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영의 도발이 먹혔던 걸까? 강지혁의 발걸음이 멈췄고 얼굴은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그의 옆에 있던 고이준은 강지혁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심장을 졸였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한지영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임유진이라는 이름은 이제 금기사항과 마찬가지였다.그런데 오늘 한지영은 그 이름을 언급한 것도 모자라 주위 사람들에게 다 들리게 큰 소리로 얘기까지 한 것이다!레스토랑 입구의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았다.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만족스러운 듯 백연신의 팔짱을 끼고 유유히 자리를 벗어났다. 백연신은 마치 아이 같은 여자친구의 행동에 저절로 실소를 터트렸다.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였다.아까 레스토랑을 나오기 전 백연신은 강지혁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강지혁은 정말 더는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 이제 질릴 대로 질려서 헤어짐을 선택한 걸까?한지영은 강지혁의 변덕 때문이라고 씩씩거리며 얘기했지만 백연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전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때, 강지혁의 행동 하나하나에 임유진을 향한 사랑과 애정이 녹아있었다.그런데 그런 여자를 이렇게나 쉽게 포기한다고?게다가 한지영이 강지혁의 뺨을 내려쳤을 때는 술에 취한 임유진의 한마디에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던 그였다.두 사람이 헤어진 이 시점에 강지혁은 대체 임유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백연신과 한지영이 떠난 후 고이준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대표님.”“가지.”강지혁은 짧게 두 글자를 내뱉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차에 오른 뒤 고이준이 다시 회사로 향하려고 할 때 뒷좌석에서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대상이 누군지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고이준은 강지혁이 알고 싶은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임유진의 현재 행방에 관해 물었다.강지혁은 지시를 내린 뒤 시트에 기대앉아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임유진과 곽동현은 지금 병원 근처에 있는 한 백반집에서 식사하고 있다.오늘 임유진은 이재하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에 왔다가 또 곽동현과 마주쳐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자료수집을 하는 동안 곽동현은 그녀 옆에서 자잘한 심부름도 도맡아 하며 그녀에게 도움이 되려고 애썼다.임유진도 곽동현이 아직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접지 않은 것쯤은 눈치챘지만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대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최대한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쉴 틈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은 벌써 오후 1시를 가리켰고 임유진은 그제야 너무 바쁜 나머지 점심 식사도 못 했다는 걸 알아챘다.물론 곽동현도 그녀를 도와주느라 점심을 먹지 못했다.“오늘은 도와줘서 고마워요. 점심은 내가 살게요.”임유진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곽동현이 웃으며 말했다.“식사는 남자인 내가 사는 게 맞죠.”“남자 여자가 어디 있어요. 나중에 내가 도움이 되면 그때 동현 씨가 사주는 거로 해요.”곽동현은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병원 근처에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보다는 백반집이나 분식집들이 많았다. 두 사람은 제일 가까이 있는 한 백반집으로 들어갔다.주문한 음식이 나와 한창 식사를 하고 있는데 곽동현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엄마, 무슨 일이세요? 휴... 신경 쓰지 마시라니까. 그리고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러니까 약속 잡은 거 빨리 취소해주세요.”반찬을 집으려던 임유진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어머니가 뭐라고 얘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소개팅이라도 들어온 듯했다.하지만 곽동현은 방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거절을 했다.‘설마... 그게 나는 아니겠지?’임유진은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져 들고 있던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놨다.그녀는 곽동현이 말한 좋아한다는 여자가 자신이 아니길 간절하게 바랐다.사랑에 다쳐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이 상황에 누군가의 호감은 그저 부담으로만 다가올 뿐이었다.곽동현은 통화를 마친 후 조금 민망한 듯 임유진을 바라봤고
“네.”“그럼... 그때 그 동생은요?”그의 말에 임유진의 몸이 굳어버렸다.그가 말한 동생은... 아마 강지혁일 것이다. 한때는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다가 지금은 누구보다 멀리 있는 사람...“원래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갔어요. 그때는 저도 잠시만 데리고 있었던 거라.”임유진은 말을 마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마저 먹었다.곽동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때, 마치 그녀를 독점하려 했던 ‘동생’이 이제는 그녀 옆에 없다는 건가? 지금 혼자 있다는 걸 보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는 건 아닐까...?무수히 많은 생각이 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한편, 식당 안의 두 사람은 지금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가 전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백반집 근처에 정차된 검은색 차 안에서 강지혁은 두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고이준은 지금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그저 몹시도 두려운 눈빛으로 백미러로 보이는 강지혁과 식당 안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몇 분 전 임유진의 행방을 찾아낸 후 강지혁은 바로 고이준에게 그곳으로 향할 것을 명했고 그 뒤로 줄곧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다.대체 언제까지 보려는 거지?!고이준은 지금 임유진이 눈앞의 남자와 빨리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식사를 마친 후 곽동현은 임유진을 로펌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어차피 나도 그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부담가질 필요 없어요.”“그럼... 알겠어요.”임유진은 그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은 차에 올라탔다.달리는 차 안에서 곽동현은 임유진에게 이재하가 받을 수 있는 보상액이 어느 정도 되는지 물었다.“아마 아주 적을 거예요.”임유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현재 알아본 바에 따르면 가해자 명의 아래 있던 자산은 진작에 다른 곳에 옮겨졌고 그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어요.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가해자 명의의 다른 자산을 찾지 못하면 소송에서 이
헛된 기대에 희망을 품게 하는 것만큼 잔인한 행동은 없을 테니까.마치 그때 누군가가 자신을 이미 타깃으로 정한 것도 모르고 감옥에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의는 살아 있다고 믿었던 그녀처럼...곽동현은 그녀의 말에 조금 머쓱했지만, 곧바로 확신에 가득 찬 말투로 얘기했다.“물론... 내가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만약 그때 유진 씨를 알았더라면 나는 무슨 짓을 해서든 도우려고 했을 거예요.”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임유진은 몸을 돌려 진지한 눈으로 곽동현을 바라봤다.그는 아무것도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남자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일을 겪어보니 평범한 것만큼 소중한 것도 없었다.“동현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어울리지 않아요. 나는 이미 사랑과 결혼에 기대가 없는 사람이고 지금은 그저 일에만 집중하고 싶어요.”“난 기다릴 수 있어요. 유진 씨가 다시 사랑이 하고 싶고 결혼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곽동현은 용기를 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쥔 그의 손은 그 무엇보다도 단단했고 그녀만 바라보겠다는 듯한 그의 눈은 그 무엇보다도 올곧았다.이 손은 강지혁과는 다른 따뜻하고 포근함이 묻어있는 그런 손이다.하지만...“아니요. 기다리지 마세요. 나 때문에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동현 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아요.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쌍방이어야 가능한 거잖아요. 나는 동현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곽동현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하게 변해갔다.아마 임유진이 이다음으로 하는 말은 더 잔인하게 들릴 것이다.애초부터 곽동현은 그녀가 옥살이하고 나온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편견 없이 그녀를 대했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그는 정말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고 인간적으로 배울 게 많은 사람이다.만약 이대로 그를 선택하게 되면 아마 그가 주는 따스함 아래 아무런 걱정 없이 평탄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정말 유진 씨가 좋아요. 내가 유진 씨에게 대단한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유진 씨에게 안정적인 행복은 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유진 씨를 지킬 거고요. 유진 씨는 어떻게 우리는 안 될 거라고 그렇게 단정을 지을 수 있어요? 나와 연애를 해본 것도 아니잖아요. 아직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모르잖아요.”떨리는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아직 이 세상에 누군가는 자신을 이렇게나 좋아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곽동현은 여태껏 그 무슨 이유에도 굴하지 않고 줄곧 그녀를 좋아해 줬고 그녀가 가장 볼품없을 때 색안경을 끼지 않고 그녀를 존중해줬다.임유진은 그를 밀어내지 않고 그의 품에 자신을 맡겼다. 너무나도 따뜻한 품이었다.하지만 그 품이 너무 따뜻해서 곽동현이 언젠가는 이 따뜻함을 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를 만나기를 바랐다.“동현 씨, 나 좋아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나는 이렇게 동현 씨 품에 안겨 있어도 설레는 감정을 느끼지 못해요. 이런 나인데 굳이 연애까지 해볼 필요가 있을까요?”임유진의 말에 곽동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그녀를 끌어안고만 있었다.한편 멀지 않은 곳에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다. 그리고 차 안에 남자는 곽동현과 임유진이 껴안는 모습을 보고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늦은 저녁, 임유진은 자신의 월세방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그녀의 머리맡에는 스탠드가 켜져 있었다. 강씨 저택에서 나온 뒤로 불을 켜고 자는 습관이 또 시작된 것이다.스탠드의 불빛 아래의 임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때 월세방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누군가가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현관문 쪽의 자동 센서 등이 켜지자 강지혁의 잔뜩 가라앉은 얼굴이 드러났다.강지혁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가 잠이 든 임유진의 얼굴을 빤히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갰다...“음...”임유진은 잠결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가 입술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해봤지만, 도저히 피해지지 않았다. 서서히 꿈에서 깨고 의식이 돌아올 때쯤 누군가가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당황한 임유진이 눈을 번쩍 떠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시야가 새까맸다.아니, 이건 누군가의 큰손이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가벼웠던 입맞춤은 어느새 키스로 변했고 점점 더 짙어져 갔다.‘누구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거야?!’그 순간 임유진을 덮친 생각은 두려움이었다.있는 힘껏 발버둥 쳐도 매번 절대적인 힘으로 제압당해 뿌리치지도 못하고 피할 수도 없다.하지만 그때 익숙한 누군가의 숨결이 느껴졌고 이에 그녀는 몸을 움찔 떨었다.이건... 강지혁?!불과 얼마 전까지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두 사람이라 그녀는 그의 숨결을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익숙한 느낌은 강지혁이 틀림없었다.하지만 대체 왜 강지혁은 이 시간에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키스를 퍼붓는 거지?‘싫어. 이런 건 싫어!’임유진이 그의 혀를 힘껏 깨물자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돌았고 그의 옅은 신음이 들려왔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더 거센 키스가 몰아쳤고 임유진은 이제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놔... 이거... 놔...”다시 한번 발버둥 치며 눈을 가리고 있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렇게 간신히 방안의 불빛이 비춰들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찰나 강지혁은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내리쳤고 임유진은 그대로 기절해버렸다.강지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침대 위에 쓰러진 그녀를 바라봤다.방금 하마터면 이성이 끊어질 뻔했다.은은한 불빛 아래 그의 입꼬리 쪽에서 아까 임유진이 힘껏 깨문 피의 흔적이 새어 나왔다.강지혁은 손가락으로 피를 가볍게 닦아냈다. 그러고는 마치 그녀가 준 이 고통마저도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유진은 다음 날 아침 휴대폰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몸을 일으키니 머리가 약간 무거웠고 목덜미 쪽에는 옅은 통증이 일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자신의 월세방을 쭉 훑어보았다.방안은 어제와 다를 건 없었고 그녀의 잠옷도 단추 하나 흐트러진 것 없이 아무 문제도 없는 듯했다.어젯밤 자고 있을 때 누군가에게 키스를 당했고 상대의 얼굴을 보려는 순간 기절해버렸다. 그 누군가의 얼굴을 결국 보지는 못했지만 키스할 때의 느낌으로 봐서는... 강지혁이 맞는 것 같았다.하지만 어제 발버둥을 치고 난동을 부린 것치고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설마 그게 모두 꿈이었던 건가...? 아직 진정으로 그를 잊은 게 아니라서 그런 꿈까지 꾸는 걸까?임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대체 언제쯤 강지혁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한때는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 남자를 대체 언제쯤 잊어버릴 수 있을까?마음속에서 강지혁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는 한 아마 새로운 시작은 영원히 못 하게 되겠지...임유진은 화장실로 들어와 칫솔을 들고 치약을 짠 다음 거울을 보며 양치를 시작했다. 그러다 자신의 목에 남겨진 붉은색 흔적을 보고 온몸이 굳어졌다.‘이게 뭐야... 설마...!’그녀는 손에 들린 칫솔을 내려놓고 조금은 복잡한 얼굴로 붉게 물든 자국을 매만졌다.거울 속에 비친 그녀는 금방 잠에서 깬 모습에 목에 남겨진 붉은 자국까지 더해져서 그런지 조금은 야릇해 보였다.역시 어젯밤 그건 꿈이 아니었던 건가?늦은 저녁, 강지혁이 방으로 들어와 그녀의 입에 키스하고 목에 자국까지 남겨 놓은 걸까?하지만 임유진은 곧바로 그건 말도 안 된다며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강지혁이 굳이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건 그답지 않은 행동이다. 헤어지자고 한 상대에게 굳이 야밤에 집에까지 들어와 이런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하지만... 목에 새겨진 이 자국은 누가 봐도 키스 마크였고
“뭘요.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한 것뿐이에요. 그리고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언니도 나를 도와줬을 거잖아요.”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탁유미도 그녀를 향해 웃었다.“참, 나 G 시로 이사하려고요.”“G 시요?”G 시는 S 시에서 너무 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으니까.그곳은 경치가 아름답고 여행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물가가 너무 높지 않아 대도시에 지친 사람들이 자주 이주하는 곳이다.“언제요?”임유진이 물었다.“아마 9월쯤에 갈 것 같아요. 일단 거처부터 정하고 윤이 유치원도 알아보려고요. 윤이가 이제는 보통 애들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내 욕심으로는 일반 유치원에 다니게 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장애가 있는 아이라면 특수학교(유치원 부)에 가는 것이 마땅하나 지금 윤이가 일반 아이들과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을 보고 탁유미는 아들이 일반 유치원에 들어가기를 바랐다.윤이에게는 못 해준 게 많아 아이의 앞으로의 인생만큼은 순탄하기를 바랐다.인공와우 수술을 받게 해준 것까지는 좋았지만 청력이라는 건 아직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수술도 없기에 아마 윤이는 평생 인공와우나 보청기를 달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윤이라면 분명히 괜찮을 거예요. 똑똑한 아이잖아요. 저번에 공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뛰어노는 걸 보니 일반 아이들과 아무런 다른 점이 없더라고요. 일반 유치원에서 테스트를 진행하더라도 윤이라면 분명히 금방 통과될 거예요.”“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윤이를 받아주는 유치원이 있을 때까지 일단은 꾸준히 연락을 넣어볼 예정이에요. 그러다 보면 분명히 한곳쯤은 받아주는 곳이 있겠죠!”바로 그때 가게 문이 열리고 탁유미 엄마가 윤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윤이는 탁유미를 보더니 한달음에 달려가 안겼다. 하지만 이내 엄마가 복부를 다쳐서 입원까지 했다는 외할머니의 말이 떠올라 얼른 품에서 고개를 들어 물었다.“엄마, 혹시 아직도 아파요?”윤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