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영이 갑자기 난입해 소동을 일으킨 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상황을 임유진이 목격했다는 점이었다. 강지혁이 이후에 책임을 묻는다면 고이준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생각에 고이준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이어서 그는 조용해진 의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강씨 저택에 갑자기 나타나 이런 일을 벌인 건 두려움 때문일까? 직장을 잃어버릴까 봐 임유진에게 최면을 건 적이 없다고 증명하려고 급했던 것일까? 이런 이유는 너무 단순한 게 아닌가? 원래 그는 안은영을 해외 회의에 참석하게 하고 겸사겸사 휴가를 보내게 한 것뿐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이준의 눈빛이 변하였다. 강지혁 곁에서 많은 일을 겪으며 한 가지 도리를 깨달았었다.‘비정상적인 일의 흐름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아마도 좀 더 조사를 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때, 강씨 저택에서는 강지혁이 임유진에게 웃으며 말했다. “자, 아침 식사부터 하자.”“혁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임유진은 그와 함께 부엌으로 가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방금 네가 본 것처럼, 네가 예전에 진료를 받았던 의사가 여기 와서 소란을 피웠어.”강지혁은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나중에 더 좋은 의사를 찾아서 네 두통이 정확히 어떤 문제인지 다시 확인해볼게.”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안은영 선생님을 알아? 내가 선생님을 찾아간 게 최면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야?”임유진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며 마음속의 의문을 털어놓았다. 강지혁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점점 입가에서 사라져 갔다. “오늘은 네 생일인데 꼭 이런 얘기를 해야겠어?”“혁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진심으로 알고 싶어!”임유진이 말했다. 마음속이 혼란스러웠다. 자신과 관련된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응.”강지혁의 대답에 임유진의 마음속은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왜 그런 거야?” “왜냐고?”그는 갑자기 팔을 들어 임유진을 조심스럽게 안아 주었다. “그럼 너는 왜 의사를 찾아 최면을 받으려 했어? 강현수와의 기억을 되찾고 싶었던 거야? 그 기억이 그렇게도 아쉬웠어? 두 사람은 어렸을 때 단 하루만 같이 지냈을 뿐이야. 지금 네 곁에는 내가 있잖아.”강지혁의 목소리는 마치 평범한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차분했지만 임유진의 귀에 들리는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과 강현수가 어렸을 때 단 하루만 같이 지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마치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모르는 사람은 그녀였던 것처럼! 임유진의 몸이 굳어진 것을 느끼고 강지혁은 그녀를 더 세게 안았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으며 속삭였다. “그 기억 찾지 마. 나 하나로 부족해?”그녀는 반드시 그 기억을 되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 기억을 모두 묻어버리기로 했었고 그저 자신만의 작은 비밀로 삼으려 했을 뿐이었다. “나와 강현수 씨 사이는...”하지만 그녀가 말을 시작하기 무섭게 강지혁에 의해 말이 끊겼다. “됐어, 말하지 마! 나는 너와 강현수 사이의 어떤 것도 듣고 싶지 않아!”그는 임유진을 꽉 안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혁아, 들어봐... 들어줘...”“이미 말했잖아. 너와 강현수 사이의 어떤 것도 듣고 싶지 않다고! 어제 두 사람이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나는 그것을 모른 척할 수 있어. 하지만 앞으로 강현수와 어떤 연락도 하지 마! 강현수를 마음에 두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고 그리워하지도 마!”그의 팔은 마치 임유진을 완전히 자신의 몸속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강지혁이 양보할 수 있는 한계였다! 그는 여자 때문에 이렇게까지 양보한 적이 없었다! 그의 자존심, 그의 존엄이 모두 임유진에 의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갖고 싶었다. 임유진은 강지혁에
그래서... 이게 바로 강지혁이 말한 여기까지 하자는 뜻인가?!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미완성 케이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때 그녀는 이 케이크를 볼 때 마음이 기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코가 시큰한 느낌이 든다. 여기서 끝나면... 이대로 끝나면, 그녀와 강지혁 사이에는 영원히 오해가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그녀는 얘기를 분명하게 해야 했다! “혁아, 나와 강현수 씨 사이는 정말...”임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무겁게 내려앉아 모든 소리를 막았다. 강지혁은 그녀의 입술을 벌주듯 한 번 깨물었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너와 강현수 사이의 일 다시는 언급하지 말자고. 두 사람이 예전에 어땠는지 상관없어, 너는 앞으로 내 옆에만 잘 있으면 돼.”입술은 분명 뜨겁지만, 임유진은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강지혁은 그녀의 설명을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말을 믿지 않으며,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그녀가 곁에 있는 것뿐인가? “그럼 내가 이미 기억이 돌아왔고 나와 강현수 씨가 겪은 어릴 때 일을 이미 다 기억해냈다고 해도 상관없어?”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이윽고 주변의 공기는 한순간에 얼어붙은 듯했다. 강지혁의 동공이 갑자기 급격히 수축하며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너... 기억났어?”그의 목소리에는 눈치채기 어려운 떨림이 있었다. “응, 기억났어.”임유진이 말했다. 강지혁의 얼굴색은 갑자기 안 좋아졌고 까만 눈동자 속에는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기억이 이미 돌아왔다. 임유진은 그녀와 강현수 사이의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그가 한 모든 것들이 헛된 노력에 불과했다!“하하... 하하... 하하하... 기억이 돌아왔었구나!”강지혁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는 임유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웃음은 마치 무언가를 억누르면서도 동시에 무언가를 터뜨리고 싶은 듯한 모순된 느낌을 주었다. “혁아, 그만 웃어.”임유진이 소리쳤다. 그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만약 강지혁이 임유진을 믿는다면, 그녀가 그의 아버지 사진 앞에서 한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를 믿어야 했다!만약 강지혁이 임유진을 믿는다면,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강지혁이라는 것을 믿어야 했다! 만약 강지혁이 임유진을 믿는다면, 할머니의 팔찌를 숨기고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믿지 않았다, 임유진은 마치 온몸이 차가운 얼음물에 잠긴 것처럼 느껴졌다. 강지혁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믿으라고 했지만, 강현수가 그녀를 업고 오는 모습을 봤을 때, 그녀가 기억을 찾기 위해 그를 속이며 병원에 여러 번을 갔을 때, 그는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분은 정말 최악이었다! 임유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네가 나를 믿는 게 어렵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 강현수는...”“됐어!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강지혁의 손이 갑자기 그녀의 목을 움켜쥐며 모든 소리를 막았다.“강현수는 너를 믿는 거야? 그래서 강현수는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거야?”강현수, 강현수... 그녀의 마음속에 강현수는 마치 낙인처럼 새겨져 있어 그를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것일까? 그는 강현수를 임유진에게서 지우려고 번번이 시도했지만, 결코 완벽하게 지워낼 수 없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었고, 그가 조금만 힘을 주면 그녀의 목을 바로 꺾을 수 있었지만... 그의 손은 계속 떨고 있었다. 심하게 떨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이렇게 화나게 했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손을 쓸 텐데 그 사람이 임유진일 때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다치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일로 느껴졌다!“혁아, 겁쟁이가 무엇인지 알아? 바로 네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결국 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못하는 거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그의 귓가에 울려 퍼진다! 그렇다, 다칠까 봐 겁나는구나! 겁이 나는
“너... 지쳤어?” 임유진은 더듬거리며 마치 그의 말만 반복할 수 있는 로봇처럼 말했다. “그래, 나 지쳤어. 그래서 우리 사이는 끝났어!” 강지혁이 말했다. 너무 지쳤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도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면, 이렇게 떨리고 불안하게 지낼 것이라면, 그는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의 마음속에 언제나 강현수를 위한 자리가 있다면, 그 나머지 몫은 그에게 필요 없었다.아버지가 자신의 눈앞에서 죽었을 때, 그는 이생에서 절대로 아버지처럼 자신을 배신한 여자 때문에 목숨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임유진은 몸이 굳은 채로 일어섰다. 그가 바로 그녀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걸까? 어젯밤, 그는 그녀와 너무나도 친밀했고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마치 거대한 풍자처럼 느껴진다. 단지 지쳤기 때문에 헤어지자는 건가? 그렇다면 그들의 관계는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혹시 그는 이 모든 것을 단지 게임처럼 여기고 있었는데 그와 달리 그녀는 그 속에 빠져들었던 게 아닐까. “만약... 나는 헤어지고 싶지 않다면?”그녀의 자존심은 이미 오래전 감옥에 갇혔을 때, 남들에 의해 완전히 짓밟혔다. 그리고 출소 후, 강지혁은 그녀가 잃어버린 자존심을 조금씩 다시 맞춰줬다. 지금, 그녀는 그 조각난 자존심으로 이 말을 꺼냈다.그녀는... 강지혁을 사랑한다! 그녀는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더는 너를 사랑하고 싶지 않아.” 강지혁은 극도로 무관심한 목소리로 말한 후, 마치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은 듯 부엌을 나갔다. 그녀를 혼자 남겨두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게 했다. 뼛속까지 시린 추위가 몸속에서 파도치듯 퍼져나갔다, 7월의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임유진은 추위에 떨었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뜨거웠
눈가는 여전히 건조했다.지금의 그녀는 울지도 못하는 걸까?...아마도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받지 못하도록 정해진 것 같다. 소민준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아직도 교훈이 되지 못했나 보다. 그녀가 강지혁을 사랑하게 될 줄이야! 임유진과 강지혁은 원래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그날 밤, 그를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교집합도 없었을 것이다. 얘기를 해보면 결국은 그녀가 먼저 그를 건드렸던 것이고 그 결과 게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그저 그녀가 다시 한번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뿐이다. 임유진은 한 걸음 한 걸음 주방을 나왔다. 이 시각의 강씨 저택은 아주 조용했고 심지어 사용인조차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이러한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많은 난처한 상황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모든 기가 다 빨린 듯 겨우 침실로 돌아왔다. 기분은 떠날 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그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뿐이야.”그녀는 화장대 앞에 서서 거울 속의 여자에게 중얼거렸다. 거울 속의 여자는 화장이 번지지 않았고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어 그 예쁜 얼굴이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얼굴색은 유난히 창백했고 눈동자에는 짙은 자조와 억눌린 씁쓸함이 가득했다. 다시 혼자가 되었을 뿐이다. 마치 감옥에서 막 나왔을 때처럼. 혼자 살아가야 하고 모든 일에 스스로 노력해야 하며 설사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가더라도 간신히 살아남아야 한다. 사실... 두려워할 게 없다. 그녀는 이미 이전에 모든 것을 겪었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임유진은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일어나 옷장을 열어 처음 왔을 때 월세방에서 가져왔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었다.그녀는 이 옷들을 아직 버리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최소한 그녀는 자신의 것을 입고 떠날 수 있으니, 그에게 빚진 것 없이 말이다. 그녀는 벗어둔 옷들을 깔끔하게 접어놓고 방을 다시 정리했다.처음에 월세방을 나올 때 가져온 물건들은 별로
그들 사이의 게임은 이로써 끝이 났다!28번째 생일, 그녀는 오늘 또다시 하늘이 얼마나 무심하고 잔혹한지 깨닫게 되었다.임유진은 가녀린 몸으로 두 개의 캐리어를 끌면서 힘들게 계단을 내려왔다. 그렇게 드디어 이 집을 나서려는데 마침 집사와 마주쳐버렸다.집사는 임유진이 조금 낡은 듯 보이는 옷을 입은 채 어딘가로 떠나듯 캐리어를 들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라 물었다.“유진 씨,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이곳을 떠나려고요. 저희 이제 헤어졌으니 제가 여기 머무를 이유도 없겠죠.”뭐라고?!집사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깜짝 놀란 듯 보였다.헤어졌다고? 두 사람이?! 그럴 리가!오늘은 임유진의 생일이라 강지혁이 집사에게 저녁 만찬은 특히 신경을 써달라고 직접 지시까지 했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게다가 임유진의 얼굴을 보면 거짓말 같지가 않아 더더욱 혼란스러웠다.임유진은 제자리에 굳은 듯 서 있는 집사를 뒤로하고 다시 캐리어를 끌고 한 걸음 한 걸음 강씨 저택을 나왔다.임유진이 사라지고 나서야 집사는 정신을 차린 듯 강지혁의 비서 고이준에게 전화를 걸어 이 상황을 알렸다.전화를 받은 고이준은 집사와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을 했고 시선을 옆으로 돌려 강지혁을 바라봤다.헤어졌다고? 두 사람이?!두 눈이 제대로 달린 사람이라면 강지혁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한 여자에게 진심인 강지혁의 모습은 처음이었으니까!헤어질 만한 이유라고 한다면 그건 아마... 오늘 예상치 못하게 벌어졌던 일 때문일 것이다. 오은영을 내보낸 후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눴고 그러다 몇 분 후 강지혁 혼자 이곳으로 왔다.고이준은 만약 임유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히 이곳을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강지혁과 그녀가 처음 만난 곳이었으니까. 또한, 강지혁의 아버지 강선우가 얼어 죽은 곳이기도 하다.매년 강선우의 기일이면 강지혁은 어김없이 이곳을 찾았다.하지만 오늘은 기일도 뭣도 아니었고 다년간
임유진은 그렇게 캐리어를 끌고 정처 없이 걷다가 강씨 저택에서 제일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 벤치에 어느 정도 앉아있었을까, 갑자기 그녀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그녀는 전화가 거의 끊어질 때쯤 휴대폰을 꺼냈고 화면을 보니 발신자는 한지영이었다.임유진은 그녀의 이름을 보는데 문득 코가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었다.통화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아, 어디야? 나랑 연신 씨 지금 너희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임유진은 그제야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고 생일 파티에 한지영과 백연신도 초대했다는 것을 떠올렸다.하지만 이제 생일 파티는 부질없어져 버렸다!“오지 마. 나랑 강지혁 헤어졌어. 생일 파티는 없을 거야.”임유진은 지금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쓰게 느껴졌다.한편, 이 말을 들은 한지영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급하게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헤어졌다니? 너랑 지혁 씨가? 왜? 아니, 그보다 너 지금 어디야?!”갑작스러운 상황에 한지영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임유진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평온해서 불안한 마음마저 들었다.임유진이 만약 욕이라도 하고 울기라도 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담담한 거로 봐서 임유진은 지금 고통을 꾹 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마치 감옥에 있을 때 그 많은 고통을 전부 마음속 한구석에 담아둔 것처럼 말이다.임유진은 그 시절, 날이 갈수록 빛이 바래졌고 결국에는 어둠에 잠식당했었다.그러다 출소한 후 강지혁과 만나며 그녀도 이제 사랑을 하고 원래의 밝은 임유진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중이었는데 이대로라면 또다시 그 절망밖에 없던 모습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한지영은 그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유진아, 내 말 들려? 너 어디 있냐고! 대답해!”한지영이 다급하게 외쳐봤지만, 임유진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너 지금 얘기 안 하면 나 연신 씨한테 부탁해서 너 사는 지역 CCTV 전부 돌리라고 할 거야. 경찰에 신고도 할 거야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