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겠다고? 잊을 수 있다고?임유진은 잔잔하던 그의 마음에 돌을 던지고 갔다.쾅!강지혁은 주먹으로 차를 세게 내리쳤다.“대표님! 괜찮으세요?”옆에 있던 기사가 서둘러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얼굴에는 어둡고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집으로 돌아온 임유진은 많이 피곤했던 건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마치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것처럼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그러다 문득 그와 얘기했던 장면이 떠올랐다.아까 그렇게도 확실하고 분명하게 얘기했으니 이제 더는 나타나지 않으려 하겠지? 강지혁은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니까.누나라... 오늘 이 호칭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가 누나라고 부르는 순간 그와 작은 단칸방에서 지내던 시절이 떠올라버렸다.그때는 매일매일을 생활고에 시달려 살았지만 그만큼 마음이 따뜻했던 순간도 없었다. 정말 가족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가족은 그녀의 허상이고 일방적인 욕심일 뿐이었다.“혁아, 난 널 잊을 수 있어...”임유진은 마치 다짐하듯 혼자 중얼거렸다.이제 그녀가 알던 혁이는 없고 오로지 강지혁만 있을 것이다. S 시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자만이 있을 것이다.임유진은 그날 밤 좀처럼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다음날, 그녀는 진한 다크서클을 달고 로펌에 도착했다. 사무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려고 보니 책상 위에 노란색 장미꽃이 놓여있었다.어림잡아 100송이는 되는듯한 꽃들이 그녀의 책상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때 옆에 있던 몇몇 동료들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유진 씨, 이 꽃들은 누가 보낸 거예요?”“정말 강지혁 씨 여자친구가 맞는 거예요?”“그게 아니더라도 분명히 돈 많은 남자가 대쉬하는 걸 거예요. 부럽다.”임유진은 장미꽃 속에 꽂혀 있는 쪽지를 집어 열어보았다.[유진 씨, 지난번에는 제가 무례했던 것 같아 이렇게 사과 인사를 보내요. 혹시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시면 언제든지 얘
임유진은 안내 데스크 직원을 찾아와 노란 장미꽃을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그러자 데스크 직원은 그 많은 장미를 한 송이 한 송이 나눈 후 로펌 전 직원들에게 건넸다. 일하는 와중 갑자기 받은 꽃이라 그런지 많은 직원이 즐거워하는 한편 유독 정한나만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했다.‘정말 헤어진 게 아니라고? 저번에 계산을 대신에 해준 것도 그렇고 이제는 꽃?’하지만 헤어진 게 아니라고 하기에는 임유진의 옷들은 평범함을 넘어서 언뜻 후줄근해 보이기도 했고 출근 가방도 유행이 지난 거라 많이 낡아 보였다.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정한나는 문득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그리고 몇 분 뒤 임유진은 차 변호사 사무실로 불려갔다.“유진 씨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차 변호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애초에 변호사 비서직 공고에는 남자친구 있는 여성과 가정이 있는 여성은 예외였으니까.“없습니다.”임유진이 대답했다.“그럼 그 꽃은...”“유승호 씨가 보낸 겁니다. 전에 사인 부탁드리러 찾아갔을 때 유승호 씨의 개인 사정으로 제가 많이 기다리게 됐거든요. 그 일로 사과를 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좀 의외의 답변이긴 했지만, 유승호라고 확실히 이름을 댄 이상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해 차 변호사는 더는 추궁하지 않고 대신 옆에 있던 서류를 건네주었다.“교통사고 소송 건이 들어왔어요. 당사자를 만나보고 증언과 증거를 수집해오세요.”임유진은 서류를 건네받고 간단히 훑어보았다.차량이 심각하게 들이받은 사건으로 현재 피해자는 병원에서 혼미 상태라고 적혀있었다. 가해자는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돈을 주지 않고 있어 피해자 가족들이 소송을 의뢰한 것이었다.임유진이 해야 할 일은 바로 해당 안건의 사건 발생 경위와 증거자료 수집이다.그녀는 알겠다고 한 뒤 사무실을 나왔다. 나와보니 정한나가 머리를 기웃거리며 자신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또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할애할 시간 따위는 없었기에 그대로 무시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고마워요.”아까 들은 것에 의하면 사고 당시 곽동현과 이재하는 각기 다른 차로 앞뒤로 나란히 운전했다고 한다.그 말인즉 곽동현은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그에게 물어볼 것도 아주 많게 될 것이다.“같이 식사하고 갈래요?”곽동현이 시계를 보며 물었다.“곧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인데.”“다음에 같이 해요.”임유진은 최대한 웃으며 거절했다. 누가 봐도 상대방과 거리를 두려는 듯한 모습이었다.곽동현이 아직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괜한 여지는 주고 싶지 않았다.“사실 재하 사건 때문에 얘기하고 싶은 게 몇 가지 더 있어서 그래요.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면 시간 절약도 하고 좋지 않겠어요?”그럴싸한 말에 임유진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그럼 더치페이로 해요.”“그래요.”곽동현은 그녀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활짝 웃었다....한지영은 임유진을 만나러 왔다가 단지 입구에서 임유진이 누군가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포착했다.운전석에 있는 사람은 남자가 분명했고 임유진은 상대방과 웃으면서 몇 마디를 나누더니 이내 인사를 나누고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한지영은 임유진의 곁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물었다.“유진아, 아까 그 사람 누구야?”임유진은 갑자기 튀어나온 한지영 때문에 깜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깜짝이야. 너는 여기 웬일이야?”“너 보러 왔지. 그보다 빨리 말해. 너 데려다준 저 남자 뭐야? 꽤 친한 사이처럼 보이던데?”한지영의 눈은 마치 연예인 스캔들 장면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빤짝거렸다.임유진은 친구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 웃었다.“전에 나 환경미화원 일했을 때 알고 지냈던 동료야. 지금은 직장을 그만두고 차량 대리점 이사로 있대. 오늘 사건 조사 나갔다가 피해자가 그 사람 직원인 걸 알게 됐어. 게다가 사건 목격자이기도 해서 같이 밥 먹으면서 일 얘기 하다가 방금 날 데려다준 것뿐이야.”“그게 다야?”
임유진은 코가 시큰거리는 걸 느끼며 한지영을 꼭 끌어안았다.“응, 네가 아이를 낳으면 나는 아이의 두 번째 엄마가 돼줄 거야. 그리고 사랑을 듬뿍 줄 거야...”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임유진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한지영일 것이다.이제까지 한지영이 그녀에게 베푼 은혜를 다 갚는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이번 생은 평생 잘해도 부족할 것이다!...사건 조사를 맡은 뒤로 임유진은 매일같이 병원을 찾았고 자연스럽게 곽동현과 만나는 날도 잦아졌다.같이 식사하는 날도 많아졌지만, 매번 임유진이 더치페이를 원하는 바람에 곽동현은 시원하게 쏘지도 못했다고 한다.“내가 볼 때, 곽동현 씨는 널 좋아하는 게 확실해. 사람도 너무 괜찮고. 마치 따뜻한 남자의 정석이랄까.”어느 한번 한지영은 임유진을 찾으러 왔다가 마침 곽동현과 마주쳐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잠깐 얘기 나눈 게 전부였지만 그 짧은 대화 속에서도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얼굴이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사람이 성실하고 우직하며 제일 중요한 건 임유진을 마주할 때마다 쑥스럽게 얼굴을 붉힌다는 것이다.지금 시대에 이러한 순정남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동현 씨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야 해.”한지영이 매번 두 사람을 밀어줄 때면 임유진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까운 사람이라 한지영은 지금 백연신과 식사 데이트 자리에서도 두 사람 생각만 하고 있었다.“무슨 생각해?”그때 백연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한지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백연신의 그 예쁜 얼굴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대체 어느 틈에 이렇게 가까워 진 거야?!’“그... 그게...”말을 하려는데 남자의 얼굴이 너무나도 가까이 있는 바람에 방금 무슨 생각했던 건지도 다 까먹어 버렸다.“응?”백연신이 조금 기분이 안 좋은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하지만 그 모습 또한 너무 섹시해 한지영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지영은 숨도 쉬지 않고 서둘러 임유진과 곽동현의 얘기를 전했다. 그러고는 말을 마친 후 한 손으로 턱을 괴더니 백연신을 향해 물었다.“유진이를 좋아하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그게 아니면 사건 조사로 만나는 것 뿐인데 매번 집까지 데려다줄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그리고 저번에 물어보니까 집도 반대 방향이래요.”백연신은 한지영이 다른 남자에게 반한 것은 아닌 듯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얼마 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진심으로 사귀게 됐음에도 그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말괄량이 같은 한지영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몰랐고 남자 얼굴에 홀려 그를 화나게 만든 전적도 여러 번 있었으니까.“그 남자가 정말 유진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건 유진 씨 의견도 들어봐야지. 저번에 보니 당분간 연애할 생각은 없어 보이던데.”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무룩해졌다.“그렇겠죠? 이게 다 강지혁 때문이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둘이 잘 되기 전에 아예 만나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 건데.”한지영은 두 사람이 사귀게 됐을 당시 잘됐다며 축하까지 해준 자신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괜히 옆에서 조급해하지 마. 진짜 인연이라면, 그 남자가 정말 임유진 씨를 좋아하는 거라면 유진 씨도 몇 년 뒤에 마음을 열지 않겠어?”한지영은 그의 말에 조금 머뭇거렸다.“몇 년이요...? 그건 너무 긴데...”이제 2년 뒷면 임유진은 30대에 진입하게 된다. 30대가 늦은 건 아니지만 20대만이 할 수 있는 사랑도 있는 법이다.“너무 길다고?”백연신이 옅게 웃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그깟 몇 년이 긴 것 같아? 10년 아니 20년 혹은 그 이상도 기다릴 수 있어. 그 정도도 못 하면 그건 사랑이 그만큼 깊지 않다는 것뿐이고.”한지영은 진지한 백연신의 말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한 사람을 좋아하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말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 상대가 백연신이라서 일까?“그럼 연신 씨도 나 그렇게 기다릴 수 있어요?”이건 자기도 모르
한지영은 그의 얼굴에 핀 예쁜 홍조를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세상에, 내가 지금 제대로 본 거 맞지? 백연신이 정말 부끄러워서 얼굴 붉히고 있는 거 맞는 거지?!’그녀는 아주 본능적으로 두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감싸 쥐었다.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백연신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고 그녀가 매만지는 걸 바라보기만 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연신 씨 얼굴 지금 엄청 빨개진 거 알아요?”그의 몸은 점점 더 굳어버렸고 이윽고 고개를 홱 하고 돌려버렸다.“아니야.”“뭐가 아니에요. 지금도 봐...”백연신은 이제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고 한지영은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들어 그의 귀까지 매만졌다. 따뜻한 걸 넘어서 거의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그만해.”백연신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려고 했다.“잠깐만요. 좀 더 만질게요. 기다려 봐요.”한지영은 촉감 놀이에 심취해 지금 자기 행동이 얼마나 야릇하게 느껴지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백연신은 그녀의 손을 지금 당장이라고 떼어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반면 그녀의 손길을 조금만 더 느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누군가를 사랑하면 원래 이런 걸까?한지영 앞에만 서면 그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고 모든 신경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한지영은 여전히 백연신의 뜨거운 볼과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생각보다 훨씬 더 순정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이 남자는 진정 종합선물세트인 걸까?“연신 씨 왜 이렇게 귀여워요.”더는 참지 못한 한지영이 그의 목을 꽉 끌어안더니 있는 힘껏 그의 볼에 뽀뽀해댔다.지금 이곳이 레스토랑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대로 옷까지 벗겨버렸을지도 모르겠다.백연신은 오늘도 한지영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 것 같았다.그렇게 여차여차 식사를 마치고 나가려는 데 레스토랑 입구에서 마찬가지로 이제 막 밖으로 나가려는 강지혁을 발견했다.한지영은 그를 보고는 바로 얼굴을 굳혔다. 해당 레스토랑은 S 시에서 꽤 유명한 곳으
한지영의 도발이 먹혔던 걸까? 강지혁의 발걸음이 멈췄고 얼굴은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그의 옆에 있던 고이준은 강지혁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심장을 졸였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한지영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임유진이라는 이름은 이제 금기사항과 마찬가지였다.그런데 오늘 한지영은 그 이름을 언급한 것도 모자라 주위 사람들에게 다 들리게 큰 소리로 얘기까지 한 것이다!레스토랑 입구의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았다.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만족스러운 듯 백연신의 팔짱을 끼고 유유히 자리를 벗어났다. 백연신은 마치 아이 같은 여자친구의 행동에 저절로 실소를 터트렸다.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였다.아까 레스토랑을 나오기 전 백연신은 강지혁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강지혁은 정말 더는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 이제 질릴 대로 질려서 헤어짐을 선택한 걸까?한지영은 강지혁의 변덕 때문이라고 씩씩거리며 얘기했지만 백연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전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때, 강지혁의 행동 하나하나에 임유진을 향한 사랑과 애정이 녹아있었다.그런데 그런 여자를 이렇게나 쉽게 포기한다고?게다가 한지영이 강지혁의 뺨을 내려쳤을 때는 술에 취한 임유진의 한마디에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던 그였다.두 사람이 헤어진 이 시점에 강지혁은 대체 임유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백연신과 한지영이 떠난 후 고이준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대표님.”“가지.”강지혁은 짧게 두 글자를 내뱉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차에 오른 뒤 고이준이 다시 회사로 향하려고 할 때 뒷좌석에서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대상이 누군지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고이준은 강지혁이 알고 싶은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임유진의 현재 행방에 관해 물었다.강지혁은 지시를 내린 뒤 시트에 기대앉아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임유진과 곽동현은 지금 병원 근처에 있는 한 백반집에서 식사하고 있다.오늘 임유진은 이재하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에 왔다가 또 곽동현과 마주쳐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자료수집을 하는 동안 곽동현은 그녀 옆에서 자잘한 심부름도 도맡아 하며 그녀에게 도움이 되려고 애썼다.임유진도 곽동현이 아직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접지 않은 것쯤은 눈치챘지만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대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최대한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쉴 틈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은 벌써 오후 1시를 가리켰고 임유진은 그제야 너무 바쁜 나머지 점심 식사도 못 했다는 걸 알아챘다.물론 곽동현도 그녀를 도와주느라 점심을 먹지 못했다.“오늘은 도와줘서 고마워요. 점심은 내가 살게요.”임유진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곽동현이 웃으며 말했다.“식사는 남자인 내가 사는 게 맞죠.”“남자 여자가 어디 있어요. 나중에 내가 도움이 되면 그때 동현 씨가 사주는 거로 해요.”곽동현은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병원 근처에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보다는 백반집이나 분식집들이 많았다. 두 사람은 제일 가까이 있는 한 백반집으로 들어갔다.주문한 음식이 나와 한창 식사를 하고 있는데 곽동현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엄마, 무슨 일이세요? 휴... 신경 쓰지 마시라니까. 그리고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러니까 약속 잡은 거 빨리 취소해주세요.”반찬을 집으려던 임유진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어머니가 뭐라고 얘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소개팅이라도 들어온 듯했다.하지만 곽동현은 방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거절을 했다.‘설마... 그게 나는 아니겠지?’임유진은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져 들고 있던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놨다.그녀는 곽동현이 말한 좋아한다는 여자가 자신이 아니길 간절하게 바랐다.사랑에 다쳐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이 상황에 누군가의 호감은 그저 부담으로만 다가올 뿐이었다.곽동현은 통화를 마친 후 조금 민망한 듯 임유진을 바라봤고
소씨 모녀의 등장에 사람들의 두 눈은 금세 흥미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이 또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히 양녀의 어머니인 소민아라고 생각했으니까.임유진은 포르쉐에서 내린 소민아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집사와 고이준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소민아는 소소하게 인기를 얻고 있던 인플루언서였다가 재벌 2세의 아이를 배고 그 집의 며느리로 들어가려다가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그간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소안나가 강씨 가문에 입양된 건 2년 전의 일로 강지혁은 소안나와 소민아를 위해 집도 주고 생활비도 다달이 보내주며 그 외의 큰 지출도 부담해주었다고 한다. 즉 소씨 모녀는 하루아침에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백을 둔 신데렐라 모녀가 됐다는 뜻이었다.지금 소민아가 입고 있는 옷이나 타고 있는 차량만 봐도 그간 얼마나 호의호식하며 지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임유진이 소민아를 훑어보고 있을 때 소민아도 마찬가지로 임유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설마 레스토랑에서 언쟁을 벌였던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소민아는 강지혁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의 감정이 몸 곳곳에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내비칠 수는 없었기에 소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유진 씨 맞으시죠? 그날은 죄송했어요. 딸 일이라 괜히 흥분해서 언성을 좀 높였어요. 용서해주세요...”그 말에 임유진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호칭 똑바로 해. 임유진 씨가 아니라 사모님.”차가운 그의 말에 주변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임유진의 위치를 똑똑히 전하고자 하는 강지혁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5년 만에 돌아왔어도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의 아내였고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강지혁의 말에
게다가 5년 만에 돌아온 거라 그간 많이 변한 저택의 상황도 알아야 했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익숙해져야만 했다.그래서 아이들 일에는 조금 소홀해졌다. 딸이 아버지를 원했던 만큼 아들도 마찬가지로 엄마를 원했을 텐데 말이다.저택 고용인들에게 듣기로 강지혁은 매일 아침 율이와 함께 저택을 나서기는 하지만 나가서는 서로 다른 차를 타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고 한다.즉, 강선율은 그간 아버지가 아닌 도우미나 기사의 보호 아래 유치원에 갔다는 소리였다.임유진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다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또한 바쁘다는 이유로 율이에게 소홀했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강선율은 임유진의 팔이 더 세게 자신을 끌어안자 조금 움찔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안기는 일은 익숙지 않았지만 상대가 엄마라서 그런지 이런 식의 포옹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좋았다.게다가 앞으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유치원으로 가주겠다는 말 또한 기분 좋게 귓가에서 맴돌았다....다음날.강선현이 유치원으로 가는 날, 임유진은 율이와 현이에게 똑같은 옷을 입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강선율은 바지고 강선현은 치마라는 것이다. 엇비슷한 키의 두 아이가 똑같은 옷에 똑같은 신발을 신은 채 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임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강선현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이미 습관이 되었던 터라 꺄르르 웃으며 뽀뽀로 회답했지만 강선율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그녀의 행동을 받고만 있었다. 분명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귀가 살짝 빨개진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했다.강지혁은 세 사람이 다정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면서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유치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과 임유진은 각자 아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아이를 등원시키러 온 학부모들은 네 사람의 등장에 입을 떡 벌리며 그대로 굳어버렸다.강지혁은 좀처럼 유치원에 얼굴을 내비치
하지만 남매 사이가 하루가 다르게 좋은 것 같아 보이니 임유진은 괜히 뿌듯해 나며 기분이 좋았다.“내일 유치원 갈 때 아빠도 엄마랑 함께 현이 데려다주면 안 돼?”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도 같이 가고 싶은 듯했다.강지혁은 아이가 이런 요구를 해올 줄은 몰랐는지 미간을 살짝 꿈틀거렸다.“유치원에 같이 가달라고?”“응! 원래 유치원 가는 첫날은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줘야 하는 거야!”현이는 이번이 첫 유치원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빠도 찾았으니 강지혁과 함께 등원하고 싶었다. 아빠가 있다는 기분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사실 지금껏 아빠의 부재에도 잘 자라왔던 아이였지만 아무래도 아빠의 빈자리가 꽤 컸던 모양이다.“그래, 그럼 내일 유치원에 같이 가줄게.”강지혁의 말에 현이는 활짝 웃더니 곧바로 팔을 쭉 내밀었다. 품에 안기고 싶다는 뜻이었다.강지혁은 스킨십 많은 딸이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인 율이는 이제껏 이런 식의 요구를 해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임유진과 쏙 빼닮은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로 팔이 뻗어졌다.현이는 강지혁에게 안긴 후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지난번 서재에서처럼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아빠가 최고야!”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딸의 모습에 임유진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 났다.딸이 아빠의 존재를 그리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금 더 빨리 기억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에 죄책감이 일었다.임유진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혹시 율이도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엄마가 있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없었던 것에 쓸쓸해 하지는 않았을까?“율아.”임유진은 그 생각에 강선율을 향해 팔을 활짝 열었다.“엄마가 안아줄까?”아이는 그 말에 어색해하며 답했다.“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동생이나 안아주세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은근히 원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냈다.임유
그날 밤, 임유진과 강지혁은 마치 5년 전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열렬하게 사랑을 나눴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그녀가 더 적극적이라는 것이었다.강지혁은 정사가 끝이 난 후 노곤해진 그녀를 안아 들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욕실로 가 그녀를 깨끗이 씻겼다.아마 그의 이런 챙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임유진뿐일 것이다.다 씻은 후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가운을 입힌 후 다시 그녀를 안아 든 채 침대로 걸어왔다.임유진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혁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강현수랑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야?”강지혁이 미간을 살짝 꿈틀거리며 물었다.“우리 다음에는 자세 좀 바꾸는 거 어때? 물론 리드하는 것도 좋지만 생각보다 내가 체력이 없어서.”“...”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아까 그를 아래에 깔고 멋대로 주도권을 쥐어간 그녀의 행동만 생각하면 지금도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어쩐지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그 무엇하나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강지혁은 임유진을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너는 과거의 내가 선택했던 내 아내야. 예전의 내가 그렇게도 널 많이 사랑했다면 지금의 나도 널 사랑할 수 있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정말? 정말 날 사랑할 거야?”“그래. 하지만 절대 날 배신해서는 안 돼. 5년 전처럼 내 곁을 떠나서도 안 되고. 알았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강지혁은 그날 별채에 있는 그의 아버지 앞에서도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절대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기억을 잃은 강지혁도 역시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될까 봐 무서운 걸까?“혁아, 내가 널 떠난 건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있어서였을 거야. 절대 원해서 널 떠난 건 아니었을 거야.”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눈가를 매만지며 어머니와 똑 닮았
내 말을 믿지도 않으면서 키스는 왜 해?임유진은 그 생각에 울컥하며 키스를 끝내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가 피할 틈조차 주지 않았고 맹렬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러다 임유진이 거의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느낄 때야 천천히 입술을 뗐다.“네가 못 믿는 건 아니고?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다는 걸?”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방금의 키스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내쉬는 숨은 무척이나 거칠었다.“반대로 물어볼게. 그럼 너는? 너는 날 얼만큼 사랑하는데?”임유진은 귓가에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에 몸이 움찔 떨렸다.강지혁의 두 눈은 감겨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마치 두 사람을 감도는 공기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멈춰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간신히 진정한 임유진의 호흡이 또다시 흔들리며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잠깐의 침묵 후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다시 떠진 그의 눈동자에는 싸늘함만이 감돌고 있었다.“그다지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서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다는 등의 말을 꺼내지 마. 그리고 네가 날 사랑한다는 말도.”강지혁은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몸을 일으키려는 듯 천천히 그녀에게서 멀어졌다.이에 임유진은 만약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를 보낸다면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그녀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두른 후 더 이상 그가 멀어지지 못하게 했다.“혁아, 날 똑바로 봐!”다급한 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몸이 멈추더니 이내 조금 놀란 듯한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내가 널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고? 멋대로 추측하지 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지금도 또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렇게 궁금하다면 알려줄게.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임유진은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러고는 강지혁이 했던 키스와 달리 은근하고 유혹적이며 또 절절한 키스를 퍼부었다.키
임유진은 말을 하며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몸을 돌린 순간 한 걸음도 채 내딛지 못하고 강지혁에게 손목이 잡혀버렸다. 그리고 눈앞이 핑 도는 느낌과 함께 어느새 침대에 눕혀져 버렸다.임유진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겨를도 없이 강지혁의 몸이 그녀에게로 바짝 다가왔다.강지혁은 두 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둔 채 얼굴을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숨이 거칠고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것이 아주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아까는 그렇게도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 도망가지? 네가 원하는 대로 얘기하고 있잖아.”“네가 흥분을 가라앉히면 다시 얘기하려고 했던 것뿐이야.”임유진이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강지혁이 누르는 바람에 좀처럼 상체를 일으키지 못했다.“혁아, 일단 좀 비켜봐.”임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 사이는 무척이나 가까웠고 강지혁은 그녀에게 가감 없이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나는 지금 충분히 이성적이야.”강지혁이 답했다.그의 코는 거의 그녀의 코와 맞닿을 정도였다.몸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임유진의 체취가 그의 몸을 감싸왔다. 마치 그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게 목적인 것처럼 그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강지혁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그녀에게 화가 나는지 그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신경이 쓰이는 걸까? 강현수와 그녀의 과거가?“강현수 좋아하지 말고 사랑하지도 마. 알아들었어?”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난 한번도 강현수를 좋아하거나 사랑한 적이 없어!”임유진이 외쳤다.“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계속 나였다. 뭐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거야?”강지혁이 물었다.“그래.”임유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단호하게 외쳤다.“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임유진은 그 말에 멈칫했다.강지혁의 입에서
임유진이 초조한 얼굴로 영상을 바라보던 그때 갑자기 욕실 문이 열리며 강지혁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강지혁은 의자에 앉아있는 임유진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멈칫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녀 너머로 보이는 영상을 보고는 다시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다.“내 물건에 멋대로 손대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나가.”임유진은 그 말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곧바로 강지혁의 앞으로 걸어갔다.“혁아, 나랑 현수 씨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 현수 씨가 날 좋아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래서 더 확실하게 얘기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너밖에 없었다는 걸.”그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강지혁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해져만 갔다.“둘 사이가 어땠는지 듣고 싶지 않아. 잘 거니까 나가. 할 말 있으면 내일 다시 해.”강지혁은 아까 임유진과 강현수가 함께 있는 걸 본 순간부터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도 사그라지지 않았다.임유진에 관한 기억은 다 잊어버린 그지만 그녀가 강현수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는 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지인들을 통해 들은 것도 있고 실제로 파티에서 강현수가 임유진의 이름을 꺼내며 그에게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으니까.하지만 그럼에도 예전에는 그런 게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어차피 임유진은 그저 그의 죽은 아내일 뿐이었으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 강현수와 과거에 썸을 탔든 연애를 했든 알 바 아니었다.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했던 임유진이 아주 멀쩡한 얼굴로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고 그에게 사랑한다며 속삭였다. 심지어 마치 그를 아주 잘 아는 듯이 굴기도 했다.그래서일까, 강지혁은 강현수와 그녀가 함께 있는 모습이 멋대로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치고 불안하기도 하며 더욱이는 심장이 아프게 욱신거리기도 했다.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마치 독처럼 그의 몸 곳곳에 퍼졌다.“아니, 나는 지금 얘기해야겠어.”임유진이 강지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나에 대해 잊었다면 다시 한번 얘기해줄게. 어릴 때
강지혁은 잠깐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새엄마는 없어.”즉 그렇다는 건 임유진과 이혼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강선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포크를 움직이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리고 강선현도 새엄마는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는 활짝 웃으며 마찬가지로 식사를 마저 했다.저녁 식사가 끝이 난 후 임유진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다 아들과 같이 유치원에서 내준 숙제를 완성했다.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선율 혼자 다 한 거나 다름없었다. 강선율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똑똑한 아이였다. 그리고 숙제를 하면서도 한번도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다.현이는 율이가 숙제를 완성하자마자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엄마, 나는 언제쯤 오빠랑 같이 유치원에 갈 수 있어?”“다음 주면 현이도 유치원에 갈 수 있어.”임유진의 말에 아이는 활짝 웃으며 방방 뛰었다.임유진은 아이들끼리 놀게 한 후 강지혁을 찾으러 위층 서재로 향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어떻게든 강현수에 관해 얘기해야만 했다.사실 식사를 마치자마자 하고 싶었는데 강지혁은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마치 잔뜩 삐져있는 아이처럼 말이다.임유진은 서재에 갔다가 강지혁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침실로 향했다. 하지만 침실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때 욕실 쪽에서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임유진은 샤워하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강지혁이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생각이었다.가만히 기다리는 게 지루해 방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그녀는 우연히 탁자 위에 있는 자료를 발견했다.자료에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그녀와 강현수의 사진이었다.그리고 자료를 더 자세히 보니 그녀와 강현수가 버스에 함께 있었을 때 났던 기사 내용이 적혀있었다.당시 임유진은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강현수는 그녀의 머리가 창문에 부딪히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의 머리와 차창 사이에 자신의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강현수는 임유진과 강지혁이 사라진 지 5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잘생긴 얼굴에 고통과 실망감이 잔뜩 어려있었다.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그지만 사랑 앞에서는 그 역시 한낱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강지혁은 임유진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 후 곧바로 그녀의 손을 풀어주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강현수와 꽤 많이 얽혀있었나 봐?”“응?”임유진은 묘하게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다급하게 해명했다.“오해하지 마. 나랑 현수 씨 사이에 네가 오해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오늘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도 몰랐고. 그리고 나는 이미...”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이 그녀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강현수와 과거에 무슨 사이였는지, 지금은 또 어떤지 나한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어. 조금도 궁금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머릿속에 넣어둬. 너는 지금 내 아내고 가문의 안주인이라는 거. 그러니까 강씨 가문을 욕보인다거나 스캔들 터질 만한 일은 만들지 마.”강지혁은 말을 다 마친 후 미련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그리고 임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강씨 가문을 욕보이지 말고 스캔들 터질 만한 일을 만들지 말라고? 그녀와 강현수 사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강지혁에게 떳떳하지 못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만약 5년 전의 강지혁이었다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아무래도 깊은 오해가 생기기 전에 강지혁에게 제대로 해명을 해야 할 듯하다.임유진은 저녁 식사를 할 때 강지혁과 얘기를 나누며 물꼬를 틀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은 식탁에 앉기 전부터 차가운 아우라를 내뿜으며 말 한마디 건네지 말라는 듯이 눈도 마주쳐주지 않았다.그 탓에 식사 분위기는 숨 막힐 듯 싸늘해졌고 임유진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그때 밥을 먹던 현이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물었다.“아빠 정말 엄마 사랑하는 거 맞아? 아까 현수 삼촌은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