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문주는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 우호적이지 못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기회를 준다고 할 땐 싫다더니, 지금은 또 후회되나 봐? 이제는 우리 할머니한테까지 손을 뻗어?”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는 조수아가 할머니를 돌아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할머니께서 말씀하신 손주가 이 사람이에요?”황애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두 사람 아는 사이였어? 그럼 더 잘 됐네. 서로 감정 기초가 있으면 어색하게 눈치 볼 필요도 없지.”“할머니, 이제 가족분 오셨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 저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요.”
조병윤은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의 조카인 조자현은 잠시 도박을 하다가 빚을 지기는 했어도 돈도 이미 다 갚았기도 했고, 그리고 고작 그런 일로 검찰청 사람들까지 찾아올 정도는 아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조병윤은 이 집사를 향해 말했다.“두 사람 들여보내. 어차피 마주할 거 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야.”잠시 후 거실로 들어선 두 남자는 간단히 찾아온 이유를 설명한 뒤 조수아를 향해 말했다.“이번 사건은 상업적 기밀에 관련되어 있는 사건이기도 하고, 워낙에 엮여있는 금액이 커서 조병윤 씨가
“조 비서님 지금 대표님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신지 30분 됐습니다.”육문주는 가슴이 누군가에 의해 쿵하고 가격 당한 듯 울렁거렸다.“남은 스케줄을 다 뒤로 미뤄.”길쭉하게 뻗은 다리를 시원하게 뻗으며 사무실로 걸어가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벽 한면을 차지한 통창 앞에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검은색 티셔츠에 녹색 캐주얼 치마를 입고 수수한 모습으로 찾아온 조수아는 머리를 높게 틀어올린 채 가는 목을 시원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매끈하면서도 곧게 뻗은 하얀 다리를 보며 육문주는 마치 마음속 어딘가에 불이 지펴진 것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육문주는 손끝을 그녀의 턱밑에 갖다대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제 얼굴을 내려 두 사람의 코가 서로 맞닿게 비비적거렸다. 끈적거리고도 긴장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아이를 잃어버렸으면 다시 만들어서 돌려줘야지.”조수아는 팔을 뻗어 상대방을 세게 밀었다.“그건 불가능해!”“그럼 네가 아까 말했던 거, 나 하나도 못 들어줘.”“당신 적당히 해!”겨우 마를까 했던 눈시울이 또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노기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육문주는 잘생긴 미간을 들썩이며 앞으로 한발자국 다가섰다. 그리
허둥지둥 경찰서에 도착하니 한지혜가 손목에 수갑을 찬 채 취조를 당하고 있었다. 엄숙한 얼굴의 경찰을 마주보며 한지혜는 쉴새없이 본인을 위해 해명하고 있었다. 주눅들거나 하는 모습은 전혀 없어보였다.빠르게 걸어간 조수아는 담당 경찰을 향해 예의있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있는 한지혜 친구 조수아라고 하는데요. 혹시 제 친구가 무슨 일로 잡혀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경찰이 대답하기도 전에 한지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제 네가 그렇게 사라지고 성빈 오빠가 널 도와줄 방법을 찾아보겠다면서 아버지한테 가보겠다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조수아는 귓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곧바로 정신차린 그녀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문주 씨는 역시나 송미진 씨 말을 믿는 거지?”“당연하지. 아니면 네 친구가 한 게 아니라는 증거를 대보든가.”역시 쓰레기구나, 당신은. 이제 한 발 뺐다고 모르는 척하는 폼이 예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그는 사건의 진상을 꿰둟어 보지 못하고 겉에 드러난 것만 믿는 나쁜놈이었다. 그리고 송미진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보는 눈 먼 사람이기도 했다.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아파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제자리에 멈춰선 조수아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덜덜 떨렸다. 이상함을 감지한 한지혜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이름을 불러주었다.“수아야, 조수아.”몇 번이나 반복해서 부른 뒤에야 조수아가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막만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자신을 부른 여인에게로 돌아갔다.“당신한테 그런 자격 없어!”갈라지는 목소리로 한 마디 쏘아붙인 뒤 조수아는 한지혜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는데 다리가 통제를 벗어난 듯 부들부들
그날밤, 조수아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연달아 이어지는 악몽에 시달리다 아침에 깨어나 보니 눈밑에 시커멓게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되어야 했고, 잡혀간 아버지를 하루빨리 빼내와야 했기에 조수아는 반드시 강해져야만 했다.조수아는 한지혜가 만들어준 아침을 먹은 뒤 몸에 핏 되는 정장을 차려입고 메이크업도 정교하게 했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향해 차에 올라탄 뒤 육엔 그룹으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해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이 비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곳저곳에서 훈수를 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거 회
박서준은 아픈 허벅지를 이끌며 힘겹게 달려가 곽서연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그는 곽서연이 다치는 게 싫었고 다시 병이 발작할까 봐 두려웠다.순간 박서준의 머릿속에는 그날 곽서연이 해변에서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삼촌, 저는 삼촌이 저를 구해준 그 날부터 삼촌을 좋아하게 됐어요.”“삼촌 옆에 가까이 있기 위해 유학을 선택한 거예요.”“삼촌, 저는 앞으로 계속 삼촌을 좋아할 거예요.”한마디 한마디 떠오를 때마다 박서준은 마음이 점점 더 아파 났다.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박서준은 곽서연을 좋아하고 있었다.
박서준은 허리를 굽혀 칼을 손에 쥔 채 곽서연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서연아, 울지 마. 삼촌 안 죽어.”곽서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삼촌이 불구가 되는 게 싫어요. 그러니까 하지 말아요. 두 번 다시 누가 나 때문에 희생하는 걸 보고 싶지가 않다고요. 한평생을 갚아도 못 갚잖아요.”곽서연은 자신의 삼촌을 통하여 알게 된 박서준이 그녀를 위해 다리를 잃는 게 싫었고 자신은 박서준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곽서연의 말뜻을 알아차린 박서준은 가슴이 지끈거렸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며 지체할
박서준의 머릿속에는 곽서연이 납치되는 장면들이 자꾸 떠올랐다.곽서연은 어렸을 때 벌어졌던 일 때문에 이미 심한 스트레스성 장애를 겪었었는데 만약 다시 재발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혼자 차를 몰고 곧장 거래 장소로 달려간 박서준이 대문을 걷어차자, 큰 나무에 묶여 있는 곽서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곽서연을 보자 박서준은 수없이 많은 칼이 한 번에 심장에 박히듯 아파져 왔다.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두 다리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려왔다.침착하고 냉정하게
입술을 닦아준 윤상후는 곽서연에게 물었다.“서연아, 둘째 삼촌이 우리가 사귀는 걸 정말로 믿게 하고 싶어?”박서준이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신경 쓰는 것이 싫었던 곽서연은 확실히 마음을 단념했음을 보여주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윤상후는 즉시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 위에 댄 뒤 머리를 숙여 손가락을 사이에 두고 입을 맞추었다.결국, 그들의 계획대로 박서준은 두 사람이 입을 맞췄다고 오해했다.박서준이 아까 했던 말을 떠올리던 곽서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곽서연은 예나 지금이나 박서준이 잘해줬던 건 그냥 곽명원 때문이
윤상후는 몸을 앞으로 숙여 곽서연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비록 박서준을 등지고 있었지만, 윤상후의 입술이 곽서연의 입술에 맞닿은 것을 본 박서준은 마치 마른벼락이 온몸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줄곧 침착하게 앉아있던 박서준은 즉시 일어나 어두운 얼굴로 그들을 향해 걸어가더니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박서준의 목소리에 윤상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가셔지지 않은 뜨거운 눈빛을 머금은 채 박서준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둘째 삼촌, 죄송해요. 방금 참지 못하고 서연이한테 입을 맞췄어요.
이제 다시는 박서준의 옆에 갈 수 없겠다고 생각한 곽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이때 윤상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고 곽서연은 즉시 감정을 추스르고 전화를 받았다.“선배.”“서연아, 일어났어? 내가 부근에 한식집을 찾아놨어. 너 한식 먹고 싶다고 했잖아. 같이 가자.”곽서연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내려갈게요.”30분 뒤에 일 층으로 내려온 곽서연의 눈에는 기숙사 입구에 서 있는 윤상후가 들어왔다. 그의 품에는 곽서연이 좋아하는 곰돌이 인형이 안겨있었다.곽서연은 즉시 웃으며
박서준은 즉시 걱정스럽게 물었다.“갑자기 배가 왜 아파?”심은하는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생리통이야. 매번 이래.”심은하는 아파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이를 본 박서준은 즉시 분부했다.“가까운 병원으로 가주세요.”운전기사는 곧바로 유턴해 가장 가까운 병원을 향해 질주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심은하는 뒷자리에 누운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까지 떨고 있었다.박서준은 조용히 외쳤다.“심은하.”심은하는 힘겹게 눈을 뜨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서준아, 나 못 걸을 거 같으니까 휠체어
곽서연은 천우처럼 항상 박서준에게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곤 했다.곽서연이 마음속으로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 박서준은 예전처럼 가까이 지내면 곽서연이 자신한테 더 깊이 빠져들 거로 생각하고 그녀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래야만 죄책감이 덜할 것 같았다.그리고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심은하의 제안을 받아들었고 곽서연이 상처받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접는 데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다.그런데 곽서연이 윤상후와 사귀는 걸 보자 마음이 아팠다.‘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
한시라도 빨리 박서준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곽서연은 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곽서연은 자신이 꾸민 모든 일이 들킬까 걱정돼 감히 박서준을 돌아보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서 박서준을 등지고 한참 동안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돌려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무슨 일 있어요?”박서준은 곽서연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피하는 곽서연을 빤히 보며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윤상후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사귀는 거야 아니면 날 피하기 위해서야?”“삼촌은 내가 그렇게 감정을 마음대로 갖고 노는 사람으로 보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