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봤을 때 강지혁은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두 사람이 있는 그 공간은 감히 침범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눈에는 오로지 강현수밖에 없는 듯했다.“하지만 아쉽게도 유진이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강지혁은 강현수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지금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미래 일은 그 누구도 모르는 거야.”강현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그보다 너는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두 사람 헤어졌잖아. 이제 끝난 사이잖아.”그 말에 강지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지혁아, 난 너한테 많은 기회를 줬어. 그동안 몇 번이나 유진이 손을 놨었으니까.”강현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고 말했다.“헤어지는 걸 택한 건 너야. 나는 더 이상 유진이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놓아줄 생각이 없어? 하하... 뭐 집안이라도 걸게?”“너는 너희 집안 걸 수나 있고?”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그때 사장이 마침 타이밍 좋게 나타나 강현수가 추가 주문한 음식들을 올렸다.그는 이 세 명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잘 몰랐지만 가게 앞을 봉쇄한 것을 보면 뭐가 됐든 지금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사장님, 소주 두 병 주세요.”사장이 몸을 돌린 그때 강현수가 뜬금없이 술을 달라고 했다.“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사장은 서둘러 소주 두 병을 들고 왔다.그들에게는 와인이나 양주를 건네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아쉽게도 이곳에 그런 고급술은 없었다.강현수는 소주병을 따더니 강지혁을 보며 물었다.“술 한잔할래? 너랑 술 마시는 것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강지혁은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그러게. 너랑 술 마시는 것도 오랜만이네. 기왕 이렇게 만난 건 한잔하지 뭐.”그러고는 강현수가 따라주는 술잔을 잡았다. 그러고
고작 7만 원으로 강지혁과 강현우 이 두 남자의 밥을 샀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임유진은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 지 웃음을 터트리고는 월세방으로 향했다.그녀는 피곤이 몰려와 화장실에서 빠르게 씻더니 곧바로 침대 위에 누웠다.지금 그녀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몸이 힘든 것이 아닌 정신이 힘들었다.임유진은 어제오늘 두 날 연속으로 강현수의 열렬한 사랑 고백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강현수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어쩌면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은 짧게는 몇 개월일 수도 있고 길어봤자 1년 또 혹은 2년 정도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임유진은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고 버림받는 그 아픔이 너무 고통스러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한번은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 두 번도 힘들지만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세 번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잡념을 집어 던지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그러다 슬슬 잠에 들려는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노크 소리는 꽤 다급했다.임유진는 눈가를 비비고 문 쪽으로 다가가 물었다.“누구시죠?”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10시가 넘었다.“유진 씨, 저 고이준입니다.”고이준의 목소리에 그녀가 멈칫하며 잠깐 망설이더니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의외였던 건 문을 열고 보니 거기에는 고이준 뿐만이 아니라 강지혁도 함께 있었다. 그는 지금 술에 취해 상체를 고이준에게 기대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에는 짙은 취기가 어려있었다.생각해 보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강지혁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여기로 오는 것이 아닌 강씨 저택으로 가셔야죠.”임유진이 말했다.고이준은 난감한 듯 웃었다.그가 왜 그걸 모를까.문제는 강지혁이 기어이 이곳으로 오겠다고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임유진의 월세방이 아니면 비서직에서 잘라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대
임유진은 고이준에게 빨리 강지혁을 부축하라는 시선을 건넸다.하지만 고이준은 어색하게 웃더니 그녀에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 아침 데리러 올 테니 혹시 밤사이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고이준은 자신의 명함을 신발장 위에 올려놓더니 친절하게 문까지 대신 닫아주고 그렇게 자리를 떠나버렸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고이준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강지혁을 이곳에서 재우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강지혁과 이곳에서 하룻밤을?임유진은 이를 꽉 깨물더니 일단 그를 부축해 침대 쪽으로 향했다.고이준은 차에 올라타고 임유진의 집을 바라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생각해보면 그 역시 강지혁이 취한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는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인 그런 사람이었다.그런 사람이었기에 강문철의 엄격한 교육도 버텨내고 결국에는 강씨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그런 강지혁이 오늘은 강현수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 두 사람 모두 지기 싫어하는 어린애 같았다.만약 그 모습이 매스컴을 타게 되면 사람들은 아마 경악을 할 것이다.강현수도 술자리에서 일어날 때 보니 강지혁과 다를 것 없었다.고이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강현수가 임유진을 사랑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게다가 제일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은 바로 강지혁이었다. 이미 헤어진 사람을 대체 왜 놓지 못하는 걸까.대체 임유진은 무슨 매력이 있어 두 남자를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게 만드는 걸까!고이준은 이제 언젠가 임유진이라는 여자 때문에 S 시가 발칵 뒤집힌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다만 임유진은 강현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만약 그녀가 강현수를 사랑하게 되면...고이준은 가설만 제기했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아버렸다.이러한 가능성은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은은한 불빛 아래 임유진은 지금 침대 위에 고이
그 마음은 그를 사랑하게 되고부터 더욱더 커졌다.강지혁이 대단한 것도 알고 그녀보다 가진 것도 많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임유진은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자신의 온 힘을 다해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만약 그가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를 전부 제거해서라도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사랑해주며 그녀에게 그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녀의 광대 짓에 지나지 않았다.강지혁은 처음부터 그녀가 지켜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그에게 그녀는 그저 장기 말일 뿐이었다.임유진은 쓰게 웃더니 허리를 숙여 강지혁의 신발을 벗겨 주었다. 그리고 이대로 이불까지 덮어준 다음 그녀는 오늘 밤 소파에서 잘 생각이었다.그에게 이불을 덮어주려는데 하필이면 오늘따라 이불이 벽 쪽에 놓여 있는 바람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몸을 넘어 이불을 가져와야 했다.그렇게 이불 끝자락을 짚고 다시 허리를 펴려는데 어느샌가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검은색 눈동자는 취기 때문인지 예쁘게 일렁거렸다.“유진아...”강지혁은 입을 열고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임유진은 순간 몸이 얼어붙어버렸다. 그러다 빠르게 다시 정신을 차리려는데 그가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얼떨결에 그녀의 상반신은 강지혁의 위에 엎드리게 되었다.임유진이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자 그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 탓에 그녀는 또다시 그의 품에 안기고야 말았다.“유진아, 유진아... 강현수 사랑하지마...”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술향기가 배어있었다.“강현수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사랑할 생각 없어. 이제 만족해? 이불 덮어 줄 테니까 빨리 이 손 풀어.”임유진은 지금 한시라도 빨리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그 누구도... 사랑할 생각이 없어?”강지혁은 혼자 그녀의 말을 되뇌더니 갑자기 몸을 옆으로 뒹굴어 임유진의 몸을 위에서 짓눌렀다.“그 말은 나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뜻이야?”강지혁은 그녀에게 몸무게의
“그러면... 너도 날 버릴 거야?”강지혁은 입술을 달싹이다 힘겹게 이 말을 내뱉었다.버린다고?이 말이 임유진에게는 우습기 짝이 없었다.강지혁이 어떤 사람인데, 그리고 애초에 그녀는 그를 가진 적도 없다.“너 진짜 취했구나. 빨리 비켜. 지금 시간도 늦었...”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갑자기 아래로 확 다가왔다. 두 코가 거의 맞닿을 그런 거리였다.“취했다고?”강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그런 표정을 지었다.“나 안 취했어. 멀쩡해.”안 취했다고, 멀쩡하다고는 하지만 제정신이라면 그런 말을 내뱉을 리가 없다.“나 버리지 마. 응? 유진아...”그는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애걸하듯 말했다.버리지 않겠다는 그녀의 한마디가 지금은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는 듯이 말이다.강지혁이 술에 취했다는 걸 알지만, 어쩌면 내일 아침이 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걸 알지만 임유진은 그럼에도 결국 이 말을 뱉어내고야 말았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데? 널 버리지 말아 달라고? 날 먼저 버린 건 너야!”그의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하지만 임유진의 말을 계속되었다.“전에 너를 원했던 건 너를 내 가족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너를 사랑해서였어. 하지만 지금은 널 가족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널 사랑하지도 않아. 그리고 더 이상 나는 널 원하지 않아.”그렇다. 그를 사랑하지도 않고 그를 원하지도 않는다.이 말은 그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고 그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다.강지혁의 눈가가 점점 빨갛게 변해버렸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귀를 타고 들어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도 않고 그를 원하지도 않는다...순간 심연 깊숙이 있던 두려움이 그의 몸을 덮쳤다. 그는 마치 자신이 뭘 하든 눈앞에 있는 여자를 곁에 둘 수 없을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그녀는 이러면 안 된다!자신의 곁을 떠나면 안 된다!“읍...”임유진은 갑작
하지만 눈을 감고 아무리 기다려봐도 생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몇 초 뒤 임유진이 슬며시 눈을 떠보니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손 안 아파?”순간 임유진은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코끝이 시큰해졌다.강지혁은 항상 이렇게 그녀를 누구보다 더 소중히 대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그 다정함에 푹 빠졌을 때는 그 누구보다 매정하게 버려버렸다.“날 사랑하는 게 아니면 나한테 키스하지도 말고 널 때린 손이 아픈지 안 아픈지도 물어보지 마! 네가 이럴수록 나는 네가 더 싫어지니까!”임유진은 그를 힘껏 노려보고는 그의 손에 잡힌 손을 거칠게 빼냈다.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희고 붉은 얼굴에 몇 가닥 붙어있고 그 사이로 빨간 입술을 꽉 깨문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명백한 거부였다.강지혁은 순간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몸도 비틀거리다가 속에서 뭔가가 올라올 것 같아 입을 꽉 틀어막은 채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 화장실로 달려갔다.그리고 문이 닫힌 순간 겨워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셨으니 당연한 결과였다.임유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뺨을 내리친 그 감촉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맞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때린 사람이 이렇게 아픈 걸까.화장실에서 들리던 토하는 소리가 점점 멎어갔다. 하지만 강지혁은 어쩐 일인지 한참이 지나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은 혹시 그가 화장실에서 쓰러진 건 아닌가 싶어 그쪽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너... 너 괜찮아?”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임유진은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강지혁, 내 말 들려? 혹시 잠든 거야? 셋 세고 문 열게.”그녀는 손가락으로 셋을 센 다음 혹시 몰라 한 번 더 노크했다.똑똑.“나 들어간다?”임유진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급하게
“그럼 걱정이 아니라 오지랖이라고 생각해.”임유진은 말을 마치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다음 그를 침대까지 힘들게 끌고 와 눕혔다.강지혁은 확실히 어딘가 안 좋은 건지 침대에 눕자마자 마치 새우처럼 몸을 옆으로 웅크렸다. 잘생긴 얼굴은 고통 때문인지 잔뜩 일그러졌고 이를 꽉 깨문 탓에 얼굴에 힘줄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은 복부를 꽉 감싸고 있었다.임유진은 문득 전에도 위경련 때문에 그가 이렇게 아팠던 것이 떠올랐다.혹시 또 위경련인 건가?사실 오늘을 돌이켜보면 그럴 만도 했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모자라 강현수와 술을 마실 때 그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니 아마 공복에 술만 들이켰을 것이다.“너 위 아파?”임유진이 묻자 강지혁은 입을 꾹 닫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조금 젖은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비서님한테 연락해서 너 병원 데려가라고 할게.”“됐어.”그때 강지혁이 힘겹게 힘을 열었다.“너 나 안 사랑한다며, 나 원하지 않는다며, 내가... 싫다며? 그러면 내가 아픈걸 보고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훑어보았다.지금의 그는 무척이나 약해져 있고 얼굴은 창백한 것이 툭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그녀는 기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강지혁, 난 너랑 달라.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원하지 않아도, 심지어는 증오할 만큼 싫어해도 그 사람의 아픈 모습을 보고 기뻐하지는 않아.”임유진이 담담하게 말했다.“고 비서님한테 연락하는 게 싫으면 여기서 잠깐 기다려. 약 사올 테니까.”그녀는 말을 마치고 휴대폰과 열쇠를 들고 월세방을 나갔다.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작은 공간에 강지혁 혼자 남겨졌다.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왜 그녀의 말에 전혀 기뻐할 수 없는 거지?지금 약 사러 간 건 마음속에 남은 연민 때문인 걸까?그 순간 위가 또다시
임유진... 유진아...이렇게 아픈데 왜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웃는 얼굴만 떠오르는 것일까.왜 그녀의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한마디에,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그 한마디에 이토록 절망스러운 것일까.커다란 물웅덩이에 온몸이 빠진 기분이다. 어떻게든 발버둥 쳐보려고 해도 점점 더 깊게 가라앉아 기어코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다.그때 문이 열리고 이쪽으로 오는 발걸음 소리와 물건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그녀가 돌아온 걸까?늦은 밤에 그를 위해 약을 사러 갔다가 돌아왔던 그때처럼?그날 힘겹게 눈을 뜨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임유진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약 먹어. 약 먹고 나면 괜찮아 질 거야.”임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지고 이내 가녀린 손이 몸을 부축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강지혁은 코끝에서 스치는 익숙한 그녀의 향기에 천천히 두 눈을 떴다.두 눈에 그녀가 가득 담긴 순간 공허했던 마음이 단숨에 뭔가로 꽉 찬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이 여자를 갖고 싶다고, 이 여자를 곁에 두고 싶다고 소리치고 있었다.임유진은 약을 강지혁의 앞에 내려놓고 말했다.“이건 한 알만 먹으면 되고 이건 두 알 먹어야 해.”그녀가 약을 손에 올려놓고 건네주자 강지혁은 약을 보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며 오로지 그녀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 눈빛이 어쩐지 가슴을 꾹 짓누르는 것 같았다.“왜? 혹시 약 먹기 싫어서 그래?”전에 그가 약 먹는 걸 싫어한다는 말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만약 내가 앞으로 평생 누나가 원하던 동생이 된다고 하면? 그래도 날 버릴 거야?”강지혁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임유진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손에든 약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응.”이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어딘가 초연한 웃음을 지었다.“나한테 너는 동생이 될 수 없어.”임유진은 강지혁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담담하게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