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가 임아중을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얼굴이 창백했고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으며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자두는 어디 있어?”임아중은 땅에 주저앉으며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이승윤, 이승윤이 자두를 데려갔어!”신유리와 서준혁의 얼굴은 동시에 굳어졌다. 신유리는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 그녀는 휘청이더니 서준혁에게 기댔다.서준혁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이승윤이 왜 자두를 데려갔지?”“모르겠어. 유리가 어딨냐고 묻더니 자두를 데려가 놀겠다고는 그냥 내 품에서 뺏어갔어.”임아중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이승윤이 자두를 보는 눈빛은 마치 애완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신유리 눈을 감은 채 온몸이 떨렸다. 그녀는 서준혁을 밀어내더니 말했다. “내가 찾아야겠어. 이승윤의 연락처 알아? 분명 나에게 복수하려는 거야.”하지만 그녀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서준혁에게 단단히 붙잡았다. 서준혁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말했다. “어디 있는지 알고 가려는 거야?”신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전혀 침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서준혁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서준혁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목이 쉬어가며 소리쳤다. “비켜, 자두 찾으러 가야 돼. 이승윤이 나한테 복수하려는 거야, 자두는 상관없어!”“이승윤이 어디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어?”서준혁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은 채 핸드폰을 꺼내 우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신유리는 서준혁한테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그의 말에 점차 차분해졌다. 다만 두려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그녀는 자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서준혁은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새까만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우서진은 금방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이승윤은 지금 추명산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추명산은 그들이 마음대로 부르는 이름으로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가파르기 때문에 자극을 추구하는 재벌 2세들이 그곳에서 자동차 경
신유리는 결국 병원에 갔다.서준혁은 등에 상처를 입어 누울 수도 없었고 병실 소파에 앉아 화상 회의를 하고 있었다.신유리를 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짓하며 마치 병실이 아니라 자신의 사무실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신유리는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옆에 앉아 있었다가 간호사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 있을게.”서준혁은 물건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약 바꿔야 하잖아.”서준혁은 덤덤하게 말했다. “이미 다 본 사이잖아.”그의 무심한 태도는 마치 신유리를 소심해 보이게 했다.잠시 망설이던 신유리는 간호사의 말을 들었다. “가족분께서 먼저 나가지 말아주세요. 오늘 부서에 수술 환자가 많아서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에요.”비록 서준혁의 상처가 심각하지 않다고 했지만 그녀는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여전히 미간이 찌푸려졌다.서준혁은 평소에 운동을 즐겨 하다 보니 넓은 어깨와 날씬한 허리를 가졌다. 신유리를 등지고 옷을 벗자 몸매는 그대로 드러났다.하지만 신유리는 등 뒤의 상처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집중했다.상처는 견갑골 아래쪽에 있었고 깊지는 않았지만 크다 보니 꿰맨 자국이 있었다.서준혁의 피부는 하얀 편이라 흉터는 더욱 두드러졌고 이승윤이 당시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약을 바꾸는 시간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간호사는 나가면서 병실 문을 닫았다.서준혁은 천천히 환자복을 다시 입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옷의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잠갔다.신유리는 그를 흘겨보더니 물었다. “이승윤은 어떻게 처리하려고?”서준혁이 다치면서 상황이 더 커졌기 때문에 이승윤 쪽 문제는 서씨 집안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신유리는 이승윤의 미친 짓을 보고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신유리는 이씨 집안의 세력이 크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승윤을 빼낼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무모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서준혁은 말했다. “이승윤 형이 남주시에서 왔어. 이승윤을 풀어주려고 이씨
퇴원하고 나서도 신유리는 서준혁이 한 말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뭔가 의미심장해 보였지만 그녀는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호텔로 급히 돌아온 그녀는 임아중과 함께 놀고 있는 자두를 보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임아중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해 보여? 누가 쫓아오기라도 해?”신유리는 자두를 안아 올려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뽀뽀했다. 자두도 곧바로 엄마에게 다가와 얼굴을 비볐다.“참, 할 말이 있어.”임아중이 말했다. “이승윤의 형이 너에 대해 알아보고 다니더라. 아마 서준혁한테서 걸렸는지 너를 찾으려는 것 같아.”신유리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한테 뭘 하려고?”“그건 나도 몰라.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승윤도 그렇지만, 그의 형도 좋은 사람은 아니야.”임아중의 말대로 조심해서 나쁠 게 없었다.그날 밤, 신유리는 이승윤의 형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는 매우 공격적으로 나오며 신유리와 만날 것을 요구했다.신유리는 금방 자두를 재운 뒤라 테라스로 나가 전화를 받으며 바로 거절했다.상대방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유리 씨,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죠.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신유리는 어처구니없는 논리에 말문을 잃었다. 분명 이승윤이 일으킨 문제인데 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지 어이없었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반문했다. “제가 무슨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죠?”“이승윤은 갇혔고 서준혁은 다쳤습니다. 분명 당신들 셋이 함께 있었는데 결국 당신만 무사하군요.”상대방은 경멸적인 어조로 말했다. “신유리 씨, 남주시에서 당신이 잘나간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렇다면 남주시에서 이씨 가문의 영향력을 잘 알 것 같은데요?”노골적인 협박에 신유리는 이마를 찌푸렸다.남주시에서 계속 일하려면 이씨 가문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다만 이승윤의 형이 그녀를 찾아온 뒤 하정숙도 신유리를 찾아왔다.하정숙은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신유리 앞에 문서
신유리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자두를 안고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서준혁과 의사는 안색이 어두워진 신유리의 뒤를 따라 나섰고 의사는 신유리의 굳은 얼굴을 보고는 위로의 말들을 건넸다.“결과는 곧 나올 겁니다, 아이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때 가장 두려운 문제는 바로 아이 본인도 모른다는 겁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이런 일을 맞닥뜨리면 당연히 놀랄 만도 하지요, 아이의 부모가 잘 감시하고 챙긴다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신유리는 애써 쓴 웃음을 지으며 의사의 말에 대답했다.“감사합니다, 의사선생님.”의사는 자두와 서준혁을 번갈아보더니 또 다시 그에게 말했다.“각종 약 알레르기반응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테니 네 친구한테는 네 경험을 토대로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서준혁과 좌의사는 같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그날 갑자기 찾아와 검사를 받을 때 서준혁이 언제 몰래 결혼을 했는지 몰랐기에 많이 당황했었다.그리고 좌의사는 이름난 소아과 의사이기에 아직 어린 자두지만 아이를 처음 마주한 순간 서준혁의 이목구비와 아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렇기에 좌의사는 늘 서준혁에게 자두가 그의 딸인지를 농담하는 식으로 물어봤었다.하지만 상황을 보니 일은 생각보다 복잡해보였기에 그도 그냥 그러려니했다.좌의사는 몇 년간 소아과 의사를 하며 이런저런 일은 다 겪었기에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신유리에게 명함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전 성남에 있습니다, 나중에 아이에게 또 신유리 씨가 모를 문제가 생긴다면 저 찾아오셔도 됩니다.”말을 마친 좌의사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고 신유리는 서준혁의 시선을 본능적으로 피하며 자두를 꼭 끌어안더니 말했다.“검사 마쳤으니 이제 가보셔도 돼요, 저는 또 다른 일이 더 있어서.”“리정윤 씨가 찾아왔다고 그러던데...”자신을 피하는 신유리에게 서준혁은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리정윤은 리승윤의 친형이었고 서준혁은 또 다시 신유리에게 말을 했다.“리정윤 씨는 자신의 하고 싶은 일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든지 다 하
우서진은 그저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에 얼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후, 최근 만나서 같이 놀았던 여자에게 문자를 보냈다.[집에서 강제적으로 맞선을 보라고 하네, 오랫동안 같이 놀지는 못하겠다.]문자를 보내고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 문이 열리자 아이를 안고 있는 임아중의 모습이 보였다.우서진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전에 임아중 스스로 아이가 사생아라고 인정을 했으니까 말이다.그는 임아중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고민 끝에 먼저 말을 걸었다.“언제부터 엄마라는 역할로 일하게 되신 겁니까?”임아중은 이젠 그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알바 아니시잖아요?”우서진 또한 더는 임아중과 다투기가 싫어 자리를 떠나려고 했고 떠나기 직전 처음으로 자두의 얼굴을 확인했다.아이의 얼굴을 본 우서진은 발걸음이 뚝 멈추더니 미간을 점점 더 찌푸렸다.임아중은 그가 한참 간 자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경계하며 물었다.“왜 저희를 계속 보시는 거죠?”우서진은 그제야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대답했다.“아닙디다, 유리 씨 아이를 보니 그래도 친구인 제가 용돈이라도 줘야 하나 싶어서...”“누가 그쪽 돈을 받아준대요? 더러워 정말.”임아중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더니 자두를 안고 뒤돌아 떠나버렸다.서준혁의 상처는 당연하게도 다시 찢어지는 바람에 또 병원에 며칠 더 입원을 해야만 했고 상처에 감염이 생겨 열이 내려가지 않아 고열에 시달렸다.신유리는 생각 끝에 이석민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가 도착하면 바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임아중은 이제야 이 일을 알고는 자두를 안은 상태로 신유리에게 물었다.“그럼 어떡해? 너 지금 갈 거야?”신유리는 전에 서준혁이 퇴원을 할 때 성남을 떠나겠다는 말을 했지만 지금 서준혁은 또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였다.“...”신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임아중은 그녀의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신유리는 요 며칠간 병원을 간적이 없지만 할아버지는 늘 전화를 걸어와 몇 마디 나누다가 자두의 얘기를 꺼냈었다.그녀는 자두가 잠이 들었다는 핑계로 할아버지의 말을 피해갔지만 할아버지는 필경 서씨 가문의 사람이라 나쁜 의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신유리는 여전히 서씨 가문에 대해 경계심이 많았다.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거절을 하는 신유리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한걸음 물러나며 말을 했다.“유리야, 네가 지금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잘 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절대 그렇게 개념이 없는 사람이 아니란다.”“네가 준혁이랑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나도 딱히 강박하지는 않겠다, 준혁이가 복이 없어서 너 같은 애를 놓친 거니 너를 탓하지는 않는단다.”“너도 이제 그만 시름 놓아라, 내가 있는 한 너랑 자두는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테니.”할아버지는 진심을 다해 자신의 속마음을 말을 해줬고 신유리에게 든든한 뒤가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신유리는 할아버지의 말에 골똘히 생각을 하다 대답했다.“고마워요.”할아버지는 씁쓸한 웃음을 짓더니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유씨 아저씨는 할아버지의 외로운 표정을 보고는 위로의 말들을 해줬다.“너무 근심하지는 마십시오, 다 자기의 복을 받을 때가 있을 겁니다.”할아버지는 아저씨의 말에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유리 그 애는 원래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이 세고 준혁이 그놈도 성질머리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전에는 유리가 준혁이에게 매달려서 그렇지 지금은 그 애가 준혁이를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으니 준혁이가 또 무슨 복이 있겠나.”“너무 비관적이게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유씨 아저씨가 말했다.“내 손녀가 다른 늙은이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게 생겼는데 내가 어떻게 좋게 생각을 하겠나?”신유리는 할아버지가 아직도 자두가 그를 할아버지라고 못 부른 일에 대해 속을 썩이는 것을 모른 채 자두를 데리고 이신을 맞이하러 공항으로 꺼났다.이신은 오후 비행기로 성남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신유리는 잔뜩 날이 선 채로 대답했다.“당신이 여기 있으면 그냥 방해만 될 뿐이지 아무런 소용도 없어요.”서준혁은 날선 신유리의 말에 그녀를 묵묵히 쳐다만 보며 말을 했다.“기억나십니까? 외할아버님께서 전에 저한테 과분할 정도로 잘해주셨는데....”“네, 할아버지께서 서준혁 씨를 많이 아끼긴 했죠.”신유리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서준혁을 할아버지에게 소개를 시켜주는 순간부터 할아버지는 그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 간간히 들려오는 그의 소식에 한숨을 푹 내쉬기도 했었다.서준혁은 신유리으 대답을 듣고 눈빛에 다시 생기가 도는 듯싶었지만 신유리는 이내 다시 정정했다.“하지만 서준혁 씨 스스로로 말했잖아요, 다 예전의 일들이라고.”신유리는 유골함 앞에 놓인 많은 물건들을 보며 딱 봐도 서준혁이 가지고 왔다는 생각에 다시 말을 이어갔다.“여기서 까지 그쪽이랑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물건들 다 챙겨서 나가주세요. 외조부모님 쉬시는데 방해하지 마시고요.”“저는 그저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서준혁 씨, 아직도 정신이 안 드세요?”신유리는 깊게 숨을 내쉬더니 몸을 돌려 서준혁을 똑똑히 쳐다보며 행여나 외조부모님에게 방해가 될까봐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당신이 제 앞에 나타나는 것이 정말 죽기보다 싫다고. 그리고 제 외할아버지고 제 외할머니에요, 서준혁 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그녀는 서준혁의 앞에 서서 그가 싫은 티를 팍팍 내고 있었는데 마치 못 볼꼴을 본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서준혁은 신유리의 말에 온 몸이 굳어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신유리가 자신을 원망하고 화를 내고 급기야 혐오하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지금처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냉정함은 견디기 힘들었다.그는 신유리가 무서울 만큼 차갑고 무감정한 말투로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도 듣기가 싫었다.예전에 주변 사람들은 늘 서준혁에게 신유리와 많이 비슷한 것
신유리의 생일은 여느 때보다 더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보냈고 새벽이 다 되어서야 이미 잠은 든 자두를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자두를 안고 가는 신유리를 발견한 이신은 얼른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내가 안을까?”고기를 구워먹은 탓에 신유리의 옷에 베여버린 냄새와 그와 달리 고기를 안 좋아해 얼마 먹지 않아 깨끗하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이신의 옷.자두도 이제는 조금 커버려 체중이 꽤나 무거워 신유리가 안고 있기에는 무리가 있어 이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두를 안겨주었다.“고작 3개월 지났는데 얘 왜 이리 무거워졌어?”“3개월이나 지난 사실을 알고는 있었나보네.”이신이 묻는 말에 갈 길을 가던 임아중이 다시 돌아오더니 그에게 말을 이어갔다.“3개월이면 꽃도 다 폈다가 시들고 남은 시간이겠다, 너 이제 돌아와 놓고 그런 말 하지마. 자두가 크는건 당연한 거고 유리가 마음만 먹으면 둘째까지 낳았겠어.”임아중은 술을 조금 마시는 바람에 아무 말이나 막 내뱉었고 듣고 있던 신유리는 민망해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신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왜 웃어?”신유리는 웃는 이신을 째려보며 물었다.“다행히 아직 꽃이 안 시들 어서.”이신이 애매한 대답을 남겼고 신유리는 이신을 가만히 보며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했다.생일을 보낸 지 얼마 안지나 임아중과 다른 사람들을 밀린 업무가 있어 남주시로 떠나버렸다.이신도 따라갈 줄 안 신유리는 그가 며칠만 더 있다가 간다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너 성남에 뭐 더 볼 일 있어? 그때 되게 중요한 일 아직 못했다며.”신유리가 물었다.이신을 묻는 신유리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대답했다.“다른 일이 좀 있어서, 그리고 중요하다고 했던 일은 이미 다 해결했어.”“그래?”더는 묻지 않는 신유리를 본 이신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그녀에게 되물었다.“너는 어떤 중요한 일인지는 안 궁금해?”“사적인 일이야 아니면 공적인 일이야?”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신유리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려는 뜻이 하나도 없어 이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