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밤, 조수아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연달아 이어지는 악몽에 시달리다 아침에 깨어나 보니 눈밑에 시커멓게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되어야 했고, 잡혀간 아버지를 하루빨리 빼내와야 했기에 조수아는 반드시 강해져야만 했다.조수아는 한지혜가 만들어준 아침을 먹은 뒤 몸에 핏 되는 정장을 차려입고 메이크업도 정교하게 했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향해 차에 올라탄 뒤 육엔 그룹으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해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이 비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곳저곳에서 훈수를 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거 회
잠시 뒤, 조수아가 문을 두드리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방금 전 감시카메라를 통해 봤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직장인으로서의 반듯한 미소를 장착한 채였다.“대표님, 찾으셨습니까?”육문주는 빈 손으로 들어온 그녀를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내 아침식사는?”예전의 조수아는 그가 아침을 못 먹고 회사에 출근하게 되는 날, 항상 도시락에 정성스레 아침을 준비해서 회사로 가져왔었다. 육문주의 물음에 조수아는 당황하지 않고 예의 바르게 물었다.“혹시 식사를 한식, 아니면 양식으로 하시겠습니까? 정해 주시면 제가 지금 안
함정을 파놓고 조병윤을 걸려들게 만든 것, 그가 외부에 기밀소식을 누설하게 만든 것, 이 모든 게 모두 조 씨 가문을 파산하게 만들고, 조병윤을 감옥에 보내려는 안혜원의 치밀한 계획이었다. 육문주는 아직 안혜원이 이런 짓을 벌인 진정한 목적을 알지 못했다. 조수아의 어머니가 자신의 남편한테 꼬리 친 일로 복수를 한 거라기엔 어딘가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육문주는 안혜원의 통장 거래내역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선금을 꿀꺽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육엔 그룹은 예전부터 자선사업을 아주 크게 중시했
종이는 이미 더러워졌고, 겉에 오물까지 묻었는지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결벽증이 있는 육문주한테 계약서를 이대로 들고 갔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계약서를 그러쥔 손에 힘이 실리며 마디가 새하얘졌다. 송 씨 가문의 아가씨로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자라왔을 그녀가 대체 뭐가 부족해서 육엔 그룹의 비서로 취직했을지, 그 이유를 조수아는 모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오늘과 같은 일들이 앞으로도 빈번하게 발생할 거라고 단정했다. 고운 입술이 차가운 호도를 그렸다.십여 분이 지난 뒤 조수아는 다
송미진은 제가 조수아를 얕봤음을 인정했다. 한 시간 뒤 이사진회의가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조수아의 능숙한 대처에 계약서 체결도 별다른 문제 없이 약속대로 체결될 수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안혜원은 일부러 모든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육문주를 향해 말했다.“문주야, 미진이가 식당 예약했다고 하니까 이따가 끝나고 와서 밥이나 같이 먹자. 두 사람이 자주 데이트했던 그 식당이야. 어딘지 알지?”안혜원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현장에 있는 모두가 다 잘 알았다. 조수아는 침착하게 필기도구나
이런 취급을 당해봤을 리 없는 송미진은 힘껏 바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네까짓 게 뭔데 날 때려! 날 건드리면 니네 아빠 감옥에서 확 죽여버린다?”아버지의 이름이 거론되자 조수아는 손에 더 힘을 실어 날렸다.“네 엄마 아빠가 아이를 교육할 줄 모르는 것 같으니까 수고스럽긴 하지만 내가 직접 도와줘야겠어!”송미진의 키가 조수아보다 작기도 했고, 어려서부터 고생 한 번 해본 적이 없이 커왔던 터라 그녀는 조수아의 상대가 전혀 안 되었다. 몇 분도 안 되어 송미진의 얼굴이 곧장 팅팅 부어올랐다.“두고 보자, 조수아!”송미진은
육문주는 단호한 음성으로 조수아를 향해 명령했다.“당장 미진이한테 사과해!”조수아는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사과를 강요하는 남자를 보며 역시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송미진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그녀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조수아는 육문주의 시선에 지지 않고 마주 노려봤다.“제가 한 것도 아닌 일로 왜 제가 사과해야 되죠? 대표님께서는 무력으로 저를 자백하게 만들 생각인 건가요?”“1분을 줄 테니까 얼른. 사과 안 하면 후과가 어떨지 알아서 생각해
조수아의 죄를 입증하기 위해 안혜원은 육문주를 데리고 직접 기술부로 향했다. 마스크를 낀 송미진이 두 사람의 뒤를 바짝 따랐다. 기술부에 도착한 후 송미진은 눈앞의 모니터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기필코 이번에 조수아를 회사에서 쫓아버리겠다고 연신 다짐했다. 기술부 직원이 송미진이 맞았다고 주장하는 시간대의 영상을 모니터에 띄웠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육문주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화면을 보며 느린 속도로 재생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아무리 돌려보아도 송미진이 화장실을 드나들던 시간대
천우는 더 이상 겁먹지 않고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서준을 노려봤다.“흥! 이제는 고모님이랑 고모부님이 제 편이에요! 삼촌, 저 못 괴롭힐 거예요.”박서준은 천우의 기세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네가 누가 편을 들어준다고 해서 내가 못 할 줄 알아? 밤에 네가 잠들면 몰래 널 택배 상자에 넣어서 고국으로 보낼 거야.”천우는 깜짝 놀라 윌리엄 요한의 목을 양손으로 꼭 껴안고 애원하듯 말했다.“고모부, 살려주세요!”윌리엄 요한은 천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걱정하지 마. 고모랑 내가 있잖아. 삼촌도 감히 널
윌리엄 요한의 신사적이면서도 절제된 감정 표현은 육연희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느낄 수 있었다.그의 시선을 받는 순간, 육연희는 마치 불길에 휩싸인 듯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어색하게 말했다.“아이가 보고 있으니, 좀 신경을 써주세요.”윌리엄 요한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알겠어. 아내 말은 무조건 들어야지.”그는 살짝 장난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윌리엄 요한의 절제된 태도와 배려는 육연희의 마음을 깊이 흔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정을 숨기려 애쓰며 담담히 말했다.“잘 잤습니다. 그런데 당신은요? 눈이 충혈된 것 같은데, 못 주무셨나요?”윌리엄 요한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낮게 웃었다.“연희야, 네가 내 걱정해 주는 거야?”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정한 눈빛을 보냈다. 그의 진지하고 깊은 시선은 보는 이를 빠져들게 했다.육연희는 그의 눈을 피하려 했지만, 그 시선에 갇힌 듯 도망칠 수 없었다.그녀는 그의 충혈
임혜나는 두 사람이 서로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을 세게 구르며 외쳤다.“박서준, 두고 봐. 이 두 대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야!”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홱 돌아서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천우의 귀여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줌마, 가져온 아침 가져가세요. 안 그러면 제가 또 ‘쓰레기’를 버리러 가야 하잖아요.”이미 화가 치밀어 있던 임혜나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분통이 터졌다. 결국 봉투를 성큼성큼 집어 들고, 쾅쾅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저택을 떠났다.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곽
“서준아, 우리 어릴 땐 정말 좋았잖아. 너도 나 잘 챙겨줬고, 뭐든 나한테 양보해 줬어.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거야?”박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땐 내가 널 여동생으로 생각했으니까. 우리가 계속 남매처럼 지냈다면 여전히 잘해줬을 거야.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그 이상이라, 난 줄 수 없어.”임혜나는 사람들 앞에서 거절당하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을 꽉 움켜쥐고 눈물이 맺힌 채로 박서준을 쳐다봤다.“그래도 그 약속은 잊지 마. 너 서른 살까지 결혼 안 하면 나랑 결혼하기로 했잖아. 그건 너도 우리
곽서연은 방금 입안에 넣은 우유를 뱉을 뻔하다가 그대로 목에 걸려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천우는 깜짝 놀라 작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누나, 이 아줌마 때문에 놀란 거예요?”곽서연은 한참 동안 기침을 멈추지 못해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얼굴은 창백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다.그녀는 천우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겨우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너무 급하게 마셔서 그런 거야.”박서준은 기침을 멈춘 곽서연을 보며 무표정하던 얼굴을 살짝 누그러뜨리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누가
“너무 좋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가 조금 더 커서 어른이 되면 이야기하자.”“알겠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 비밀 꼭 지킬게요. 삼촌한테 누나가 삼촌 아내 되고 싶어 한다는 말 절대 안 할게요.”“제발 그 얘기는 하지 말자!”곽서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천우의 입을 막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왔다.아래층에서 박서준이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내려오자, 박서준은 약간 놀란 듯 말했다.“뭐 그렇게 꾸물거려? 배 안 고파?”곽서연은 식탁 쪽으로 다가가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 감탄했다
천우는 박서준의 목소리를 듣자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까맣고 큰 눈이 반짝이며 박서준을 바라봤다.박서준은 천우를 번쩍 들어 올려 작은 엉덩이를 한 번 툭 치고 웃으며 물었다.“삼촌이 늙었다고? 다시 말해봐!”천우는 금세 작은 목소리로 살살 빌며 말했다.“안 할게요. 삼촌, 제발 용서해 주세요.”“그래? 네가 무서워하는 것도 있구나. 근데 말 안 들으면 어쩌지?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다 없으니까, 삼촌이 혼내줄 거다.”천우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두 손을 맞잡고 간청했다.“말 잘 들을게요! 삼촌도 많
박서준은 곽서연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길이 머물렀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물었다.“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야?”곽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건 2년 전이었어요. 여기 온 것도 그 사람 때문인데, 막상 만나 보니 그 사람이 절 전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박서준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이마를 톡 치고는 단호하게 말했다.“2년 전이면 네가 몇 살이었냐? 공부나 열심히 할 생각은 안 하고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