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문득 고개를 숙여 자신의 평평한 배를 바라봤다.어쩌면 이번 생은 정말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전에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라 포기했지만, 지금은 몸이 괜찮아도 마음이 괜찮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사랑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임유진이 식당에 도착한 건 저녁 8시가 다 돼서였고 다행히 피크 타임은 피할 수 있었다.“왔어요?”탁유미는 임유진을 반갑게 맞이하고는 조금 초췌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밥은 먹었어요?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그럼 언니, 나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싶어요.”“잠깐만 기다려요.”탁유미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 주방장에게 부탁했고 몇 분 후 뜨끈한 칼국수가 임유진 앞에 놓였다.“먹어요. 하루 지나긴 했지만, 생일 축하해요!”“고마워요.”임유진은 아무 말 없이 식사하기 시작했다. 탁유미는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먼저 손님을 받고 주방일도 돕다가 임유진이 식사를 마친 후에야 다시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어제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탁유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나 강지혁이랑 헤어졌어요. 지금은 그 집에서 나왔고요.”하룻밤 지나고 나니 이런 얘기도 평정심에 할 수 있게 됐다. 이대로라면 그를 향한 마음들도 조만간 전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탁유미는 너무나도 평온해 보이는 그녀를 보며 더더욱 걱정이 일었다. 그녀 역시 힘든 사랑에 다치고 할퀴어 넝마가 된 사람이라 임유진의 평온함도 그저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것뿐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녀에게 힘이 나는 조언을 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자격도 없거니와 이 상황에서 어떤 위로를 건네야 좋을지 감이 서지 않았다.오직 시간의 흐름만이 그녀의 상처를 전부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아닐까?“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 아니에요.”임유진은 탁유미 눈에서 자신을 향한 걱정을 읽고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참, 이건 내가 윤이 주려고 산 케이크예요. 어제는 약속
그리고 손에 든 케이크도 놓치고 말았다.아까 몸을 돌린 순간 가게 앞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그 실루엣은 지금 차에 기댄 몸을 세우더니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머리는 항상 그랬듯 단정하게 세팅하고 검은색 정장은 그의 몸에 딱 맞게 자리 잡아 완벽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금욕적인 얼굴은 조금 차가워 보이기도 했고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볼 듯한 눈동자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 같기도 했다.그리고 지금 그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탁유미는 순간 흐르던 피가 멈춘 듯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주위 공기마저 차갑게 느껴졌다.이경빈!이 남자가 결국에는 그녀를 찾아내고야 말았다!백화점에서 도망갔을 때 탁유미는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 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이번에야말로 그가 그녀를 찾아낼 것이라고.하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 미처 이 상황에 대비할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이 남자를 마주해야 했고 지금 그녀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오랜만이야.”싸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그러자 탁유미의 몸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흠칫 떨리고 만다.오랜만이려나...?백화점에서 도망갈 때 스치듯 봤던 그의 옆모습이라면 확실히 오랜만이 맞을 것이다.그러면 그전에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제였지? 아, 법정에서 그가 증인이 되어 그녀에게 죄를 입힌 그날이려나?이경빈은 그날 그 예쁜 입으로 직접 그녀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그때 아마 ‘네가 지은 죄 달갑게 받아!’라고 했었나?하지만 탁유미는 죄를 지은 적이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외치고 또 외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그녀는 그가 내린 ‘벌’을 그저 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그녀에게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 이경빈을 사랑한 죄밖에 없을 것이다.그녀를 감옥에 밀어 넣은 장본인이 지금 그녀에게 ‘오랜만이야’라는 인사를 건
그녀가 배고픔에 시달리면서 고통받았을 때, 그는 아마도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고 진수성찬을 만끽하고 있었을 것이다.“손 좀 놓아줄래?”탁유미가 말했다. “우리 사이에 할 얘기는 이미 법정에서 다 끝낸 것 같은데. 네가 날 감옥에 보내서 순순히 갔다 왔잖아. 경빈아, 넌 나한테 뭘 더 원하는 거야?”이경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예전처럼 다정하지 않았고 온몸에 가시가 돋친듯해서 사람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이경빈의 귀에는 그녀가 손을 놓아달라고 하는 말이 많이 거슬렸다.“탁유미, 네가 그 몇 년 감옥에 있은 거로 네가 진 빚이 다 청산됐다고 생각하는 거야?”이경빈은 차갑게 말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팔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너무 순진해!”그 말에 탁유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하다니... 그가 그녀를 순진하다고 말하다니! 그녀의 순진함은 진작에 이경빈 때문에 파괴되고 산산이 부서졌다! “이경빈, 나는 원래부터 너에게 빚진 게 하나도 없어.”탁유미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것없어도, 그녀의 존엄성이 모두 상실되었어도, 절대로 그에게 빚진 것은 없다! “나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그는 분노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나에게 생명 하나를 빚졌어! 네가 아니었으면 수진이 배 속의 아이를 잃지 않았을 거야!” 탁유미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더 크게 웃었다.그때, 그녀는 바로 이 일로 감옥에 간 것이 아닌가? 이경빈은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기에 공수진이 유산하고 아이를 잃게 됐다고 지목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상해죄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3년 반의 감옥 생활을 마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가 자신에게 생명을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그럼 너는 내가 얼마나 더 감옥에 있기를 바라는 거야? 5년? 10년? 아니면 20년... 그것도 아니면 무기징역?”탁유미는 비아냥거
평온한 탁유미의 모습에 이경빈은 약간 놀란 듯했다. “안 도망쳐?”그는 넥타이를 풀면서 물었다. “도망칠 수 있기나 해?” 그녀는 우스운 얘기를 듣기라도 한 듯 반문했다. 탁유미는 도망쳤었다. 감옥에서 나올 때 한 번, 그리고 그를 백화점에서 본 후에 또 한 번 도망쳤다. 하지만 결국... 이경빈은 그녀를 다시 찾아냈다. 가끔 운명은 이렇게 돌고 돌아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우스꽝스럽고도 슬픈 일이지만 또한 사람을 어쩔 수 없게 만든다. “도망칠 수 없어.” 이경빈이 그녀에게 준 대답이었다. “이번에 또 도망친다고 해도 나는 또다시 너를 찾아낼 거야.”“그러니까 도망칠 필요가 없지.” 탁유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저항하기를 모두 포기한 듯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너는 내가 너에게 빚졌다는 그 목숨을 어떻게 갚길 원해?”이경빈은 입술을 깨물며 가라앉은 눈빛으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 “난 궁금해. 그때 네가 출소한 후에 누가 너의 모든 행적을 숨겨 준 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을 것이다.“친구.”탁유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떤 친구?”이경빈이 추궁했다. “내 목숨도 내줄 수 있는 친구!” 탁유미가 말했다. 하지만 이경빈은 이 친구를 이성이라고 오해했다. 불쾌한 감정이 순식간에 이경빈의 마음을 덮쳤다. 언제부터 그녀에게 목숨을 내줄 정도인 다른 남자가 생긴 거지? “너는 정말 남자가 끊이지를 않네. 왜, 감옥 안에서는 남자가 부족했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목숨을 줄 수 있을 만큼 그런 남자가 생겼어? 그 남자를 나랑 비교해보면 어떤 것 같아?”이경빈이 다가가며 말했다. 탁유미는 바로 그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 전, 그녀는 이미 이경빈에게 수많은 해명을 했다. 하지만 매번 그 해명들은 모욕받을 일을 자처하는 꼴밖에 더 되지 않았다. 하여 지금, 그녀는 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나는 다른
그 순간, 탁유미는 너무 놀라 넋이 나갔다.이 사람이 지금 뭐 하는 거지? 지금 키스하는 거야?왜 키스를 하는 거지? 이경빈은 그녀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왜 그의 키스에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삼키려는 듯한 절박함을 담고 있는 건지.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키스는 드디어 끝이 났고 그의 목구멍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경빈 자신도 놀랐다. 이 키스가... 그에게 이렇게 큰 만족감을 줄 줄이야! 이런 만족감을 느낀 지가 오래되었다! 왜... 왜 하필이면 이 여자인 건가.복잡한 감정을 담은 그의 시선이 그녀를 응시했고 손끝은 조금 전의 키스로 약간 부어오른 입술을 문질렀다. 4년이 넘는 시간은 예전의 풋풋함을 벗겨내고 그녀에게 성숙한 느낌을 더했다. 그녀의 매력적인 눈썹과 눈매는 쉽게 남자의 마음을 흔들었다.아마 그녀는 이런 눈빛으로 다른 남자의 마음도 흔들었겠지?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다른 남자에게 바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 떠오르자 그의 기분은 극도로 나빠졌다. 그 남자도 그녀에게 이렇게 키스를 했을까?“이경빈, 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탁유미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예전에 그가 키스한 후에 그녀가 보여주었던 수줍음은 더는 그녀의 얼굴에 없었다. 마치 방금 그의 키스가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그저 4년이 지났을 뿐인데, 자신은 더는 이 여자에게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는가?!이경빈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에서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마디를 입에서 내뱉었다.“아이를 낳아줘!”“뭐라고?”탁유미는 당황했다. “내 아이를 낳아줘.”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아이를 낳아달라고? 그가 지금 진심으로 자신에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한다고?!그때 탁유미가 자신이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 이경빈은 믿지 않았었고 심지어 그녀는 평생 그의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고도 말했다. 설사 그녀가 임신했
병원의 VIP 병실에서, 침대에 기대어 앉은 강문철은 몇 걸음 거리에 앉아 있는 손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와 헤어졌다며?”강문철이 이 사실을 이렇게 빨리 알게 된 것에 전혀 놀라지 않은 듯 강지혁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강씨 저택 안에는 반드시 강문철의 정보원이 있을 것이다. 비록 강문철이 지금은 병원에서 장기간 요양 중이라 하더라도 강씨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맞아요. 헤어졌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니까 넌 처음부터 내 말을 들었어야 했어. 그 여자는 너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아!”이 순간, 강문철의 흐릿한 눈동자가 날카롭게 손자를 응시했다.“다행히도 넌 네 아버지처럼 되지 않았어. 그래도 넌 잘못된 걸 알고 고칠 줄 알아. 그렇지 않으면 너도 네 아버지와 같은 꼴을 당하게 됐을 거야!”강지혁의 입가에는 순식간에 차가운 미소가 서렸다. 그는 시선을 들어 강문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 안씨 성을 가진 심리상담 의사를 강씨 저택에 보냈고요.”이 말이 나오자, 강문철의 얼굴에는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지만 곧이어 솔직하게 인정하며 말했다.“맞아,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의사를 매수해 강씨 저택으로 보냈어.”손자가 이렇게 빨리 이 사실을 파악해 낼 줄은 몰라서 강문철은 조금 놀라웠다. “보아하니 할아버지는 내가 임유진과 헤어지게 하려고 꽤 많은 수고를 하셨더군요.” 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단지 현실을 명확히 제시했을 뿐이야. 결정을 내린 사람은 너 자신이었어.” 강문철이 말했다. “그 애가 바로 강현수가 찾던 아이인 거지. 그 애가 강현수의 곁으로 갈까 봐 몰래 많은 일을 했더구나. 그건 정말 예상치 못했어." 처음에는 강문철 역시 심리상담 의사가 얽힌 쪽으로 사람을 시켜 조사하기 시작했었는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단지 임유진을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그렇게 큰 노력을 기울였다니. 하지만 이럴수록 손자가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더욱
강문철이 자신의 인생을 조종하려는 시도가 싫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와 유진의 이별이 강문철이 쓴 계략의 결과물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별은 그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만약 이번에 강문철이 개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마 강지혁은 임유진과 이별했을 것이다. 유진의 마음속에 강현수가 존재하는 한 그는 늘 불안해하고 그녀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언젠가 그녀가 자신을 배신할까 봐 두려워할 것이다. 매일 이런 두려움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이 관계를 자신이 끊는 것이 낫다. 그저 한낱 여자일 뿐이고 단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감정일 뿐이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슴 한구석에서는 알 수 없는 아픔이 느껴졌다.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고통인 듯했다.“어, 임유진 씨네요." 앞 좌석에 있던 고이준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강지혁은 몸을 번쩍 일으켜 본능에 이끌리듯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멀지 않은 앞쪽 도로변에서 그 날씬한 실루엣을 보았다. 그녀는 회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긴 머리는 간단하게 하나로 묶었다. 그 청초한 얼굴은 며칠 만에 더 수척해진 것 같았고 그녀가 입고 있는 티셔츠도 헐렁한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그 남자를 향해 있었고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 미소는... 강지혁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남자는 곽동현이라는 사람일 것이다. 유진이 환경위생과에서 일할 때 함께 일했던 사람이고 그때 유진을 좋아했던 사람이다.강지혁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순식간에 차 안의 분위기는 무섭게 가라앉았다.처음 말을 꺼냈던 고이준은 아주 후회하고 있었다. 왜 굳이 이 말을 했을까? 말하지 않았다면, 대표님은 아마 그녀를 보지 못했을 테니까. 고이준은 백미러로 강지혁의 차가운 표정을 보면서 자신을 걱정해야 할지 임유진을 걱정해야 할지 파악이 안 됐다.하지만
차가 그녀 앞을 지나쳐 가며 정차하지 않았다. 이것이 제일 정상적인 상황이 아닐까? 그들은 이미 헤어졌고 이제부터는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니 더는 서로 상관없어진 것이다. 임유진은 자신한테 조용히 읊조렸다.“유진 씨, 무슨 일 있어요? 뭐 보고 있어요?”곽동현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귀에 울려 퍼졌다. 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곽동현을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잠깐만요!”곽동현이 서둘러 말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제가 바래다줄게요. 제 차가 바로 근처에 있어요.” “괜찮아요. 저는 버스 타고 가는 게 편해요.”“그럼...”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임유진에게 건넸다.“이건 제 명함이에요. 여기에 제 연락처랑 지금 일하는 곳 주소가 있으니 제가 유진 씨를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요!”임유진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환경위생과에서 보았던 때와 달리 더는 작업복을 입고 있지 않았고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으며 머리 모양도 바뀌었다. 그리고 그가 건넨 명함에는 차량 대리점의 이사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그가 정말로 사업을 시작한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환경위생과에서 그랬던 것처럼 맑고 수줍으며... 여전히 그녀를 존중했다. 그렇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존중을 담고 있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감옥에 갔다 왔다고, 길거리 청소를 한다고 무시했을 때 그는 절대로 그런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한참 동안 명함을 받지 않자 곽동현의 얼굴에 다시 의문이 스쳐 갔다. “왜 그래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임유진은 가볍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흔들며 명함을 받았다. “아니에요. 동현 씨가 차량 대리점의 이사가 될 줄 생각도 못 해서 그래요.” “제가 돈을 좀 투자해서 이름만 걸어놓은 거예요. 사업은 아직 시작하는 단계에 있어요.”곽동현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