죠.”차서윤의 말에 경호원은 차경훈을 강제로 현장에서 끌고 나갔다.차서윤의 완강한 태도에 겁을
그 말을 들은 차서윤의 눈에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송학진의 볼에 입맞춤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결심을 내렸다.“감사해요. 근데 저는 학진 씨가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마음속의 흉터를 모든 사람에게 공개해야 한다 해도 학진 씨를 위해서 뭐든 할 거예요.”말을 마친 차서윤은 신부 들러리로부터 핸드폰을 가지고 송학진에게 건네줬다.“제 핸드폰과 스크린을 연결해 주세요.”그 말은 들은 송학진은 차서윤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렇게 행복한 순간에 그녀에게 무수한 악몽을 남겨준 악마 같은 남자를 보자 차서윤은 지금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분노와 슬픔이 있었고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감옥에 있어야 할 차경훈이 왜 멀쩡하게 결혼식장에 나타난 것일까.송학진이 재빨리 다가와서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 줬다.“괜찮아. 내가 사람을 불러서 저 사람을 감옥으로 돌려보낼게.”그가 매니저에게 눈치를 보내자 매니저는 사람을 불러와서 송학진을 제압했다. 경호원들에게 잡힌 차경훈은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네가 안고 자고 싶다면 될 일이야? 네가 그러다가 이모부한테 쫓겨 나오면 내 잘못 아니다.”둘째와 셋째는 아빠와 천우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신바람이 나서 쉴 새 없이 옹알이했다.육문주는 셋째를 끌어안고 볼 뽀뽀를 하며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그래도 딸이 좋아. 역시 우리 보배 딸이 제일이야. 너희 오빠 한번 봐봐. 고작 3살밖에 안 됐는데 아빠 엄마는 안중에도 없고 와이프를 입에 붙이고 살잖아.”셋째는 아빠의 따뜻한 품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입을 비죽이며 뭐라 말했다. 아기의 귀여운 모습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