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문주는 단호한 음성으로 조수아를 향해 명령했다.“당장 미진이한테 사과해!”조수아는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사과를 강요하는 남자를 보며 역시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송미진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그녀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조수아는 육문주의 시선에 지지 않고 마주 노려봤다.“제가 한 것도 아닌 일로 왜 제가 사과해야 되죠? 대표님께서는 무력으로 저를 자백하게 만들 생각인 건가요?”“1분을 줄 테니까 얼른. 사과 안 하면 후과가 어떨지 알아서 생각해
조수아의 죄를 입증하기 위해 안혜원은 육문주를 데리고 직접 기술부로 향했다. 마스크를 낀 송미진이 두 사람의 뒤를 바짝 따랐다. 기술부에 도착한 후 송미진은 눈앞의 모니터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기필코 이번에 조수아를 회사에서 쫓아버리겠다고 연신 다짐했다. 기술부 직원이 송미진이 맞았다고 주장하는 시간대의 영상을 모니터에 띄웠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육문주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화면을 보며 느린 속도로 재생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아무리 돌려보아도 송미진이 화장실을 드나들던 시간대
백태웅은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왜, 스승님이 늙어서 이제는 싫어?”“그게 아니라 갑자기 습관이 안 돼서요. 그래도 스승님은 여전히 제 맘속에서 아직 젊고 멋지세요.”“벌써 60도 더 넘었는데 멋지긴 뭘 멋져. 그것보다 너 야윈 것 좀 봐. 내가 성빈이한테서 들었는데 너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끝끝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자신은 그깟 자존심 때문에 3년이나 스승님을 찾아뵙지 않았는데도, 제자한테 어려움이 생겼다는 걸 듣자마자 직접 달려와 준 스승님의 은정을 어떻게 갚
글을 다 쓴 뒤 육문주는 커다란 손을 조수아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야릇하게 훑기 시작했다.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이, 마치 그녀가 함부로 말을 하면 그의 손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수아는 반항하고 싶었으나 스승님한테 두 사람의 관계를 들킬까 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케익을 퍼먹을 수밖에 없었다. 육문주는 순식간에 얌전한 고양이가 된 그녀를 보며 가슴이 간질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손이 순간 참지 못하고 꽉 움켜졌다.“제자분 똑똑해 보이시는 게 사람을 잘못 봤을 것 같지 않
“저 예전에는 사랑에 대한 환상들로 머리가 가득 찼었던 것 같아요. 사랑이 제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것인 줄 알고 그걸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대가도 아낌없이 퍼부었어요. 그런데 제가 착각한 게 있었어요. 제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상대방의 눈에는 그저 거래의 일종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저 이제 고상한 척은 버리려고 결심했어요. 어차피 한 번 거래하든, 여러번 거래하든 결과는 똑같잖아요. 제 아빠만 무사할 수 있다면 아무렴 다 괜찮아요.”덤덤하게 제 얘기를 하는 조수아였지만, 그녀의 속마음이 얼마나 타들어가고 있
육문주의 입에서 나온 ‘집’이라는 단어에 조수아는 가슴이 콕콕 쑤셨다. 한때 그녀는 진심으로 그곳을 집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온갖 인테리어숍을 뒤져 소품들을 직접 하나하나 고르고, 새로 가구를 들일 때에도 모두 조수아가 직접 디자인과 색상 등을 정했었다. 그녀의 입주로 인해 원래 썰렁했던 집안이 따뜻하게 변모해갔다. 조수아는 또 매일 저녁 퇴근하면 직접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육문주를 위해 그가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저녁식사를 차렸었다. 퇴근한 그를 기다려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밥 먹을 때가, 조수아는 제 인생에서 제일 행
이것이 사랑하는 여인과, 사랑하지 않는 여인을 대하는 남자들의 태도 차이겠지.조수아는 불쑥 주도권을 빼앗아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남자의 목울대를 조금씩 핥기 시작했다. “어때요, 대표님? 이런 거 좋아하시면 계속 이렇게 해드릴까요?”나긋나긋한 음성과 뜨거운 시선, 부드러운 손끝이 그의 뺨을 덧그리며 매혹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육문주는 겁도 없이 이리저리 유영하는 작은 손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가뒀다. 섹시한 목울대가 위로 올라갔다가 꿀렁이며 내려왔다.“꼭 이래야겠어?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면 안 돼?”조수아는 그의 귓가에
병원에 도착하자 조수아는 아직도 아버지가 응급처치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교도관으로 보이는 남자의 곁으로 걸어간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저희 아빠 어떻게 됐어요?”“의사분들께서 아직 최선을 다해 살리고 있는 중이십니다. 조병윤 씨가 팔목을 그으셨는데 피를 많이 흘리기도 했고, 심장 수술을 받으신지 얼마 안 된다고 해서 상황이 많이 복잡한가 봅니다.”조수아는 뒷걸음질 치다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교도관이 얼른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주며 걱정스레 말했다.“침착하세요, 조수아 씨
육천우는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확실하지는 않아. 됐어. 이제는 그만 놀릴게. 아직 아침을 먹지 않은 것을 알고 비서더러 네가 좋아하는 슈 크림빵이랑 치즈케이크를 사 오라고 했으니 얼른 먹어.”육천우는 허나연의 손을 잡고 식탁 앞에 왔다.그녀에게 만두 하나를 짚어주고 우유 한잔을 따라준 후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좀 처리할 서류가 있으니 혼자 먹고 있어.”허나연은 스스럼없이 만두를 입에 집어넣고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육 대표님은 모든 직원에게 이렇게 친절합니까? 외국에 있을 때도 아침을 사
차유라는 허나연의 사원증에 똑똑히 ‘대표 비서 허나연’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였다.업계의 모든 사람은 육천우에게는 불문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의 비서는 줄곧 남자였다.허나연을 만난 후 육천우는 정략결혼의 압박 때문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녀를 편애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오래된 습관을 버렸다.마음속으로 질투를 억누른 차유라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축하해요. 하지만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데 대표님의 비서는 전문적인 지식과 수양을 갖춰야 하는 직업이지 아이들의 소꿉장난 아니에요. 무용수인 나연 씨
이 문제를 이전에 두었더라면 허나연은 망설였을 것이지만 차유라의 등장으로 그녀의 마음에 큰 변화가 생겼다.차유라가 육천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 허나연은 그를 뺏길까 봐 일부러 그들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렸다.예전처럼 다른 사람과 육천우를 공유하기 싫었고 혼자만 그를 소유하고 싶었다.육천우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육천우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뜨겁지 않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여도 꼭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던 그녀였다.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늘어뜨린 허나연은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나마 조금은
그가 접근하자 허나연의 심장은 쿵쿵 뛰었고 그 하얀 얼굴도 점점 뜨거워졌다.어린 시절 단순했던 감정도 어느새 맛이 변해 버렸다.차유라가 육천우를 바라보던 눈빛을 생각하니 가슴이 시큰거렸다.그들은 지난 3년 동안 함께 일했다.육천우가 그녀와 연락이 줄어들었던 것도 옆에 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 허나연은 화가나 육천우를 발로 걷어찼다.“나를 건드리지 말고 유라 씨한테 가.”뾰로통한 허나연의 모습을 본 육천우는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아직도 질투하는 거야?”“내가 무슨 질투를 해. 우리 집이 식초 공장을 하는 것도
허나연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네, 알았어요. 하지만 의사 진료에 협조하겠다고 먼저 약속해 주세요.”이렇게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본 차 교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좋아. 너희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말을 듣고 수술을 받을게.”육천우는 농담조로 말했다.“저의 아내가 말 한마디로 스승님이 수술을 받으시게 했네요, 나연이의 능력을 새삼 새롭게 보게 되네요.”애정 어린 눈빛으로 허나연을 바라보던 육천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옆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서 있는 차유라를 본 차 교수는 입술을 살짝 치켜올렸다.“됐어
수표를 받아 쥔 차유라의 손가락은 새하얗게 변했고 가슴은 간간이 쿡쿡 찌르는듯한 통증이 전해졌다.차유라는 아버지 덕에 육천우 마음속의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 전에 그는 혼약이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진 차유라는 가련한 눈빛으로 육천우를 바라보았다.“천우야, 나연 씨랑 결혼 할 거야?”육천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허나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유라 씨의 뜻은 저랑 천우가 감정이 하나도 없는 정략결혼이기에 언젠가 헤어질 거라고 말하고 싶으신 거죠? 제 말 맞죠?”“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왜냐하면 외
허나연은 어릴 때부터 말싸움으로 육천우를 이긴 적이 없다.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을 한 그녀는 조수아의 품으로 달려들었다.“이모, 천우 오빠가 또 저를 괴롭혀요.”조수아는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이따가 천우에게 밥을 주지 말고 굶기자. 자신이 못생겼다는 것을 모르다니, 우리 나연이가 천우보다 백배는 예뻐, 제일 예뻐.”허나연은 육천우를 향하여 의기양양하게 웃었다.“네가 못생긴 거야.”육천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네, 네. 그렇게 나연이 응석을 항상 받아주세요, 앞으로 결혼한 후 말을 듣지 않는다고 저한테 고자
이 소식을 들은 육천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며칠 전 스승님과 함께 식사한 적이 있는데 왜 그때 이 일을 언급하지 않으셨지?”차유라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네가 알게 되면 BM 투자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하게 할까 봐 아버지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 아버지께서는 네가 그의 제일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길 바라고 있어.”육천우가 ZERO 그룹을 인수한 직후 유럽발 금융위기를 겪고 있을 때 금융 전문가인 차 교수의 도움 덕에 여러 투자 프로젝트에서 부활할 수 있었으므로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그를 존경하고 있
방금 누그러졌던 허나연은 다시 조롱을 받고 놀라서 육예람의 입을 틀어막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제발 그만 좀 말해. 네가 마음에 들었던 가방을 사줄게.”육예람은 웃으면서 허나연의 볼을 꼬집었다.“비밀 하나에 차 한 대와 가방 하나를 맞바꾸는 건 너무 실속 있는 거래야. 다음에 무엇을 뜯어낼지 고민해 볼 테니 반드시 꼭 나한테 미리 말해줘.”육천우는 다가가 육예람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꿈 깨!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나연이랑 할 말 있으니 자리 좀 비켜줘.”화가 난 육예람은 눈을 부릅뜨고 육천우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