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눈을 감고 아무리 기다려봐도 생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몇 초 뒤 임유진이 슬며시 눈을 떠보니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손 안 아파?”순간 임유진은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코끝이 시큰해졌다.강지혁은 항상 이렇게 그녀를 누구보다 더 소중히 대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그 다정함에 푹 빠졌을 때는 그 누구보다 매정하게 버려버렸다.“날 사랑하는 게 아니면 나한테 키스하지도 말고 널 때린 손이 아픈지 안 아픈지도 물어보지 마! 네가 이럴수록 나는 네가 더 싫어지니까!”임유진은 그를 힘껏 노려보고는 그의 손에 잡힌 손을 거칠게 빼냈다.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희고 붉은 얼굴에 몇 가닥 붙어있고 그 사이로 빨간 입술을 꽉 깨문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명백한 거부였다.강지혁은 순간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몸도 비틀거리다가 속에서 뭔가가 올라올 것 같아 입을 꽉 틀어막은 채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 화장실로 달려갔다.그리고 문이 닫힌 순간 겨워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셨으니 당연한 결과였다.임유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뺨을 내리친 그 감촉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맞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때린 사람이 이렇게 아픈 걸까.화장실에서 들리던 토하는 소리가 점점 멎어갔다. 하지만 강지혁은 어쩐 일인지 한참이 지나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은 혹시 그가 화장실에서 쓰러진 건 아닌가 싶어 그쪽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너... 너 괜찮아?”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임유진은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강지혁, 내 말 들려? 혹시 잠든 거야? 셋 세고 문 열게.”그녀는 손가락으로 셋을 센 다음 혹시 몰라 한 번 더 노크했다.똑똑.“나 들어간다?”임유진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급하게
“그럼 걱정이 아니라 오지랖이라고 생각해.”임유진은 말을 마치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다음 그를 침대까지 힘들게 끌고 와 눕혔다.강지혁은 확실히 어딘가 안 좋은 건지 침대에 눕자마자 마치 새우처럼 몸을 옆으로 웅크렸다. 잘생긴 얼굴은 고통 때문인지 잔뜩 일그러졌고 이를 꽉 깨문 탓에 얼굴에 힘줄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은 복부를 꽉 감싸고 있었다.임유진은 문득 전에도 위경련 때문에 그가 이렇게 아팠던 것이 떠올랐다.혹시 또 위경련인 건가?사실 오늘을 돌이켜보면 그럴 만도 했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모자라 강현수와 술을 마실 때 그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니 아마 공복에 술만 들이켰을 것이다.“너 위 아파?”임유진이 묻자 강지혁은 입을 꾹 닫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조금 젖은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비서님한테 연락해서 너 병원 데려가라고 할게.”“됐어.”그때 강지혁이 힘겹게 힘을 열었다.“너 나 안 사랑한다며, 나 원하지 않는다며, 내가... 싫다며? 그러면 내가 아픈걸 보고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훑어보았다.지금의 그는 무척이나 약해져 있고 얼굴은 창백한 것이 툭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그녀는 기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강지혁, 난 너랑 달라.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원하지 않아도, 심지어는 증오할 만큼 싫어해도 그 사람의 아픈 모습을 보고 기뻐하지는 않아.”임유진이 담담하게 말했다.“고 비서님한테 연락하는 게 싫으면 여기서 잠깐 기다려. 약 사올 테니까.”그녀는 말을 마치고 휴대폰과 열쇠를 들고 월세방을 나갔다.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작은 공간에 강지혁 혼자 남겨졌다.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왜 그녀의 말에 전혀 기뻐할 수 없는 거지?지금 약 사러 간 건 마음속에 남은 연민 때문인 걸까?그 순간 위가 또다시
임유진... 유진아...이렇게 아픈데 왜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웃는 얼굴만 떠오르는 것일까.왜 그녀의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한마디에,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그 한마디에 이토록 절망스러운 것일까.커다란 물웅덩이에 온몸이 빠진 기분이다. 어떻게든 발버둥 쳐보려고 해도 점점 더 깊게 가라앉아 기어코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다.그때 문이 열리고 이쪽으로 오는 발걸음 소리와 물건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그녀가 돌아온 걸까?늦은 밤에 그를 위해 약을 사러 갔다가 돌아왔던 그때처럼?그날 힘겹게 눈을 뜨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임유진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약 먹어. 약 먹고 나면 괜찮아 질 거야.”임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지고 이내 가녀린 손이 몸을 부축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강지혁은 코끝에서 스치는 익숙한 그녀의 향기에 천천히 두 눈을 떴다.두 눈에 그녀가 가득 담긴 순간 공허했던 마음이 단숨에 뭔가로 꽉 찬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이 여자를 갖고 싶다고, 이 여자를 곁에 두고 싶다고 소리치고 있었다.임유진은 약을 강지혁의 앞에 내려놓고 말했다.“이건 한 알만 먹으면 되고 이건 두 알 먹어야 해.”그녀가 약을 손에 올려놓고 건네주자 강지혁은 약을 보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며 오로지 그녀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 눈빛이 어쩐지 가슴을 꾹 짓누르는 것 같았다.“왜? 혹시 약 먹기 싫어서 그래?”전에 그가 약 먹는 걸 싫어한다는 말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만약 내가 앞으로 평생 누나가 원하던 동생이 된다고 하면? 그래도 날 버릴 거야?”강지혁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임유진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손에든 약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응.”이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어딘가 초연한 웃음을 지었다.“나한테 너는 동생이 될 수 없어.”임유진은 강지혁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담담하게 얘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시지 않을 것 같던 통증도 서서히 가라앉았다.강지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킨 후 침대에서 내려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왔다.숨소리가 고른 것을 보니 이미 잠이 든 것 같아 보였다.그는 허리를 숙이고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아 침대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그녀가 춥지 않게 옆에 있던 이불도 덮어주었다.강지혁의 시선은 임유진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아까 그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만약 그녀와 모든 게 끝이 나면, 그러면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그는 아까 살 이유가 뭐였는지 잊어버렸다.강지혁은 과거의 자신을 비웃듯 실소를 터트렸다.그의 생사는 여전히 그녀의 손에 달려있었다.헤어지기만 하면 인생의 주도권을 다시 돌려받고 그녀의 영향에서 벗어나 한낱 여자의 배신 때문에 목숨까지 포기해 버리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하지만 그건 오만한 생각이었다.그는 줄곧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고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그저 정신승리일 뿐이었다....다음 날, 고이준은 아침 댓바람부터 강지혁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임유진의 집 앞으로 왔다. 그러자 거기에는 벌써 강지혁이 대기하고 있었다.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강지혁의 뺨에 빨간 자국이 남아있다는 것이었다.고이준은 그걸 보더니 숨을 헙하고 들이켜고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그 빨간 자국은 누가 봐도 누군가의 손바닥 자국이었다.강지혁이 임유진에게 뺨을 맞았다는 사실에 고이준은 지금 상당히 놀라버렸다.S 시에서 강지혁의 얼굴에 손을 올리고 자국까지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하지만 상대가 임유진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지난번 임유진의 친구 한지영도 강지혁의 뺨을 때리고서 별 탈 없었으니 임유진이 때린 건 아마 벌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 수도 있다.잔인하고 매정한 강지혁이 임유진 앞에서는
언젠가 임유진이 강현수에게 활짝 웃어주며 다정하게 포옹하고 자신과 했던 것들을 강현수와 하며 심지어 강현수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릴까 봐 두려웠던 것일까?이러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강지혁은 견딜 수가 없다.사랑이라는 건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그런 거라는 걸 그는 톡톡히 느꼈다....임유진은 알람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은 어느새 소파가 아닌 침대 위에 있었다.강지혁이 침대까지 옮겨다 준 걸까? 물어볼 것도 없이 그 가능성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 방 안에는 강지혁이 어디에도 없다.머리맡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약이 없어진 걸 보니 그래도 다행히 약은 먹은 것 같았다.다만 나머지 약은 가져가지 않고 탁자 위에 그대로 있었다.지금쯤 아픈 건 다 나았을까?임유진은 속으로 그를 걱정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아침이 되었으니 고이준도 함께 있을 테고 정말 아픈 거라면 진작에 병원을 갔을 테니 그녀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임유진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로펌으로 출근했다.사무실에 도착하니 직장 동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녀를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었다.그러다 평소 궁금한 건 못 참던 여자 동료가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유진 씨 정말 강현수 씨랑 사귀는 거예요? 어제 퇴근했을 때 유진 씨 데리러 온 거 보고 다들 부러워죽겠다며 난리예요. 우리뿐만이 아니라 강현수 씨를 노리고 있는 연예인들도 엄청나게 부러워할걸요?”임유진은 한껏 과장하며 부러운 표정을 짓는 동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뒤에 쓸데없는 사족을 많이 붙이는 건 그녀가 강현수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이다.아무 말 없는 임유진을 보며 여자 동료가 다시 뭐라 얘기하려고 입을 열려던 그때 옆에 있던 누군가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어머, 한나 씨, 왜 그래요?”정한나는 다리를 절뚝이며 사무실 안
“그건 모르는 일이죠.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사랑을 만난 걸 수도 있잖아요. 강현수 씨가 여자친구한테 이토록 지극정성인 거 처음 아니에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강현수 씨는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문에 한 번도 부인하는 기사를 내지 않았잖아요. 이런 걸 종합해 보면 답 딱 나오지 않아요?”그럴싸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임유진을 부러워했던 눈길이 지금은 동정으로 변했다.정한나는 신이 나서 더 떠들어댔다.“그리고 배여진 그 여자 드라마 촬영할 때 강현수 씨가 같이 가줬대요. 물론 드라마 배역도 강현수 씨가 준 거고요. 그렇게 물심양면인데 만약 정말 유진 씨한테 마음이 있었다면 솔직히 우리 로펌에 출근시키는 것보다 로펌 하나 차려줄 것 같지 않아요? 앗...”정한나는 실컷 떠들어대다가 마지막에 못 할 말을 했다는 양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미안해요, 유진 씨, 나도 그냥 해보는 소리예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정말 강현수 씨가 조만간 유진 씨한테 로펌이라도 차려줄지...”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속에는 강현수가 너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조롱으로 가득했다.정한나의 말에 주변 동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강현수가 정말 임유진을 좋아한다면 이런 곳에서 변호사 비서나 하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그들은 임유진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모두 제자리로 가버렸다.임유진은 정한나의 말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일에만 몰두했다. 정한나는 신이 나서 혼자 얘기하다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자 다리를 절뚝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그때 누군가가 정한나를 향해 외쳤다.“어머, 한나 씨 지금 인기 검색어에 한나 씨 이름 올라왔어요!”그 말에 정한나가 뒤를 돌아 고개를 갸웃거렸다.기사를 확인한 동료들의 시선이 하나둘 정한나에게로 가서 꽂혔다.정한나는 다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기사를 확인했다. 인기 검색어에는 그녀의 이름뿐만이 아니라 세레나의 이름도 있었다.그 순간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동영상을 클릭
“한나 씨 우리한테는 유진 씨랑 사이좋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뒤에서 이런 짓을 해요?”“겉과 속이 다른 거죠. 뭐가 됐든 한나 씨 다시 봤어요.”동료들은 저마다 그녀에게 싸늘한 한마디를 내뱉고는 자리로 돌아갔다.정한나는 지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대로 가다가는 임유진을 로펌에서 내보내기 전에 자신이 먼저 잘릴 판이었다.정한나는 자리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더니 결국 오늘도 월차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한편 임유진은 정한나의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아까부터 손에 있는 자료들만 정리했다.며칠 뒤면 이재하의 재판이 열리게 된다. 소지혜는 여태 자신이 가해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경찰 측에서 재수사한 결과 그녀가 가해자라는 증거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모든 일이...임유진은 문득 타자를 멈추고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어젯밤 그녀는 이 손으로 강지혁의 뺨을 내리쳤다. 그리고 강지혁은 이 손을 바라보며 아프지는 않냐고 물었다.아파도 맞은 사람이 더 아팠을 텐데 말이다.‘어제 약 먹고 나서 아픈 건 좀 나았을까...?’‘세상에, 왜 또 걱정하는 거야! 그만 걱정해. 아예 생각하지 마, 임유진!’임유진은 머리를 거세게 흔들며 강지혁의 걱정을 떨쳐냈다.강지혁은 그녀의 인생에 잠시 들른 손님과도 같은 존재일 뿐이다.그러니 그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강씨 저택.고이준은 지금 상당히 불안한 얼굴로 별채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이곳으로 들어간 지 벌써 3시간째, 강지혁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오늘 있을 중요한 미팅 몇 건은 부득이하게 전부 취소되어 버렸다.오늘 임유진의 집에서 나온 뒤부터 강지혁은 어딘가 이상해졌다.고이준은 지금 임유진에게 전화해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체 무슨 충격을 받아 강지혁이 모든 일을 제치고 별채에만 들어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강지혁은 평소 특별한 날짜가 아닌 이상 별채 쪽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그
그때 적막을 깨고 휴대폰이 울렸다.강지혁은 전화를 받고 상대의 말을 듣더니 담담하게 알겠다는 한마디를 내뱉고 다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다시 위패를 바라보았다.“저는 역시 아버지 아들이 맞나봐요. 한 여자를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그 여자에게 버림받으면 살아갈 이유를 잃는 것을 보면. 하지만 저는 아버지처럼 죽을 생각은 없어요. 절대.”말을 마치고 강지혁은 별채에서 나왔다.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대기하던 고이준은 드디어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제야 활짝 웃었다.“대표님, 나오셨어요?”“노인네 병원으로 갈 거니까 차 대기시켜.”강지혁은 큰 표정 변화 없이 지시를 내렸다.“네, 알겠습니다.”몇 분 뒤, 강지혁을 태운 검은색 승용차가 강씨 저택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VIP 병실.허약한 몸의 노인은 지금 병상에 누워 의사의 말을 듣고 있다. 노인은 자신의 몸상태를 나열하는 의사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는 건지만 말해.”의사는 조금 난감한 기색을 표하며 답했다.“많게는 6개월 정도고...”“적게는?”강문철이 되물었다.“적게는 4개월 정도로 보입니다.”“알았어. 이 교수가 제안했던 치료 받을테니 이만 나가 봐.”강문철은 의사와 간호사들을 전부 내보낸 후 옆에 있는 비서에게 말했다.“이따 지혁이 오면 깨워.”“네, 알겠습니다.”한때는 S 시를 주름잡았던 전설의 인물이 지금은 잔뜩 쇠약해진 채로 병상에 누워 삶의 끝을 기다리고 있다.강지혁이 병실로 들어왔을 때 강문철은 자고 있었다.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야윈 모습이었다. 약 때문에 머리카락도 많이 빠졌고 볼은 살이 없어 푹 꺼져있었다. 누워있는 그의 주위로 죽음의 기운들이 감싸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확실히 늙으셨네.’허약해진 강문철을 보며 강지혁은 어쩐지 복잡한 기분이었다.강문철의 비서가 지시대로 깨우려고 하자 강지혁이 제지했다.“좀 더 주무시게 놔둬. 깰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
“임유진 씨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너를 설득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너와 직접 얘기하려고 들어왔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 간이 너한테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이경빈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탁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수술은 받아줘. 네가 수술을 받으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이경빈은 지금 오직 그녀가 살기만을 바랐다.그녀만 살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나한테 간을 기증해주면 수술 후에 후유증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평온한 그녀의 말투에 이경빈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수, 수술받으려고?!”“...응.”윤이와 김수영을 위해 그녀는 한번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간을 기증해주는 대신에 뭐 바라는 거 있으면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얘기해. 너한테 빚지는 건 싫으니까. 물론 내가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되면 그때는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들어줄 수 없게 되겠지만.”“아니! 넌 죽지 않아!”이경빈이 흥분해서 외쳤다.“분명히 괜찮을 거야. 네 골수를 이식받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이경빈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조건은? 그것부터 말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조건이라니, 그녀에게 간을 기증해주는 대신 바라는 게 있다고 하면 그녀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밖에 없다.그녀가 살 수 있다면 간 따위 몇 번이고 더 기증해줄 수 있다.“바라는 거 없어. 그리고 나한테 빚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너한테 빚진 걸 갚는 거니까. 너도 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잖아.”“그래? 그럼 서로 빚진 게 없는 거네? 알았어. 수술 무사히 끝나면... 우리 더는 보지 말자. 나는 더 이상 너랑
“유진 씨? 유진 씨가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탁유미가 깜짝 놀라며 임유진에게 물었다.“이경빈 씨 전화를 받고 왔어요.”임유진은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언니, 수술해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요.”“유진 씨!”탁유미는 갑작스러운 임유진의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윤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윤이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연한 표정이었다.“언니가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남은 시간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언니... 만약 수술에 성공하면 그때는 윤이가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언니, 만약 그때 내가 배 속의 아이를 한 명 지우는 걸 택했으면 어쩌면 아이들이나 나나 조금 더 안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랬으면 결코 지금 같은 행복감은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의사 선생님들의 권고에도, 혁이의 반대에도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쉽게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이도 언니가 그러기를 바랄 거예요. 세상에 엄마를 일찍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으니까요. 윤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아줘요.”탁유미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윤이는 임유진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다.“엄마, 윤이는 엄마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윤이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윤이가 키도 크고 힘도 세지면 그때는 윤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윤이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그때 병실
임유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얼른 답했다.“알겠어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게요!”“임유진 씨...”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기어들어 갈 듯한 이경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웬만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데 지금은 임유진 씨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 좀 할게요. 제발... 제발 유미 좀 설득해주세요. 유미가 내 간을 받고 수술할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임유진은 그의 간절한 부탁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그간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경빈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남자인지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다.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탁유미의 목숨 때문에 제발이라는 말까지 하며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만약 이대로 탁유미가 죽게 되면 이경빈은 어쩌면 평생 지옥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알겠어요.”“무슨 일이야?”전화를 끊자마자 옆에 있던 강지혁이 물었다.“유미 언니 지금 병원에 있대. 지금 바로 간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언니가 위험하대.”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챙겼다.“언니가 수술받을 수 있게 설득하러 가야겠어.”“같이 가.”“너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저녁에 다시 하면 돼. 너 혼자 보내는 게 걱정돼서 그래.”“내가 왜 혼자야. 네가 붙여둔 경호원분들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그래도 걱정돼.”강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그는 마음 같아서는 외딴 섬을 하나 사들여 임유진을 그 섬에 데리고 가 자신의 시야 안에서만 있게 하고 싶었다.임유진은 그의 고집스러운 말에 결국 알겠다며 같이 밖으로 향했다.병원.탁유미가 있는 병실 앞으로 뛰어와 보니 문밖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꽉 쥐고 있는 이경빈의 모습이 보였다.“언니는 어떻게 됐어요?”임유진이 다가와 물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 임유진을 쳐다보았다.임유진은 이경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움찔했다.이경빈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대로 탁유미를 안아 들고 윤이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엄마 데리고 병원으로 갈 거야. 윤이도 엄마 아픈 거 싫지?”윤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빈을 따라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차 문이 열린 후 이경빈은 탁유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고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는 시트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것이 아닌 몸을 앞으로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조금만 참아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 구해줄 거예요.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탁유미는 그 말에 남은 힘을 끌어다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모자의 대화에 이경빈은 가슴이 미어져 서둘러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 그는 혹여 아픈 소리를 내면 윤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보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탁유미는 그와 나란히 걷던 도중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그녀는 괜찮다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었다.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녀의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졌고 이에 이상함은 여긴 이경빈은 그녀의 발을 힐끔 봤다가 그제야 퍼렇게 멍든 그녀의 발목을 발견했다.“바보야?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이경빈의 추궁에 탁유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아프다 그러면 또 걱정할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는 집에 가서 약 바르면 금방 나아.”탁유미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자기보다는 옆에 사람을 더 위하며 자기가 받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그녀는 그런 여자였다.이경빈은 차량이 빨간 불에 멈출 틈을 타 티슈를 꺼내 탁유미의 땀을 닦아주었다.많이 아픈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땀 범벅이 되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빨에게 혹사당한 입술은 빨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