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뜬 시야 안으로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조수아는 구명줄을 잡은 사람처럼 남자의 옷깃을 꽉 붙잡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선배, 저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세요.”그녀는 육문주에게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불쌍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싫었다. 다른 건 다 싫고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연성빈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나가겠다는 거야? 안 되겠다. 일단은 의사선생님한테 가자.”“안 돼요, 선배! 저 아까 현혈하고 나와서 잠시 어지럼증 때문에 그
송미진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조수아는 그녀의 말을 모두 듣게 되었다. 육문주의 대답은 한순간에 그녀의 7년이나 이어온 감정을 엉망으로 짓밟았다. “나 이 비서한테 그 영상을 복제해달라고 했지 삭제하라고 한 적 없어.”육문주는 표정 변화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증언이랑 물증이 완벽한데 그래도 변명할 생각이야?”변명이라니, 그건 육문주가 자신을 믿어줄 가능성이 있을 때나 의미 있는 단어였다. 그리고 무릇 송미진이 연관되어 있는 일이라면 육문주는 무조건 송미진의 편이었다.조수아는 입술을 깨물며 침착함을 가장했다.“그럼 경찰에 신
“방금 뭐라고 그러셨어요? 할머니가 저를 문주 씨 옆에 붙여둔 거라고요?”“당연하지. 아니면 육 대표님이 정말 백마 탄 왕자처럼 쨔잔하고 나타나서 널 구해준 줄 알았어? 생각해 봐. 육 대표님 같은 다망하신 분이 어떻게 난데없이 그렇게 구석진 곳에 갔겠어. 나랑 네 오빠가 미리 함정을 파서 육 대표님을 그곳으로 이끌지 않았다면 네가 3년이나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육 대표님한테 시집가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는 게 네 주제에 가당키나 해? 너처럼 낯 부끄러운 줄 모르는 엄마를 둔 사람을 B시에
조수아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그거 빼고 다 들어줄 수 있어.”“내가 필요한 건 이거 하나뿐인데?”“문주 씨, 내가 불순한 목적이 있어서 당신한테 접근했다 쳐. 그래도 3년이나 당신 곁에서 그렇게 챙겨줬으면 나는 할 도리는 다 했다고 보는데, 아니야? 날 이렇게 놓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육문주는 고집스런 눈빛과 계속해서 열었다 닫혔다 하는 입술, 그리고 갸름한 턱라인을 보며 목울대를 꿀떡 움직였다. 단숨에 조수아를 안아 허벅지에 앉힌 그는 턱을 그녀의 어깨에 댄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어떻
“그렇다면요? 대표님께서 저를 직접 수술대로 끌고가서 아이를 지워버리게 하려고요?”치켜든 고개에 조금씩 빨개지기 시작한 눈동자가 자리했다.살이 홀쭉하게 빠진 조수아의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던 육문주가 물었다.“그렇게 중요한 걸 왜 나한테 안 알려줬어?”“알려주면? 그럼 하루라도 더 빨리 애를 지우려고?”“맘대로 내말 해석하지 말고 제대로 들어.”육문주는 미운 말만 뱉는 얄미운 입을 그러쥐었다.“어차피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고 애 낳을 거, 굳이 내가 임신했다고 그래서 문주 씨가 관심이나 가질까?”그녀의 고집스런
“조수아, 내가 네 투정 안 받아줬다고 내 아이를 지웠다고 말하는 거야, 지금? 너 그렇게 맘이 독한 여자인줄 오늘 처음 알았네?”조수아가 핏발선 눈으로 노려봤다.“내가 안 그랬어! 아이를 죽인 건 당신이야!”“여기에 적힌 거 안 보여? 어디서 궤변이야!”“그거 다른 사람이 기록을 일부러 고쳐놓은 거라면 믿겠어?”육문주는 손에 힘을 풀고 그녀의 새하얀 목을 수놓은 키스마크를 보며 가슴이 찔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조수아는 제가 7년을 사랑하고, 3년을 옆에서 아낌없이 살펴준 남자를 처량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자신의 말
손목을 덥석 잡아오는 조수아의 행동에 송미진은 아파서 눈을 찡그렸다.“내 손 아직 다 안 나았어. 감히 내 몸에 손 대기만 해 봐. 배로 돌려줄 테니까!”차가운 조소가 흘러나왔다.“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은 두려울 것도 없다는 거 몰라요? 그렇게 몇 번이고 자꾸 시비를 걸어오는데, 거기에 응해주지 않으면 송미진 씨한테 너무 미안하잖아요. 저 때문에 팔 다친 걸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지 못하게 됐다면서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더 완벽하게 망가지는 게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르죠.”말을 마침과 동시에 우둑, 하는 소리
송미진은 다친 손을 들어 육문주에게 보여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방금 전에 조수아에게 당한 뒤로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가 응급처치를 받고, 한시도 지체없이 다시 이곳으로 달려왔는데 이런 장면을 목격할 줄 송미진은 몰랐다.‘조수아가 아이를 지웠다는데도 왜 그렇게 그녀를 다정하게 대해줘? 내가 겨우 골머리를 앓아 생각해낸 방법이 결국 또 실패인 거야?’송미진은 훌쩍이며 슬금슬금 육문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가 가까이 붙기도 전에 육문주가 조수아를 뒤로 숨기며 몇 걸음 물러섰다.“그게 무슨 소리야. 조수아 여태까지 계속
입안에 들어온 물건을 알아차린 곽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곽서연은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안의 물건을 내뱉자 핑크빛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곽서연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삼촌, 이거 나한테 주는 거예요?”박서준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당연한 거 아니야? 너 말고 또 누구 줄 사람 있어?”“하지만 우리 이제 겨우 시작한 건데, 이런 선물은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내 모든 재산을 전부 너한테 넘겼는데, 설마 나랑 그만둘 생각을 하는 거야
“내 아내를 내가 아껴줘야지 그럼 누가 아껴줘?”“내 아내를 내가 안 보면 누가 봐요?”말을 마친 천우는 조수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30분 후, 두 사람은 산부인과 병원에 도착했다. 한지혜는 이미 분만실로 옮겨졌고 허연후도 동행했다.두꺼운 문 너머로 한지혜의 외침이 들려왔다. 조수아는 의아한 듯 물었다.“무통 주사를 안 맞은 거예요? 왜 저렇게 아파해요?”옆에 서 있던 윤다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무통 주사가 애한테 나쁘다고 우겨서 끝내는 안 맞고 들어갔어. 누가 지혜를 이기겠니.”“고작 그런 거로 애들 영
곽서연은 놀라서 순간적으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집안 사람들이 전부 다 있는데 테이블 밑에서 몰래 입을 맞추다니.갑작스러운 스킨십에 곽서연은 가슴이 움찔했다. 그녀는 놀라서 즉시 박서준을 밀어내고 눈에 화를 가득 담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그러나 박서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가족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박주영은 곽서연의 안색을 보고 즉시 물었다.“서연아, 몸이 안 좋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곽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좀 더워서 그래요. 저 잠깐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그래도 네가 양심은 있구나.”박서준은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할아버지, 칭찬 고맙습니다. 그리고 서연이를 저한테 기꺼이 내주신 것도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손녀사위로서 차 한잔 올릴게요. 할아버지, 한잔하시죠.”박서준의 말에 표정이 조금 풀어진 곽훈은 자연스럽게 차를 받아들고 한잔 마시고 나서야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차리고 찻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말했다.“이놈이 지금 번지르르한 말로 날 얼리는 것이냐? 네가 왜 내 손녀사위야?”박서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할아버지,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에요. 방금
박서준은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고 문 앞에 선 채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곽훈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할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박서준의 ‘할아버지’라는 호칭에 곽훈은 마시고 있던 차를 뿜을 뻔했다. 그는 박서준을 노려보며 말했다.“겨우 3일을 갇혀있었다고 너를 허락할 거 같아서 온 거냐? 귀한 내 공주님을 너같이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시킬 수는 없어. 좋게 말할 때 돌아가거라.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곽훈은 박서준한테 들어오라는 인사도 건네지 않고 냉정하게 거절했지만, 박서준은 그런 체면 따위 상
말을 마친 박서준은 곽서연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곽서연의 귀를 타고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파도처럼 거친 키스가 그녀를 향해 다시 휘몰아쳤다. 박서준은 아까처럼 그렇게 자제하지 않았고 서로의 존재를 탐내듯 키스는 점점 더 깊어졌다.박서준은 드디어 자기도 아내가 생겼다고 조상들 앞에서 선언하고 싶었다.다른 한편.담벼락에 오르기도 전에 누군가의 호통 소리에 놀란 곽명원은 곽서연을 향해 신신당부했다.“여기는 삼촌한테 맡기고 빨리 뛰어내려.”말을 마친 곽명원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육문
박서준의 다정다감한 말과 행동에 곽서연의 뺨은 더욱 화끈거렸고 따라서 목소리도 나긋나긋해 졌다.“삼촌.”박서준은 부끄러워하는 곽서연의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무서워할 거 없어. 삼촌이 네가 다 클 때까지 기다려 줄게.”박서준은 큰 손으로 곽서연의 뺨을 어루만지며 솟구치는 욕망을 참고 또 자제했다.사슴같이 예쁘장한 곽서연의 눈은 자기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박서준의 목을 껴안고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삼촌이 심은하와 약혼한 뒤에는 삼촌을 놓아주고 잊으려고 노력
말을 마친 곽명원은 곽서연의 손을 잡고 벽 쪽으로 걸어가 허벅지로 사다리를 만들고 말했다.“딛고 올라가.”곽서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곽명원의 허벅지에 딛고 이어서 벽 위로 올라갔다. 뒤이어서 곽명원이 벽에 오르려는 찰나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 누구야? 감히 육 씨 집안 벽을 넘어? 당장 내려와!”곽서연은 놀라서 즉시 안쪽으로 뛰어내렸고 곽명원을 버려둔 채 사당 쪽으로 뛰어갔다. 만약 지금 여기서 발견되면 박서준을 못 볼 수도 있었다.박서준이 혼자 사당에서 아픈 다리를 이끌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곽명원의 말에 곽서연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상후 선배의 아버지가 곽 씨 집안과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니에요?”곽명원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서준이가 널 위해서 그렇게 말한 거야. 네가 진실을 알게 되면 혹시나 병이 다시 발작할까 봐 걱정돼서, 네가 서준이를 오해할 걸 뻔히 알면서도 널 속인 거야. 그런데 삼촌은 그렇게 생각 안 해. 너도 이제는 부모님의 사건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컸잖아. 그렇지?”곽명원의 말뜻을 알아차린 곽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부모님을 죽인 살인범이 윤상후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