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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7 화

힘겹게 뜬 시야 안으로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조수아는 구명줄을 잡은 사람처럼 남자의 옷깃을 꽉 붙잡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저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세요.”

그녀는 육문주에게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불쌍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싫었다. 다른 건 다 싫고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연성빈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나가겠다는 거야? 안 되겠다. 일단은 의사선생님한테 가자.”

“안 돼요, 선배! 저 아까 현혈하고 나와서 잠시 어지럼증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저 집에 데려다 주세요. 푹 쉬고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연성빈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작게 위로했다.

“알겠어. 무서워하지 마. 지금 당장 여기에서 데리고 나가줄게.”

육문주가 볼일을 마치고 병원문을 나섰을 땐 마침 연성빈이 조수아를 안고 차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에 가득한 걱정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주먹을 꽉 그러쥔 육문주는 살벌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노려봤다.

조수아는 이튿날 오전이 돼서야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어제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피까지 뽑았더니 위가 텅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침실에서 나와 거실로 들어서는데 맛있는 냄새가 주방에서 풍겨왔다. 의아한 얼굴로 주방을 바라보는데 커다란 인영이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손에 죽그릇을 들고 귀여운 핑크돼지가 그려진 앞치마를 한 연성빈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너 어제 피 뽑았다면서. 그럴땐 돼지간으로 만든 죽을 먹으면 좋다고 해서 한 번 해봤거든? 빨리 와서 먹어봐.”

조수아는 미안한 얼굴로 작게 웃었다.

“미안해요, 선배. 어제 선배한테 신세진 걸로도 모자라서 요리까지 하고. 나중에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연성빈과 조수아는 R대학교 법학과 동문생으로 연성빈은 그녀보다 2학번 더 위였다. 두 사람은 모두 법학계 최고 권위자인 백태웅의 제자였는데, 3년전 석사 졸업한 연성빈이 외국에 나가 발전하고 조수아가 육문주의 비서로 취직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연성빈이 웃으며 답했다.

“좋지. 스승님도 너 보고싶다 그러더라. 나중에 너 건강해지면 셋이서 같이 밥 먹자.”

멋적은 듯 머리를 넘긴 조수아가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이 저한테 진짜 잘해주셨는데 제가 스승님의 길을 걷지 않아서 너무 미안해요. 그래서 사실 스승님 얼굴 보기도 부끄러워요.”

조수아는 백태웅이 제일 아끼는 제자였다. 그녀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던 백태웅은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제자가 법정계에 발을 들이게 되면 분명 큰 파란을 일으킬 것이라며 호언장담하고 다녔었다.

그러다 조수아가 졸업하고 육문주와 함께 있기 위하여 과감히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하조 비서가 되기로 했을 때, 백태웅은 꽤나 오랜 시간을 그녀 대신 안타까워 했었다.

연성빈은 죽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은 뒤 신사답게 의자를 빼내주며 웃었다.

“사람마다 다 자신만의 생각이 있는데 뭐. 스승님께서 한 번도 너 원망한 적 없었어.”

조수아는 마음속이 시큰해나는 것을 느꼈다.

자리에 앉으며 조수아는 연성빈한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나저나 선배 북유럽에서 벌써 골든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하던데. 연봉도 벌써 어마어마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온 거예요?”

눈밑에 잠시 반짝하고 떠오른 빛이 곧장 사라졌다. 연성빈은 다정한 음성으로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거기 밥이 내 입에 안 맞더라고. 그래서 돌아왔어.”

숟가락을 건네던 연성빈이 무심한 듯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너 그분이랑은 어때?”

조수아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헤어졌어요.”

연성빈의 뜨거운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몇 초간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걱정 마. 그 사람이 너 못 괴롭히게 내가 지켜줄게.”

손을 뻗은 연성빈이 다정하게 조수아의 머리에 얹고 위로하듯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육문주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 연성빈은 모르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잠에 든 조수아는 얼마나 서글픈지 한참이나 울먹이며 훌쩍거렸었다.

조수아의 머리에 얹은 손을 떼어내기도 전에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띠리릭 열리며 육문주가 문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늘한 눈매가 조수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손으로 옮겨가 고정되었다.

두 사람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육문주가 기다란 다리를 성큼거리며 걸어와 조수아의 손에서 숟가락을 뺏어 내려놨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은 채 침실로 다급하게 걸어가더니 발로 쿵하고 문을 거세게 닫았다. 곧바로 철컥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조수아가 무슨 일인지 상황파악을 마쳤을 땐 이미 육문주의 몸에 깔려 침대에 눕혀진 뒤였다.

문밖에서 연성빈이 쾅쾅대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으로 한기를 내뿜고 있는 육문주 때문에 조수아는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았다.

“당신 미쳤어?”

핏발이 선 육문주가 갈라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보다 더 미칠 수도 있어.”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숙여 눈앞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육문주의 뇌리속에는 지금 온통 조수아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던 낯선 남자의 눈빛으로 가득했다.

그걸 생각하니 육문주는 도무지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단연코 그는 어떤 여자 때문에 이 정도로 이성을 잃은 적이 없었다.

미친 듯이 조수아의 입술을 씹어대던 육문주는 새하얀 목을 타고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조수아는 한쪽으로 발버둥치며 한쪽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 나쁜놈아! 우린 이제 끝났어. 그러니까 더 이상 당신을 경멸하게 만들지 마!”

육문주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 미친 듯이 키스를 이어갔다. 새하얀 살결을 한입 가득 깨물은 그가 입을 떼며 물었다.

“그새 벌써 새 남자 찾았어?”

“이미 헤어진 마당에 내가 누구랑 같이 있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 그럼 내가 저 사람의 앞길을 다 막아도 괜찮은 거지?”

“그러기만 해 봐!”

“내 여자한테 감히 손 댔는데 내가 못할 것 같아?”

“그냥 나랑 같은 학교를 다녔던 선배일 뿐이야.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선배한테 해코지 하지 마.”

조수아는 육문주가 본인한테 불리한 사람한테는 언제나 손속에 여지를 두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연성빈은 이제 귀국한지 얼마 안 돼서 제대로 터를 못 잡았을 게 분명했다. 육문주에게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의 앞길을 망쳐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잔뜩 긴장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육문주는 코웃음을 쳤다.

“나랑 같이 돌아가. 안 그러면 저 사람 무사할 거란 보장 못해.”

그때 침실문이 외력에 의해 쾅하고 열리며 연성빈이 안으로 튀어들어왔다. 그리고 조수아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육문주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우당탕탕!

방안에 두 남자가 서로 뒤엉키는 소리가 들려오고 조수아의 무력한 비명소리가 섞여들었다.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에야 침실이 평정을 되찾았다.

옷이 잔뜩 흐트러진 채 피를 묻힌 연성빈이 안에서 걸어나오며 바닥에 주저앉은 조수아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수아야, 나 절대 네가 다른 사람한테 굴복해야 되는 짐짝이 안 될 거야. 일어나서 밥 먹어.”

손을 뻗은 연성빈이 아직까지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조수아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를 부축해 식탁 앞에 앉혔다.

조수아가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그를 마주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선배.”

“미안해할 필요 없어. 우린 동문 선후배잖아. 당연히 너를 보호해야지. 죽이 식었네. 가서 덥혀올 테니가 잠깐만 기다려.”

죽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는 연성빈의 뒤로 육문주가 안방에서 걸어나왔다. 연성빈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얼굴에 멍을 달고 있었다. 입술을 훔치던 그가 흐린 눈빛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랑 지금 같이 가. 아니면 여기에 남아서 죽이나 먹든지. 네가 알아서 선택해.”

조수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우린 끝났어. 당신이랑 안 돌아갈 거야.”

“이게 네 선택이라 이거지? 그래.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마!”

육문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머니에 있던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 상대가 송미진임을 확인한 그는 짜증스레 전화를 받았다.

“문주 오빠, 탕비실에 있던 CCTV 영상을 조 비서님이 지웠대요. 우리 부모님이 그걸 알고는 조 비서님을 고의상해죄로 고소한다고 지금 난리예요. 그러니까 빨리 와서 우리 부모님 좀 말려줘요.”

휴대폰을 귓가에 댄 채 육문주는 조수아를 감정없이 내려다보며 망설임없이 말했다.

“그냥 감옥 가게 냅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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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novel comment avatar
큰별
돼지 간으로 죽… 중국사람 따라가기 힘드네요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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