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탁유미는 너무 놀라 넋이 나갔다.이 사람이 지금 뭐 하는 거지? 지금 키스하는 거야?왜 키스를 하는 거지? 이경빈은 그녀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왜 그의 키스에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삼키려는 듯한 절박함을 담고 있는 건지.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키스는 드디어 끝이 났고 그의 목구멍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경빈 자신도 놀랐다. 이 키스가... 그에게 이렇게 큰 만족감을 줄 줄이야! 이런 만족감을 느낀 지가 오래되었다! 왜... 왜 하필이면 이 여자인 건가.복잡한 감정을 담은 그의 시선이 그녀를 응시했고 손끝은 조금 전의 키스로 약간 부어오른 입술을 문질렀다. 4년이 넘는 시간은 예전의 풋풋함을 벗겨내고 그녀에게 성숙한 느낌을 더했다. 그녀의 매력적인 눈썹과 눈매는 쉽게 남자의 마음을 흔들었다.아마 그녀는 이런 눈빛으로 다른 남자의 마음도 흔들었겠지?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다른 남자에게 바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 떠오르자 그의 기분은 극도로 나빠졌다. 그 남자도 그녀에게 이렇게 키스를 했을까?“이경빈, 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탁유미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예전에 그가 키스한 후에 그녀가 보여주었던 수줍음은 더는 그녀의 얼굴에 없었다. 마치 방금 그의 키스가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그저 4년이 지났을 뿐인데, 자신은 더는 이 여자에게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는가?!이경빈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에서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마디를 입에서 내뱉었다.“아이를 낳아줘!”“뭐라고?”탁유미는 당황했다. “내 아이를 낳아줘.”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아이를 낳아달라고? 그가 지금 진심으로 자신에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한다고?!그때 탁유미가 자신이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 이경빈은 믿지 않았었고 심지어 그녀는 평생 그의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고도 말했다. 설사 그녀가 임신했
병원의 VIP 병실에서, 침대에 기대어 앉은 강문철은 몇 걸음 거리에 앉아 있는 손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와 헤어졌다며?”강문철이 이 사실을 이렇게 빨리 알게 된 것에 전혀 놀라지 않은 듯 강지혁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강씨 저택 안에는 반드시 강문철의 정보원이 있을 것이다. 비록 강문철이 지금은 병원에서 장기간 요양 중이라 하더라도 강씨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맞아요. 헤어졌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니까 넌 처음부터 내 말을 들었어야 했어. 그 여자는 너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아!”이 순간, 강문철의 흐릿한 눈동자가 날카롭게 손자를 응시했다.“다행히도 넌 네 아버지처럼 되지 않았어. 그래도 넌 잘못된 걸 알고 고칠 줄 알아. 그렇지 않으면 너도 네 아버지와 같은 꼴을 당하게 됐을 거야!”강지혁의 입가에는 순식간에 차가운 미소가 서렸다. 그는 시선을 들어 강문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 안씨 성을 가진 심리상담 의사를 강씨 저택에 보냈고요.”이 말이 나오자, 강문철의 얼굴에는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지만 곧이어 솔직하게 인정하며 말했다.“맞아,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의사를 매수해 강씨 저택으로 보냈어.”손자가 이렇게 빨리 이 사실을 파악해 낼 줄은 몰라서 강문철은 조금 놀라웠다. “보아하니 할아버지는 내가 임유진과 헤어지게 하려고 꽤 많은 수고를 하셨더군요.” 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단지 현실을 명확히 제시했을 뿐이야. 결정을 내린 사람은 너 자신이었어.” 강문철이 말했다. “그 애가 바로 강현수가 찾던 아이인 거지. 그 애가 강현수의 곁으로 갈까 봐 몰래 많은 일을 했더구나. 그건 정말 예상치 못했어." 처음에는 강문철 역시 심리상담 의사가 얽힌 쪽으로 사람을 시켜 조사하기 시작했었는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단지 임유진을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그렇게 큰 노력을 기울였다니. 하지만 이럴수록 손자가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더욱
강문철이 자신의 인생을 조종하려는 시도가 싫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와 유진의 이별이 강문철이 쓴 계략의 결과물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별은 그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만약 이번에 강문철이 개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마 강지혁은 임유진과 이별했을 것이다. 유진의 마음속에 강현수가 존재하는 한 그는 늘 불안해하고 그녀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언젠가 그녀가 자신을 배신할까 봐 두려워할 것이다. 매일 이런 두려움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이 관계를 자신이 끊는 것이 낫다. 그저 한낱 여자일 뿐이고 단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감정일 뿐이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슴 한구석에서는 알 수 없는 아픔이 느껴졌다.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고통인 듯했다.“어, 임유진 씨네요." 앞 좌석에 있던 고이준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강지혁은 몸을 번쩍 일으켜 본능에 이끌리듯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멀지 않은 앞쪽 도로변에서 그 날씬한 실루엣을 보았다. 그녀는 회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긴 머리는 간단하게 하나로 묶었다. 그 청초한 얼굴은 며칠 만에 더 수척해진 것 같았고 그녀가 입고 있는 티셔츠도 헐렁한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그 남자를 향해 있었고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 미소는... 강지혁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남자는 곽동현이라는 사람일 것이다. 유진이 환경위생과에서 일할 때 함께 일했던 사람이고 그때 유진을 좋아했던 사람이다.강지혁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순식간에 차 안의 분위기는 무섭게 가라앉았다.처음 말을 꺼냈던 고이준은 아주 후회하고 있었다. 왜 굳이 이 말을 했을까? 말하지 않았다면, 대표님은 아마 그녀를 보지 못했을 테니까. 고이준은 백미러로 강지혁의 차가운 표정을 보면서 자신을 걱정해야 할지 임유진을 걱정해야 할지 파악이 안 됐다.하지만
차가 그녀 앞을 지나쳐 가며 정차하지 않았다. 이것이 제일 정상적인 상황이 아닐까? 그들은 이미 헤어졌고 이제부터는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니 더는 서로 상관없어진 것이다. 임유진은 자신한테 조용히 읊조렸다.“유진 씨, 무슨 일 있어요? 뭐 보고 있어요?”곽동현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귀에 울려 퍼졌다. 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곽동현을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잠깐만요!”곽동현이 서둘러 말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제가 바래다줄게요. 제 차가 바로 근처에 있어요.” “괜찮아요. 저는 버스 타고 가는 게 편해요.”“그럼...”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임유진에게 건넸다.“이건 제 명함이에요. 여기에 제 연락처랑 지금 일하는 곳 주소가 있으니 제가 유진 씨를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요!”임유진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환경위생과에서 보았던 때와 달리 더는 작업복을 입고 있지 않았고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으며 머리 모양도 바뀌었다. 그리고 그가 건넨 명함에는 차량 대리점의 이사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그가 정말로 사업을 시작한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환경위생과에서 그랬던 것처럼 맑고 수줍으며... 여전히 그녀를 존중했다. 그렇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존중을 담고 있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감옥에 갔다 왔다고, 길거리 청소를 한다고 무시했을 때 그는 절대로 그런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한참 동안 명함을 받지 않자 곽동현의 얼굴에 다시 의문이 스쳐 갔다. “왜 그래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임유진은 가볍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흔들며 명함을 받았다. “아니에요. 동현 씨가 차량 대리점의 이사가 될 줄 생각도 못 해서 그래요.” “제가 돈을 좀 투자해서 이름만 걸어놓은 거예요. 사업은 아직 시작하는 단계에 있어요.”곽동현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고이준은 차 안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자신의 상사 주변으로 퍼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에 온몸이 오싹해지며 차량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차량이 회사 빌딩 아래에 도착한 뒤 강지혁이 내리려 할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옆에서 뛰쳐나와 강지혁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빌딩 입구의 경비원들에 의해 가볍게 제압됐다.그는 대략 30세 정도로 보이는 남성으로,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제압된 후에도 강지혁에게 바락바락 소리쳤다.“당신이지. 당신이 지시해서 우리 세령 여신을 연예계에서 퇴출하게 했다고 들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녀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데! 그녀의 언니는 당신의 약혼녀이기도 했잖아!”남성은 자신의 마음속 여신을 위한 정의를 구현하려 강지혁과 대치할 생각인 듯 했다. 곁에 있던 고이준은 이를 듣고서 내심 놀랐다... 진세령을 연예계에서 퇴출시킨 일은 사실 임유진과도 관련이 있었다. 현재 대표님과 임유진이 헤어진 상태이니 임유진과 관련된 모든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 겁을 상실한 사람이 그 금기를 건드렸다.“대표님, 경찰에 맡기시죠.”고이준은 이렇게 말하고 옆에 있는 경비에게 경찰에 전화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 남성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래, 신고해! 나는 두렵지 않아. 나는 세령 여신을 위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여기 있는 거야. 강지혁, 당신이 가진 권력이 하도 커서 아무도 세령 여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주지 않으니, 내가 그녀를 위해 목소리를 내겠어. 강지혁, 당신 같은 사람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나는 세령 여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어!”그 남성은 진세령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가 피운 소동으로 인해 빌딩을 드나들던 직원들과 데스크의 직원들이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이준은 강지혁의 곁에 서 있었기에 그 남성이 이 말을 한 후... 대표님의 기
예상치 못하게도 강지혁이 정말로 멈췄다. 고이준은 깜짝 놀랐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정말로 효과가 있었나? 지금 강지혁은 고개를 숙여서 자신의 피 묻은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그녀가 그의 손이 매우 아름답고 깨끗하다고 말했던 것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손에 얼마나 많은 피와 세상의 어둠을 묻혔는지 그녀는 몰랐다. “그러네, 정말 손이 더러워졌네...”강지혁이 낮게 중얼거렸다. “대표님, 손을...” 옆에 있던 고이준은 서둘러 깨끗한 손수건을 건넸다. 강지혁은 손수건을 받아서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에게 더는 관심이 없는 듯 그를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고이준도 서둘러 몇 마디 지시하고는 빠르게 건물로 따라 들어갔다. 방금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에 차갑고 고귀해 보이는 대표님이 한번 손을 쓰면 얼마나 무서운지, 마치... 이성을 잃은 맹수와 같았다. 수백만의 생명이 그의 손에 죽었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처럼, 마치 생명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비서 따라오지 마.” 강지혁은 대표이사실 입구에서 고이준에게 담담히 지시했다. “예!”고이준이 대답했다. 강지혁은 혼자 사무실로 들어갔고 이윽고 사무실 안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밖에 서 있는 고이준은 오늘 대표님의 이례적인 행동과 분노가 모두 임유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헤어졌는데... 보아하니 임유진이 대표님에게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오늘 거리에서 임유진 곁에 있던 그 남자와 임유진은 무슨 관계일까, 대표님은... 신경 쓰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 물음들에 대한 답변들을 고이준은 알 길이 없다. 이 시각, 대표이사실 안에서 강지혁은 어질러진 바닥을 보면서 한 손으로 옆에 있는 강화 유리창을 세게 내리쳤다.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 있냐고?”갈라져서 부서지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임유진은 이제 누명을 벗었기에 다시 변호사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변호사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알고 있다. 법적으로 무죄가 증명되었음에도 감옥에 갔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그녀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다. 본인이 3년 동안이나 무고하게 감옥살이를 한 변호사의 능력을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믿어 줄까? 그리고 그녀의 사건은 변호사들끼리의 내부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그녀의 사건을 단지 가십거리로만 여기며 그녀의 경험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게 그녀의 능력을 신뢰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번에 그녀는 인터넷에 많은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최종적으로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온 곳은 이 한 곳뿐이었다. 어찌 됐든 그녀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기로 했다. 변호사가 되는 것은 오래전부터 꿈꾸어 온 것이며 항상 이 꿈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그녀는 자신을 다독였다. 데스크에 도착한 임유진은 직원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면접 보러 온 임유진입니다.”그녀는 한때 가장 유망한 신임 변호사로 평가받았지만 몇 년의 공백이 있고 난 뒤 이 분야로 다시 발을 들여놓으려면 가장 기본적인 변호사 보조직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상대방이 말했다. “차 변호사님이 현재 다른 사람을 면접 중이세요. 의자에 앉아서 잠시 쉬고 계세요.”하여 임유진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려고 하는데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유진 씨,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임유진이 고개를 들어보니 앞에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예전에 근무했던 로펌의 동료였던 정한나였다.과거에 정한나는 임유진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고 심지어 임유진의 사건이 뒤집히기 전에 그녀의 사례를 신입 동료들 앞에서 교육용 사례로 사용하여 그녀를 모욕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정한나를 다시 본 적이 없고 그녀가 그 사무소에서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여기서 다시 정한나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
정한나는 눈이 번쩍 뜨여서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임유진은 면접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바로 정한나와 마주쳤다. “유진 씨, 왜 여기에 면접을 보러 왔어요? 남자친구는 알고 있나요? 유진 씨가 만약 다시 변호사가 되고 싶다면, 남자친구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유진 씨에게 로펌을 차려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정한나가 가식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정한나의 옆에 있던 동료가 이 말을 듣고는 놀라면서 임유진을 아래위로 한번 훑고는 말했다.“한나 씨, 농담하는 거 아니죠? 이분 남자친구가 손쉽게 로펌을 차려줄 수 있는 거 맞아요?”“제가 왜 농담을 하겠어요.”정한나가 친절하게 설명하는 모양새로 말했다. “유진 씨 남자친구가 바로 강지혁인데 이 S시에서 강지혁이 로펌 하나 차려주는 것은 식은 죽 먹기죠.”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자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나 씨, 잘못 들은 거 아냐? 이분 남자친구가 강지혁이라고?"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만약 이분 남자친구가 정말 강지혁이라면, 내 남자친구는 강현수야!”“정말이지, 우리 변호사들은 증거로 말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만약 강지혁이 이 말을 듣는다면 당신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지도 몰라요.”“저 정말 거짓말 안 했어요. 이건 사실이에요.” 하필 이때 정한나는 진지하게 임유진을 보면서 말했다. “유진 씨도 말 좀 해봐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농담하는 줄 알잖아요. 강지혁이 당신 남자친구 맞잖아요. 게다가 유진 씨를 잘 지켜주고 유진 씨에게 되게 잘해주잖아요!” 정한나가 진지하게 임유진에게 바람을 넣을수록 주변의 비웃음 소리는 더 커졌다. 임유진은 냉랭하게 정한나를 쳐다보았고 이 상황은 정한나가 의도한 것으로 자신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함임을 알고 있었다. 임유진은 정한나를 지나쳐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정한나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리가 없었고 바로 임유진을 붙잡으며 말했다.“참나, 유진 씨, 말해봐요. 내 말이 맞죠? 강지혁이 당신 남자친구 맞죠? 다른 사람들이 날 우습게 보
임유진이 초조한 얼굴로 영상을 바라보던 그때 갑자기 욕실 문이 열리며 강지혁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강지혁은 의자에 앉아있는 임유진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멈칫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녀 너머로 보이는 영상을 보고는 다시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다.“내 물건에 멋대로 손대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나가.”임유진은 그 말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곧바로 강지혁의 앞으로 걸어갔다.“혁아, 나랑 현수 씨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 현수 씨가 날 좋아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래서 더 확실하게 얘기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너밖에 없었다는 걸.”그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강지혁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해져만 갔다.“둘 사이가 어땠는지 듣고 싶지 않아. 잘 거니까 나가. 할 말 있으면 내일 다시 해.”강지혁은 아까 임유진과 강현수가 함께 있는 걸 본 순간부터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도 사그라지지 않았다.임유진에 관한 기억은 다 잊어버린 그지만 그녀가 강현수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는 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지인들을 통해 들은 것도 있고 실제로 파티에서 강현수가 임유진의 이름을 꺼내며 그에게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으니까.하지만 그럼에도 예전에는 그런 게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어차피 임유진은 그저 그의 죽은 아내일 뿐이었으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 강현수와 과거에 썸을 탔든 연애를 했든 알 바 아니었다.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했던 임유진이 아주 멀쩡한 얼굴로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고 그에게 사랑한다며 속삭였다. 심지어 마치 그를 아주 잘 아는 듯이 굴기도 했다.그래서일까, 강지혁은 강현수와 그녀가 함께 있는 모습이 멋대로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치고 불안하기도 하며 더욱이는 심장이 아프게 욱신거리기도 했다.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마치 독처럼 그의 몸 곳곳에 퍼졌다.“아니, 나는 지금 얘기해야겠어.”임유진이 강지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나에 대해 잊었다면 다시 한번 얘기해줄게. 어릴 때
강지혁은 잠깐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새엄마는 없어.”즉 그렇다는 건 임유진과 이혼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강선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포크를 움직이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리고 강선현도 새엄마는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는 활짝 웃으며 마찬가지로 식사를 마저 했다.저녁 식사가 끝이 난 후 임유진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다 아들과 같이 유치원에서 내준 숙제를 완성했다.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선율 혼자 다 한 거나 다름없었다. 강선율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똑똑한 아이였다. 그리고 숙제를 하면서도 한번도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다.현이는 율이가 숙제를 완성하자마자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엄마, 나는 언제쯤 오빠랑 같이 유치원에 갈 수 있어?”“다음 주면 현이도 유치원에 갈 수 있어.”임유진의 말에 아이는 활짝 웃으며 방방 뛰었다.임유진은 아이들끼리 놀게 한 후 강지혁을 찾으러 위층 서재로 향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어떻게든 강현수에 관해 얘기해야만 했다.사실 식사를 마치자마자 하고 싶었는데 강지혁은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마치 잔뜩 삐져있는 아이처럼 말이다.임유진은 서재에 갔다가 강지혁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침실로 향했다. 하지만 침실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때 욕실 쪽에서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임유진은 샤워하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강지혁이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생각이었다.가만히 기다리는 게 지루해 방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그녀는 우연히 탁자 위에 있는 자료를 발견했다.자료에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그녀와 강현수의 사진이었다.그리고 자료를 더 자세히 보니 그녀와 강현수가 버스에 함께 있었을 때 났던 기사 내용이 적혀있었다.당시 임유진은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강현수는 그녀의 머리가 창문에 부딪히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의 머리와 차창 사이에 자신의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강현수는 임유진과 강지혁이 사라진 지 5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잘생긴 얼굴에 고통과 실망감이 잔뜩 어려있었다.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그지만 사랑 앞에서는 그 역시 한낱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강지혁은 임유진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 후 곧바로 그녀의 손을 풀어주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강현수와 꽤 많이 얽혀있었나 봐?”“응?”임유진은 묘하게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다급하게 해명했다.“오해하지 마. 나랑 현수 씨 사이에 네가 오해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오늘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도 몰랐고. 그리고 나는 이미...”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이 그녀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강현수와 과거에 무슨 사이였는지, 지금은 또 어떤지 나한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어. 조금도 궁금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머릿속에 넣어둬. 너는 지금 내 아내고 가문의 안주인이라는 거. 그러니까 강씨 가문을 욕보인다거나 스캔들 터질 만한 일은 만들지 마.”강지혁은 말을 다 마친 후 미련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그리고 임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강씨 가문을 욕보이지 말고 스캔들 터질 만한 일을 만들지 말라고? 그녀와 강현수 사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강지혁에게 떳떳하지 못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만약 5년 전의 강지혁이었다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아무래도 깊은 오해가 생기기 전에 강지혁에게 제대로 해명을 해야 할 듯하다.임유진은 저녁 식사를 할 때 강지혁과 얘기를 나누며 물꼬를 틀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은 식탁에 앉기 전부터 차가운 아우라를 내뿜으며 말 한마디 건네지 말라는 듯이 눈도 마주쳐주지 않았다.그 탓에 식사 분위기는 숨 막힐 듯 싸늘해졌고 임유진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그때 밥을 먹던 현이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물었다.“아빠 정말 엄마 사랑하는 거 맞아? 아까 현수 삼촌은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강지혁은 강현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네가 아무리 나보다 더 빨리 만났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내가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아도 임유진은 날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날 사랑해야만 하며 내 곁에 있어야만 해.”그는 말을 마친 후 갑자기 임유진의 턱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임유진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곧바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임유진은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과 입술이 맞닿는 감촉에 깜짝 놀라 순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강지혁이 먼저 입을 맞춰왔다. 그것도 강현수와 경호원들 앞에서 말이다.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스킨십하는 걸 그녀는 좋아하지도 않고 굳이 말하자면 불편해하는 편이었는데 강지혁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강지혁이 지금 무슨 이유로 그녀에게 키스한 건지는 몰라도 5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키스하는 거라 그녀는 그의 입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강지혁과의 키스에 심취해 있었다.강지혁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아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아팠는지.강지혁이 그런 말을 하는 게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그에게 냉랭한 말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도 있고 당시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눈앞에 선해 그것 또한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적어도 절벽에서 떨어진 후 병원에서 깨어난 순간 모든 걸 다 잊어버린 상태라 아예 고통의 감정 같은 게 없었지만 강지혁은 최면을 받기 전까지 계속 고통에 시달렸어야만 했을 테니까.죽음은 늘 그렇다. 항상 살아있는 사람이 더 괴로운 게 바로 죽음이었다.강지혁은 그녀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했기에 지금 이렇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게 된 것이다.강현수는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임유진은 강지혁이 혹시 오해라도 할까 봐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마침 잘 왔네. 네가 한번 말해봐. 너 그때 분명히 나한테 유진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안 그래, 강지혁?”강현수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꾹 닫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갑작스러운 대치상황에 임유진은 서둘러 팔을 빼기 위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강현수가 너무나도 꽉 잡고 있는 바람에 도저히 팔을 뺄 수가 없었다.현이는 무서운 분위기에 많이 놀란 건지 창백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그때 강지혁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맞아, 그랬지. 그런데 그게 뭐?”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하더니 이내 임유진을 잡고 있던 강현수의 손목을 억세게 잡았다.“내가 네 앞에서 뭐라고 했던 임유진이 내 아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내가 놓지 않는 한 임유진은 어디도 못 가.”“만약 유진이가 떠나겠다고 하면 그게 아무리 너라도 막을 권리는 없어!”강현수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만약 임유진이 떠나겠다고 하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도울 것이다.소중한 이를 강지혁에게 보냈던 건 강지혁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강지혁은 지난번에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여전히 임유진을 사랑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만약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을 마음속에서 지운 거라면 더 이상 임유진을 그의 옆에 둘 수 없다.“내가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직접 시험해보면 되겠네.”강지혁은 강현수를 향해 차가운 말을 내뱉고는 이내 뒤에 있는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애를 집 안으로 데려가.”기사는 그 말에 강선현을 안으려는 듯 앞으로 다가갔다.“아가씨, 이리로 오세요.”하지만 현이는 떠날 생각이 없는 듯 임유진의 손을 꽉 잡은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우리 현이 착하지. 현수 삼촌이랑 할 얘기가 있
강현수는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는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고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있었는데 왜 5년간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은 거야? 난 정말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네 장례식에 참가했을 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냐고.”강현수는 당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그녀가 떨어졌던 절벽에서 투신할까도 생각했었다.“미안해요. 의도치 않게 걱정을 끼쳤네요.”임유진이 말했다.그녀를 바라보는 강현수의 두 눈은 이미 잔뜩 빨개져 있었다.“아니야.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너무 다행이야.”강현수는 말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와 닿으려고 했다. 임유진이 정말 살아있는 게 맞다는 것을, 그의 환각이나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임유진이 몸을 살짝 옆으로 틀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이에 강현수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하고 멈췄다.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명백한 거절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강현수는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강지혁 때문이야?”“네.”임유진이 답했다.“계속해서 나한테 말 편히 하지 않는 것도 강지혁 때문이고?”“나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고 나는 여전히 혁이를 사랑하고 있어요.”강현수는 그 말에 허탈하고도 조금 슬픈 웃음을 터트렸다.“5년이야. 5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았으면서, 강지혁 보러 찾아오지도 않았으면서 여전히 강지혁을 사랑한다고? 정말 사랑했으면 더 빨리 돌아와야 하는 거 아니야?”임유진은 강현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돌아오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났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혁이고 내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면 그것 또한 혁이 옆이에요. 현수 씨 말대로 5년이나 지났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날 잊어버리고 나한테 시간이든 뭐든 쓰지 말아줘요. 그럴 가치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강현수의 눈에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
임유진은 기억이 돌아온 후 한지영과의 통화에서 그녀가 죽은 후 강현수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술을 진탕 마시고 또 허구한 날 그녀의 무덤 앞으로 가 무릎을 꿇은 채 통곡했다던 기사가 났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 S 시가 아닌 해외로만 계속 돌고 있었다는 얘기도 말이다.강현수는 목석처럼 차에 기댄 채 계속해서 기다리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5년간 줄곧 꿈속에서만 또는 정신없이 취해있어야만 간신히 보이던 이의 모습이 이렇게 현실감 없이 눈앞에 나타났다.강현수는 순간 하마터면 다리의 힘이 다 풀릴 뻔했다.그녀다. 그녀가 살아있었다. 이한의 말대로 임유진은 정말 살아있었다.“유진아...”잔뜩 매인 목소리가 강현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강현수가 임유진 쪽으로 뛰어갔다.강현수의 마음은 임유진을 사랑했던 만큼 요동쳤고 또 몸은 그녀를 그리워했던 만큼 흥분이 일었다.임유진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을 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웬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강현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다 그제야 임유진의 곁에 서 있는 현이를 발견했다. 눈빛이 똘망하고 예쁜 것이 임유진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이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이 아이가 임유진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당시 뱄던 세쌍둥이 중의 한 명이 틀림없었다.‘선율이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구나.’“나는...”강현수는 무릎을 구부리고 현이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는 강현수 삼촌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강선현이에요. 원래는 임현이었고요. 현이라고 불러주세요.”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현이를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임유진이 떠올랐다. 그날 우거진 풀숲에서 그를 구해주고 또 산 아래까지 그를 업어줬던 용감한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말이다.그때의 기억은 강현수가 한평생 놓
이경빈은 탁유미 사건이 뒤집히면 회사가 타격을 입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탁유미를 위해 당시의 사건을 뒤집어주었다.“이경빈 씨 나름의 속죄네요. 그 뒤로 언니 찾아온 적은 있어요?”“네. 그런데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걸 아니까 직접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탁유미는 시선을 돌려 현이와 함께 놀고 있는 윤이를 바라보았다.“오히려 이경빈보다 더 많이 찾아온 건 이경빈의 부모님이죠. 윤이를 집에 들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찾아왔었어요.”“그걸 언니가 거절했고요?”만약 윤이를 보냈다면 지금쯤 탁윤이 아니라 이윤으로 살고 있었을 테니 거절한 건 분명해 보였다.“윤이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때 이경빈이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뒤로 윤이는 이경빈에게 줄곧 마음을 닫고 있는 상태예요. 이경빈은 어차피 어린애라 몇 번 달래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 문제인가요? 아이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분위기 파악을 잘하고 또 섬세하다는 걸 몰랐던 거죠.”“그럼 언니는 어때요? 언니는 이경빈을 용서할 수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사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이경빈에 관한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경빈은 결혼은 물론이고 그 어떤 스캔들도 없었다.아무래도 탁유미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이경빈이 한 짓은 이미 용서했어요. 계속해서 과거의 일을 붙잡아두고 있어봤자 감정 낭비하는 건 나일 테니까요. 그런데 다시 합치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 사이는 이미 5년 전에 모든 게 다 끝이 났어요.”탁유미가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마치 그로 인해 겪었던 다양한 감정들을 이미 말끔히 지운 사람처럼 말이다.임유진은 탁유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정말 잘된 일인지 몰라 생각이 복잡했다.한때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공수진의 개입으로 한평생 함께할 수 없는 두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임유진은 딸을 데리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