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원장의 부탁 때문에 그는 임유진에게 좀 더 신경을 썼다.이때 또 하나의 그림자가 진료실에 들어가 임유진의 곁에 와서 불렀다.“누나.”“왔어?”임유진이 말했다. 그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왔다.“응, 길이 막혀서 시간이 좀 늦었어.”강지혁이 대답했다.“의사 선생님, 어때요? 제 친구 괜찮아요? 방금 에스컬레이터에서 걸려 넘어져서 계단을 굴렀어요.”옆에 있던 한지영이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낙상은 문제가 심각하지 않아요. 다리 발목 여기 부분에 뼈가 조금 금 갔는데 1, 2주정도 쉬면 돼요. 하지만…….”장 의사는 망설였다.“그런데 뭐예요?”한지영이 추궁했다.“그런데 임유진 씨, 몇 년 전에 자주 다치지 않았어요?”장 의사가 물었다.임유진은 멍해져서 한동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다른 뜻은 없어요. 단지 임유진 씨 CT 결과에 따르면 임유진 씨가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상처를 입은 것 같아서요. 조금 오래된 상처는 당시 잘 치료하지 못했기에 후유증이 조금 있을 수 있어요.”“후유증?”임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저는 평소에 불편한 점을 못 느꼈어요.”“임유진 씨는 아직 젊으니 당연히 별 느낌을 받지 못할 거예요. 앞으로 나이가 들면 그 후유증이 서서히 발현될 거예요.”“어떤 후유증일까요?”한지영은 임유진보다 더 긴장했다.“나중에 관절이 자주 아플 수도 있고, 심하면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없고, 걷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어요.”장 의사가 말했다.임유진은 침묵하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과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 오래된 상처는 모두 감옥에서 입은 것이다.골절 되었다 하더라도 간단하게 의사를 찾아 싸매기만 하면 잠시 조용해질 수 있는 곳이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쉽지 않는데 또 상처를 잘 치료할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그…… 그럼 치료할 방법이 있나요?”한지영은 긴장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임유진은 오히려 좀 더 조용해 보였다.“주로 많이 쉬면서 평소에 칼슘 보충 음식을 많이
그녀의 입에서 ‘강지혁’이라는 세 글자를 말했을 때, 그의 몸은 자기도 모르게 경직되어 있었다.“강지혁을 미워한다고?”그가 중얼거리며 물었다.그녀는 조금 탄식하며 말했다.“하긴, S 시에서 누가 그를 모르겠어. 그 교통사고에서 죽은 사람은 강지혁의 약혼녀 진애령이었어. 그의 약혼녀가 죽었으니 나의 결말은 당연히 좋지 않겠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에게 아부하고 싶어 하는지, 아마도 그만큼 많은 사람이 우물에 빠진 나에게 돌을 던졌겠지.”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그녀는 자신을 조롱하며 말했다.“가끔 나는 그때 나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진애령이 아니었다면 내가 소송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어. 그러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지 않고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거잖아.”그녀는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았지만, 현재 이런 담담한 말투 때문에 강지혁은 오히려 가슴을 쥐어뜯을 만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그녀가 받은 고통의 반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그는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응시했다.“누나가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을 줄 알았다면, 나는 3년 전에 누나를 보호했을 거야.”이 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만약 그때, 다른 사람이 자신의 비위를 맞추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면, 만약 그 당시, 그녀에게 공정한 결론을 주려 했다면…… 그녀는 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온몸에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다.“나는 네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 자, 이런 일은 말하지 말자.”임유진은 웃으며 손을 들어 그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요즘 그녀는 자주 이렇게 그의 머리를 만졌다.한지영은 약을 챙겨 돌아와 두 사람에게 말했다.“그럼 나는 지하 주차장 쪽으로 가서 차를 가져올게. 그리고 혁이 씨는 유진이를 부축해 정문 쪽으로 가서 내 차를 기다려요.”“알았어요.”강지혁이 대답했다.한지영은 곧 차를 가지러 떠났다. 임유진은 옆에 있는 사람의 도움으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누나는 아주 가벼워.”강지혁이 솔직히 말했다. 임유진은 160여 센티미터였지만 그가 이렇게 업고 있으니 체중이 기껏해야 45키로를 넘지 않을 것으로 느껴졌다. 그는 앞으로 그녀에게 몸보신을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얼굴을 그의 등에 갖다 대니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업힌 적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른다. 기억 속에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이렇게 자신을 업고 살았던 것 같았다.다만 그때의 기억은 너무 희미했다.“혁아, 난 네가 참 좋아.”그녀가 중얼거렸다.“그리고 누나는 또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할 거지?”그가 말했다.“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네가 정말 좋은 동생이라는 거야. 너 같은 동생이 있어서 나는 정말 행복해.”그녀가 말했다.애초에 이 게임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동생으로 그녀의 곁에 있었지 않았던가? 그녀는 그에게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다.그러나 지금 그는 그녀가 정말로 그를 동생으로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강지혁이 임유진을 업고 병원 앞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지영의 차가 나타났다.두 사람이 차에 오르자 한지영은 차에서 화를 내며 오늘 발생한 일을 말했다.강지혁은 이미 고이준으로부터 사건의 대략적인 경과를 알게 되었지만 한지영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표정이 굳어버렸다.“소민영은 정말 너무해요. 처음에는 악의적으로 점원에게 우리를 내쫓으라고 한 것도 모자라 고의로 이렇게 사람을 넘어지게하다니. 유진이 운이 좋아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아마 중상을 입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한지영은 이가 갈릴 정도로 미워했다.“소민영은 뒤에 소 씨 가문이 있다는 것을 믿고 이렇게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거예요!”“소 씨 가문…….”강지혁은 가볍게 읽으면서 조롱 섞인 말투로 물었다.“소 씨 가문은 왜요?”“휴, 혁이 씨, 혁이 씨 정말 소 씨 가문을 업신여기지 말아요.”비록 욕은 욕이지만 한지영은 사실을 설명했다.“소 씨네 가문은
임대주택에서 강지혁은 임유진을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혀놓은 뒤 이미 식은 음식을 다시 데웠다.강지혁의 바쁜 모습을 보자 한지영은 오히려 강지혁에 대한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이전에는 유진이가 이렇게 낯선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방은 분명 유진이에게 잘해주고 있었다.만약 누군가가 이렇게 친구를 돌봐준다면 한지영도 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한지영이 돌아간 뒤 강지혁과 임유진은 간단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식사 후에 임유진이 치우려 하자 강지혁이 말했다.“내가 치우면 돼. 누나는 많이 움직이지 마.”임유진은 자신이 오히려 한가한 사람들이 된 것 같았다.강지혁은 정리를 마치고 또 임유진에게 물었다.“누나 화장실에 갈래?”“뭐?”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얼굴을 붉혔다.“갈래, 안 갈래?”그가 말했다. 아주 평범한 질문을 던진 듯 했다.그녀는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결국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그래서 그는 그녀를 안고 화장실로 간 다음 다시 물러났다.“다 됐으면 나를 불러.”그가 말했다.“…… 알았어.”그녀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그녀가 줄곧 화장실에 가지 않은 것까지 그가 알아차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화장실을 나서자 강지혁은 또 임유진을 의자까지 안아갔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사실 나 스스로 갈 수 있어. 한쪽 발이 조금 금 갔을 뿐, 다른 한쪽 발은 괜찮아.”“의사가 조금씩 걸을 수 있으면 조금씩 걸으라고 했어.”그가 말했다.“아니면, 누나는 내가 이렇게 누나를 돌봐주는 게 싫은 거야?”“아니…… 그런 건 아니야.”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그는 살짝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가볍게 어루만졌다.“나는 누나가 다치는 게 싫지만 누나가 이렇게 나에게 의지하는 것이 좋아.”“의지?”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래, 나한테 의지해. 누나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안아서 갈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아무 데도 못 가. 난 누나가 나한테 의지하는 게 좋아. 그래서……
“하지만 해고되고 수입이 없다면 임대료랑 먹고 살 돈을 어디서 구해…….”“내가 있잖아!”그가 말했다.“내가 돈을 벌어서 누나를 먹여 살릴 테니 누나는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임유진은 물끄러미 눈앞의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매일 자질구레한 일만 할 뿐 돈을 전혀 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이렇게 말하니 오히려 예전에 느껴본 적 없는 든든함이 생겼다.그녀의 생활은 결코 혼자가 아니고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직 혁이에게 의지할 수 있다.“전화해.”그는 직접 그녀의 핸드폰을 그녀의 눈앞에 건네주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환경위생과에서 환경미화원들을 관리하는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휴가를 신청하면 괴롭힘을 당할 줄 알았는데, 그녀가 휴가를 일주일이나 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을 때, 팀장은 뜻밖에도 아무렇지 않게 승낙했다. 일주일이 부족하면 2주일을 쉬어도 된다고 했다. 또 최저임금은 여전히 지급될 것이라고 그녀의 급여를 정상적으로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뒤에도 의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팀장님이 내가 휴가 내길 간절히 바라는 것 같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모르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휴가 신청에 동의한 거잖아.”강지혁은 말하면서 계속 발을 씻겨주었다.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발등, 발뒤꿈치, 발가락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어 그녀는 좀 쑥스러웠다.여태껏 남자가 그녀의 발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소민준조차 없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을 받치고 길쭉한 손가락이 그녀의 발을 감쌌을 때,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벌겋게 상기되었고, 피가 모두 머리 위로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얼굴은 심하게 뜨거웠다.“아…… 됐어, 내가 닦으면 돼!”그녀는 그의 손바닥에서 발을 빼려고 움직였다.그러나 그의 다섯 손가락은 여전히 그녀의 발을 감싸고 있었다.“내가 닦으면 돼. 누나는 움직이지 마.”그가 말했다.그녀는 어색해서 한동안
저녁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낮은 비명에 놀라 잠에서 깼다. 그가 불을 켜자 그녀가 편안하게 자지 못하고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다만 이 소리가 너무 희미해서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누나!”그는 그녀를 부르며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보았는데, 그녀의 이마에 이미 식은땀이 났고, 조금 뜨거운 것 같았다.강지혁은 재빨리 따뜻한 물로 수건을 적셔 유진의 이마를 닦았다.그리고 임유진은 두 눈을 꼭 감고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그가 아무리 그녀를 불러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그는 얇은 입술을 깨물고 초조하고 불안한 느낌이 몸에 가득 차올랐다. 심지어 그순간 어떻게 해야 그녀를 좀 편안하게 해줄 수 있을지 몰랐다.한 여자 때문에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핸드폰을 꺼낸 그는 비서 고이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하여 새벽 2시에 고 비서는 BOSS의 전화를 받았다.“당장 의사를 데리고 임대주택으로 와. 유진이가 열이 나.”강지혁의 목소리에 은근한 초조함을 띠었다.“지금요?”고이준은 깜짝 놀랐다.“그래, 지금.”강지혁이 말했다.고이준은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서둘러 의사에게 연락한 뒤 한밤중에 따뜻한 이불 속에서 일어나 의사를 임대주택으로 데려다줄 수밖에 없었다.문을 두드릴 때 고이준은 특별히 조심스러웠다. 상사는 진짜 신분을 임유진에게 들키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 말이다.문이 열리자 강지혁은 몸을 옆으로 돌려 의사와 고이준을 직접 방으로 들여보냈다.들어가자마자 고이준은 임유진이 침대에 누워있고 두 눈이 감겨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한 번 봐봐요, 그녀가 지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방금 내가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를 깨울 수 없었어요.”강지혁이 말했다.고이준은 상사가 평소의 냉정함을 잃은 것 같다고 느꼈다.고이준이 데려온 그 의사는 경험이 풍부한 가정 의사였다. 비록 상대방은 강지혁의 신분을 모르지만 고이준이
그러나 곧 고이준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가 추측해서는 안 될 일이다.고이준은 임대주택 문을 살짝 닫았다. 에서 강지혁은 혼수상태에 있는 유진을 보면서 손에 든 약을 입술에 건네주었다.“착하지, 약 먹어.”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더 꽉 닫혀 있어 알약도 넣을 수 없으니 약을 먹인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강지혁은 얇은 입술을 거의 일직선으로 오므린 후 알약을 입에 물고 물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유진의 차가운 입술 옆에 다가갔다.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눌렀고, 혀끝이 그녀의 입술을 밀어 약을 그녀의 입으로 넣었다. 사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는 이런 방식으로 그녀에게 약을 먹였다.비록 약이 이미 그녀의 입에 들어갔지만, 그는 그녀의 입술을 그리워하고 있다.일종의 탐욕 같기도 하고, 일종의 중독 같기도 하고, 만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했고 심지어…… 놓을 수 없고, 아쉬웠다…….“유진…….”그가 중얼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갑자기 그녀는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천천히 두 눈을 떴다. 희미한 눈동자가 그의 몸에 떨어졌다.그는 멍하니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이 순간에 긴장된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그녀가 입을 벌리고 그를 향해 멍청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엄마, 착하게 있을게요. 엄마랑 함께 자고 싶어요.”“…….”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아마 그녀는 지금 열이 나서 그를 그녀의 어머니로 착각한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앳되고 천진난만하지만 또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그녀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녀의 어머니는 바로 그녀가 그 집에서의 마지막 따뜻함이었을 것이다.강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젖혔다. 그들 중 한 명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한 명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 말하자면 정말 좀 비슷하다.“엄마, 같이 있어 줄래요? 얌전히 있을게요. 얌전히 있을…….”그녀는 눈을 반쯤 뜨고
소민영은 계속 일러바쳤다.소민준의 부모님은 그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10억, 소 씨네 집에 있어서 이 돈은 비록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일반인에게는 큰돈이다.“민준아, 너 이게…….”소민준의 어머니는 의아해하며 아들을 바라보았다.“민영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봐요.”소민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민영이가 임유진에게 마음대로 가게에서 옷 한 벌을 고르라고 하며 그녀에게 선물한다고 했어요. 결국 임유진은 10억짜리를 골랐고 저는 단지 민영이가 저질러놓은 난장판을 수습한 것 뿐이에요.”“그녀가 고르면 다 사줘?”소민영은 씩씩거리며 말했다.“오빠, 왜 말을 안 해, 오빠는 근본적으로 임유진에 대해 감정이 남아 있어!”“나는 너의 목숨을 구하고 있어!”소민준은 정말 여동생의 뺨을 한 대 더 때리고 싶었다.소민영은 화가 나서 말했다.“임유진 따위가 날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웃겨.”“그래, 민준아, 너도 너무 심했어. 임유진 때문에 네 동생을 때리다니. 그 여자는 원래 재수 없는 여자야. 그렇지 않으면 그 여자 때문에 우리 집이 지금 강 씨 가문의 미움을 살까 봐 이렇게 노심초사할 필요가 있겠어?”소민영의 어머니가 딸을 도와 말을 했다.“엄마, 이 일은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그럼 어떻게 해!”소민준의 어머니가 반박했다.“임유진은 정신 차리지 못한 것 같아. 네가 결혼하려고 하는데, 또 너를 건드리는거야, 정말 뻔뻔스러워. 10억도 뻔뻔하게 가져간 거야?”그런 여자에게 10억을 줬다고 생각하니 소민준의 어머니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소민준은 갑자기 일어섰다.“엄마, 왜 더 자세하게 물어보지 않아요? 민영이가 나중에 또 임유진에게 무엇을 했는지 알아요? 일부로 임유진의 발을 걸어 유진이가 에스컬레이터에서 굴러떨어지게 했어요!”“그럼 뭐 어때?”소민준의 어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상처를 좀 입었을 테지. 병원비는 얼마든지 우리 소 씨 가문이 내줄 수 있어. 이런 일 때문에 동생을 때릴 필요가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
탁유미는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이경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을 반대로 잡아당겼다.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도저히 잡아당겨 지지를 않았다.이경빈은 이대로 그녀의 옷을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꽉 쥐고 놓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경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손 다치고 싶지 않으면.”경호원은 그녀의 눈빛에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의 옷을 꽉 잡고 있는 이경빈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이경빈은 경호원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나 원망하는 거 알아. 당연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날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난 너랑 할 얘기 없어.”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이경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옷을 꽉 잡은 손이 경호원의 힘으로 하나둘 펴지며 서서히 고통이 일고 있는데도,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옷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대로 놓아주면 다시는 그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까 봐, 그녀와는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날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탁유미는 제 옷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는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었다면 억지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항상 네 기분만 중요하고 네 생각만 중요한 사람이었어! 존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마치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탁유미는 옷을 정
이경빈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인수로만 놓고 보면 이경빈 쪽이 훨씬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경호원들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특정 인원들의 출입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는 강지혁의 명령을 받았으니까.“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탁유미가 걸어 나왔다.강지혁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경빈 대표님은 저희가 금방 되돌려보내겠습니다.”그들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갖췄다.탁유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턱 쪽에 수염이 까끌까끌 나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으며 다크서클은 물론이고 눈가도 엄청 빨개 있었다.이제껏 줄곧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세팅하고 다니던 남자였는데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며칠 만에 보는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으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더 힘이 없어 보였다.게다가 이마에는 까진 상처가 있었는데 복도 조명 때문에 더 잘 보였다.이경빈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에 마치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일었다.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는 그날 그의 명령으로 머리가 조아려졌을 때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그렇게도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억지로 그녀의 무릎을 꿇리고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그날 경호원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런 수모를 줬을까.왜 등신처럼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고 공수진에게 사과하게 했을까.이경빈이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 탁유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왜, 또
주원호의 말에 이경빈의 몸이 움찔 떨렸다.탁유미는 그저 복수대상일 뿐이라고?아니. 탁유미는 그에게 단지 복수대상뿐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다.이경빈은 심장이 점점 더 세게 아파 와 이윽고 벽에 몸을 기댔다.꼭 이 통증에 잠식되어가는 듯한 기분이다.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자신이 탁유미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한때는 고작 원수 집안의 딸일 뿐인 여자라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따위는 금방 지워질 줄 알았다. 그녀를 감옥에 보내 복수를 하고 나면 아주 손쉽게 그녀를 마음속에서 떨쳐낼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했을 뿐 그는 줄곧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만약 탁유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허름한 모습으로 있는 게 신경이 쓰일 리도 없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질투 날 리도 없다.또한 상처만 줬던 그녀에게 배신감이 들 리도 없다.이경빈은 항상 공수진의 편에만 서고 한 번도 탁유미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는 것에서 늘 도망쳐왔다.죽도록 미운 원수의 딸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이경빈은 몸 옆으로 축 늘어진 자신의 두 손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뚫어버리고 이내 바닥으로 피까지 뚝뚝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고통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텅 비어 버린 얼굴로 탁유미의 병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탁유미를 만나 그간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를 해야만 한다.그녀의 아버지를 향한 증오를 그따위 비열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됐다고 사과해야만 한다.또한 앞으로는 정말 잘 해주겠다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전부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잘해주겠다고 말을 해야만 한다.이경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놓고는 막상 탁유미의 병실에 점점 가까워지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탁유미가 전과 같은 원망과 증오가 서
이경빈은 말 그대로 공수진에게 생지옥이라는 게 무엇인지 맛보게 해줄 생각이다.그와 탁유미의 인생을 가지고 논 대가를 평생에 걸쳐 갚게 할 생각이다....병실에서 나온 이경빈은 심장께가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탁유미를 모함하려고 한 공수진도 물론 증오스러웠지만 그녀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여자에게 무자비했던 자신이 더 증오스러웠다.아까 병실로 들어간 순간 이경빈은 억지로 탁유미의 무릎을 꿇리고 그녀에게 머리까지 조아리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바닥에 쿵쿵 부딪히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정말 공수진을 위해서였을까?사실은 그저 그런 방식으로 탁유미에게 상처를 줘 그녀를 향한 마음을 애써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윤이를 이용해 이씨 집안 재산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공수진이 어렵게 생긴 아이를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자꾸 상처받은 듯한 탁유미의 얼굴들이 떠올라 더 모질게 굴었던 건 아닐까?탁유미는 그에게 등신이라고 했다.맞는 말이다.그는 정말 구제 불능의 등신이었다.“저... 저기, 저는 그저 공수진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제가 아는 건 다 털어놨으니 이제 그만 저 풀어주세요...”주원호가 이경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몇십 분 전 그는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찰나 검은색 정장의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병원으로 데려와 졌고 이경빈의 앞에서 공수진에 관한 모든 얘기를 실토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만약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주원호는 솔직히 그저 공수진에게 돈만 조금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돈이고 뭐고 공수진 근처로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대체 누가 날 데리고 온 거지? 상황을 볼 때 이경빈은 아닌 것 같은데.’“풀어달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헛웃음을 쳤다.공수진을 도와 진실을 덮어버린 그
이경빈은 공수진에게로 더 바짝 다가가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래서 네 배 속의 아이가 주원호의 아이라는 걸 다 알고 일부러 그런 식으로 유산해 아이도 제거하고 탁유미도 제거하려고 했던 거야?”공수진의 흥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이경빈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하지만 그건 꼭 거대한 해일이 밀려들기 전의 고요함으로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공수진은 이경빈의 질문에 머리가 새하얘지고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에 꽉 막힌 채 좀처럼 튀어나오지 않았다.이경빈은 그녀의 머릿속을 다 꿰뚫어버리려는 듯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나는... 나는...”공수진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네 유산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를 불러올까? 태아가 정확히 몇 개월 된 아이였는지 물어봐 줘? 그것도 아니면 너희 집안이 의사한테 돈을 먹인 증거를 가지고 올까?”공수진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부인해봤자 큰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노선을 바꿔 그에게 매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경빈 씨, 미안해요. 경빈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일로 경빈 씨가 나를 싫어할까 봐... 그래서 말을 못 했어요. 그리고 일부러 탁유미 씨를 모함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에요. 유미 씨가 나를 밀어버려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유산하게 된 거예요. 절대 일부러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경빈 씨, 나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요...? 전에는 내가 한 잘못은 다 용서해줬잖아요. 그리고 날 평생에 걸쳐 사랑하고 또 아껴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도 한 번만 봐줘요. 네...?”그녀의 눈물과 애처로운 말은 더 이상 이경빈의 동정심을 자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심기만 건드릴 뿐이었다.“용서?”이경빈이 코웃음을 치더니 그대로 공수진의 팔을 뿌리쳤다.공수진은 그 충격으로 뒤에 있는 벽에 몸이 부딪쳐버렸다.그리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이경빈에 의해 목이 졸려졌다.냉랭하고 차분했던 기색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
이경빈의 말에 공씨 집안 사람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공수진은 등줄기를 타고 오는 오싹함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설마...!’“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경빈 씨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속이다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공수진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글썽였다.예전이면 가여워 보였을 그녀의 모습이 지금은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이경빈은 가볍게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고 화면을 두어 번 터치하더니 곧바로 공수진 쪽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그러자 휴대폰 안에서 의사와 공수진의 통화 녹음이 흘러나왔다.공수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공수진은 물론이고 공씨 부부 역시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심지어 공수진은 많이 당황한 것인지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흘러내렸다.‘임유진이 말했던 녹음이라는 게 이거였어?! 그 여자가 기어코 경빈 씨한테 이 녹음 파일을 전해준 거야?!’공수진은 임유진을 향한 분노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참 대단해.”그때 이경빈이 천천히 병상 옆으로 다가와 공기조차 얼려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 나를 몇 년이나 가지고 놀고 말이야. 참 대단해, 공수진.”“이... 이거 거짓말이에요! 가짜라고요! 누가 내 목소리로 일부러 이런 통화 녹음을 만든 거예요!”“네가 아니라고?”공수진의 부인에 이경빈은 손에 든 자료를 그대로 그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당시 너랑 통화했던 의사 선생님도 찾았고 네 목소리가 맞는지 전문가한테 의뢰하기까지 했어. 그런데도 네가 아니야? 증거가 버젓이 있는데?”공수진은 당황한 듯 말을 버벅거렸다.“그.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병원 기록을 알아보면 되잖아요! 기, 기록에 다 적혀 있어요. 내가 경빈 씨한테 기증했다는...”드르륵.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공수진은 갑자기 나타난 주원호의 얼굴을 보고는 얼굴이 새하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