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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화

작가: 달코
술잔을 쥔 육문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그 순간 쿡하고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송미진이 자살시도를 했을 때 조수아가 생리통 때문에 여러번이나 전화한 걸 처음에는 받았다가 나중에는 짜증이 나서 그냥 끊어버렸던 게 생각이 났다. 설마 그것 때문에 조수아가 헤어지자고 한 건 아니겠지?

눈매를 드리운 육문주는 송학진과 허연후가 그 쓰레기 남편 흉을 보는 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가 손가락을 뜨겁게 하는데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온밤을 육문주는 마음이 뒤숭숭했다.

보통 이맘때쯤 되면 조수아가 걱정스레 전화를 걸어왔었는데, 지금은 새벽 한 시가 됐는데도 그녀한테서 문자 하나 와있지 않았다.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든 그는 담배를 비벼끈 뒤 휴대폰을 챙기고 룸을 나왔다.

술집을 나서는데 밖에서 마침 생화가 든 바구니를 들고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가 보였다. 아이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여자친구분께 꽃선물 어때요?”

탐스럽게 열린 샴페인 로즈를 보며 육문주는 순간 방금전에 송학진이 ‘잘 달래주면 되지’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거 다 포장해 주세요.”

환하게 웃은 여자아이는 꽃을 곱게 포장하여 건네며 끝으로 축복의 말도 몇 마디 보탰다.

내내 가라앉아 있던 육문주의 얼굴이 드디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지갑에서 5만원 권 여러장을 꺼내 아이에게 건넨 뒤 집에 돌아와 보니 그를 맞이한 건 익숙한 작은 인영이 아니라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는 아주머니였다.

“대표님 오셨네요. 해장국 끓여왔는데 한 그릇 드릴까요?”

미간을 찡그린 육문주가 윗층을 노려보며 말했다.

“조수아는 자는 겁니까?”

아주머니는 멈칫하더니 답했다.

“조수아 씨는 갔습니다. 가기 전에 이거 전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편지봉투를 건네받고 열자 종이에 조수아가 적은 옷 리스트가 적혀있는 게 보였다. 단번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육문주는 편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당장에 휴대폰을 꺼내 조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왜.”

마디가 분명한 큰 손이 휴대폰을 으스러트릴 듯 꽉 쥐었다.

“너 진심이야?”

“응.”

“너 후회하지 마.”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은 육문주는 그대로 윗층으로 향했다. 그러자 뒤에서 아주머니가 경직되어 묻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이 꽃은…”

“버리세요!”

그렇게 한 마디를 툭 던지고 안방으로 들어서는데 사모예드 한 마리가 목에 노란색 부적을 걸고 멀뚱멀뚱 서있는 게 보였다.

조수아의 SNS를 봐서 육문주는 그 부적이 조수아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절에 가서 직접 빌어온 부적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 네가 제일 사랑하는 게 이 개란 말이지?’

이를 바득 간 육문주는 밀크의 목에서 부적을 홱하고 떼어내 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밀크가 그를 향해 크게 짖기 시작했다. 육문주는 개를 노려보며 맞받아쳤다.

“뭐가 좋다고 짖어! 네 엄마 널 버리고 갔거든!”

밀크를 밖으로 내쫓은 육문주는 쾅하고 방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이튿날 아침, 습관적으로 팔을 뻗어 옆을 더듬던 육문주는 아무것도 만져지는 게 없자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조수아가 어제 떠나고 없다는 것을 떠올린 그는 문득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의 두 사람은 아침마다 작게 스킨십을 하거나 자주 관계를 가졌었다. 그럴 때마다 제 밑에서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는 조수아를 보며 육문주는 형언 못할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그런 감각이 마치 독약처럼 그의 골수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육문주는 지금 조수아를 당장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고는 했다.

그러나 그녀가 한 마디도 없이 집을 나갔다는 것을 떠올리기만 하면 육문주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찾아가서 빌기를 바라나 본데, 어림도 없지.

옷을 갈아입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진영택이 거실에 서서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게 보였다. 그에게 잠깐 시선을 줬다가 돌린 육문주가 입을 열었다.

“바빠 보이네.”

진영택은 타자하던 손을 멈추더니 걱정스레 물어왔다.

“대표님, 조 비서님 많이 아프신가요? 병원에 가 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육문주가 무슨 소리냐는듯 물었다.

“조 비서가 그래?”

“네. 방금 전에 저한테 일주일 휴가를 신청하더라고요. 그래서 대표님한테 직접 얘기하면 되지 왜 저한테 얘기한 건지 의아해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어?”

“네. 조 비서님한테 집에서 푹 쉬시라고 하세요. 일은 제가 알아서 다 안배하겠습니다.”

진영택은 일처리를 잘한다는 칭찬이 들려오길 기대했지만 돌아온 건 대표님의 싸늘한 음성이었다.

“분기별 인센티브 이번에 없다.”

수술로 너무 많은 피를 흘린 조수아는 일주일이나 휴식한 뒤에야 겨우 출근할 수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동료 직원들이 지난 일주일이 얼마나 금찍했는지, 매일 밤마다 야근도 계속 해야 했었다며 한 마디씩 보탰다.

그리고 육문주의 남비서 진영택이 조수아한테 일주일 휴가를 줬다고 몇천만이나 되는 분기별 인센티브를 깎였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그 돈이 진영택이 장가 가기 위해 열심히 모으고 있는 밑천이라는 걸 아는 조수아는 간단히 업무를 어레인지 한 뒤 대표님 사무실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육문주가 올블랙 정장을 입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에 곧게 뻗은 콧날,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눈동자에 여유로움이 묻어나며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들어온 자에게 잠시 시선을 준 그는 다시 담담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주시했다.

다시 남자를 마주한 상황에서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7년 전에도 육문주의 이러한 매혹적인 분위기에 홀려 그가 만남을 제기해왔을 때 서슴없이 받아들였던 조수아였다.

그러나 자신의 일방적인 구애였음을 다시금 떠올린 그녀는 애써 제 감정을 숨기며 사무적인 어투로 말문을 뗐다.

“대표님, 회사 내 인사팀 휴가 프로세스 규칙에 따르면 10일 이내의 휴가는 직속 상사의 허가만 있으면 되는 걸로 압니다. 진영택 팀장님은 제 직속 상사로 제 휴가 신청을 승인한 게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요? 왜 팀장님 인센티브를 깎으신 겁니까?”

한쪽 눈썹을 들어올린 육문주가 그녀의 생각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 왜일 것 같아?”

말끝이 살짝 올라가고 약간의 조롱이 섞인 말투였다.

조수아는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제가 헤어지자고 해서 불쾌해서 그런 건가요? 저한테 불만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 괜히 무고한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마시고.”

육문주는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무고한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게 싫으면 집으로 얌전히 다시 들어와. 그럼 지금까지 일은 없었던 걸로 하지.”

조수아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씁쓸함이 떠올랐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사직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육문주의 앞으로 밀었다.

“대표님, 저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이렇게 사직을 신청하는 바입니다. 여기 제 사직서니까 빨리 새로 사람을 구해서 인수인계할 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검은 책상 위에 대조적인 하얀색의 사직서를 보며 육문주는 주먹을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칠흑같은 눈동자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눈앞의 여자를 노려봤다.

“내가 허락 안 한다면?”

조수아의 입꼬리가 보기 좋은 호도를 그렸다.

“대표님께서 애초에 서로 질리면 헤어지자고 그러셨잖아요. 이렇게 저 안 놔주시면 대표님께서 저한테 미련이 있는 걸로 오해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육문주는 조수아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턱을 단번에 붙잡았다. 엄지로 고운 피부를 연신 훑던 남자의 입에서 드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련이 남은 게 아니라 아직 다 즐기지 못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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