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겠다고? 잊을 수 있다고?임유진은 잔잔하던 그의 마음에 돌을 던지고 갔다.쾅!강지혁은 주먹으로 차를 세게 내리쳤다.“대표님! 괜찮으세요?”옆에 있던 기사가 서둘러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얼굴에는 어둡고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집으로 돌아온 임유진은 많이 피곤했던 건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마치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것처럼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그러다 문득 그와 얘기했던 장면이 떠올랐다.아까 그렇게도 확실하고 분명하게 얘기했으니 이제 더는 나타나지 않으려 하겠지? 강지혁은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니까.누나라... 오늘 이 호칭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가 누나라고 부르는 순간 그와 작은 단칸방에서 지내던 시절이 떠올라버렸다.그때는 매일매일을 생활고에 시달려 살았지만 그만큼 마음이 따뜻했던 순간도 없었다. 정말 가족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가족은 그녀의 허상이고 일방적인 욕심일 뿐이었다.“혁아, 난 널 잊을 수 있어...”임유진은 마치 다짐하듯 혼자 중얼거렸다.이제 그녀가 알던 혁이는 없고 오로지 강지혁만 있을 것이다. S 시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자만이 있을 것이다.임유진은 그날 밤 좀처럼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다음날, 그녀는 진한 다크서클을 달고 로펌에 도착했다. 사무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려고 보니 책상 위에 노란색 장미꽃이 놓여있었다.어림잡아 100송이는 되는듯한 꽃들이 그녀의 책상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때 옆에 있던 몇몇 동료들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유진 씨, 이 꽃들은 누가 보낸 거예요?”“정말 강지혁 씨 여자친구가 맞는 거예요?”“그게 아니더라도 분명히 돈 많은 남자가 대쉬하는 걸 거예요. 부럽다.”임유진은 장미꽃 속에 꽂혀 있는 쪽지를 집어 열어보았다.[유진 씨, 지난번에는 제가 무례했던 것 같아 이렇게 사과 인사를 보내요. 혹시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시면 언제든지 얘
임유진은 안내 데스크 직원을 찾아와 노란 장미꽃을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그러자 데스크 직원은 그 많은 장미를 한 송이 한 송이 나눈 후 로펌 전 직원들에게 건넸다. 일하는 와중 갑자기 받은 꽃이라 그런지 많은 직원이 즐거워하는 한편 유독 정한나만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했다.‘정말 헤어진 게 아니라고? 저번에 계산을 대신에 해준 것도 그렇고 이제는 꽃?’하지만 헤어진 게 아니라고 하기에는 임유진의 옷들은 평범함을 넘어서 언뜻 후줄근해 보이기도 했고 출근 가방도 유행이 지난 거라 많이 낡아 보였다.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정한나는 문득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그리고 몇 분 뒤 임유진은 차 변호사 사무실로 불려갔다.“유진 씨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차 변호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애초에 변호사 비서직 공고에는 남자친구 있는 여성과 가정이 있는 여성은 예외였으니까.“없습니다.”임유진이 대답했다.“그럼 그 꽃은...”“유승호 씨가 보낸 겁니다. 전에 사인 부탁드리러 찾아갔을 때 유승호 씨의 개인 사정으로 제가 많이 기다리게 됐거든요. 그 일로 사과를 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좀 의외의 답변이긴 했지만, 유승호라고 확실히 이름을 댄 이상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해 차 변호사는 더는 추궁하지 않고 대신 옆에 있던 서류를 건네주었다.“교통사고 소송 건이 들어왔어요. 당사자를 만나보고 증언과 증거를 수집해오세요.”임유진은 서류를 건네받고 간단히 훑어보았다.차량이 심각하게 들이받은 사건으로 현재 피해자는 병원에서 혼미 상태라고 적혀있었다. 가해자는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돈을 주지 않고 있어 피해자 가족들이 소송을 의뢰한 것이었다.임유진이 해야 할 일은 바로 해당 안건의 사건 발생 경위와 증거자료 수집이다.그녀는 알겠다고 한 뒤 사무실을 나왔다. 나와보니 정한나가 머리를 기웃거리며 자신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또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할애할 시간 따위는 없었기에 그대로 무시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고마워요.”아까 들은 것에 의하면 사고 당시 곽동현과 이재하는 각기 다른 차로 앞뒤로 나란히 운전했다고 한다.그 말인즉 곽동현은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그에게 물어볼 것도 아주 많게 될 것이다.“같이 식사하고 갈래요?”곽동현이 시계를 보며 물었다.“곧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인데.”“다음에 같이 해요.”임유진은 최대한 웃으며 거절했다. 누가 봐도 상대방과 거리를 두려는 듯한 모습이었다.곽동현이 아직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괜한 여지는 주고 싶지 않았다.“사실 재하 사건 때문에 얘기하고 싶은 게 몇 가지 더 있어서 그래요.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면 시간 절약도 하고 좋지 않겠어요?”그럴싸한 말에 임유진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그럼 더치페이로 해요.”“그래요.”곽동현은 그녀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활짝 웃었다....한지영은 임유진을 만나러 왔다가 단지 입구에서 임유진이 누군가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포착했다.운전석에 있는 사람은 남자가 분명했고 임유진은 상대방과 웃으면서 몇 마디를 나누더니 이내 인사를 나누고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한지영은 임유진의 곁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물었다.“유진아, 아까 그 사람 누구야?”임유진은 갑자기 튀어나온 한지영 때문에 깜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깜짝이야. 너는 여기 웬일이야?”“너 보러 왔지. 그보다 빨리 말해. 너 데려다준 저 남자 뭐야? 꽤 친한 사이처럼 보이던데?”한지영의 눈은 마치 연예인 스캔들 장면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빤짝거렸다.임유진은 친구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 웃었다.“전에 나 환경미화원 일했을 때 알고 지냈던 동료야. 지금은 직장을 그만두고 차량 대리점 이사로 있대. 오늘 사건 조사 나갔다가 피해자가 그 사람 직원인 걸 알게 됐어. 게다가 사건 목격자이기도 해서 같이 밥 먹으면서 일 얘기 하다가 방금 날 데려다준 것뿐이야.”“그게 다야?”
임유진은 코가 시큰거리는 걸 느끼며 한지영을 꼭 끌어안았다.“응, 네가 아이를 낳으면 나는 아이의 두 번째 엄마가 돼줄 거야. 그리고 사랑을 듬뿍 줄 거야...”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임유진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한지영일 것이다.이제까지 한지영이 그녀에게 베푼 은혜를 다 갚는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이번 생은 평생 잘해도 부족할 것이다!...사건 조사를 맡은 뒤로 임유진은 매일같이 병원을 찾았고 자연스럽게 곽동현과 만나는 날도 잦아졌다.같이 식사하는 날도 많아졌지만, 매번 임유진이 더치페이를 원하는 바람에 곽동현은 시원하게 쏘지도 못했다고 한다.“내가 볼 때, 곽동현 씨는 널 좋아하는 게 확실해. 사람도 너무 괜찮고. 마치 따뜻한 남자의 정석이랄까.”어느 한번 한지영은 임유진을 찾으러 왔다가 마침 곽동현과 마주쳐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잠깐 얘기 나눈 게 전부였지만 그 짧은 대화 속에서도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얼굴이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사람이 성실하고 우직하며 제일 중요한 건 임유진을 마주할 때마다 쑥스럽게 얼굴을 붉힌다는 것이다.지금 시대에 이러한 순정남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동현 씨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야 해.”한지영이 매번 두 사람을 밀어줄 때면 임유진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까운 사람이라 한지영은 지금 백연신과 식사 데이트 자리에서도 두 사람 생각만 하고 있었다.“무슨 생각해?”그때 백연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한지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백연신의 그 예쁜 얼굴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대체 어느 틈에 이렇게 가까워 진 거야?!’“그... 그게...”말을 하려는데 남자의 얼굴이 너무나도 가까이 있는 바람에 방금 무슨 생각했던 건지도 다 까먹어 버렸다.“응?”백연신이 조금 기분이 안 좋은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하지만 그 모습 또한 너무 섹시해 한지영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지영은 숨도 쉬지 않고 서둘러 임유진과 곽동현의 얘기를 전했다. 그러고는 말을 마친 후 한 손으로 턱을 괴더니 백연신을 향해 물었다.“유진이를 좋아하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그게 아니면 사건 조사로 만나는 것 뿐인데 매번 집까지 데려다줄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그리고 저번에 물어보니까 집도 반대 방향이래요.”백연신은 한지영이 다른 남자에게 반한 것은 아닌 듯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얼마 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진심으로 사귀게 됐음에도 그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말괄량이 같은 한지영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몰랐고 남자 얼굴에 홀려 그를 화나게 만든 전적도 여러 번 있었으니까.“그 남자가 정말 유진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건 유진 씨 의견도 들어봐야지. 저번에 보니 당분간 연애할 생각은 없어 보이던데.”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무룩해졌다.“그렇겠죠? 이게 다 강지혁 때문이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둘이 잘 되기 전에 아예 만나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 건데.”한지영은 두 사람이 사귀게 됐을 당시 잘됐다며 축하까지 해준 자신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괜히 옆에서 조급해하지 마. 진짜 인연이라면, 그 남자가 정말 임유진 씨를 좋아하는 거라면 유진 씨도 몇 년 뒤에 마음을 열지 않겠어?”한지영은 그의 말에 조금 머뭇거렸다.“몇 년이요...? 그건 너무 긴데...”이제 2년 뒷면 임유진은 30대에 진입하게 된다. 30대가 늦은 건 아니지만 20대만이 할 수 있는 사랑도 있는 법이다.“너무 길다고?”백연신이 옅게 웃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그깟 몇 년이 긴 것 같아? 10년 아니 20년 혹은 그 이상도 기다릴 수 있어. 그 정도도 못 하면 그건 사랑이 그만큼 깊지 않다는 것뿐이고.”한지영은 진지한 백연신의 말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한 사람을 좋아하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말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 상대가 백연신이라서 일까?“그럼 연신 씨도 나 그렇게 기다릴 수 있어요?”이건 자기도 모르
한지영은 그의 얼굴에 핀 예쁜 홍조를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세상에, 내가 지금 제대로 본 거 맞지? 백연신이 정말 부끄러워서 얼굴 붉히고 있는 거 맞는 거지?!’그녀는 아주 본능적으로 두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감싸 쥐었다.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백연신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고 그녀가 매만지는 걸 바라보기만 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연신 씨 얼굴 지금 엄청 빨개진 거 알아요?”그의 몸은 점점 더 굳어버렸고 이윽고 고개를 홱 하고 돌려버렸다.“아니야.”“뭐가 아니에요. 지금도 봐...”백연신은 이제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고 한지영은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들어 그의 귀까지 매만졌다. 따뜻한 걸 넘어서 거의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그만해.”백연신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려고 했다.“잠깐만요. 좀 더 만질게요. 기다려 봐요.”한지영은 촉감 놀이에 심취해 지금 자기 행동이 얼마나 야릇하게 느껴지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백연신은 그녀의 손을 지금 당장이라고 떼어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반면 그녀의 손길을 조금만 더 느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누군가를 사랑하면 원래 이런 걸까?한지영 앞에만 서면 그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고 모든 신경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한지영은 여전히 백연신의 뜨거운 볼과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생각보다 훨씬 더 순정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이 남자는 진정 종합선물세트인 걸까?“연신 씨 왜 이렇게 귀여워요.”더는 참지 못한 한지영이 그의 목을 꽉 끌어안더니 있는 힘껏 그의 볼에 뽀뽀해댔다.지금 이곳이 레스토랑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대로 옷까지 벗겨버렸을지도 모르겠다.백연신은 오늘도 한지영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 것 같았다.그렇게 여차여차 식사를 마치고 나가려는 데 레스토랑 입구에서 마찬가지로 이제 막 밖으로 나가려는 강지혁을 발견했다.한지영은 그를 보고는 바로 얼굴을 굳혔다. 해당 레스토랑은 S 시에서 꽤 유명한 곳으
한지영의 도발이 먹혔던 걸까? 강지혁의 발걸음이 멈췄고 얼굴은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그의 옆에 있던 고이준은 강지혁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심장을 졸였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한지영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임유진이라는 이름은 이제 금기사항과 마찬가지였다.그런데 오늘 한지영은 그 이름을 언급한 것도 모자라 주위 사람들에게 다 들리게 큰 소리로 얘기까지 한 것이다!레스토랑 입구의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았다.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만족스러운 듯 백연신의 팔짱을 끼고 유유히 자리를 벗어났다. 백연신은 마치 아이 같은 여자친구의 행동에 저절로 실소를 터트렸다.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였다.아까 레스토랑을 나오기 전 백연신은 강지혁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강지혁은 정말 더는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 이제 질릴 대로 질려서 헤어짐을 선택한 걸까?한지영은 강지혁의 변덕 때문이라고 씩씩거리며 얘기했지만 백연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전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때, 강지혁의 행동 하나하나에 임유진을 향한 사랑과 애정이 녹아있었다.그런데 그런 여자를 이렇게나 쉽게 포기한다고?게다가 한지영이 강지혁의 뺨을 내려쳤을 때는 술에 취한 임유진의 한마디에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던 그였다.두 사람이 헤어진 이 시점에 강지혁은 대체 임유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백연신과 한지영이 떠난 후 고이준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대표님.”“가지.”강지혁은 짧게 두 글자를 내뱉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차에 오른 뒤 고이준이 다시 회사로 향하려고 할 때 뒷좌석에서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대상이 누군지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고이준은 강지혁이 알고 싶은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임유진의 현재 행방에 관해 물었다.강지혁은 지시를 내린 뒤 시트에 기대앉아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임유진과 곽동현은 지금 병원 근처에 있는 한 백반집에서 식사하고 있다.오늘 임유진은 이재하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에 왔다가 또 곽동현과 마주쳐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자료수집을 하는 동안 곽동현은 그녀 옆에서 자잘한 심부름도 도맡아 하며 그녀에게 도움이 되려고 애썼다.임유진도 곽동현이 아직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접지 않은 것쯤은 눈치챘지만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대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최대한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쉴 틈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은 벌써 오후 1시를 가리켰고 임유진은 그제야 너무 바쁜 나머지 점심 식사도 못 했다는 걸 알아챘다.물론 곽동현도 그녀를 도와주느라 점심을 먹지 못했다.“오늘은 도와줘서 고마워요. 점심은 내가 살게요.”임유진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곽동현이 웃으며 말했다.“식사는 남자인 내가 사는 게 맞죠.”“남자 여자가 어디 있어요. 나중에 내가 도움이 되면 그때 동현 씨가 사주는 거로 해요.”곽동현은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병원 근처에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보다는 백반집이나 분식집들이 많았다. 두 사람은 제일 가까이 있는 한 백반집으로 들어갔다.주문한 음식이 나와 한창 식사를 하고 있는데 곽동현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엄마, 무슨 일이세요? 휴... 신경 쓰지 마시라니까. 그리고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러니까 약속 잡은 거 빨리 취소해주세요.”반찬을 집으려던 임유진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어머니가 뭐라고 얘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소개팅이라도 들어온 듯했다.하지만 곽동현은 방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거절을 했다.‘설마... 그게 나는 아니겠지?’임유진은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져 들고 있던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놨다.그녀는 곽동현이 말한 좋아한다는 여자가 자신이 아니길 간절하게 바랐다.사랑에 다쳐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이 상황에 누군가의 호감은 그저 부담으로만 다가올 뿐이었다.곽동현은 통화를 마친 후 조금 민망한 듯 임유진을 바라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