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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 화

작가: 달코
조수아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거 빼고 다 들어줄 수 있어.”

“내가 필요한 건 이거 하나뿐인데?”

“문주 씨, 내가 불순한 목적이 있어서 당신한테 접근했다 쳐. 그래도 3년이나 당신 곁에서 그렇게 챙겨줬으면 나는 할 도리는 다 했다고 보는데, 아니야? 날 이렇게 놓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육문주는 고집스런 눈빛과 계속해서 열었다 닫혔다 하는 입술, 그리고 갸름한 턱라인을 보며 목울대를 꿀떡 움직였다.

단숨에 조수아를 안아 허벅지에 앉힌 그는 턱을 그녀의 어깨에 댄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떻게 날 챙겼는데. 자세히 한 번 얘기해 봐.”

귀 바로 밑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울림있는 목소리에 조수아는 두피가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자의 큰 손이 가만있지 못하고 그녀의 옷속으로 슬금슬금 들어왔다.

조수아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고 싶었으나, 육문주가 하도 세게 자신을 안고있는 탓에 급한 나머지 눈앞의 어깨를 콱 물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여태껏 받은 모든 억울함과 불만을 모두 실은 입질이었다.

조수아는 입에서 피비린내가 날 때까지 물었다가 입을 뗐다. 눈물이 맺힌 얼굴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려. 그러니까 나 벼랑 끝까지 몰지 마.”

육문주가 행동을 멈춘 틈을 타 그를 세게 밀어낸 조수아는 원망이 가득 담긴 얼굴로 차에서 내려 그대로 떠나갔다.

차로 돌아온 진영택은 휴대폰을 들고 제 어깨를 찍고 있던 육문주를 발견했다. 백미러를 통해 보니 그의 어깨에 피가 배어나온 치흔이 있는 게 보였다.

‘쯧, 대표님께서 또 조 비서님 성질을 건드리셨나 보네.’

진영택이 동정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연고 발라 드릴까요?”

“내가 그렇게 연약해 보여?”

“설마 그걸 증거로 남겨뒀다가 나중에 몰아서 조 비서님한테 따지려고 그러는 건 아니시죠?”

연달아 사진을 여러 장 찍은 육문주가 그제야 옷을 다시 매만지며 차갑게 대꾸했다.

“조한 그룹이랑 협업한 프로젝트, 누가 스탑 걸었어?”

고개를 숙인 진영택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대표님의 어머님께서요.”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사모님께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그래서…”

“진영택, 너 내 비서야, 아니면 우리 어머니 비서야.”

“대표님, 사모님께서 대표님이랑 조 비서님 관계를 아신 것 같습니다. 사모님께서 사람을 시켜서 조 비서님의 최근 3년간 모든 행적이랑, 그리고 조한 그룹과 육엔 그룹간의 모든 거래에 대해 조사를 시켰더라고요. 제가 보기에 사모님께서 이번에 안 좋은 일을 꾸미고 계신 것 같았어요.”

넥타이를 끌어내린 육문주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휴대폰을 꺼내 그의 어머니인 안혜원한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전화너머에서 중년 여성의 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한 그룹을 봐달라고 전화한 거라면 그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마. 절대 그만둘 생각 없으니까.”

육문주의 표정이 더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찌푸려졌다.

“제 사람입니다. 어머니께서 조수아를 건드릴 권력이 없어요.”

안혜원이 차게 웃으며 답했다.

“네 사람이라니까 내가 건드린 거야. 그년의 엄마라는 작자가 예전에 네 아버지한테 꼬리쳤던 거 알아 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남자 침대에 기를 쓰고 올라간 년이 낳은 새끼가 뭘 얼마나 대단한 교육을 받았겠어!”

육문주는 그게 뭐 어쨌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건 조수아의 어머니 얘기이지, 조수아랑은 상관없는 얘기잖아요.”

“육문주, 우리 가문에 절대 그런 여자를 들일 수 없으니까 알아서 해! 너 걔랑 같이 있으면 절대 행복할 수 없어.”

“어머니는 아버지랑 결혼해서 뭐 행복했나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몇십 년이나 다투고 이혼을 반복하면서, 저한테 혼인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줬잖아요. 누나도 서른이 넘었는데 사랑을 믿지 못해 아직까지 혼자이고요. 그런데도 아직까지 반성은커녕 저희를 벼랑끝까지 내몰아야 직성이 풀리시겠어요?”

마지막에 가서 육문주의 음성이 떨려서 나왔다. 어렸을 적 그의 기억속에는 온통 부모님이 큰소리로 다투던 화면들로만 가득했다. 그때마다 그의 누나는 그를 안고 어두컴컴한 방에 숨어 함께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아마 할머니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육문주와 그의 누나는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등받이에 몸을 묻은 그는 손끝으로 태양혈을 가볍게 문질렀다. 어렸을 때의 기억만 떠올리면 찌르는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안혜원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게 나 혼자만의 탓이야? 네 아버지가 밖에서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내가 네 아버지랑 싸웠겠니? 아무튼 조수아 그년은 내가 반드시 막아설 테니까 알아서 처신해. 애인도 안 되니까 헛된 생각 말고. 알았어?”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은 안혜원에, 육문주는 툭툭 튀는 미간을 문지르다 담배갑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등받이에 깊숙이 묻은 몸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며칠 후, 병실에서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던 조수아는 갑자기 병원 산부인과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지난번 유산한 뒤로 진행했던 전신 건강검진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고 오겠다며 복도로 나온 그녀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조수아 씨, 지난번에 조수아 씨께서 진행하신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는데요. 그게…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좋기는 직접 들러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조수아는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인지하고 전화를 끊은 뒤 아버지한테 간단하게 몇 마디 당부한 뒤 핑계를 대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곧장 산부인과 진료실로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산부인과에 도착해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진료실로 들어간 조수아는 그녀의 건강검진 보고서를 든 의사와 마주보고 앉았다. 의사선생님이 무거운 얼굴로 물어왔다.

“혹시 남자친구분과 관계를 가지신 후 사후피임약을 자주 드셨었나요?”

조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문주는 시시때때로 발정했는데 어떨 때 콘돔을 살 겨를도 없이 달려드는 탓에, 체외사정을 했더라도 자주 사후피임약을 먹어야만 했다.

지난번 임신했을 때는 어느날, 유독 육문주가 끝도 없이 그녀를 괴롭히다가 몇 번은 체내사정을 했던 걸로 기억했다.

결국 끝에 가서 신체부담을 이기지 못한 조수아는 고열로 앓아누워 약을 챙겨먹지 못했고, 그렇게 덜컥 임신이 돼 버렸다.

의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환자분께서 지금 자궁 후방전위와 자궁 내벽이 많이 얇아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 거기에다 환자분께서 장기적으로 사후피임약을 복용했다 보니 난소노화 증상이 살짝 있네요. 원래는 임신하기 엄청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하셨는데, 이번에 유산을 하시고 과다 출혈까지 하게 되면서 환자분 몸에 굉장한 무리가 가해졌어요. 지금 건강검진 결과에 따르면 환자분께서 다시 임신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적은 걸로 보여집니다. 아마 20프로도 간당한 것 같네요.”

마음의 준비없이 듣게 된 소식에 조수아는 심장이 칼로 도려내진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턱하니 막혔다. 옷자락을 거머쥔 주먹에 힘이 가득 실렸다.

조수아의 친척 중에 임신 확률이 40프로도 안 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실제로 결혼생활이 5년을 넘어가는데도 그 부부 사이에는 아직까지도 자식 하나 없었다.

그렇다는 건 임신 확률 20프로도 안 되는 자신이 한평생 엄마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수아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의사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일단은 한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드셔보실 수 있으시긴 한데, 임신 가능성이 오를 수 있을지는 장담 드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앞으로 절대 사후피임약을 드시면 안 되세요. 여자란 엄마가 될 권리를 잃어버리게 되면 한평생을 후회하게 돼요. 만약 환자분 남자친구분께서 정말 환자분을 사랑하시면 충분히 다른 피임방법을 찾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조수아의 얼굴에 비참한 미소가 걸렸다.

육문주가 만약 정말로 자신을 사랑했다면, 그녀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두지도 않았겠지.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조수아는 건강검진 보고서를 들고 비틀비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사이에 다음 환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들렸다. 조수아는 상대방의 얼굴도 볼 겨를이 없이 몸을 비껴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가던 걸음을 멈췄다.

“선생님, 저 임신 준비를 위한 검사 진행하려고 그러는데요. 결혼하고 바로 애기를 가질 거라서요.”

조수아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송미진의 얼굴이 시선에 들어왔다.

‘나랑은 결혼도 싫다, 아이 가지기도 싫다면서 사후피임약이나 먹게 하고. 그것 때문에 이제는 임신조차 하기 힘들어진 몸으로 만들어 놓은 주제에, 곧바로 태세전환하여 송미진이랑은 결혼까지 결심하고 아이까지 가지려고 한단 말이야?’

비교가 없으면 상처도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조수아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진료실 문을 나서다가 얼마 못 가 익숙한 품에 안겨버렸다. 머리 위에서 육문주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임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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