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조수아와 주지훈은 제로그룹 회장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다.그녀가 회장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문을 열자 키가 180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남자가 창가에 서 있었다.남자는 하얀 티셔츠에 회색 슬랙스 차림으로 나긋하게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조수아가 들어오자 남자의 눈은 잠깐 반짝거리다가 이내 다시 퀭해졌다.그는 담배를 끄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조수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그의 허스키한 목소리에는 부드러움이 섞여 있었다.“조 변호사님, 워낙 유명하셔서 말씀 많이 들었어요.”조수아는 공손하게 손을 내밀고 밝은
주지훈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래서 뭐라고 했는데?”“들킬까 봐 우유 반, 설탕 반이라고 했습니다.”주지훈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냈다.조수아는 워낙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단 하나의 허점이라도 보이면 안 된다.만약 오늘 이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고 우유는 조금만 탔다고 말했더라면 분명 그의 신분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주지훈은 비서를 향해 나가보라고 손을 휘저었다.그렇게 사무실 의자에 앉아 서류 위 조수아가 싸인한 이름을 살짝 만져보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수아야, 널 지켜주려고 이러는 거야.”조수
“저한테 준거라곤 상처뿐인 사람에게 제가 다시 돌아갈 것 같나요?”“그리고 강 비서님, 그렇게 할 일 없으면 회사 일에 좀 더 신경 쓰는 게 어때요?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마시고요. 비서님은 제 상대가 아닌 것 같네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백시율과 함께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그러다가 얼마 가지 않아 먼 곳에 있는 육문주를 보게 되었다.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는 못본 사이에 더욱 차갑고 매서워진 듯했다.그러다가 그도 조수아를 발견했는데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두 사람이 지금은 원수 사이가 되어버렸
박주영은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매우 컸다.그리고 쉴 새 없이 아랫입술을 떨었고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그녀의 큰 소리에 박경준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휠체어 손잡이를 꽉 쥐었다.그리고 가만히 앉아 싸움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조수아는 이제야 박경준의 최종 목적을 알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그는 이런 방식으로 육문주가 대중들에게 손가락질받게 함으로써 박주영이 진짜로 미친 건지 아니면 연기하는 건지 알아내려는 것이었다.일단 그녀가 미친 척하는 게 확실해지면 그건 박주영의 기억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
말을 마친 뒤 그는 박서준의 어깨를 밀치고 그대로 지나쳐갔다.권세 있는 가문의 형제들 사이에서의 권력 싸움은 사실 뻔한 스토리다.그리고 이런 작은 소동도 빠르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질 것이다.이브닝 파티는 다시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었다. 박경준도 휠체어에 앉아 흐뭇하게 상황을 지켜보다가 다시 조수아의 곁에 다가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다들 조 변호사님의 머리가 똑똑하고 문제를 보는 시각이 남들과 다르다고 하던데 오늘 이 일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조수아는 술 한 모금 들이킨 뒤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제 솔직한 대
조수아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주지훈이 아래위로 파란색 양복을 입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리고 외투를 벗어 조수아에게 걸쳐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조금 쌀쌀한 것 같은데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요.”조수아는 문득 그의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지만 블랙홀마냥 깊은 눈동자 외에는 그의 의도를 도통 알아내기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 기분이 어떤지도 알아보기 힘든 정도였는데 마치 예전의 육문주를 보는 것 같았다.다른 사람한테서 그와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어딘가 이상한 조수아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리고 한참 동안 노골적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는데 마치 한 마리 굶주린 늑대가 자기 사냥감을 보듯 금방이라도 덮쳐올 것 같았다.그의 모습에 조수아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저는 여태껏 모든 의뢰인을 그렇게 대했습니다. 제가 조사한 진실과 의뢰인의 진술이 일치해야 사건을 접수할 수 있거든요.”“그래요? 전 또 조 변호사님께서 저에게 첫눈에 반한 줄 알았네요. 그건 그렇고 변호사님도 지금 남자 친구 필요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오늘처럼 전남편한테 미련이 남아 여지
여자의 얼굴이 한미영과 똑 닮아있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분명 한미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조수아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대뜸 물었다.“당신은 누구예요?”그 여자는 코웃음을 치면서 답했다.“전 조병윤 씨 친딸인 조현영이라고 해요. 조씨 가문의 진짜 핏줄이죠. 그러니까 가짜는 이만 물러나시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가방에서 친자 확인 보고서를 꺼냈다.한미영과 조현영의 검사 결과였고 위에는 99% 일치한다고 적혀있었다.또한 국과수 도장까지 찍혀있었다.조수아는 조사 중
곽서연은 웃으며 박서준의 팔을 잡고 말했다.“삼촌이 있으면 두려울 거 하나도 없어요. 서핑하러 가요.”두 사람이 함께 해변에 도착하자 몇 명의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노느라 정신이 팔려 아무도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곽서연은 고개를 들어 박서준을 보며 말했다.“삼촌, 나도 서핑하고 싶은데 같이 가면 안 돼요?”박서준은 백사장에 유유히 앉아 있는 곽명원을 보며 말했다.“너희 삼촌한테는 왜 안 가는 거야?”“우리 삼촌은 숙모도 보살펴야 하고 유나도 보살펴야 하는데 나를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어요. 다들 한집 식구잖아요
“네. 알았어요. 삼촌, 내가 짐을 같이 옮겨줄게요.”“아니야. 괜찮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돼. 넌 옆에서 쉬어.”박서준은 트렁크의 짐을 하나하나 들어내어 차 옆에 놓았다.곽서연은 트렁크에 가득 찬 짐을 보며 놀랐듯 물었다.“뭐가 이렇게 많아요? 나는 캐리어 하나밖에 없는데.”“애만 셋이잖아. 쌍둥이들 물건이 제일 많아. 먹을 분유에 갈아입힐 기저귀에. 거기다 우리 형이 또 딸 바보라 치마만 한 캐리어를 넣었어. 사진 찍어준다고. 휴, 전부 다 내가 챙겨야 한다는 생각은 하나도 안 하지.”박서준의 말에 곽서연은 웃으
방금까지도 설레던 마음이 송학진의 말 한마디에 금세 사그라진 차서윤은 화가나 그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왜 이렇게 밝혀요. 이런 사람인 줄 몰랐네요.”“아직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했는데? 어디 한번 제대로 밝혀봐?”“싫어요. 빨리 일어나서 짐 싸고 출발해야죠.”몇 가족은 차를 몰고 곧장 해변에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허연후는 차에서 내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해양 섬을 바라보며 한지혜의 배를 어루만졌다.“여보, 저기가 우리 추억이 담긴 곳이잖아. 그때 저기서 너한테 고백했었는데 기억나?”오랜만에 추억을 떠올리자 한지혜는 괜
앞으로의 삶은 행복하고 순탄할 것이다.다른 한편.천우가 눈을 떠보니 아림은 이미 깨어나 그의 곁에 엎드려 뺨을 괴고 그를 보고 있었다. 천우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오늘에는 유치원에도 안 가는데?”아림은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천우 오빠, 어제 받은 돈으로 쌍둥이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어. 난 지금 언니니까 언니답게 굴어야 하잖아.”천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짧은 다리로 침대 옆으로 달려가 서랍에서 돈 봉투를 꺼내 침대 위에 던졌다.“나도 이렇게 많아. 너랑 쌍둥이들을 위해서 아껴놓은 거야.
이미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송학진한테 차서윤의 말은 마치 휘발유처럼 그를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송학진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선물?”차서윤은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말했다.“먼저 씻어요. 조금 후면 알게 될 거예요.”송학진은 차서윤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여보,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잖아. 저쪽 칸에서 씻을 테니까 자기가 여기서 씻어. 씻고 나왔을 때 선물이 날 실망하게 하지 않길 바랄게.”“그럴 일 없어요.”차서윤은 송학진을 방에서 밀어내고 물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송학진
“외삼촌이 그럴 리가 없어요. 외숙모와 아림이도 나 때문에 만난 거잖아요. 만약 유치원에서 내가 아림의 치마를 적시지 않았다면 외삼촌이 외숙모를 만날 일이 있었을까요?”천우의 말을 잠깐 생각해보던 육문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만약 천우가 아니었다면 송학진은 어쩌면 아직도 솔로였을 수도 있었다.갑자기 뿌듯해진 육문주는 잔을 들고 자리에 있는 형제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너희들 우리 아들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천우가 아니었으면 우리 이 축하주를 언제 마셨을지도 모를 일이야.”곽명원은 웃으며 말했다.“천우가 아니었
박서준은 웃으며 말했다.“배은망덕한 건 아닌 것 같네. 보살펴준 보람이 있어. 왔던 김에 가족들이랑 며칠 시간 좀 보내다 갈 거야.”박서준의 말에 곽서연은 즉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정말요? 그럼 우리 그동안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박서준은 곽서연을 흘려보며 말했다.“삼촌이랑 헤어지는 게 그렇게 싫어?”“네. 매일 매일 삼촌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왜 이렇게 달라붙는 거야? 천우보다 더하네?”곽서연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삼촌은 내가 달라붙는 게 싫어요?”박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싫다고 그러면 또 울
곽서연과 박서준이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곽명원이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박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형네 집 공주님께서 발을 삐끗해서 울고 계시잖아.”곽명원은 별생각 없이 곽서연 곁으로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그녀의 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마구잡이로 잡고 돌리는 턱에 아파 난 곽서연은 바로 소리를 질렀다.“아! 삼촌 살살 좀 해요.”곽서연은 참을 수 없는 아픔에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곽명원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아프다고? 어릴 때처럼 아픈 척하
송학진의 차가운 태도에 화가 난 강한나는 눈시울을 붉히고 입술을 깨물며 경호원을 바라보고 말했다.“내 발로 나갈 테니까 비켜요.”말을 마친 강한나는 도도한 걸음으로 이곳을 떠났다. 많은 사람이 뒤에서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모든 것이 끝나고 송학진은 차서윤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와 예복을 갈아입었다.송학진은 차서윤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서윤아, 이제 내가 있으니까 누구도 감히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송학진은 차서윤이 이십여 년간 저런 아버지 밑에서 보내다 겨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