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준은 강지혁에게 사과하려 했지만 강지혁을 전혀 만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임유진이 사는 임대주택 앞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벤틀리 차 한대가 임대주택의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있고, 누군가 임대주택에서 내려왔을 때 급히 차에서 내려 맞이했다.“강 대표님, 그 전의 일은 여동생이 철이 없는 것이니 부디 용서해주세요.”소민준은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소 씨 가문을 봐달라고요?”강지혁은 담담하게 콧방귀를 뀌었다.“제시하고 싶은 조건을, 얼마든지 얘기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잘생긴 눈으로 차갑게 쳐다보는 순간, 소민준은 피가 멎는 느낌이 들었다. 강지혁의 눈빛은 마치 맹수처럼 느껴져 숨조차 감히 크게 쉬지 못했다.“그러고 보니 내가 신세를 진 것 같네요?”강지혁이 갑자기 말했다. “신세요?”소민준은 언제 강 대표님에게 신세를 지게 했는지 몰랐다.“이렇게 해요, 이번에 소 씨 가문을 봐줄 수 있어요. 소민영이 그쪽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돼요.”강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소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여동생을 약혼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했다. 비록 체면에 영향이 가지만 핑계를 대 얼버무릴 수 있으니 이 대가는 정말 아주 작다고 할 수 있다.“강 대표님 감사합니다.”소민준은 얼른 말했다.“나한테 고마워하지 마요, 내가 고마워해야죠.”강지혁은 한 손으로 소민준의 어깨에 걸치고 천천히 몸을 기울여 소민준의 귓가에 다가가,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리고 고마운 일이 또 있어. 그때 유진이와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헤어져서 고마워. 네가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좀 더 골치 아팠을 거야.”강지혁은 이 말을 평화롭게 했는데 마치 친구 사이의 잡담처럼 감사를 표시했다.그러나 소민준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만약 애초에 그가 임유진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은 강지혁이 대적하려는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설마 이것이 강지혁이 방금 말한 그 신세를 졌다는 것인가?강지혁이 주택단지를 떠
소민영의 협박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소민영 씨라고 하니 됐어요.”말이 끝나자 그 사람은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그럼 오른발을 부러뜨려. 동영상에서 뻗은 발이 오른발이야.”‘뭐…… 무슨 뜻이지?!’소민영은 매우 놀랐다. 설마 이 사람들은 협박하러 온 것이 아닌가?잠시 후,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룸에서 울렸다…….————임유진은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 열이 마침내 내렸다.강지혁이 입을 열었다.“열이 내려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누나를 업고 다시 병원에 갔을 거야”.“나…… 어젯밤에 열이 났어?”임유진은 중얼거렸다.“응, 열이 나고, 열 때문에 헛소리도 많이 했어.”그가 말했다.그녀는 깜짝 놀랐다.“내…… 내가 무슨 말을 했어?”그녀가 설마 하면 안 될 말을 하지 않았겠지?“누나가 얌전히 착한 아이가 될 거랬어. 그분이 누나 옆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그가 말했다. 눈빛에는 오히려 보기 드문 장난기가 담겼다.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누나 걱정하지 마. 누나가 착한 아이가 되지 않아도 내가 누나와 함께 있을 거야.”강지혁은 유유히 말을 뱉었다.임유진의 얼굴은 여전히 빨갛지만 의외라는 듯 강지혁을 보고 있었다.“왜?”그가 말했다.“왠지 네가 예전과 좀 다른 것 같아. 농담도 할 줄 알고.”그녀가 생각했다.그는 마치 자신도 그 변화를 의식한 것처럼 멍해졌다.그리고 그의 변화는 그녀 때문인가?그는 눈앞의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기울였다.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붙을 뻔했다.“아!”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지금 거동이 불편하다는 것을 잊어버렸다.그의 한 손은 제때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지만, 오히려 그녀를 더욱 품속으로 끌어당겼다.그녀는 가까운 곳에 있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극도로 아름다운 눈썹, 긴 속눈썹, 그리고 칠흑 같은 눈동자 속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맙소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한 거지.’“너무 가까워서 이상하게 느껴져.”임유진이 말했다.“그래.”그가 손을 놓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볼을 만졌는데, 매우 뜨거웠다.“참, 누나, 아까 가까웠을 때 키스하고 싶었어?”그가 갑자기 질문하자 그녀는 순간 멍해졌다.새까만 눈동자가 깜박거리자 그녀는 손바닥 아래로 볼이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워?”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나…… 나는 당연히…….”“누나라면 난 좋아.”그가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나는 다른 여자가 나에게 키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러나 만약 누나라면 나는 괜찮아.”햇빛이 그 좁은 유리창을 통해 방안으로 쏟아져 그의 몸에 떨어졌다.그의 표정은 마치 그녀에게 그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지했다.한순간, 그 뒷부분의 ‘너를 동생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마치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오후에 임유진은 아주 한가했다. 휴대전화를 닦을 때 소민영에 관한 뉴스를 보았다. 뉴스에서 소민영이 어젯밤에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다. 어떤 사람에게 미움을 사서 한쪽 발이 골절이 되었다고 하는데 치료 후에 또 어떤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이 때문에 며칠 뒤 소 씨 가문과 진 씨 가문 두 집안의 약혼식에 소민영은 참석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기사를 내보낸 파파라치 기자는 소민영이 도대체 누구에게 미움을 샀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소 씨 가문의 태도는 지금 모호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일을 추궁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래서 이 기자는 소민영이 미움을 산 사람은 아마도 배경이 소 씨 가문 위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소 씨 가문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임유진은 이 뉴스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들어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쳤을 때, 그는 소민영이 대가를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못해. 오직 자신에게 의지해야만 아무런 실망도 없을 거야.”그렇지 않으면 기대가 커질수록 실망도 커진다.“그런데, 나는 누나의 배후가 되고 싶은데, 어떡하지?”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고 한가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만약 혁이라면…….”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좋아, 나는 앞으로 혁이가 내 배후가 돼주기를 기다릴게.”“왜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었어?”그가 물었다.“혁이는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니까, 왜냐하면…….”그녀는 잠시 주춤했다.“너는 어쨌든 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 그렇지?”그는 그 말을 듣고 낮게 웃었다.“맞아, 나는 누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밤, 강지혁은 임유진이 깊이 잠든 것을 본 후에야 임대주택을 나와 임유진이 사는 임대주택에서 멀지 않은 한 집으로 왔다.다만 임유진의 그 좁은 임대주택과 달리 이 스위트룸은 넓고 밝으며 훨씬 크고 인테리어도 상당히 신경을 썼다.그리고 이때 고이준은 방에서 강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리자마자 문을 열고 BOSS를 맞이했다.고이준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이 BOSS 는 평소에 아무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는데 신분을 낮춰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임유진을 돌보기 위해 뜻밖에도 직접 이 동네의 집 한 채를 샀다. 그리고…… 그것은 임유진이 잠든 틈을 타서 편리하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고이준은 낮에 회사의 일을 보고하고 있다. 보스는 낮에 임유진을 돌보느라 바쁘니 말이다.강지혁은 한들으면서 신속하게 지시를 내린 뒤 고이준에게 직접 해외지사의 임원들과 연락해 영상회의를 진행하라고 분부했다.그러자 잠시 후 해외 지사 임원들이 스크린에 등장하며 회의를 시작했다.그러나 어떤 임원들은 강지혁이 지금 처한 배경에 대해 비교적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이 방의 인테리어는 비교적 정교한 편이지만, 그것은 단지 평범한 소시민에 비할 뿐
바로 그때 강지혁이 통화를 끝내고 고이준에게 말했다.“오늘 못다 한 회의는 고비서가 마무리하고 정리해서 나한테 전해줘.”“강 대표님은요?”“임유진이 잠에서 깨고 지금 나를 찾고 있어,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지혁이 말을 이었다.“회의의 대체적인 흐름은 이미 파악을 끝냈고 자잘한 문제는 네가 알아서 처리해 줘.”말을 마치고 지혁은 곧장 방을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해외 고위층들은 대표가 떠나는 모습에 다시 술렁였다.그리고 이준의 등장에 사람은 저마다 입을 열었다.“고 비서,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강지혁 대표는 어딜 가시는 겁니까?”“아까 누구의 전화였습니까?”“방금 통화하신 모습을 보아하니 연애 중인 게 분명해요.”해외 로맨티스트가 입을 열었다.이준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자자, 회의를 이어가도록 하죠.”‘연애? 대표님이 지금 연애를 하는 거라고 할 수 있나?’착잡해진 이준이었다.정말 지혁이 유진이랑 연애라도 한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전 도시가 술렁일 게 분명했다!-전셋집에서.유진은 이제야 돌아온 지혁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왜 이렇게 늦었어? 일어났는데 없어서 깜짝 놀랐잖아.”‘사고라도 생긴 줄 알았네.’“잠이 오지 않아서 밖에 나갔다 왔어.”지혁이 대답하며 방금 침대에서 내려온 유진을 다시 공주님 안기로 침대 위로 조심스레 올려놓았다.“이젠 어디도 가지 않을 테니까 다시 자. 옆에 꼭 붙어있을게.”“다음에 내가 잠이 들었는데 나갈 일이 생기면 쪽지라도 남겨줘.”“알겠어.”지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누나, 나 내일 저녁 약속이 있어. 잠시 나갔다 올게.”“회사 일인 거야?”유진이 물었다.“그런 셈이지.”“그런데 크게 중요한 약속 자리는 아니야. 참석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긴 한데.”“아니야, 일 보러 가. 나 혼자 있어도 돼. 이틀 동안 발이 크게 아프지도 않았어. 이젠 가볍게 움직일 수도 있는걸.”오히려 지혁이 계속 품에 껴안고 옮겨주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강지혁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지혁에겐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고이준은 이런 지혁도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알고있다. 예를 들어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 때와 같은 상황에서 였다.이준은 강 대표의 눈은 늘 차가운 게 아니라 예외인 경우도 있다는 그때 알아차렸었다.“대표님, 차는 이미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어요.”이준이 말했다.“그럼 이만 나가지.”지혁이 덤덤하게 말했다.오늘 밤엔 소씨 가문과 진씨 가문, 양가의 약혼식이 있었다. 전에는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소민준, 유진과 만났었던 남자. 유진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지혁은…… 일말의 가능성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유진과 민준이 다시 만날 가능성이 단 1%도 없었으면 했고, 오늘 밤 이야말로 그 남은 1%의 가능성마저 말살되는 날이었다.그러니 이 약혼식을 지혁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유진은 전셋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따분한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들고 무료하게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다.오늘 모든 소셜 미디어에서 소씨 가문과 진씨 가문의 약혼식에 대한 기사를 떠들썩하게 말하고 있었다. 비록 약혼식에 불과했지만 재벌에게 있어 이러한 약혼식은 거의 결혼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약혼식은 결혼 전의 작은 절차일 뿐이었다.유진은 기사에 실린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민준이 꿈에 그리던 약혼식 사진이었다.하얀색 예복을 입은 진세령과 하얀색 턱시도 차림의 민준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한 쌍의 어울리는 커플 같아 보였다.기사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부러운 마음을 담은 댓글을 썼다.“잘생기고 예쁘고 돈 많은 사람들의 약혼이라, 정말 재벌의 스케일은 다르네!”“너무 어울린다.”“진세령이 고른 남자인데 당연히 대단한 사람이겠지!”세령의 팬들은 오늘의 약혼식이 얼마나 호화로웠는
어릴 때부터 임유진은 아버지의 칭찬을 갈구하고 새어머니의 미움을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갔다. 많은 것을 얻었지만 너무 피곤한 삶이었다.소민준과의 연애가 유진에게 남긴 건, 세상에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혁은 유진을 또다시 의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혁을 떠올리기만 해도 유진은 슬그머니 미소를 짓게 되었다. 출소 이후 가장 행운이었던 건 아마도 혁을 만난 것일 것이다.유진은 이러한 생각을 하며 웹페이지를 아무렇게나 둘러보고 있는데 호텔 입구에서 강지혁을 목격했다는 글을 확인했다. 지혁의 주변에는 경호원으로 둘러싸여 사진 촬영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기자들도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했다고 했다.만에 하나 찍힌 사진은 현장에서 모조리 삭제되었고 이는 너무 횡포다운 행동이었지만 지혁의 이러한 횡포는 모두 자본에서 나온 것인 만큼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이 목격 글을 올린 사람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혁의 뒷모습을 촬영했다고 했다.지혁은 예전부터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인터뷰를 자주 하지 않기로 소문난 신비주의자였다.심지어 유진이 지혁의 약혼녀 진애령을 죽일 뻔한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가던 해에도 유진은 지혁을 만나지 못했었다.법정 내내 지혁은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었다.한지영의 말에 따르면, 일전에 지혁을 만나 진애령의 죽음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지혁을 찾아갔으나 얼굴 한번 만나보지 못하고 쫓겨났었다고 했다.유진은 가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뒤집어 보며 정말 헛웃음이 나왔다. 지혁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유진의 인생은 무슨 이유인지 지혁과 계속해서 연결된 것 같았다. 유진이 사고에 휩쓸리고 아무도 유진을 변호하지 않아 감옥에 수감되고 감옥에서 온갖 수모를 당한 것도 어쩌면 지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유진은 그 게시물을 가장 아래로 당겨 찍힌 사진을 확인했다. 경호원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그 뒷모습이 어쩐지 눈에 익숙했다.넓은 직각 어
“촉이 틀렸나 보지 뭐.”강현수가 힐긋 시선을 돌리자, 연회장 안을 두리번거리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이 자리에도 있어. 소개해 줄까?”강지혁이 현수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임유라?”“설마 아는 사이야?”지혁의 반응에 현수가 오히려 의아한 반응이었다. 지혁과 유라의 연결고리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에.“그런 셈이지.”지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네 새 여자친구분 말이야. 네가 그 사람한테 정말 진심이라면 앞으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해줘. 사고가 벌어진다면 너라도 감당하지 못할 거야.”“널 건드린 적 있어?”현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지혁을 바라보았다.“날 건드렸다면 지금 이 자리에 멀쩡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아?”지혁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앞으로의 처신은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이 말을 끝으로 지혁이 그 자리에서 벗어났고 마침 유라가 현수를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왔다.“현수야!”유라는 현수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연회장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유라는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공인들이며, 연예계의 유명 인사들을 눈에 담았다. c급 연예인으로서 유라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꿈만 같았다.그리고 유라는 이 모든 게 현수 덕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도착해서 연락하지 그랬어. 그러면 문 앞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현수가 손을 들어 유라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유라는 지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유명 인사와 연회장을 함께 누비고 있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다들 강현수가 연예계의 큰손이라고 했어. 그의 눈에 든 사람이면 무조건 대박이 나고!’그리고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촬영장에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무명 배우 신세이던 유라는 현수를 만나고 촬영장 스태프들의 명백한 태도 변화를 느꼈다.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들어오자마자 네가 보였는 걸.”유라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현수의 팔에 손을 걸었다.“아, 오늘 유명한 연예인들 많이 만났어. 전에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
탁유미는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이경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을 반대로 잡아당겼다.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도저히 잡아당겨 지지를 않았다.이경빈은 이대로 그녀의 옷을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꽉 쥐고 놓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경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손 다치고 싶지 않으면.”경호원은 그녀의 눈빛에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의 옷을 꽉 잡고 있는 이경빈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이경빈은 경호원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나 원망하는 거 알아. 당연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날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난 너랑 할 얘기 없어.”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이경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옷을 꽉 잡은 손이 경호원의 힘으로 하나둘 펴지며 서서히 고통이 일고 있는데도,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옷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대로 놓아주면 다시는 그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까 봐, 그녀와는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날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탁유미는 제 옷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는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었다면 억지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항상 네 기분만 중요하고 네 생각만 중요한 사람이었어! 존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마치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탁유미는 옷을 정
이경빈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인수로만 놓고 보면 이경빈 쪽이 훨씬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경호원들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특정 인원들의 출입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는 강지혁의 명령을 받았으니까.“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탁유미가 걸어 나왔다.강지혁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경빈 대표님은 저희가 금방 되돌려보내겠습니다.”그들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갖췄다.탁유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턱 쪽에 수염이 까끌까끌 나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으며 다크서클은 물론이고 눈가도 엄청 빨개 있었다.이제껏 줄곧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세팅하고 다니던 남자였는데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며칠 만에 보는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으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더 힘이 없어 보였다.게다가 이마에는 까진 상처가 있었는데 복도 조명 때문에 더 잘 보였다.이경빈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에 마치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일었다.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는 그날 그의 명령으로 머리가 조아려졌을 때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그렇게도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억지로 그녀의 무릎을 꿇리고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그날 경호원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런 수모를 줬을까.왜 등신처럼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고 공수진에게 사과하게 했을까.이경빈이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 탁유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왜, 또
주원호의 말에 이경빈의 몸이 움찔 떨렸다.탁유미는 그저 복수대상일 뿐이라고?아니. 탁유미는 그에게 단지 복수대상뿐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다.이경빈은 심장이 점점 더 세게 아파 와 이윽고 벽에 몸을 기댔다.꼭 이 통증에 잠식되어가는 듯한 기분이다.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자신이 탁유미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한때는 고작 원수 집안의 딸일 뿐인 여자라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따위는 금방 지워질 줄 알았다. 그녀를 감옥에 보내 복수를 하고 나면 아주 손쉽게 그녀를 마음속에서 떨쳐낼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했을 뿐 그는 줄곧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만약 탁유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허름한 모습으로 있는 게 신경이 쓰일 리도 없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질투 날 리도 없다.또한 상처만 줬던 그녀에게 배신감이 들 리도 없다.이경빈은 항상 공수진의 편에만 서고 한 번도 탁유미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는 것에서 늘 도망쳐왔다.죽도록 미운 원수의 딸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이경빈은 몸 옆으로 축 늘어진 자신의 두 손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뚫어버리고 이내 바닥으로 피까지 뚝뚝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고통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텅 비어 버린 얼굴로 탁유미의 병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탁유미를 만나 그간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를 해야만 한다.그녀의 아버지를 향한 증오를 그따위 비열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됐다고 사과해야만 한다.또한 앞으로는 정말 잘 해주겠다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전부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잘해주겠다고 말을 해야만 한다.이경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놓고는 막상 탁유미의 병실에 점점 가까워지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탁유미가 전과 같은 원망과 증오가 서
이경빈은 말 그대로 공수진에게 생지옥이라는 게 무엇인지 맛보게 해줄 생각이다.그와 탁유미의 인생을 가지고 논 대가를 평생에 걸쳐 갚게 할 생각이다....병실에서 나온 이경빈은 심장께가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탁유미를 모함하려고 한 공수진도 물론 증오스러웠지만 그녀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여자에게 무자비했던 자신이 더 증오스러웠다.아까 병실로 들어간 순간 이경빈은 억지로 탁유미의 무릎을 꿇리고 그녀에게 머리까지 조아리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바닥에 쿵쿵 부딪히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정말 공수진을 위해서였을까?사실은 그저 그런 방식으로 탁유미에게 상처를 줘 그녀를 향한 마음을 애써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윤이를 이용해 이씨 집안 재산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공수진이 어렵게 생긴 아이를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자꾸 상처받은 듯한 탁유미의 얼굴들이 떠올라 더 모질게 굴었던 건 아닐까?탁유미는 그에게 등신이라고 했다.맞는 말이다.그는 정말 구제 불능의 등신이었다.“저... 저기, 저는 그저 공수진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제가 아는 건 다 털어놨으니 이제 그만 저 풀어주세요...”주원호가 이경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몇십 분 전 그는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찰나 검은색 정장의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병원으로 데려와 졌고 이경빈의 앞에서 공수진에 관한 모든 얘기를 실토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만약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주원호는 솔직히 그저 공수진에게 돈만 조금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돈이고 뭐고 공수진 근처로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대체 누가 날 데리고 온 거지? 상황을 볼 때 이경빈은 아닌 것 같은데.’“풀어달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헛웃음을 쳤다.공수진을 도와 진실을 덮어버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