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꽃은 파란색과 보라색의 잘 어울리는 아이리스 꽃다발이었는데 예쁜 포장지에 싸여져 있어 더 아름다워 보였다. 게다가 오늘 신유리가 입은 연보라색 셔츠와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녀는 꽃다발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본 서준혁이 말했다. “네가 아이리스 꽃을 좋아한다고 한 말 기억해.”신유리는 꽃을 좋아하지만 수많은 꽃 중에 아이리스 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어릴 때 이연지과 외할아버지가 꽃을 키우기를 즐겨하셔서 신유리는 늘 작은 의자를 끌어다 놓고 꽃을 보았기 때문에 꽃에 대한 반감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 만지거나 직접적으로 접하지는 않았었다.게다가 꽃은 서준혁이 건네준 것이니 신유리는 받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신유리는 결국 마지막까지 그 꽃다발을 받지 않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밖에 천천히 황혼이 지고 있었다.어제 도우미 아줌마가 퇴직했기 때문에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자두를 근처의 보육원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사실 자두의 나이로는 보육원에 맡길 수 없는 것이 정상이지만 신유리와 그곳의 책임자는 어느 정도 아는 사이여서 어찌 저찌 맡길 수 있었다.자두를 데리러 가는 길 내내 서준혁은 신유리의 뒤를 따랐고 책임자는 외국인 여성이라 서준혁을 발견하고는 농담을 던졌다. “자기야, 이분은 누구? 남편인가요? 정말 멋져 보이네요.”신유리는 책임자의 물음에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럼 당신의 남자친구군요. 둘이 잘 어울리네요.” 신유리는 할 말을 잃었고 조용히 자두를 받아 안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서준혁이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준혁의 눈에는 끝없는 애정과 부드러움이 담겨 있는 듯했지만 신유리는 마음이 이상해져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곧바로 떠났다. 최근에 변태 스토커가 동네를 누비고 다닌다는 뉴스가 떠들썩했기에 신유리는 자두를 보육소에 혼자 두는 게 걱정되었다. 그래서 차라리 회사 일을 집으로 가져와 하려고 결정을 내렸
갑작스러운 사고에 신유리는 입맛이 없어져버렸고 잔뜩 긴장한 채로 경찰에 상황을 설명한 뒤,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서준혁 또한 굳은 얼굴로 어딘가로 몇 통이나 전화를 걸더니 신유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내가 있을게, 아마 상습법인 것 같아. 너랑 자두만 집에 있으면 내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신유리는 핸드폰으로 최근 뉴스를 확인했고 그 변태는 이미 이 주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창문에 가득 묻은 페인트는 사람을 불러 해결을 마쳤지만 흔적은 조금 남게 되었다. 신유리는 서준혁과 거실에 있는 모든 창문을 꼼꼼하고 세게 잠가버렸다.지금 이 상황에 신유리는 자꾸만 예전에 주국병이 진 빚으로 인해 사채업자가 들이닥치던 일들이 생각이 나 더욱 두려웠다.서준혁이 집에 남겠다고 결정했으니 신유리도 그를 내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필경 무서운 변태보다는 서준혁이 더 믿음직하니까 말이다.게다가 집에 어린 자두로 있어 홀로 긴급 상황을 대처하기보다는 남자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하지만 벌어진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심각한 어른들 뒤로 해맑은 자두는 방실방실 웃고만 있었다.서준혁이 해준 이유식을 먹고 나서는 혼자 땅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자두는 요즘 그가 사온 장난감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곰 인형을 손에 들고는 뭐라는지 모를 옹알이를 하고 있었다.자두의 모습을 본 서준혁은 아이를 번쩍 안았고 자두도 안기자마자 서준혁의 목을 꽉 감싸며 애교를 부렸다.서준혁은 자두가 자신을 어떻게 막 대해도 그저 웃기만 하다가 옆에 있는 신유리를 달래며 입을 열었다.“아까 통화하면서 물었는데 이 동네 치안이 그래도 꽤 괜찮대, 방금 꺼는 그냥 겁주기였을 거야.”“겁?”신유리가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그래도 조심하는게 좋을 거야, 이미 그 사람은 우리를 노리고 있을 수도 있어. 너만 괜찮다면 내가 사는데 같이 가서 지낼래?”서준혁
신유리는 바뀌어가는 서준혁의 표정에 왜인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핸드폰을 다시 건네받은 신유리는 자두를 안아 들었고 아이가 조금씩 걸음마를 떼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서준혁이 깐 카펫은 유난히 두꺼워 넘어진다 해도 다치지 않으니까.서준혁은 자두가 핸드폰 영상 속 강아지 한 마리에게 아빠라고 부르면서 자신에게는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 사실에 혼이 나간 듯 앉아 있다가 나지막한 소리로 신유리에게 물었다.“저녁 뭐 먹고 싶어?”“아무거나.”신유리는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는 대답을 했지만 서준혁은 요 며칠 반찬과 국, 심지어는 자두의 이유식까지 다 다르게 만들어주었다.자두의 입맛을 알아차린 서준혁이라 밥 먹을 시간만 다가오면 아이는 먼저 밥상으로 다가가 숟가락을 들고 가만히 밥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신유리도 그가 한 모든 음식들이 다 자신의 입맛에 맞춘 사실을 발견했지만 유일하게 하나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두에게 아빠라고 부르라고 가르쳐주려는 서준혁의 의지였다.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아빠라는 단어를 배워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교육을 하고 있었다.여전하게도 몇 개의 외국어들을 막 섞어가며 가르치고 있었지만 서준혁 또한 고집이 센 사람이라 어떻게 해도 그 영상은 자두에게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그러나 서준혁이 자두에게 매달린 뒤로 신유리는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일을 할 수가 있었고 그러는 도중 자두에게 언어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서준혁 또한 이 점을 알아차렸는지 계속 몇 개 국어로 자두랑 소통을 하려고 했고 신유리는 가끔 서준혁이 정말로 자두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준다는 착각이 들었다.그 순간,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신유리는 정신을 차렸고 발신자는 이신이었다.“나 이제야 뉴스 봤는데 넌 좀 어때?”그는 신유리 집 주위에 발생하는 변태 일을 제일 먼저 물었다.“괜찮아, 요 며칠 별 다른 일은 없어.”신유리가 대답했다.“그럼 됐네.”이신은 머뭇대다가 신유리에게 말했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침 마트가 있어 두 사람은 자두의 분유를 사러 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저녁에는 먹고 싶은거 있어?” 서준혁은 신유리에게 저녁 메뉴에 대해 물었다. 최근 정기적으로 집안청소를 청소부에게 맡겼고 먹고 마시는 것은 다 서준혁이 책임지고 있었다. 사실 서준혁 또한 밥을 잘하지 못했지만 스스로 인터넷을 뒤져 레시피를 찾고 영상을 보며 갖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요리에 꽤 재능이 있었는지 그가 한 음식들은 신유리는 처음에는 인정하지는 않았지 서준혁이 만들어준 이유식을 너무나도 맛있게 먹는 자두를 보고는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중식 아니면 한식? 더 아니면 서양식?” 그는 신유리에게 끈질기게 물었고 신유리는 하는 수 없이 대답을 했다. “다 괜찮아.” 그러자 서준혁은 자두에게 시선을 돌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자두에게 물었다. “네가 한번 말해봐, 엄마는 뭐가 먹고 싶대?” 자두는 눈을 깜빡이며 어딘가를 가리키더니 옹알거렸다. “저거! 줘!” 아이가 가리킨 방향을 본 서준혁의 눈에 잘 구운 닭 한 마리가 들어왔다. 곧 자두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단호히 말했다. “안 돼, 저건 네가 못 먹는 거야.” 자두는 누구를 닮은 건지 이상하게도 튀김이나 구운 음식을 먹기 좋아했다. 전에 혼자 몰래 서준혁이 상 위에 놓은 구운 닭고기를 먹고 난 뒤부터는 닭고기를 볼 때마다 사달라고 서준혁에게 졸라댔다. 서준혁은 처음에 자두가 원하는 대로 다 사주다가 몇 번이나 반복이 되자 아이의 음식 습관이 잘못될까 봐 마음을 굳게 먹고 사주지 않기로 다짐했다. 자두는 서준혁의 단호함에 속이 상한 듯 그를 끌어안고는 칭얼거렸고 신유리는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었고 왜인지 모르게 착잡해졌다. 신유리가 업무 때문에 아이를 돌 볼 시간이 없어 자연스럽게 서준혁이 자두랑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는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걸음마도 연습하며 각종 언어까지 가르쳤다. 신유리는 당연하게도 요즘 자두가 서준혁을 어색해하기는커녕
저녁 식사는 다소 침묵 속에 진행되었고 유일하게 기뻐하는 사람은 자두뿐이었다. 서준혁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유식을 만들었다. 자두는 서준혁이 만든 이유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매일 적극적으로 먹었다. 그는 신유리를 바라보며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사실 그렇게 서둘러 이사할 필요 없어. 나도 요즘 여기서 지낼 거야.” 신유리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했다. “남의 집에서 지내는 게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서준혁은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는 자두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 “박지훈이 자두가 이유식을 좀 더 먹는 게 좋다고 했어, 그리고 자두도 내가 만든 걸 좋아하고.”신유리는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당연히 자두가 서준혁이 만들어준 이유식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두를 데리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습관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만약 자두가 서준혁의 존재에 익숙해진다면 그때 가서 자두를 데리고 가는 게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전문적인 도우미를 다시 찾는 중이야, 요즘 자두 달 돌봐줘서 고마워.”“신연과 계약을 체결해서 그때면 일이 많아질 것 같아. 여기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야.”“일은 회사에서 처리할 거야.”신유리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말했다. “다 먹었어. 이만 일어날게.”거절의 뜻은 명확했다. 서준혁은 비록 마음이 아팠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두에게 주의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자두는 입을 크게 벌리며 밥을 먹고 있었다. 너무나도 귀여운 나머지 마음이 녹아내렸다. 신유리는 자두의 독립성을 키우기 위해 일찍이 스스로 밥을 먹도록 했다. 그래서 자두는 자신의 자그마한 숟가락으로 애써 먹었다. 자두는 서준혁의 시선을 느끼고 움직임을 멈추더니 서준혁을 향해 웃었다. 서준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분명 그는 자두의 성장과 함께해야 하는데 그녀의 탄생조차 환영하지 못했으니. 식사 후, 신유리는 떠나려고
우서진과 통화를 마치고 서준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테라스 밖의 리시안셔스를 바라보았다. 집을 처음 구입할 때 그는 이 리시안셔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유리가 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 가까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준혁은 이 집을 구입하자마자 꽃가루 방지 구조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는 신유리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는 꽃을 좋아하지 그를 좋아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서준혁의 싸늘한 눈매에 서서히 절망의 빛이 번진 채 리시안셔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시안셔스의 꽃말도 신유리가 전에 알려준 것이다. 진실한 사랑. 서준혁은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눈을 감았다. 그는 손목으로 눈을 가린 채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진실한 사랑? 신유리를 속이려 했던 순간부터 그는 이미 진실을 논할 자격을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그를 믿지 않았고 그를 떠난 것이다. 거짓말쟁이는 사탕을 받을 수 없다. 벌을 받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배운 교훈이기도 하다. 서준혁은 소파에 앉은 채 거실에 있던 핸드폰이 울릴 때까지 깊은 침묵 속에 빠졌다. 하정숙이 전화를 걸어왔다. 서창범의 사건이 끝나고 서준혁이 이곳에 온 후로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한 적이 없었다. 하정숙이 먼저 그를 찾지 않았고 그 역시 하정숙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둘은 모자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낯설었다. 서준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결국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로 하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성남으로 돌아올 거니?”그녀의 말투에는 질책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네가 해외로 나간 이유를 모를 줄 알아? 서준혁,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하씨 가문에서 지내는 게 불편하세요?”하정숙은 이미 하씨 가문으로 돌아갔고 지금도 살고 있었다. 서준혁의 말투는 더없이 차가웠다.“하씨 가문에서 또 뭘 원하는 거죠?”하정숙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씨 가문에서 뭘 원
이신은 신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일에 대해 몇 마디 얘기를 나눴다. 김가영과 계약을 체결하고 남주시 쪽의 작업 진행 상황을 전했다. 그러고 나서 사적인 질문을 했다. “서준혁이 그쪽에 있다며?” 신유리는 잠시 멈칫했다. 사실 이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특히 이신이 서준혁에 대해 물어볼 때면 더욱 난처했다. 그러나 굳이 이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요즘 신연과 계약하고 있어서.”“그래서 너를 찾아갔네.”그는 물음이 아닌 확신을 했다. 신유리는 부인하지 않았다. 침묵은 최선의 응답이었다. 이신도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냈다. “전에 네가 사는 동네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그게… 서준혁이 있어서?”이신은 전에 신유리가 걱정되어 보러 오겠다고 하자 그녀가 단칼에 거절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신유리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채 이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솔직히 그녀는 이제 곧 서른이고 순수했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이신이 전에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줬던 것에 대해 감동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로 집 안을 바라보았다. 마침 자두는 서준혁과 함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자두는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 비록 아직도 어리지만 이목구비는 서준혁과 정말 많이 닮았다. 특히 둘이 함께 앉아 있을 때면 더욱 선명했다. 누구나 그들이 부녀 사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때때로 신유리는 혈연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다. 전화 너머로 이신은 그녀의 대답을 듣지 못하고 결국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이신은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 모든 결정을 존중할 거야, 너한테 좋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신유리는 그의 말투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답답함을 느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내 잘못이야.” “왜?”
신유리는 그림자를 보더니 발걸음을 멈췄다. 신유리는 회사를 나올 때부터 눈치챘다. 그녀는 기억력이 좋아서 그가 입고 있던 옷 색깔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며칠 전 소란을 일으킨 스토커 사건 때문에 신유리는 경계심이 매우 강해져 있었다. “뭔 일 있어?”서준혁은 이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신유리는 다시 유리 진열장을 보자 그 그림자는 이미 뒤쪽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신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서준혁의 시선 끝에는 작은 디저트 가게가 있었다. 진열대에 놓인 디저트는 작고 정교했으며 보기만 해도 달콤해 보였다. 그는 신유리를 보며 물었다.“하나 사 갈래?”신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당분 섭취를 엄격히 신경 썼고 디저트를 거의 먹지 않았다. 서준혁도 마찬가지로 단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며 별로 설득하지 않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유리보다 더 엄격한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하정숙과 서창범의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규칙은 그대로 따랐다. 재벌가에서 자란 그는 재료 하나하나까지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준혁은 디저트에 별로 관심이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만 집 앞에서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만났다. 우서진은 담배를 입에 물고 얼굴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었다. 신유리의 가사 도우미는 얼굴에 경계심이 가득한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신유리와 서준혁이 돌아온 것을 보고서야 가사 도우미는 안심하며 말했다. “사모님, 이분께서 사모님의 친구라고 자칭하셨지만 사모님의 확인을 받지 못해서 열어드리지 않았어요.”신유리는 계약을 체결할 때 이미 도우미에게 지인들이 방문할 때는 미리 알려줄 테니 함부로 사람을 들이지 말라고 당부한 바 있었다. 신유리는 우서진을 보고 별로 반가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녀가 아직 인사를 하기도 전에 우서진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