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혁은 당시 본인의 선택이 후회스럽고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시간은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밤은 깊었고 서준혁은 혼자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듯싶었다....신유리는 어젯밤 자신의 말들을 듣고 서준혁이 떠났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밥상에 아침이 차려져있고 주방에서도 인기척이 들려왔다.서준혁은 마지막 아침을 꺼내다가 잠에서 깬 신유리를 발견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아침 드시죠, 제가 마스크를 끼고 한 거니 별 문제없을 겁니다.”신유리가 대답하려는 찰나 신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그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서준혁을 힐끔 쳐다본 신유리는 자두를 먼저 소파에 잘 앉혀놓고는 통화를 하러 자리를 피했고, 신연은 업무상의 일로 몇 마디 말을 꺼내다가 문득 물었다.“서준혁 씨가 신유리 씨랑 같이 있습니까?”“네.”예상치 못했던 신연의 사적인 물음에 당황하던 신유리가 대답했다.“그래도 신유리 씨를 찾아갈 기분은 있었나 봅니다.”신유리는 그의 말에 담긴 의도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고 그대로 통화를 끝마쳤다.거실로 다시 돌아간 신유리는 서준혁이 자두에게 우유를 데워주는 모습을 발견했다. 마치 큰일을 하는 듯 그의 표정은 진지하고 엄숙하기 그지없었다.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온도계를 들고 우유의 온도를 시시각각 재고 있었다.자두는 바쁜 서준혁의 뒷모습을 보고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고만 있었다.신유리는 그런 자두를 슥 쳐다보고는 얼른 서준혁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서 우유를 낚아채고는 빠르게 데워 자두에게 먹이려고 했다.그러나 서준혁은 신유리의 숙련된 행동에도 의심이 가는지 그녀에게 먼저 물었다.“인터넷에서 우유는 60도를 넘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제가 온도계로 다시 재볼까요?”자두는 이미 배가 고팠는지 우유를 정신없이 마시고 있었고 신유리는 주방에서 본인이 마실 커피를 만들며 말했다.“조금 있다가 저는 회사로 나가봐야 돼서요. 베이비시터분도 와서 자두를 돌봐주실
신유리는 서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오해한 거야.”“오빠라고 부른 게 아니야, 유도가 아니라 자두라고 알려주는 거야.”신유리가 말을 마치자, 품에 안겨 있던 자두는 바로 덧붙였다.“자두!”서준혁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더니 억지로 웃으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런 거였구나?”“응, 자두는 뭔가를 강조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거든? 특히나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신유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유도라는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말아줘.”서준혁은 자두의 맑고 순진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설렜던 기분은 서서히 가라앉았다.결국 그의 오해였다.서준혁은 자조하듯 웃었다. 그는 자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자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뿐이었다.신유리는 새로 배치된 가구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두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오전 내내 놀았던 자두는 피곤했는지 곧 잠들었다.오후, 서준혁이 주문한 카펫이 도착했다. 신유리는 두툼한 양모 카펫을 보더니 서준혁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서준혁은 이내 설명했다. “아까 유... 자두를 봤더니.”유도라는 이름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겨우 삼켜버린 채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자두가 바닥에서 놀려고 하는데 원래 카펫이 너무 얇아서 좀 더 두꺼운 걸 주문했어.”“고마워.”서준혁은 긴장했던 마음이 그제야 내려앉았다. 그는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앞으로는 자두라고 부를게.”아직 감기가 아직 낫지 않아서인지, 그는 약간 코맹맹이 소리가 섞여 있었어 서운함과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마치 무언가를 약속하는 듯했다.“서준혁.”신유리는 그의 말을 가볍게 끊고 눈꺼풀을 치켜올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언제 떠날 생각인데?”서준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의 발을 내려보았다.신유리는 발은 크게 다친 게 아니라 거의 나았지만 여전히 걷는 속도가 느렸다.“네가 좀 나으면 그때 떠날게.”신유리는 바로 물었다. “서창범 사건 곧 재판이야, 안 돌아
신연은 사람을 보내 신유리를 호텔로 데려갔다. 그녀는 성남시로 돌아온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반짝이는 야경을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신연은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서준혁은 서창범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다만 서창범 쪽에서는 서준혁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므로 인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서창범은 복수심이 강한 사람이라 아마 유리 씨를 사건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유리 씨가 법정에 서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겁니다.”신유리는 그의 의도를 꿰뚫어 보며 물었다.“그럼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나한테 계속 돌아오라고 암시하는 거죠?”“저 사람들이 이렇게 질질 끌다가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니까요.”신연은 솔직하게 말했다.“지금 서준혁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다만 무의미하다고 여긴 사건이 실제로는 신유리의 안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알겠어요.”신연처럼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또 있었다.하정숙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녀는 광기가 도는듯한 눈빛으로 날카롭게 말했다.“신유리를 데려오면 끝인데 왜 그 딴식으로 하는 건데? 이미 끝났어, 서창범이 빽을 찾아버렸으니.”하씨 저택, 하정숙은 일그러진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몇십 년간 기다려 온 복수의 기회가 날아갔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쉽게 해결될 문제였는데 서준혁이 여자 때문에 서창범에게 빠져나갈 틈을 줬다고 여겼다.하정숙은 화를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어떤 방법을 쓰든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버려!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으니까. 서창범 때문에 평생을 역겹게 살아왔어.”“잊지 마, 내가 네 외삼촌에게 부탁해서 도와준 게 아니었다면 넌 지금쯤 넌 그 서자에게 짓눌려서 화인 그룹 지사의 사장은 무슨, 화인 그룹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거니까.”“네 아버지라고 생각해서 봐주는
신연이 갖고 있는 증거와 신유리가 증인으로 출석하며 서창범의 변호사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변호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증거가 하나씩 드러날수록 신유리의 얼굴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겪었던 고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누구한테나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신유리한테서 직접 전해 들은 서준혁은 뼛속까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신유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리에 선 채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였다. 신유리의 증인 출석으로 서창범의 사건 판결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결국 8년의 유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신유리는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게 끝났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서창범에게 내려진 형벌은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았다. 신유리는 별로 홀가분하지 않았다. 서창범의 사건이 판결되고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뉴스에서도 여러 번 다루어졌다. 서창범 측의 변호사는 항소 신청을 할 것이라고 했지만 사건의 파장은 결코 막을 수 없었다. “너 요즘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 난 서창범의 사건이 터지면 당연히 그를 비난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서준혁이 욕먹고 있어.”“서준혁이 배은망덕하고 불효자라며 저주까지 하고 있어. 아버지가 얘기하시는 걸 들었는데 이 때문에 서준혁이 몇 개의 계약을 잃었대. 오히려 오담윤은 그 틈을 타 많은 이익을 챙겼고.”임아중은 안타까움과 함께 신유리에게 소식을 전했다. 다들 서창범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결국엔 서준혁이 비난받을 줄이야.비록 임아중은 평소에 서준혁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편에 서고 싶었다.신유리의 안색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눈빛은 살짝 어두워졌다. 이런 결과를 서준혁이 몰랐을 리 없다. 자신의 아버지를 직접 감옥에 보낸 사람과 누가 협력하려 하겠는가. 분명히 그는 결과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을 내렸다.“대표님, 휘현 그룹에서도 더 이상
신유리는 어르신께서 먼저 만나자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서창범의 사건 이후로 어르신께서 다시는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르신은 자두를 보자 여전히 기뻐하며 자두에게 장난감을 주라고 유 아저씨를 시켰다. 신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어르신께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젠 나랑 말도 못 하겠니?”신유리는 망설이며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어르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랑 준혁이 많이 닮았어. 준혁이도 내가 화날까 봐 두려워하더구나. 내가 말했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법이라고. 이건 서창범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누구도 탓할 수 없다.”“게다가 서창범은 내 아들이고 준혁이는 내 손자다. 자두도 내 손녀고 내 아들이 내 손녀를 해치려고 했다니...” 어르신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얼굴에 쓴웃음을 띠며 손을 흔들었다. “유리야, 미안해할 것 없어. 우리 서씨 가문에서 너한테 미안하단다.” 신유리는 자두를 안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자두는 워낙 성격이 밝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어르신을 바라봤다. 어르신은 신유리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두를 안아봐도 될까?”신유리는 잠시 망설였지만 어르신의 기대 찬 눈빛에 이내 자두를 건네주었다. 자두는 어르신의 품에 안겨서 울지도 않았다. 오히려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어르신은 감탄하며 말했다. “자두를 보니 준혁이 어렸을 때가 떠 오르는구나. 준혁이도 내가 손수 키웠지, 엄마 아빠라는 사람들은 그를 신경 쓰지도 않았어.”“내 기억으로 준혁이가 여덟, 아홉 살쯤이었을 거야. 그때 둘은 집에서 싸우다가 꽃병을 준혁이한테 던졌지. 그는 소리 없이 나에게 달려왔고 저녁을 다 먹고 나서야 팔에 큰 상처가 있다는 걸 알았어.”어르신의 목소리에는 후회와 자책이 가득했다.“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그를 곁에 데리고 키우지 못했지. 준혁이는 고집이 세고 바보 같고 직설적이어서 무슨 일이든 혼자
신유리는 바에 도착하자마자 서준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았다. 신유리는 어르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서준혁은 혹여나 다른 자리에 앉으면 찾지 못하기라도 할 듯 같은 자리만 고집했다.신유리는 자신도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몰랐다. 그냥 서준혁이 바에서 취했다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와 있었다. 신유리는 그날 어르신을 만난 이후로 서준혁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특히 서준혁이 이번 사건 때문에 화인 그룹과의 협력을 잃은 데다가 그 틈을 타 이사회 사람들이 압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였다. 그가 받은 영향은 이미 자신과 이 사건과의 관계를 넘었다. 재판이 끝난 이후, 잡담을 즐기는 사람들이 물어보는 것 외에 신유리에게는 다른 영향이 없었다. 하정숙조차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 모든 악의는 서준혁에게 향했다. 신유리는 서준혁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신유리의 기억 속 서준혁은 결코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일로 그는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했다. 신유리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 완전히 잠겨 있는 서준혁을 보며 잠시 멍해졌다. 그녀는 야맹증 때문에 어두운 환경에서 핸드폰 조명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번에 서준혁을 찾았다. 아마 습관이 되었다.신유리는 예전에 서준혁을 데리러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서준혁의 체형과 습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리 어두워도 첫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예전에도 신유리는 여러 번 경고했었다. 어두운 곳에 있으면 못 볼 수도 있다고.서준혁은 한 번도 해명한 적 없었고 그렇다고 자리를 바꾼 적도 없었다. 이제야 신유리는 아마도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꿈속에서 봤던 어린 서준혁에게 생긴 상처와 고집스러움에 신유리의 눈에 깊은 감정이 담겼다. 신유리는 천천히 서준혁의 옆으로 다가갔다. 우서진이 먼저
서준혁의 목소리는 쉰 듯했고 말투도 전혀 달랐다. 신유리는 단번에 그가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녀는 서준혁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신유리는 이 자세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서준혁, 너 취했어.”“응, 알아.” 서준혁은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신유리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화인 그룹 쪽 일에 대해 들었어...”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준혁은 그녀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많이 마신 모양인지 목소리가 꽤나 잠겨있었다.“듣기 싫어.”“이것 말고는 할 말 없어?”서준혁은 눈을 감은 채로 신유리를 벽에 밀어붙이며 본래 좁은 공간이 더욱 좁게 느껴졌다.“일, 서창범, 이신 듣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일들만 내 앞에서 얘기하잖아. 내가 좋아할 만한 말을 할 수는 없어?”신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를 일깨워줬다. “너 취했어. 석민 씨나 서진 씨 불러줄게.”“그럼 손민수는?” 서준혁이 갑자기 물었다. 다만 신유리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자신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눈을 번쩍 들고 신유리를 쳐다봤다.“아까 우서진이 말했잖아. 손민수가 돌아온다고, 손민수를 보면 넌 무슨 말할 거야?”신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 “내가 손민수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게다가 조금 전 우서진이 손민수에 대해 일부러 언급한 것도 떠올렸다.서준혁의 손끝은 굳어버렸고 큰 폭풍을 일으킬 듯했지만 이내 억눌러버렸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손민수랑 만났잖아, 좋아했고.”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였다. “그때 우리 사귀고 있었어.”신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서준혁의 손을 뿌리쳤다. 서준혁의 한마디는 눈가에 고였던 눈물을 금세 마르게 했다. 모든 감정이 사라진 채 차가움과 냉소만 남았다.그녀는 서준혁을 쏘아보며 말했다. “서준혁, 모든 사람을 너처럼 더럽게 생각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서준혁의 쉰 목소리가 들렸고 신유리는 그저 피곤하기만 했다. 그녀는 그만 떠나고 싶었고 서준혁과 거리를 두고 싶었지만 그는 신유리를 꽉 잡은 채 고집스럽게 놓아주지 않았다. 신유리는 마음이 한없이 허탈했다. 서준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이 상황이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가 서준혁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순식간에 하찮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뺨을 세게 내리치며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신유리는 빤히 앞을 쳐다보았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천천히 붉어졌다. “서준혁, 우리 이제 그만하자. 더 이상 너를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어.”그녀는 서준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고 억울하게 지낸 지난 몇 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가장 순수하고 깨끗했던 신유리의 감정을 서준혁은 무시하고 짓이겼다. 그는 항상 마음대로 그녀를 판단했고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신유리는 마치 모든 감정이 사라진 듯한 공허한 눈빛으로 서준혁을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이토록 역겹게 볼 줄은 몰랐어.” “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이야,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서준혁은 신유리의 초점을 잃은 공허한 눈빛에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이 심장에서부터 퍼져나갔다. 숨도 못 쉴 정도로 힘들었다.그의 잘생긴 얼굴은 고통에 휩싸였고 신유리를 잡고 있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신유리는 이내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는 마치 땅에 뿌리를 내린 듯 움직이지 못하고 신유리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내 허리를 굽히며 가슴을 움켜잡더니 깊게 숨을 내쉬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절망과 고통에 그는 무기력해진 채 시야조차 흐려졌다. 룸 안에 방금 전까지 남아있던 뜨거운 열기는 무형의 칼날이 되어 서준혁의 마음을 찔렀다. 신유리는 술집을 벗어나 역겨운 공간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