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렇게 공수진을 보살피며 심지어 아이의 일마저 공수진을 위해 생각하는데...“내가 공수진한테 목숨을 빚졌다고 했지?”그녀는 갑자기 되물었다.이경빈은 탁유미를 빤히 쳐다보며 뭔지 모를 그녀의 평온한 모습이 그로 하여금 불안해지게 했다.탁유미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바 옆으로 걸어가 와인 한 병과 와인잔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에게 와인 한 잔을 따랐다.지금의 그녀는 아마 알콜이라도 섭취하여 용기를 북돋으려는 것 같았다.달콤하면서도 쓴맛 나는 붉은 액체는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맛은 괜찮았다.예전에 그녀는 왜 술이 맛있는 줄 몰랐을까?술 한잔을 비우고 나더니 탁유미는 이내 술잔을 바 테두리에 대고 내리쳤다. 술잔은 순식간에 반쪽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손에 잡혀 있는 반쪽 깨진 술잔은 날카로웠다.“탁유미, 너 미쳤어?”“이경빈, 네가 말해봐. 그놈의 목숨 어떻게 갚을까?”탁유미는 마치 상대방의 기분을 개의치도 않는 듯 그저 가볍게 웃더니 물었다.그의 불안한 감정은 더욱 강렬해졌다.“뭐 하자는 거야?”차가운 목소리에는 그조차도 모르는 불안함이 묻어있었다.“이러면, 아마 이젠 아이를 낳을 수 없겠지?”그녀는 웃으며 손에 쥐어있던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자신의 복부를 찔렀다.뜨거운 핏물이 깨진 유리컵을 타고 흘러내려 그녀의 옷에 스며들고 손등에 떨어졌다.이경빈은 동공이 흔들리더니 그녀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지금 뭐 하는 짓이야?”그는 그녀를 향해 소리치기만 할 뿐 감히 그녀의 손에 들린 깨진 유리컵을 건드리지 못했다. 잘못 건드렸다가 그녀의 상처가 더욱 심해질까 두려웠다.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한 손으로 그녀의 팔목을 꽉 잡은 채 깨진 유리컵이 더 이상 그녀의 복부를 자극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 구급차를 불렀다.한 번도 119 구급대에 전화를 거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다고 느낀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마치 온몸의 힘이 다 소모된 것 같았다.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그는
그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호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그녀는 마음대로 자신의 몸을 해쳤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온몸이 차가워졌고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마치 그녀가 깨진 유리컵을 그의 몸에 박은 것 같았다.너무나도 아팠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그의 고통과 분노는 탁유미를 웃게 만들었다. 그저 가볍게 웃었을 뿐인데 복부의 피는 더 빨리 뿜어나왔다.“웃지 마!”그는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피가 너무 많이, 너무 빨리 흐를까 봐 걱정되었다.그녀의 웃음은 마치 당황한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이러면, 목숨 갚은 셈이지?”탁유미는 다소 힘이 든 채 말했다. 그녀는 피가 뿜어나오는 것을 느꼈지만 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그때 감옥에서 그녀는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는지라 이정도 부상은 그녀의 목숨을 앗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가 이렇게까지 결연한 것은 이경빈이 그녀의 결심을 알기를 바랐을 뿐이다.“난 남은 생 동안 아이를 갖지 않을 수도 있어. 아니면 네가 의사보고 내 자궁을 떼어내라고 해도 돼. 아, 물론, 지금 자궁이 이미 다쳤을 수도 있겠네? 그럼 아이를 아예 낳지 못하겠지.”탁유미는 다소 힘이 들어서는 말했다. 비웃음이 담긴 두 눈으로 안색이 창백해진 그 남자를 바라봤다.그의 얼굴에는 혈색이 일도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긴장하고 고통스럽고 당황스러움이 묻어있었다. 꼭 마치... 그녀를 무척 신경 쓰듯이 말이다. 만약 그때 그녀가 그의 매정스러움을 맛보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가 걱정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그는 그저 그녀가 그와 공수진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을 뿐이다.“이경빈, 나... 이거로 갚으면 되겠어?”그녀의 피는 그녀의 몸을 타고,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급 카펫 위에 끊임없이 뚝뚝 떨어졌다.그의 두 눈은 빤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이렇게 결연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그가 두려
그녀가 단지 3년 반 동안만 감옥살이를 했었기 때문이다. 3년 반이란 시간은 너무 가벼웠다.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해치는 것을 보고 그는 왜 말렸을까? 왜 구급차까지 불렀을까?그는 분명히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당했다고 생각했다.때마침 울린 핸드폰 벨소리는 조용한 공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이경빈의 핸드폰 화면에 표시된 이름은 공수진이었다.“경빈 씨.”그가 전화를 받자 전화 너머로 공수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이경빈은 피곤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경빈 씨, 무슨 일 있어요? 소리가 힘이 없네요.”공수진은 평상시와 다른 그의 목소리를 눈치채고 이내 물었다.“괜찮아, 별일없어.”탁유미의 일은 그에게 별 일도 아니었다.“그럼... 이만 끊을게요. 경빈 씨가 언제 돌아오는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 만약 경빈 씨가 S시에 더 있어야 한다면 저도 갈래요.”그동안 S시에 있을 때 그는 매번 통화할 때마다 몇 마디만 하고 급하게 끊어버렸다. 그럴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무슨 변수라도 생길까 봐 늘 두려웠다.비록 몇 년 동안 그는 그녀에게 매우 잘해 주었고 게다가 두 사람은 결혼 준비까지 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마치 가시처럼 항상 그녀의 마음속에 꽂혀있었다.게다가... 그녀가 제일 신경 쓰였던 건 일 년 동안 그가 계속 탁유미를 찾고 있었단 사실이었다.그는 도대체 탁유미에 대해... 공수진은 더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이경빈을 단단히 붙잡고 순조롭게 이씨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아니, 괜찮아. 안 와도 돼. 이틀 후면 다시 돌아갈 거야.”이경빈은 말했다.공수진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전화를 마친 이경빈은 굳게 닫힌 수술실 문으로 시선을 돌리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도대체 탁유미한테 어떻게 해야 할까?계속 복수해야 할까?아니면...그는 심지어 자신조차도
“걘 정말 네 원수야, 걔만 나타나면 넌 또 이렇게 다치잖아.”탁유미 엄마는 분에 가득 차서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진짜 걔 말대로 너 혼자 찌른 거야?”“네.”탁유미는 빠르게 인정했다.“네, 엄마, 제가 그런 거예요.”“하지만 너...”“나보고 아이를 낳아달라는 거예요.”탁유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우습죠? 그땐 저한테 그렇게 대해놓고 지금 저한테 복수하려는 방식이 뜻밖에도 아이를 낳으라는 거예요.”“걔 설마 너한테 아직 감정이 남아있는 거 아니냐? 필경 너희들 전에는...”“엄마!”탁유미는 엄마의 부질없는 환상을 깨버렸다.“그가 나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한 건 공수진이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단지 날 도구로 여겼을 뿐이에요. 만약 나에게 아직 감정이 남아있다면 당시 나를 감옥에 보내지도 않았겠죠.”그 말을 들은 탁유미 엄마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죄야, 네 아버지가 지은 죄를 지금 너 보고 갚으라니! 이경빈이 어떻게 너한테 그래, 네가 걔를 위해...”“엄마, 됐어요.”탁유미는 엄마의 말을 가로챘다. 과거의 모든 것은 그녀한테는 악몽일 뿐이었다. 그저 그녀가 잊으려고 애쓰는 악몽이었다.“지금 이시간에 병원에 오시면 윤이는 어떡해요?”“집주인보고 잠시 봐달라고 했어. 이경빈이 볼까 봐 병원은 데리고 올 수 없었어. 하지만 지금 이경빈이 갔으니 내가 윤이를 병원에 데리고 오는 게 낫겠어, 널 돌보는 것도 더 편하고.”“괜찮아요, 저... 저 병원에서 간병인을 찾으면 돼요. 어쨌든 병원에서 밥은 다 챙겨주니까, 윤이를 병원에 데려오지 마세요. 내가 다쳐서 입원한 것도 윤이한텐 말하지 마세요.”그녀는 아들이 이경빈에게 들킬 가능성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하지만 너 너무 심하게 다쳤...”“엄마, 나 잘 살게. 엄마 노후도 챙겨줘야지, 윤이 크는 것도 봐야지.”탁유미는 애써 얼굴에 웃음을 담은 채 말했다. 그녀는 엄마가 자기 때문에 걱정하는 게 싫었다.엄마가 그녀를 위해 했던 고생은 이미 충분했다.
임유진은 3일 후 로펌으로부터 면접이 통과되었다는 통지를 전화로 받았다. 차 변호사는 그녀를 비서로 받아들였다.비록 로펌 비서일 뿐이라고 해도 그녀가 다시 변호사라는 직업에 발을 디뎠다는 것을 의미했다.임유진은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어 좋은 소식을 전했다. 한지영은 진심으로 친구를 위해 함께 기뻐해 줬다.“너무 잘 됐다. 유진아, 잘해! 나중에 우리 변호사님께서 사주는 밥도 얻어먹어야지.”한지영은 덩달아 기뻐했다.임유진은 그녀의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변호사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있어? 첫 달 월급만 받으면 크게 한턱쏠게.”“약속한 거다!”한지영은 이어 말했다.“기다릴게.”“그래.”임유진은 쿨하게 대답했다. 며칠간 우울했던 기분은 지금 이 순간에 다 풀려버렸다.인생은 결국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고 그녀는 상처로부터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강지혁에 대한 감정을 모두 내려놓은 채 그저 터무니없는 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전화를 마친 임유진은 여전히 자신의 핸드폰을 보며 연락처를 펼쳤다. 연락처에는 혁이라는 이름이 적힌 번호가 두 개 저장되어 있었다.하나는 그때 그녀가 그에게 핸드폰을 사주며 만들었던 유심카드였고 다른 하나는 그가 평소에 자주 쓰던 번호였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화면을 터치하며 두 개의 번호를 일일이 삭제했다.마치 둘 사이의 마지막 관계를 끊어내는 것 같았다.“강지혁, 잊을게.”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게 그녀를 감싸며 공기 속으로 퍼졌다.퇴근할 때, 백연신은 한지영을 데리러 왔다. 디자인 스튜디오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한지영이 운이 좋게 백선 그룹의 회장과 사귄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번 백연신이 그녀를 데리러 올 때면 스튜디오의 보기 드문 광경이기도 했다.심지어 일부러 꾸민 채 백연신 앞에서 얼굴을 잠깐 비치며 혹시라도 눈에 띄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품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필경 한지영은 여신까지는 아니었고 기껏해야 깔끔하고 단정했을 뿐이다.많은 사람이 백연신이 한지
“당신은 내가 아니잖아...”그녀는 무심결에 부인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목에 뭔가 걸린 것처럼 말끝을 흐렸다.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는 마치 자조와 암울함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한지영은 가슴이 답답해 났다. 그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숨이 막혔고 마치 그에게 무슨 빚이라도 진 것 같았다.차 안은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왜? 계속 말해봐.”그제야 이 적막을 깨는 백연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든요.”그녀는 혼자 켕겨서 말했다.‘제발, 뭐가 찔리는데!’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말했다. 그들은 진짜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둘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다만 때로는 그의 몇 마디 말이... 그녀를 약간 착각하게 했다... 그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항상.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그와 같은 남자는 못 만나본 여자가 없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아니면 지금 그의 행동이나 말은 단지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그를 사랑하게 되면 그는 아마도 그녀를 차버릴 것이다. 마치 그때 그녀가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났을 때와 같이 말이다.“오늘 어디 가서 밥 먹을래?”그는 이내 말을 돌렸다.“근처에 있는 쇼핑몰로 가죠. 이따 먹어요. 먼저 쇼핑하면서 유진에게 옷 몇벌 사주려고요. 유진이가 오늘 새 직장을 구했대요. 하지만 유진의 옷은 모두 몇 년 전에 입던 옷들이라 공식적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요.”한지영은 말을 이어갔다.강지혁이 사준 옷들을 유진은 한 벌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유진의 옷들은 모두 그해 감옥에 가기 전의 옷이었다. 비록 어떤 옷은 질이 좋았지만 유행도 지났고 색도 죄다 빠졌다.백연신은 한편으로 액셀을 밟으며 말했다.“너 임유진한테는 엄청 잘해주더라, 임유진의 일이라면 맘에 항상 두고. 언제면 내 일을 그렇게 맘에 두고 있을지 모르겠네.”“흠...흠흠...”
“그저 일반인이에요... 옛날엔 친구였는데 지금은 연락 안 해요.”임유진은 씁쓸해서 말했다.차 변호사는 뭔가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그 친구에게 잘해야겠네요.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유진 씨는 지금 변호사 일을 할 수도 없었을 거예요.”임유진은 차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나온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방금 새 상사가 그녀를 도와 사건을 뒤집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꼬치꼬치 캐 묻을까 봐 걱정이었다.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임유진은 일을 손에 익히기 시작했다.처음 입사했을 때, 그녀도 반년 동안 비서로 일했던지라 지금 다시 비서 일을 하니 오히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일이 좀 사소하고 잡다하긴 하지만 어렵지는 않았다.정한나는 그녀의 앞에서 어슬렁거리더니 강지혁에 관한 일을 슬쩍 물었지만 임유진은 덤덤하게 그 물음들을 비껴갔다.퇴근 시간이 되자, 임유진은 막 퇴근하려는데 마침 장한나의 소리가 들렸다.“오늘 유진 씨가 새로 입사했는데 우리 유진 씨를 위해 환영하는 겸 회식하는 게 어때요?”사람들은 이내 맞장구를 쳤다.“좋아요. 새 동료의 입사를 축하해요.”“그러게요. 어쩌다 여자 동료가 입사했는데 축하해야죠!”“그럼 다 같이 가시죠.”임유진은 상황을 보고 거절하기도 무안했다. 게다가 필경 그녀가 처음 입사했기 때문에 인간관계도 가꾸어야 했다. 만약 출근 첫날부터 어울리지 못한다면 앞으로 계속 함께 어울리기 어려울 것이었다.그리고 변호사 같은 직업은 인맥이 중요하다.비록 장한나가 제기한 제안이었고 분명히 호의는 아니었지만 임유진은 이 상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그녀는 장한나가 도대체 무슨 꿍꿍인지도 생각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회식하자는 건 아닐테니 말이다.임유진이 지원한 직책은 비서인지라 회식에 참석하는 것은 사무소에서 경력이 짧은 변호사거나 임유진과 마찬가지로 비서뿐이었다.그런데 이 사람들만 합쳐도 열 명쯤 되었다.다만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임유진은 그릴앤바에 간다는 것을 알았다
“자, 우리 새로 입사한 임유진 비서를 위하여!”직장동료는 잔을 들고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회식 자리의 주인공인 임유진은 당연히 사람들이 술을 권하는 대상이었다.임유진의 주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몇 잔만 마셨는데도 약간 어질어질했다.그녀는 동료들이 술을 권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핑계를 대며 화장실에 갔다.화장실에서 임유진은 세면대 옆에 기댄 채 술기운 때문에 뜨거워진 얼굴을 물로 헹궜다.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거울 속 자신을 빤히 바라봤다. 이마와 볼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에는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빨개진 두 볼, 앙증맞은 코, 그리고 평소보다 더 붉은 입술.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은 마치 작은 부채 같았다.예전에 그녀는 자신의 속눈썹이 매우 길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연하게 화장할 때면 마스카라도 할 필요 없었다. 하지만 강지혁을 만난 후, 그녀는 남자의 속눈썹도 그렇게 예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혁이의 속눈썹은 엄청 예뻤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속눈썹이 매번 흔들릴 때마다 사람을 설레게 했다. 그녀로 하여금 감정을 억누를 수 없게 했다...세상에, 그녀는 또 그의 생각을 했다.임유진은 머리를 힘껏 저으며 다시 찬물로 얼굴을 씻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이 세상에는 더 이상 혁이는 없다. 다만 강지혁만 있을 뿐이다.그녀는 심호흡하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찬물로 세수했는데도 머리가 어지럽고 조금 있으면 더 취할 것만 같았다.마침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한지영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전화 너머로 한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아, 어딨어? 집에 없던데?”“너... 나 찾으러 갔어?”임유진은 입을 열었다.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술에 취해 혀가 꼬였다.“응, 근데 너 목소리 왜 그래?”한지영은 이내 되물었다.“술 좀 마셨어.”“술? 어디서?”한지영은 갑자기 긴장되었다. 필경 유진이는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깐.“그릴앤바.”임유진은 대답했다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