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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편
나쁜 남편
Author: 달코

0001 화

Author: 달코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02-29 21:05:29
격렬한 정사가 끝나고, 조수아는 옅게 배어나온 땀을 한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육문주는 그런 조수아를 품에 안은 채 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오관을 덧그렸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깊고 매혹적인 눈매에 전에 없는 다정함을 담고 있었다.

조수아는 몸이 혹사될대로 되어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 순간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분 때문에 마음만은 충만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욕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육문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본 조수아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육문주의 팔을 끌어안고 있는 손에 힘이 조금 더 실렸다. 고개를 든 그녀가 작게 물었다.

“안 받으면 안 돼?”

전화를 걸어온 송미진은 육문주가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으로, 귀국한지 한 달도 안 돼 벌써 여러 번이나 자살소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살소동들이 사실은 송미진이 일부러 난리를 피운 거라는 걸 조수아는 모르지 않았다.

육문주는 그녀의 기분은 아랑곳 않은 채 제 팔에 감긴 손을 밀어내며 기다렸다는 듯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마치 방금 전 서로 온도를 나눴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송미진이 전화에 대고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육문주의 눈동자 깊은 곳에 밀물이 세차게 밀려들어 오며 창밖의 밤보다 더 어두운 눈빛으로 변해갔다.

전화가 끊긴 후 육문주는 빠르게 옷을 챙겨입으며 입을 열었다.

“미진이가 또 자살하려나 봐. 그쪽에 가봐야겠어.”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조수아는 군데군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키스마크를 달고 뜨거운 눈길로 남자를 바라봤다.

“오늘 내 생일이야. 나랑 같이 있기로 했으면서. 나 당신한테 중요한 얘기 할 거 있어.”

이미 반듯하게 옷을 갖춰입은 육문주가 예리한 눈썹뼈 아래에 위치한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언제부터 그렇게 일의 중요순서를 모르고 이기적이게 된 거야. 송미진이 언제든지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잖아.”

조수아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방문이 굳게 닫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수아는 베개 밑에 감춰둔 정교한 케이스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안에 든 두 개의 반지를 고개숙여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차츰 젖어갔다.

3년 전, 조수아가 질 나쁜 사람한테 몰려 골목길에서 오도가도 못할 때 육문주가 갑자기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었고, 이로 인해 허벅지까지 다치는 일이 있었다. 그때 조수아가 먼저 나서서 그의 병간호를 해주겠다 요청했었다.

그렇게 간간이 만남을 이어오다 어느날 술을 마신 뒤로 두 사람은 잠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때 육문주가 이렇게 제안했었다. 나와 만나보지 않겠냐고. 전제는 자신이 결혼생활을 그녀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수아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당연히 오케이했다. 그 시점에서 그녀는 이미 육문주를 4년이나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조수아는 낮에 육문주의 예쁘고 능력있는 여비서로, 저녁에는 그의 말 잘 듣고 착한 잠자리 파트너가 되었다.

조수아는 순진하게도 육문주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로만 알았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그저 집안 영향을 받아 그런 걸로 알았다.

그래서 조수아는 3년이 지난 지금, 하루를 꼬박 들여 프로포즈를 준비했고 오늘 원래 육문주한테 고백해서 그가 마음속 응어리를 풀 수 있게 도와주려 했다.

그러나 송미진의 전화는 그녀를 완전히 착각속에서 빠져나오게 만들었다.

육문주는 사실 결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저 결혼하고 싶은 대상이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수아는 쓰게 웃으며 반지를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그리고 손수 꾸민 베란다 장식도 쓸쓸히 다 치운 뒤 혼자 차를 몰고 나갔다.

그런데 차를 타고 나간지 얼마 안 돼 그녀의 아랫배 쪽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뜨거운 온기가 허벅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온다 싶더니, 고개를 숙이자 하얀색 가죽시트가 시뻘건 피로 잔뜩 물들어 버렸다.

예감이 좋지 못한 조수아는 그 자리에서 당장 육문주에게 전화를 걸엇다.

“문주 씨, 나 지금 배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 데리러 와주면 안 돼?”

짜증 섞인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왔다.

“조수아, 떼를 쓰고 싶어도 시간과 때를 가려서 해야지!”

가죽시트에 점점 더 퍼지기 시작하는 피를 보며 조수아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나 정말로 배가 지금 너무 아파. 그리고 지금…”

피도 엄청 많이 흘리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남자의 매정한 말이 돌아왔다.

“미진이 지금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고, 알아? 그걸 듣고도 투정 부리고 싶어?”

조수아는 넋이 나갔다가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렸다. 무력한 웃음이 입가에 지어졌다.

“당신 지금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해?”

“그럼 아니야?”

육문주의 싸늘한 반응이 조수아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입술을 힘껏 깨문 그녀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실으며 온힘을 다해 욕했다.

“육문주, 이 개자식아!”

전화를 끊은 조수아는 식은땀에 흠뻑 젖어 통증을 겨우 감내하고 있었다. 구급전화를 누르려던 손가락에 힘이 풀리며 툭 떨궈졌다. 마지막으로 눈앞이 깜깜해짐과 동시에 조수아는 정신을 잃고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조수아는 이미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친구 한지혜가 조수아가 깨어난 걸 보고 가슴 아픈 얼굴로 일어나 다가왔다.

“수아야, 괜찮아? 아직도 많이 아파?”

조수아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나 어떻게 된 거야?”

잠깐 머뭇거리던 한지혜가 조심스레 말했다.

“너 임신했었어. 의사가 말하길 너 자궁 내벽이 원래도 얇았던 데다가 관계를 가질 때 상대방이 너무 거칠게 해서 충격을 못 이기고 유산이 됐대. 그리고 과다 출혈도 동반 되고.”

조수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임신을 했는데 아이가 없어졌다는 생각만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와 육문주의 아이였다.

비록 육문주와는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조수아의 첫 아이였다. 손가락을 말아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그녀는 소리없이 눈물을 떨궜다.

친구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한지혜는 몸을 굽혀 조수아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너 지금 수술한 지 얼마 안 돼서 울면 안 돼. 나중에 네가 다 나으면 내가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소개시켜 줄 테니까 그 개 같은 자식 콧대 단단히 눌러주자. 쓰레기 같은 새끼! 네 목숨을 위험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감히 네 앞에서 바람까지 피워? 아주 그냥 부랄을 터뜨려도 시원찮을 놈이야, 그 새끼는.”

조수아는 심장에 수만 개의 화살이 날아와 박힌 것보다도 더 가슴이 아팠다. 차가운 손이 한지혜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꺽꺽거리는 목구멍에서 한참이나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자신한테 찾아오자마자 목숨이 꺾여버린 아이와, 그녀가 7년이나 사랑했던 남자를 생각하니 조수아는 도무지 평정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이 흐른 후에야 조수아가 입을 열었다.

“너 그 사람 봤구나.”

한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새끼 지금 여기 병원 4층에서 송미진과 함께 있어. 너 수술할 때 네 휴대폰으로 전화 했었거든. 내려와서 수술동의서에 사인하라고. 근데 그 개자식이 전화도 아예 안 받더라.”

조수아는 고통스레 눈을 감았다.

“나 거기에 데려다 줄 수 있어?”

“너 방금 수술해서 흥분하거나 그러면 안 된다니까?”

“어떤 건 직접 봐야지, 아니면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서 그래.”

한지혜는 조수아의 고집을 못 꺾고 휠체어에 그녀를 앉힌 채 4층으로 향했다.

송미진의 병실 밖, 조수아는 열린 문틈으로 마침 부드러운 음성으로 송미진에게 약을 먹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드럽게 풀린 눈매와 듣기 좋은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조수아의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육문주의 몸에서 시선을 떼어내 송미진의 얼굴로 옮겼을 때, 조수아는 자신과 꽤나 닮아있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순간 모든 걸 깨달은 것 같았다.

비참한 웃음이 흘렀다.

고개를 돌린 조수아가 한지혜에게 말했다.

“나 병실로 데려다 줘.”

다시 육문주를 보게 된 건 그로부터 이틀이 흐른 뒤였다.

조수아는 침대에 누워 자신이 마음 깊이 사랑했던 남자를 조용히 쳐다봤다. 이젠 정말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죽을 것처럼 마음이 힘들었다.

육문주는 그녀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는 걸 발견했는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틀이나 됐는데 아직도 아파?”

그는 조수아가 생리 때문에 아픈 줄로만 알았다. 예전에는 하루만 아프고 말았던 것이 이번에는 조금 오래가는 정도라고만 그렇게 생각했다.

조수아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애써 요동치는 정서를 억눌렀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남자가 뜨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를 매만져 주었다. 목소리도 살짝 톤다운 되었다.

“너 지난 번에 맘에 든다고 했던 가방, 내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사왔어. 거실 소파에 지금 있으니까 일어나서 봐봐.”

조수아는 아무런 파문도 없는 눈동자로 육문주를 마주봤다.

“지금은 안 좋아해.”

“그럼 차 바꿔줄까? 페라리? 아니면 포르쉐?”

또 침묵이 이어지자 육문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가 원하는 게 뭔데?”

그가 생각하기에 돈으로 해결 못할 게 없는가 보다.

조수아는 잠옷 자락을 꽉 쥔 채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약간은 핏기가 없어 보이는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나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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