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진은 다친 손을 들어 육문주에게 보여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방금 전에 조수아에게 당한 뒤로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가 응급처치를 받고, 한시도 지체없이 다시 이곳으로 달려왔는데 이런 장면을 목격할 줄 송미진은 몰랐다.‘조수아가 아이를 지웠다는데도 왜 그렇게 그녀를 다정하게 대해줘? 내가 겨우 골머리를 앓아 생각해낸 방법이 결국 또 실패인 거야?’송미진은 훌쩍이며 슬금슬금 육문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가 가까이 붙기도 전에 육문주가 조수아를 뒤로 숨기며 몇 걸음 물러섰다.“그게 무슨 소리야. 조수아 여태까지 계속
육문주는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 우호적이지 못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기회를 준다고 할 땐 싫다더니, 지금은 또 후회되나 봐? 이제는 우리 할머니한테까지 손을 뻗어?”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는 조수아가 할머니를 돌아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할머니께서 말씀하신 손주가 이 사람이에요?”황애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두 사람 아는 사이였어? 그럼 더 잘 됐네. 서로 감정 기초가 있으면 어색하게 눈치 볼 필요도 없지.”“할머니, 이제 가족분 오셨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 저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요.”
조병윤은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의 조카인 조자현은 잠시 도박을 하다가 빚을 지기는 했어도 돈도 이미 다 갚았기도 했고, 그리고 고작 그런 일로 검찰청 사람들까지 찾아올 정도는 아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조병윤은 이 집사를 향해 말했다.“두 사람 들여보내. 어차피 마주할 거 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야.”잠시 후 거실로 들어선 두 남자는 간단히 찾아온 이유를 설명한 뒤 조수아를 향해 말했다.“이번 사건은 상업적 기밀에 관련되어 있는 사건이기도 하고, 워낙에 엮여있는 금액이 커서 조병윤 씨가
“조 비서님 지금 대표님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신지 30분 됐습니다.”육문주는 가슴이 누군가에 의해 쿵하고 가격 당한 듯 울렁거렸다.“남은 스케줄을 다 뒤로 미뤄.”길쭉하게 뻗은 다리를 시원하게 뻗으며 사무실로 걸어가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벽 한면을 차지한 통창 앞에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검은색 티셔츠에 녹색 캐주얼 치마를 입고 수수한 모습으로 찾아온 조수아는 머리를 높게 틀어올린 채 가는 목을 시원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매끈하면서도 곧게 뻗은 하얀 다리를 보며 육문주는 마치 마음속 어딘가에 불이 지펴진 것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육문주는 손끝을 그녀의 턱밑에 갖다대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제 얼굴을 내려 두 사람의 코가 서로 맞닿게 비비적거렸다. 끈적거리고도 긴장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아이를 잃어버렸으면 다시 만들어서 돌려줘야지.”조수아는 팔을 뻗어 상대방을 세게 밀었다.“그건 불가능해!”“그럼 네가 아까 말했던 거, 나 하나도 못 들어줘.”“당신 적당히 해!”겨우 마를까 했던 눈시울이 또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노기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육문주는 잘생긴 미간을 들썩이며 앞으로 한발자국 다가섰다. 그리
허둥지둥 경찰서에 도착하니 한지혜가 손목에 수갑을 찬 채 취조를 당하고 있었다. 엄숙한 얼굴의 경찰을 마주보며 한지혜는 쉴새없이 본인을 위해 해명하고 있었다. 주눅들거나 하는 모습은 전혀 없어보였다.빠르게 걸어간 조수아는 담당 경찰을 향해 예의있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있는 한지혜 친구 조수아라고 하는데요. 혹시 제 친구가 무슨 일로 잡혀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경찰이 대답하기도 전에 한지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제 네가 그렇게 사라지고 성빈 오빠가 널 도와줄 방법을 찾아보겠다면서 아버지한테 가보겠다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조수아는 귓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곧바로 정신차린 그녀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문주 씨는 역시나 송미진 씨 말을 믿는 거지?”“당연하지. 아니면 네 친구가 한 게 아니라는 증거를 대보든가.”역시 쓰레기구나, 당신은. 이제 한 발 뺐다고 모르는 척하는 폼이 예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그는 사건의 진상을 꿰둟어 보지 못하고 겉에 드러난 것만 믿는 나쁜놈이었다. 그리고 송미진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보는 눈 먼 사람이기도 했다.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아파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제자리에 멈춰선 조수아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덜덜 떨렸다. 이상함을 감지한 한지혜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이름을 불러주었다.“수아야, 조수아.”몇 번이나 반복해서 부른 뒤에야 조수아가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막만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자신을 부른 여인에게로 돌아갔다.“당신한테 그런 자격 없어!”갈라지는 목소리로 한 마디 쏘아붙인 뒤 조수아는 한지혜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는데 다리가 통제를 벗어난 듯 부들부들
육천우는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확실하지는 않아. 됐어. 이제는 그만 놀릴게. 아직 아침을 먹지 않은 것을 알고 비서더러 네가 좋아하는 슈 크림빵이랑 치즈케이크를 사 오라고 했으니 얼른 먹어.”육천우는 허나연의 손을 잡고 식탁 앞에 왔다.그녀에게 만두 하나를 짚어주고 우유 한잔을 따라준 후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좀 처리할 서류가 있으니 혼자 먹고 있어.”허나연은 스스럼없이 만두를 입에 집어넣고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육 대표님은 모든 직원에게 이렇게 친절합니까? 외국에 있을 때도 아침을 사
차유라는 허나연의 사원증에 똑똑히 ‘대표 비서 허나연’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였다.업계의 모든 사람은 육천우에게는 불문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의 비서는 줄곧 남자였다.허나연을 만난 후 육천우는 정략결혼의 압박 때문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녀를 편애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오래된 습관을 버렸다.마음속으로 질투를 억누른 차유라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축하해요. 하지만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데 대표님의 비서는 전문적인 지식과 수양을 갖춰야 하는 직업이지 아이들의 소꿉장난 아니에요. 무용수인 나연 씨
이 문제를 이전에 두었더라면 허나연은 망설였을 것이지만 차유라의 등장으로 그녀의 마음에 큰 변화가 생겼다.차유라가 육천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 허나연은 그를 뺏길까 봐 일부러 그들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렸다.예전처럼 다른 사람과 육천우를 공유하기 싫었고 혼자만 그를 소유하고 싶었다.육천우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육천우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뜨겁지 않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여도 꼭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던 그녀였다.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늘어뜨린 허나연은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나마 조금은
그가 접근하자 허나연의 심장은 쿵쿵 뛰었고 그 하얀 얼굴도 점점 뜨거워졌다.어린 시절 단순했던 감정도 어느새 맛이 변해 버렸다.차유라가 육천우를 바라보던 눈빛을 생각하니 가슴이 시큰거렸다.그들은 지난 3년 동안 함께 일했다.육천우가 그녀와 연락이 줄어들었던 것도 옆에 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 허나연은 화가나 육천우를 발로 걷어찼다.“나를 건드리지 말고 유라 씨한테 가.”뾰로통한 허나연의 모습을 본 육천우는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아직도 질투하는 거야?”“내가 무슨 질투를 해. 우리 집이 식초 공장을 하는 것도
허나연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네, 알았어요. 하지만 의사 진료에 협조하겠다고 먼저 약속해 주세요.”이렇게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본 차 교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좋아. 너희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말을 듣고 수술을 받을게.”육천우는 농담조로 말했다.“저의 아내가 말 한마디로 스승님이 수술을 받으시게 했네요, 나연이의 능력을 새삼 새롭게 보게 되네요.”애정 어린 눈빛으로 허나연을 바라보던 육천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옆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서 있는 차유라를 본 차 교수는 입술을 살짝 치켜올렸다.“됐어
수표를 받아 쥔 차유라의 손가락은 새하얗게 변했고 가슴은 간간이 쿡쿡 찌르는듯한 통증이 전해졌다.차유라는 아버지 덕에 육천우 마음속의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 전에 그는 혼약이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진 차유라는 가련한 눈빛으로 육천우를 바라보았다.“천우야, 나연 씨랑 결혼 할 거야?”육천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허나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유라 씨의 뜻은 저랑 천우가 감정이 하나도 없는 정략결혼이기에 언젠가 헤어질 거라고 말하고 싶으신 거죠? 제 말 맞죠?”“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왜냐하면 외
허나연은 어릴 때부터 말싸움으로 육천우를 이긴 적이 없다.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을 한 그녀는 조수아의 품으로 달려들었다.“이모, 천우 오빠가 또 저를 괴롭혀요.”조수아는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이따가 천우에게 밥을 주지 말고 굶기자. 자신이 못생겼다는 것을 모르다니, 우리 나연이가 천우보다 백배는 예뻐, 제일 예뻐.”허나연은 육천우를 향하여 의기양양하게 웃었다.“네가 못생긴 거야.”육천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네, 네. 그렇게 나연이 응석을 항상 받아주세요, 앞으로 결혼한 후 말을 듣지 않는다고 저한테 고자
이 소식을 들은 육천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며칠 전 스승님과 함께 식사한 적이 있는데 왜 그때 이 일을 언급하지 않으셨지?”차유라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네가 알게 되면 BM 투자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하게 할까 봐 아버지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 아버지께서는 네가 그의 제일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길 바라고 있어.”육천우가 ZERO 그룹을 인수한 직후 유럽발 금융위기를 겪고 있을 때 금융 전문가인 차 교수의 도움 덕에 여러 투자 프로젝트에서 부활할 수 있었으므로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그를 존경하고 있
방금 누그러졌던 허나연은 다시 조롱을 받고 놀라서 육예람의 입을 틀어막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제발 그만 좀 말해. 네가 마음에 들었던 가방을 사줄게.”육예람은 웃으면서 허나연의 볼을 꼬집었다.“비밀 하나에 차 한 대와 가방 하나를 맞바꾸는 건 너무 실속 있는 거래야. 다음에 무엇을 뜯어낼지 고민해 볼 테니 반드시 꼭 나한테 미리 말해줘.”육천우는 다가가 육예람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꿈 깨!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나연이랑 할 말 있으니 자리 좀 비켜줘.”화가 난 육예람은 눈을 부릅뜨고 육천우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