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을 쥔 육문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그 순간 쿡하고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송미진이 자살시도를 했을 때 조수아가 생리통 때문에 여러번이나 전화한 걸 처음에는 받았다가 나중에는 짜증이 나서 그냥 끊어버렸던 게 생각이 났다. 설마 그것 때문에 조수아가 헤어지자고 한 건 아니겠지? 눈매를 드리운 육문주는 송학진과 허연후가 그 쓰레기 남편 흉을 보는 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가 손가락을 뜨겁게 하는데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온밤을 육문주는 마음이 뒤숭숭했다.보통 이맘때쯤 되면 조수아가 걱정스
육문주의 키스는 언제나 뿌리침을 불허할 정도로 강압적이었다. 조수아를 테이블로 밀고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은 그는 다른 한 손으로 허리를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향긋한 몸이 육문주의 모든 신경줄을 예민하게 자극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갇힌 맹수가 나오고 싶다면서 울타리에 쉴 새없이 몸을 부딪쳤다.조수아와 함께 한 시간 동안 육문주는 잠자리 쪽으로 아주 만족스러웠었다. 그가 얼마나 원하든 조수아는 힘들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수요에 다 맞춰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조수아는 뻣뻣하다 못해
조수아는 민첩하게 옆으로 몸을 비켜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 조금이 그녀의 발등을 덮치고 말았다. 발등이 얼얼해지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헛숨이 들이켜졌다. 고개를 들어 송미진에게 따지려던 조수아는 등 뒤에 있는 유리 선반을 향해 몸이 기우뚱거리고 있는 송미진을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그녀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송미진은 그것을 뿌리치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와장창!깨진 유리에 팔뚝이 그인 송미진이 피를 주르륵 흘렸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선혈을 뒤로하고 육문주의 싸늘한 음성이 날아왔다. “조수아, 이게 뭐하는 짓이
육문주는 잠시 의문이 담긴 눈빛을 했다가 차갑게 답했다.“목숨 안 아까우면 직접 실험해 보든지.”조수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왜 못해봤을 거라 생각하는데? 만일 내가 얼마 전에 방금 2000CC의 피를 흘렸다고 하면, 그래도 나더러 헌혈하라고 강요할 거야?”“조수아, 억지부리지 마. 생리를 해봤자 고작 60CC의 피를 잃는 게 다야. 핑계를 대도 말이 되는 핑계를 대야지.”조수아는 쓴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힌트를 줬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에 한숨만 나왔다. 만약 육문주가 자신
힘겹게 뜬 시야 안으로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조수아는 구명줄을 잡은 사람처럼 남자의 옷깃을 꽉 붙잡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선배, 저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세요.”그녀는 육문주에게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불쌍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싫었다. 다른 건 다 싫고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연성빈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나가겠다는 거야? 안 되겠다. 일단은 의사선생님한테 가자.”“안 돼요, 선배! 저 아까 현혈하고 나와서 잠시 어지럼증 때문에 그
송미진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조수아는 그녀의 말을 모두 듣게 되었다. 육문주의 대답은 한순간에 그녀의 7년이나 이어온 감정을 엉망으로 짓밟았다. “나 이 비서한테 그 영상을 복제해달라고 했지 삭제하라고 한 적 없어.”육문주는 표정 변화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증언이랑 물증이 완벽한데 그래도 변명할 생각이야?”변명이라니, 그건 육문주가 자신을 믿어줄 가능성이 있을 때나 의미 있는 단어였다. 그리고 무릇 송미진이 연관되어 있는 일이라면 육문주는 무조건 송미진의 편이었다.조수아는 입술을 깨물며 침착함을 가장했다.“그럼 경찰에 신
“방금 뭐라고 그러셨어요? 할머니가 저를 문주 씨 옆에 붙여둔 거라고요?”“당연하지. 아니면 육 대표님이 정말 백마 탄 왕자처럼 쨔잔하고 나타나서 널 구해준 줄 알았어? 생각해 봐. 육 대표님 같은 다망하신 분이 어떻게 난데없이 그렇게 구석진 곳에 갔겠어. 나랑 네 오빠가 미리 함정을 파서 육 대표님을 그곳으로 이끌지 않았다면 네가 3년이나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육 대표님한테 시집가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는 게 네 주제에 가당키나 해? 너처럼 낯 부끄러운 줄 모르는 엄마를 둔 사람을 B시에
조수아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그거 빼고 다 들어줄 수 있어.”“내가 필요한 건 이거 하나뿐인데?”“문주 씨, 내가 불순한 목적이 있어서 당신한테 접근했다 쳐. 그래도 3년이나 당신 곁에서 그렇게 챙겨줬으면 나는 할 도리는 다 했다고 보는데, 아니야? 날 이렇게 놓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육문주는 고집스런 눈빛과 계속해서 열었다 닫혔다 하는 입술, 그리고 갸름한 턱라인을 보며 목울대를 꿀떡 움직였다. 단숨에 조수아를 안아 허벅지에 앉힌 그는 턱을 그녀의 어깨에 댄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어떻
윤상후는 몸을 앞으로 숙여 곽서연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비록 박서준을 등지고 있었지만, 윤상후의 입술이 곽서연의 입술에 맞닿은 것을 본 박서준은 마치 마른벼락이 온몸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줄곧 침착하게 앉아있던 박서준은 즉시 일어나 어두운 얼굴로 그들을 향해 걸어가더니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박서준의 목소리에 윤상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가셔지지 않은 뜨거운 눈빛을 머금은 채 박서준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둘째 삼촌, 죄송해요. 방금 참지 못하고 서연이한테 입을 맞췄어요.
이제 다시는 박서준의 옆에 갈 수 없겠다고 생각한 곽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이때 윤상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고 곽서연은 즉시 감정을 추스르고 전화를 받았다.“선배.”“서연아, 일어났어? 내가 부근에 한식집을 찾아놨어. 너 한식 먹고 싶다고 했잖아. 같이 가자.”곽서연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내려갈게요.”30분 뒤에 일 층으로 내려온 곽서연의 눈에는 기숙사 입구에 서 있는 윤상후가 들어왔다. 그의 품에는 곽서연이 좋아하는 곰돌이 인형이 안겨있었다.곽서연은 즉시 웃으며
박서준은 즉시 걱정스럽게 물었다.“갑자기 배가 왜 아파?”심은하는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생리통이야. 매번 이래.”심은하는 아파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이를 본 박서준은 즉시 분부했다.“가까운 병원으로 가주세요.”운전기사는 곧바로 유턴해 가장 가까운 병원을 향해 질주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심은하는 뒷자리에 누운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까지 떨고 있었다.박서준은 조용히 외쳤다.“심은하.”심은하는 힘겹게 눈을 뜨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서준아, 나 못 걸을 거 같으니까 휠체어
곽서연은 천우처럼 항상 박서준에게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곤 했다.곽서연이 마음속으로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 박서준은 예전처럼 가까이 지내면 곽서연이 자신한테 더 깊이 빠져들 거로 생각하고 그녀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래야만 죄책감이 덜할 것 같았다.그리고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심은하의 제안을 받아들었고 곽서연이 상처받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접는 데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다.그런데 곽서연이 윤상후와 사귀는 걸 보자 마음이 아팠다.‘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
한시라도 빨리 박서준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곽서연은 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곽서연은 자신이 꾸민 모든 일이 들킬까 걱정돼 감히 박서준을 돌아보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서 박서준을 등지고 한참 동안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돌려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무슨 일 있어요?”박서준은 곽서연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피하는 곽서연을 빤히 보며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윤상후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사귀는 거야 아니면 날 피하기 위해서야?”“삼촌은 내가 그렇게 감정을 마음대로 갖고 노는 사람으로 보이세
“곽 씨 집안과 비교하면 우리 집은 확실히 평범해요. 어머니는 그냥 학교 교사이고 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함께 자랐어요. 하지만 꼭 노력해서 서연이에게는 좋은 생활환경을 마련해 줄 거예요.”곽명원은 이상한 듯 물었다.“그럼 아버지는? 아버지는 연락 없는 거야?”윤상후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어릴 때부터 본 적이 없어요. 어머니가 혼전임신이라 혼자서 저를 키우셨어요.”윤상후의 말에 곽명원은 마음이 좀 언짢았다. 윤상후의 가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가정은 아이의 마음에 그늘을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곽명원의 가
박서준은 왠지 모르게 가슴에 큰 바위가 들어앉은 것처럼 숨이 막혔고, 지금 당장 달려나가 윤상후의 손에서 곽서연을 끌어당기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박서준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미친것 같아 속으로 꾸짖었다.‘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날 잊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잘 된 거지. 원했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바로 그때 곽서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작은 삼촌, 둘째 삼촌, 여긴 윤상후라고 해요. 제 남자친구예요.”곽서연의 입에서 ‘남자친구’라는 말을 듣자 박서준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져 왔다. 그는 자기도
곽서연의 말에 윤상후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여자가 드디어 그의 여자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한다.윤상후는 어릴 적 바이올린 콩쿠르에 참가한 날 구석에 숨어서 울고 있는 그에게 사탕을 쥐여주던 여자아이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날 여자아이는 작은 손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했다.“오빠, 이 사탕 먹으면 슬프지 않을 거예요. 아주 신통한데 한번 먹어볼래요?”여자아이의 큰 눈이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자 윤상후의 부서진 마음은 한순간에 풀리는 것 같았고 순간 암담했던 생활에 한 줄기 햇빛이 비
곽명원의 말에 곽서연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윤상후는 그냥 사귀는 척하는 사람일 뿐이었는데 박서준은 그걸 진짜라고 오해하고 있었다.‘삼촌한테 분명히 윤상후는 남자친구가 아니라고 했는데, 날 얼마나 밀어내고 싶으면 명원 삼촌한테 이렇게 말한 거야?’‘남자친구를 가족들한테 소개해 준다면 아마 삼촌에 대한 내 마음은 누구도 모르겠지. 삼촌이 원하는 게 어쩌면 이런 거 일지도 몰라.”여기까지 생각한 곽서연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남자친구가 시간 있는지 물어볼게요. 된다면 함께 나갈게요.”곽서연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