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은 딱 설산 아래에 위치하여 있어 가만히 풍경만 보고 있어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신유리는 자두와 함께 먼저 방으로 돌아갔고 아까 장다혜가 말한 농담 섞인 말들이 생각이 났지만 잘생긴 남자와 우연한 만남에 대해서는 별로 흥취가 없었다.그들이 오후에 호텔로 도착한 이유로 오늘 저녁이 아닌 내일 제대로 놀기로 결정하였다.저녁밥을 먹을 때, 장다혜는 머리를 수그린 채 핸드폰만 해댔고 그녀의 모습에 신유리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이렇게 행동이 빠른 사람이었어요?”장다혜는 신유리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못 얻어냈어요 연락처, 그 남자 되게 개성 있어 보이던데요? 저는 절대 가능성이 없어보였어요.”신유리는 장다혜를 위로하듯 말을 했다.“너무 한 나무에만 매달려있지 마요, 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유리 씨는 이신 씨 같은 잘생긴 남자가 옆에 있으니 이런 말이 나오는 거죠.”장다혜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이신은 요즘 매일 신유리를 데리러 오기 때문에 장다혜도 이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그녀는 신유리를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말했다.“원래 끼리끼리 논다고 하잖아요? 잘생긴 남자 옆에는 꼭 더 잘생긴 남자가 있을 거예요, 이신 씨 주위에 다른 친구들 없어요?”신유리는 장다혜의 말에 문득 허경천과 연우진이 떠올랐지만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해줬다.“어떻게 우연히 만난 그 잘생긴 남자랑 잘 해볼지 생각해보는게 좋을 것 같아요.”장다혜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고 신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자두에게 우유를 먹여주었다.“어머!”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신유리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수그린 채로 물었다.“왜 그래요?”“그 남자 식당에 밥 먹으러 왔어요.”주변에 많은 유명한 식당이 있었지만 너무 지쳐 호텔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기를 선택한 그들이었다.하지만 호텔의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은 적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여기까지 놀러와 이 지역의 소문난
신유리는 이미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 동료들을 보고는 잠시 침묵하더니 자두를 서준혁에게 안겨주며 말을 했다.“부탁 좀 드릴게요.”하지만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이 서준혁에 의해 잡혀버렸고 그는 신유리를 번쩍 들어 안고는 차에서 내리게 하였다.서준혁이 신유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러면 더 안전할 것 같아서요.”신유리는 굳어진 표정으로 서준혁을 째려보며 대답했다.“손 놔요, 누가 이렇게 해 달랬어요?”서준혁의 손은 아직까지도 신유리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비록 그녀의 품에 자두가 안겨있다 해도 두 사람의 동작은 친밀해보이기 그지없었다.그녀의 날선 말에 서준혁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곧바로 손을 떼버렸고 신유리는 그의 존재를 무시해버리고는 자리를 떠나버렸다.갑작스러운 서준혁의 행동에 심기가 불편해진 신유리는 짜증이 나 미칠 것 같았다.자두가 품에 안겨있었고 요즘 피곤이 쌓인 탓에 하마터면 자두를 놓칠 뻔 한 신유리는 무례한 서준혁에게 잔뜩 화가 났다.장다혜는 두 사람이 걸어오는 모습에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준혁을 쳐다보더니 말했다.“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우리는 우리 몰래 이상한 짓을 하는 걸로 착각할 뻔했어.”신유리는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두를 다른 동료에게 맡겨버리고는 텐트를 치는 일에 동참하였고 장다헤는 그녀의 뒤를 따라와서는 물었다.“왜 이렇게 화가 나있어요?”“아니에요, 아무것도.”장다혜는 머쓱한지 자신의 코를 만지작대더니 옆에 있는 서준혁을 보며 말했다.“준혁아.”신유리는 그 목소리에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땅에 버려버렸고 장다혜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닫아버렸다.강가에서 물건들을 씻고 있던 신유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아까 안겼을 때 나는 그 익숙한 냄새가 생각이 나 짜증이 밀려왔다.익숙한 향기에 옛날 일들이 생각이 났지만 그 어떤 일도 행복하고 기쁘지는 않았다.물건을 다 씻은 후, 텐트로 돌아간 신유리는 사람들이 몰려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사람들 틈에는 익숙한 누군
서준혁은 좋지 않은 안색으로 신유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다친 그녀의 왼발을 보고는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아까는 왜 달린 겁니까?”신유리는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빠른 속도로 달렸던 거고 서준혁의 다가와 묻자 얼른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서준혁은 그녀의 모습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신유리는 그의 숨소리에 원래부터 불편하던 마음이 폭발한 듯 입을 열었다.“제발 제 앞에 나타나주시지 않으면 안돼요?”그녀의 말에 서준혁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고 한참동안이나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자신의 말에 서준혁이 당연히 떠날 줄 알았던 신유리가 안도하려는 그때, 서준혁은 갑자기 그녀를 들어 안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심하게 부상을 당한 것 같은데, 이럴 때에는 제 말 좀 들으세요.”자신의 몸이 붕 떠있는 느낌에 불쾌감을 느낀 신유리는 차디찬 목소리로 외쳤다.“저 좀 내려놓으세요!”“다쳤잖습니까.”“그쪽이 상관할 일 아니니까 내려놓으라고요.”서준혁은 날선 그녀의 태도에 발걸음을 멈췄고 신유리는 그의 몸에서 나는 그 익숙한 냄새에 속은 더욱 더 불편해졌다.그는 신유리를 내려놓기는커녕 더욱 꽉 안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죄송합니다.”서준혁은 항상 신유리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 상황이 짜증이 나 죽겠다는 듯 썩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미안하다는 말 진즉에 했어야 했는데 이미 늦은 걸까?]서준혁은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후회로 가득 차버렸다.신유리는 서준혁에게 안겨있을 때, 풍기는 향기에 사람의 기억력이란 참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분명 그들은 오랫동안 이렇게 친밀한 행동도, 말도 한 적이 없지만 그까짓 향기와 온도 하나도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생각이 나면 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 신유리는 서준혁을 조롱이라도 하듯 물었다.“김가영 씨 혼자 두고 오면 안 삐져요?”서준혁은 신유리의 물음에 멈칫하는 것도 잠시 곧 대답을 했다.“저랑 김가영 씨는 아무런 사이
호텔은 조금 옛날식이라 스스로 계단을 오르고 내려야 했지만 신유리는 서준혁의 품에 안겨 오르고 있었다.뜨거운 그의 체온과 강한 팔 힘으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은 서준혁의 손, 신유리는 그의 품에 안겨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서준혁에게서 나는 향기는 비가 와서 그런지 아까보다 많이 옅어져있었다.서준혁은 그녀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천천히 내려주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왼쪽 발에 신고 있던 양말과 신발을 조심스레 벗겨 다친 곳을 확인했다.차가운 손이 피부에 닿자 신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피했지만 서준혁은 그녀의 발목을 툭 잡더니 말했다.“움직이지 말아요, 다친 곳에 약을 발라야 할 것 같습니다.”신유리는 침묵하다 서준혁의 다정한 모습에 천천히 말을 했다.“서준혁 씨, 지금 되게 본인답지 못한거 아세요?”분명 서준혁은 다정하고 자상한 스타일이 아니지만 그는 지금 억지로 그런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정말 조금이라도 서준혁답지 못하게 말이다.그는 그녀의 말에 멈칫하더니 무릎을 꿇은 상태로 대답했다.“다 고칠 겁니다, 그게 뭐가 됐든.”신유리가 말했다.“아니요, 고치고 바뀐다 해도 저는 서준혁 씨가 마음에 안들 것 같아요.”서준혁이 아무리 노력해도 전에 신유리의 마음에 입혔던 상처들은 좀처럼 치유되지가 않았고 지금 신유리가 바라는건 오직 앞으로 남은 삶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었다.서씨 가문도, 서준혁도 없는 그런 안정적인 삶.서준혁이 신유리의 말에 답하려는 순간 장다혜가 자두를 안고 신유리의 방에 들어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서준혁을 발견하고는 당황하더니 물었다.“제가 지금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온 건가요?”서준혁은 그녀의 물음에 몸을 일으키며 신유리를 바라보더니 떨리는 입술로 입을 열었다.“내려가서 약 좀 찾아보고 오겠습니다.”장다혜는 뒤돌아 떠나는 서준혁의 모습에 얼른 신유리의 곁으로 가 앉더니 물었다.“무슨 일이예요? 그 작은 숲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거예요? 왜 두 사람 분위
서준혁은 국내에 있을 때에는 회사 업무로 인해 거의 매일이다시피 회사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했기에 숨 돌릴 틈도 없었다.겨우 나온 여가시간에는 얼른 달려와 신유리를 찾은 그는 어제 숲에서 외투도 없이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밤에는 신유리의 동태를 살피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아예 휴식을 제대로 못 취한 그의 몸에서 지금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신유리가 체온계로 서준혁의 열을 재줬고 그는 현재 무려 39도로 열이 펄펄 끓는 상태였다.서준혁은 소파에 앉아 힘없는 상태로 축 처져있었는데 아픈 원인인지 평소 그의 날카로운 모습과는 사뭇 달라보였다.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신유리가 먼저 말을 했다.“열나시는데 병원에 가보셔야죠.”서준혁은 그녀의 말에 더는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뜨리지 않았고 조용히 자신의 외투를 집어 들며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압니다, 열은 전염가능성이 있다는거. 자두도 어려서 면역력이 없을 테니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키가 180이 훌쩍 넘는 그는 허리까지 얇아 섹시하기 그지없었지만 신유리는 왜인지 서준혁이 야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입구까지 걸어 나가던 서준혁은 연신 기침을 해대더니 신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사과했다.“죄송합니다, 기침은 참을 수가 없어서.”신유리는 아까보다 더 빨개진 서준혁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차가운 말투로 입을 뗐다.“저쪽 창고 같은 방에 사람이 없이 비어있어요, 별 일 없으면 거실로 나오지 마시고요. 될 수록이면 우리 하율이한테 가까이 다가서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서준혁은 하던 기침을 멈췄고 얼른 신유리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자두를 안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서준혁은 손으로 자신의 올라가는 입 꼬리를 겨우겨우 막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신유리는 서준혁을 내보내지는 않고 남겨두었지만 그래도 그와 많이 접촉하기는 싫어 온 종일 방안에만 머물렀다.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서준혁은 조심조심 신유리의 방문을 두드리며 말을 했다.“냉장고에 먹을 것이 없던데 마트 가서 식재료
서준혁에게 손목을 잡혀있던 신유리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서준혁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한참동안 대답을 잇지 못하다가 천천히 서준혁에게 물었다.“서준혁 씨, 정말 어떨 때는 참 이상해 보여요.”“저 말입니까?”신유리는 고개를 숙여 곧 서준혁의 힘에 부서져나갈 것 같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며 그간 참아왔던 말들을 쏟아 뱉었다.“젤 처음 먼저 저를 건드린 사람도 서준혁 씨였어요, 그때는 새로운 여자니까 신선해서 계속 저를 따라다니셨겠죠.”“나중에는 저한테 질리셔서 먼저 저를 버린 사람도, 제 손을 놓은 사람도 서준혁 씨 본인이고요. 한번 또 한 번 더러운 행동으로 제가 수치심을 느끼게 절벽 끝까지 밀어버린 사람조차도 서준혁 씨였어요, 버티다 못한 제가 지금 당신 옆에서 떠나버리겠다는데 왜 자꾸만 저를 붙잡는 거예요?”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서준혁 씨의 그런 장난에 놀아나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은.”신유리는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다 서준혁에게 해버렸다. 요 며칠 그의 과도한 챙김에 신유리는 기쁜 감정이 아닌 그저 피곤하다고만 생각했었다.서준혁은 자신의 일상이 지루해졌을 때 쯤, 막무가내로 다가와 조금 놀아주고는 또 떠나버리는 것이 취미인 사람이라는 것을 신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신유리는 마치 서준혁이라는 사람을 다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닙니다.”“저랑 김가영 씨는 유리 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떨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하던 서준혁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자신의 옆에 두면 신유리가 위험해지지만 그녀와의 소중한 추억을 다 잃어버리긴 싫고 그래서 억지로라도 자신의 눈에 신유리가 들어오지 않게끔 애를 썼지만...이런저런 생각들은 서준혁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버려 그는 차마 입을 쉽게 떼지 못했다.점점 거세게 뛰는 심장은 서준혁의 피부를 뚫고나오려는 듯 강했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서준혁의
서준혁은 당시 본인의 선택이 후회스럽고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시간은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밤은 깊었고 서준혁은 혼자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듯싶었다....신유리는 어젯밤 자신의 말들을 듣고 서준혁이 떠났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밥상에 아침이 차려져있고 주방에서도 인기척이 들려왔다.서준혁은 마지막 아침을 꺼내다가 잠에서 깬 신유리를 발견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아침 드시죠, 제가 마스크를 끼고 한 거니 별 문제없을 겁니다.”신유리가 대답하려는 찰나 신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그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서준혁을 힐끔 쳐다본 신유리는 자두를 먼저 소파에 잘 앉혀놓고는 통화를 하러 자리를 피했고, 신연은 업무상의 일로 몇 마디 말을 꺼내다가 문득 물었다.“서준혁 씨가 신유리 씨랑 같이 있습니까?”“네.”예상치 못했던 신연의 사적인 물음에 당황하던 신유리가 대답했다.“그래도 신유리 씨를 찾아갈 기분은 있었나 봅니다.”신유리는 그의 말에 담긴 의도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고 그대로 통화를 끝마쳤다.거실로 다시 돌아간 신유리는 서준혁이 자두에게 우유를 데워주는 모습을 발견했다. 마치 큰일을 하는 듯 그의 표정은 진지하고 엄숙하기 그지없었다.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온도계를 들고 우유의 온도를 시시각각 재고 있었다.자두는 바쁜 서준혁의 뒷모습을 보고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고만 있었다.신유리는 그런 자두를 슥 쳐다보고는 얼른 서준혁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서 우유를 낚아채고는 빠르게 데워 자두에게 먹이려고 했다.그러나 서준혁은 신유리의 숙련된 행동에도 의심이 가는지 그녀에게 먼저 물었다.“인터넷에서 우유는 60도를 넘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제가 온도계로 다시 재볼까요?”자두는 이미 배가 고팠는지 우유를 정신없이 마시고 있었고 신유리는 주방에서 본인이 마실 커피를 만들며 말했다.“조금 있다가 저는 회사로 나가봐야 돼서요. 베이비시터분도 와서 자두를 돌봐주실
신유리는 서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오해한 거야.”“오빠라고 부른 게 아니야, 유도가 아니라 자두라고 알려주는 거야.”신유리가 말을 마치자, 품에 안겨 있던 자두는 바로 덧붙였다.“자두!”서준혁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더니 억지로 웃으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런 거였구나?”“응, 자두는 뭔가를 강조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거든? 특히나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신유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유도라는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말아줘.”서준혁은 자두의 맑고 순진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설렜던 기분은 서서히 가라앉았다.결국 그의 오해였다.서준혁은 자조하듯 웃었다. 그는 자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자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뿐이었다.신유리는 새로 배치된 가구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두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오전 내내 놀았던 자두는 피곤했는지 곧 잠들었다.오후, 서준혁이 주문한 카펫이 도착했다. 신유리는 두툼한 양모 카펫을 보더니 서준혁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서준혁은 이내 설명했다. “아까 유... 자두를 봤더니.”유도라는 이름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겨우 삼켜버린 채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자두가 바닥에서 놀려고 하는데 원래 카펫이 너무 얇아서 좀 더 두꺼운 걸 주문했어.”“고마워.”서준혁은 긴장했던 마음이 그제야 내려앉았다. 그는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앞으로는 자두라고 부를게.”아직 감기가 아직 낫지 않아서인지, 그는 약간 코맹맹이 소리가 섞여 있었어 서운함과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마치 무언가를 약속하는 듯했다.“서준혁.”신유리는 그의 말을 가볍게 끊고 눈꺼풀을 치켜올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언제 떠날 생각인데?”서준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의 발을 내려보았다.신유리는 발은 크게 다친 게 아니라 거의 나았지만 여전히 걷는 속도가 느렸다.“네가 좀 나으면 그때 떠날게.”신유리는 바로 물었다. “서창범 사건 곧 재판이야, 안 돌아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