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유미는 임유진의 목소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유진 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그게... 다음에 만나면, 그떄 얘기해 줄게요.”임유진은 애써 괜찮은 척 목소리 톤을 높였다.“윤이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줘요. 오늘 못 먹은 케이크는 내가 다음에 꼭 사주겠다고도 얘기해주고요.”“유진 씨, 내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 찾아와요. 빈말 아니에요.”탁유미는 어느샌가 임유진을 정말 자신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출소 후 이경빈을 피해 급급히 도망가느라 친구들과는 전부 연락이 끊어져 버렸고 S 시에 정착한 뒤에도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었다.하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녀는 임유진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됐고 언제부턴가 그녀를 정말 친구로 생각하게 됐다.“고마워요, 언니. 하지만 난 정말 괜찮아요.”임유진은 그녀를 안심시킨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입 밖으로 내뱉은 말처럼 그녀는 정말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이건 그저 또 한 번의 실연일 뿐이고 또 한 번 천국에서 지옥에 떨어졌을 뿐이다.아니, 억울함으로 가득했던 그때의 지옥보다는 조금 나은 지옥이겠다. 지금의 그녀는 적어도 자유의 몸이고 어디든 갈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다!철창에 갇혀 누군가의 발길질에 힘없이 쓰러져 당하고만 있었던 그런 나날은 다시는 없을 테니까.임유진은 문득 수중에 있는 휴대폰을 바라봤다.강지혁이 전에 선물해줬던 휴대폰은 어제 산속에서 고장이 났고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유심칩만 꺼낸 후 원래 쓰던 핸드폰을 쓰게 되었다.결국, 그녀는 그저 강씨 저택에 들어섰을 때와 똑같이 그곳을 나온 것뿐이다. 휴대폰, 옷, 신발 등 이 모든 것들은 다 예전의 그녀가 썼던 물건들이다.임유진은 자신이 마치 12시가 지나면 볼품없는 여자로 돌아가는 신데렐라처럼 느껴졌다.그때, 은색 포르쉐 한 대가 버스 정류장 근처에 멈춰 섰고 한지영이 다급하게 차 문을 열고 내리더니 헐레벌떡 임유진에게로 달려왔다.“유진아, 너...”그녀는 임유진의 낡은
“유진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모텔보다 호텔이 나은 것 같은데?”한지영이 조금 답답한 듯 말했다.“내가 지금 가진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그래.”임유진이 돈 걱정을 하자 한지영이 다급하게 말을 했다.“돈 때문이라면 내가...!”“지영아, 마음만 받을게. 이제는 그 누구한테도 기대고 싶지 않아서 그래.”임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결국 기댈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한지영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친구의 자존심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모텔에 도착한 후 한지영은 백연신에게 음식 배달을 부탁했고 그가 방에서 나간 후에야 비로소 임유진에게 어떻게 된 건지 물었다.“강지혁이 지쳤대. 나를 더 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대. 우리가 연애하는 동안 강지혁은 단 한 번도 나를 믿은 적이 없었던 거야.”임유진은 쓰게 웃었다.“난 연애하면 안 되는 사람인가 봐, 지영아.”“유진아,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한지영은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았다.“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 우리 친구잖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야. 내가 꼭 강지혁보다 좋은 남자친구 소개해 줄게. 그래서 우리 보란 듯이 잘살아 보는 거야! 그러니까 유진아... 힘들면 힘들다고 해.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지 마.”임유진은 한지영 어깨에 기대 그녀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제야 마음속 서러움들이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만 같았다.결국, 그녀의 구원자는 예전에도 지금도 한지영뿐이었다.이 고마움을 이번 생이 끝나기 전에 다 갚을 수 있을까?“지영아, 나 눈물이 안 나와...”그때 굳게 닫혔던 입술이 열리며 임유진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아마 예전에 너무 많이 울어서 이제는 눈물도 메말랐나 봐.”“너...”“괜찮아. 나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약하지 않아. 고작 헤어진 것뿐이잖아. 전에도 잘 견뎌냈으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임유진의 담담한 말투에 한지영은 잠깐 침묵하
지금은 그를 잊게 해달라고 빌 것이다. 이 마음이 철저하게 잊히도록. 앞으로 혁이라는 남자는 없고 오직 강지혁만 남도록.소원을 빈 후 임유진은 서서히 눈을 떴고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촛불을 꺼버렸다.“내가 자를게.”임유진은 케이크를 세 조각으로 자른 후 두 조각을 한지영과 백연신에게 건넸다. 그리고 나머지 한 조각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케이크는 달아야 하는 건데 왜 지금은 이토록 쓰게 느껴지는 걸까?케이크를 다 먹은 후 한지영은 임유진에게 오늘 여기서 같이 자자고 제안했다.“아니야. 나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연신 씨랑 돌아가.”하지만 임유진은 괜찮다며 거절했고 한지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돌아가기로 했다.“그럼... 알겠어.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푹 자! 내일 다시 올게!”“응, 잘 가. 연신 씨도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백연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지영은 여전히 걱정되는 듯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지영아, 나 정말 괜찮아. 어서 가.”임유진이 또 웃는다. 그리고 한지영은 또 심장 언저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아마 당분간은 이 상태가 쭉 이어질 듯하다.모텔에서 나온 후 한지영은 차에 타서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아직도 유진 씨가 걱정돼?”백연신이 물었다.“당연하죠. 말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어떻게 괜찮겠냐고요!”한지영은 불만을 토로하면 할수록 강지혁을 향한 불만이 더욱 켜졌다. 그러고는 한때 강지혁을 좋게 봤었던 자신도 원망스러워졌다.“역시 강지혁을 만나야겠어요. 지금 당장 그 집으로 가요!”한지영은 도저히 못 참겠는지 씩씩거리며 말했다.“지금?”그러자 백연신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네, 지금! 싫어요? 그럼 택시 타고 갈게요.”한지영은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릴 것처럼 몸을 돌렸고 백연신이 그녀의 팔을 잡아 제지했다.“싫을 게 뭐 있어. 근데... 너 마음의 준비는 한 거야? 친구 대신 분풀이 좀 했다가 강지혁을 건드리게 되면 어떡하려고?”“상관없어요.”한지영은 임유진의 억지웃음
“왜요?”한지영은 굳이 흙탕물에 뛰어들겠다는 이 남자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백씨 가문 사업이 정식적으로 S 시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면 앞으로 강지혁과 비즈니스적으로 엮일 일도 많아질 텐데 만약 지금 강지혁을 건드리게 되면 S 시에서의 사업은 여러모로 힘들어질 수도 있다.“내가 만약 너 때문이라고, 너를 위해서라면 누구를 건드리게 돼도 상관없다고 말하면 믿을 거야?”백연신이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그의 짙은 눈빛에 한지영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가 하는 말은 대체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일까?하지만 지금 이런 생각을 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한지영의 머릿속은 지금, 이 순간 그를 믿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고이준은 집사로부터 백연신과 한지영이 지금 막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제야 굳어있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오늘은 유난히 바람 잘 날 없는 하루였다.그리고 그 하루 끝에서 유일하게 걱정되는 사람은 역시 강지혁이었다. 아까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은 장장 3시간을 주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눈앞에 놓인 미완성 케이크만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이다.고이준은 강지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대체 왜 임유진을 그토록 사랑하면서 오늘 갑자기 헤어지자는 얘기를 했을까.혹시 안은영이 찾아온 것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라도 있었던 걸까?아니면... 그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물론 그게 어떤 이유이든지 이건 부하직원이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일이다.그때,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손을 올리더니 미완성이었던 케이크에 크림을 묻히고 데코를 하며 천천히 케이크를 완성하고 있었다.고이준은 그의 옆에서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한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그렇게 얼마 안 가 케이크가 완성되고 강지혁은 2와 8이 적힌 초를 케이크 중앙에 꽂은 후 불까지 붙였다.그 모습은
앞으로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강현수 곁으로 갈까 봐 매일 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강현수가 그녀의 마음속에 얼마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추측하며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된다.그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며 고작 사랑 때문에 폐인이 되거나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강지혁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드디어 주방에서 나와 홀로 2층으로 올라갔다.고이준은 멀어져가는 상사의 뒷모습을 조금 복잡한 얼굴로 바라봤다.만약 이 세상에 그 누군가가 강지혁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면...고이준은 지금 자기도 모르게 임유진의 이름 석 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다음 날 아침, 임유진이 잠에서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상자가 놓여있었다. 이건 어제 한지영과 백연신이 준 선물이지만 그녀는 어젯밤 풀어보지 않았다.서서히 몸을 일으킨 후, 선물을 뜯어보니 거기에는 정장 차림의 여자 인형이 들어있었고 변호사 배지까지 단 인형은 어딘가 모르게 그녀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인형 아래에는 한지영이 쓴 글도 있었다.[유진아, 생일 축하해! 나는 네 하루하루가 행복으로만 가득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원하는 꿈도 꼭 이루길 바랄게! PS. 인형의 왼손 손바닥을 누르면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야!]꿈? 행복?그녀가 과연 이런 걸 또다시 바랄 수 있을까?임유진은 손으로 인형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다가 버튼 같은 게 있는 걸 발견하고 꾹 눌렀다.그러자 인형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는 꼭 정의를 실현하는 좋은 변호사가 될 거야. 그래서 의뢰인들이 재판이 끝난 후 나한테 의뢰하길 잘했다고, 천만다행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이건... 임유진 그녀의 목소리이다!처음 로펌에 들어갔을 때 한지영이 축하한다며 휴대폰을 들고 동영상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녀가 했던 말들이었다.한지영이 그때의 동영상을 여태 간직하고 생일 선물로 그 말만 잘라 인형에 넣어 둘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임유진은 문득
이런 상황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에게 변호사 자격증이 있다는 것이었고 그 말은 즉 다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같이 가. 차로 움직이면 편할 거야.”그렇게 두 사람은 부동산으로 향했다. 임유진이 원하는 조건은 까다롭지 않았기에 두세 군데 돌아본 후 바로 적당한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월 34만 원짜리 방이지만 교통도 편리하고 주위에는 마트와 시장도 있어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하지만 한지영의 눈에는 그녀가 선택한 지역의 치안이 좋지 않아 보였고 괜히 친구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이곳에 평생 있을 것도 아닌데, 뭐. 그리고 저녁에는 최대한 적게 외출하면 돼. 아무 문제 없을 거야.”한지영도 지금 당장은 이게 최선이라는 걸 알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오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이사에 돌입했고 먼저 월세방을 대청소한 다음 마트에서 기본적인 생필품을 사들였다.몇 시간 후, 이사가 일단락되고 한지영은 떠나기 전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알았지?”“응, 그럴게.”그렇게 한지영이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임유진이 돌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왜 그래?”그에 한지영이 조금 놀란 듯 물었다.“지영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임유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어제 한지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서 홀로 무너졌을 것이다.매번 임유진이 절망의 늪에서 허덕일 때면 항상 한지영이 그녀를 구출해주곤 했다.한지영은 친구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말했잖아. 우리는 평생 친구라고. 앞으로도 무슨 일 생기면 네 옆에 내가 있다는 것만 기억해!”“응.”임유진의 답에는 울먹거림이 묻어있었다.만약 그 언젠가 한지영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임유진은 자신의 전부를 내걸고 그녀를 지켜줄 것이다....한지영을 보낸 후 임유진은 이제부터 살게 될 자신의 집을 바라봤다. 전에 살던 곳과 얼추 비슷한 크
임유진은 문득 고개를 숙여 자신의 평평한 배를 바라봤다.어쩌면 이번 생은 정말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전에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라 포기했지만, 지금은 몸이 괜찮아도 마음이 괜찮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사랑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임유진이 식당에 도착한 건 저녁 8시가 다 돼서였고 다행히 피크 타임은 피할 수 있었다.“왔어요?”탁유미는 임유진을 반갑게 맞이하고는 조금 초췌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밥은 먹었어요?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그럼 언니, 나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싶어요.”“잠깐만 기다려요.”탁유미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 주방장에게 부탁했고 몇 분 후 뜨끈한 칼국수가 임유진 앞에 놓였다.“먹어요. 하루 지나긴 했지만, 생일 축하해요!”“고마워요.”임유진은 아무 말 없이 식사하기 시작했다. 탁유미는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먼저 손님을 받고 주방일도 돕다가 임유진이 식사를 마친 후에야 다시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어제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탁유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나 강지혁이랑 헤어졌어요. 지금은 그 집에서 나왔고요.”하룻밤 지나고 나니 이런 얘기도 평정심에 할 수 있게 됐다. 이대로라면 그를 향한 마음들도 조만간 전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탁유미는 너무나도 평온해 보이는 그녀를 보며 더더욱 걱정이 일었다. 그녀 역시 힘든 사랑에 다치고 할퀴어 넝마가 된 사람이라 임유진의 평온함도 그저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것뿐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녀에게 힘이 나는 조언을 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자격도 없거니와 이 상황에서 어떤 위로를 건네야 좋을지 감이 서지 않았다.오직 시간의 흐름만이 그녀의 상처를 전부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아닐까?“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 아니에요.”임유진은 탁유미 눈에서 자신을 향한 걱정을 읽고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참, 이건 내가 윤이 주려고 산 케이크예요. 어제는 약속
그리고 손에 든 케이크도 놓치고 말았다.아까 몸을 돌린 순간 가게 앞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그 실루엣은 지금 차에 기댄 몸을 세우더니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머리는 항상 그랬듯 단정하게 세팅하고 검은색 정장은 그의 몸에 딱 맞게 자리 잡아 완벽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금욕적인 얼굴은 조금 차가워 보이기도 했고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볼 듯한 눈동자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 같기도 했다.그리고 지금 그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탁유미는 순간 흐르던 피가 멈춘 듯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주위 공기마저 차갑게 느껴졌다.이경빈!이 남자가 결국에는 그녀를 찾아내고야 말았다!백화점에서 도망갔을 때 탁유미는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 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이번에야말로 그가 그녀를 찾아낼 것이라고.하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 미처 이 상황에 대비할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이 남자를 마주해야 했고 지금 그녀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오랜만이야.”싸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그러자 탁유미의 몸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흠칫 떨리고 만다.오랜만이려나...?백화점에서 도망갈 때 스치듯 봤던 그의 옆모습이라면 확실히 오랜만이 맞을 것이다.그러면 그전에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제였지? 아, 법정에서 그가 증인이 되어 그녀에게 죄를 입힌 그날이려나?이경빈은 그날 그 예쁜 입으로 직접 그녀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그때 아마 ‘네가 지은 죄 달갑게 받아!’라고 했었나?하지만 탁유미는 죄를 지은 적이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외치고 또 외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그녀는 그가 내린 ‘벌’을 그저 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그녀에게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 이경빈을 사랑한 죄밖에 없을 것이다.그녀를 감옥에 밀어 넣은 장본인이 지금 그녀에게 ‘오랜만이야’라는 인사를 건
임유진이 초조한 얼굴로 영상을 바라보던 그때 갑자기 욕실 문이 열리며 강지혁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강지혁은 의자에 앉아있는 임유진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멈칫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녀 너머로 보이는 영상을 보고는 다시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다.“내 물건에 멋대로 손대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나가.”임유진은 그 말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곧바로 강지혁의 앞으로 걸어갔다.“혁아, 나랑 현수 씨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 현수 씨가 날 좋아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래서 더 확실하게 얘기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너밖에 없었다는 걸.”그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강지혁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해져만 갔다.“둘 사이가 어땠는지 듣고 싶지 않아. 잘 거니까 나가. 할 말 있으면 내일 다시 해.”강지혁은 아까 임유진과 강현수가 함께 있는 걸 본 순간부터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도 사그라지지 않았다.임유진에 관한 기억은 다 잊어버린 그지만 그녀가 강현수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는 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지인들을 통해 들은 것도 있고 실제로 파티에서 강현수가 임유진의 이름을 꺼내며 그에게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으니까.하지만 그럼에도 예전에는 그런 게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어차피 임유진은 그저 그의 죽은 아내일 뿐이었으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 강현수와 과거에 썸을 탔든 연애를 했든 알 바 아니었다.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했던 임유진이 아주 멀쩡한 얼굴로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고 그에게 사랑한다며 속삭였다. 심지어 마치 그를 아주 잘 아는 듯이 굴기도 했다.그래서일까, 강지혁은 강현수와 그녀가 함께 있는 모습이 멋대로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치고 불안하기도 하며 더욱이는 심장이 아프게 욱신거리기도 했다.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마치 독처럼 그의 몸 곳곳에 퍼졌다.“아니, 나는 지금 얘기해야겠어.”임유진이 강지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나에 대해 잊었다면 다시 한번 얘기해줄게. 어릴 때
강지혁은 잠깐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새엄마는 없어.”즉 그렇다는 건 임유진과 이혼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강선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포크를 움직이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리고 강선현도 새엄마는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는 활짝 웃으며 마찬가지로 식사를 마저 했다.저녁 식사가 끝이 난 후 임유진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다 아들과 같이 유치원에서 내준 숙제를 완성했다.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선율 혼자 다 한 거나 다름없었다. 강선율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똑똑한 아이였다. 그리고 숙제를 하면서도 한번도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다.현이는 율이가 숙제를 완성하자마자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엄마, 나는 언제쯤 오빠랑 같이 유치원에 갈 수 있어?”“다음 주면 현이도 유치원에 갈 수 있어.”임유진의 말에 아이는 활짝 웃으며 방방 뛰었다.임유진은 아이들끼리 놀게 한 후 강지혁을 찾으러 위층 서재로 향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어떻게든 강현수에 관해 얘기해야만 했다.사실 식사를 마치자마자 하고 싶었는데 강지혁은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마치 잔뜩 삐져있는 아이처럼 말이다.임유진은 서재에 갔다가 강지혁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침실로 향했다. 하지만 침실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때 욕실 쪽에서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임유진은 샤워하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강지혁이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생각이었다.가만히 기다리는 게 지루해 방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그녀는 우연히 탁자 위에 있는 자료를 발견했다.자료에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그녀와 강현수의 사진이었다.그리고 자료를 더 자세히 보니 그녀와 강현수가 버스에 함께 있었을 때 났던 기사 내용이 적혀있었다.당시 임유진은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강현수는 그녀의 머리가 창문에 부딪히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의 머리와 차창 사이에 자신의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강현수는 임유진과 강지혁이 사라진 지 5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잘생긴 얼굴에 고통과 실망감이 잔뜩 어려있었다.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그지만 사랑 앞에서는 그 역시 한낱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강지혁은 임유진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 후 곧바로 그녀의 손을 풀어주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강현수와 꽤 많이 얽혀있었나 봐?”“응?”임유진은 묘하게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다급하게 해명했다.“오해하지 마. 나랑 현수 씨 사이에 네가 오해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오늘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도 몰랐고. 그리고 나는 이미...”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이 그녀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강현수와 과거에 무슨 사이였는지, 지금은 또 어떤지 나한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어. 조금도 궁금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머릿속에 넣어둬. 너는 지금 내 아내고 가문의 안주인이라는 거. 그러니까 강씨 가문을 욕보인다거나 스캔들 터질 만한 일은 만들지 마.”강지혁은 말을 다 마친 후 미련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그리고 임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강씨 가문을 욕보이지 말고 스캔들 터질 만한 일을 만들지 말라고? 그녀와 강현수 사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강지혁에게 떳떳하지 못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만약 5년 전의 강지혁이었다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아무래도 깊은 오해가 생기기 전에 강지혁에게 제대로 해명을 해야 할 듯하다.임유진은 저녁 식사를 할 때 강지혁과 얘기를 나누며 물꼬를 틀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은 식탁에 앉기 전부터 차가운 아우라를 내뿜으며 말 한마디 건네지 말라는 듯이 눈도 마주쳐주지 않았다.그 탓에 식사 분위기는 숨 막힐 듯 싸늘해졌고 임유진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그때 밥을 먹던 현이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물었다.“아빠 정말 엄마 사랑하는 거 맞아? 아까 현수 삼촌은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강지혁은 강현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네가 아무리 나보다 더 빨리 만났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내가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아도 임유진은 날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날 사랑해야만 하며 내 곁에 있어야만 해.”그는 말을 마친 후 갑자기 임유진의 턱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임유진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곧바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임유진은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과 입술이 맞닿는 감촉에 깜짝 놀라 순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강지혁이 먼저 입을 맞춰왔다. 그것도 강현수와 경호원들 앞에서 말이다.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스킨십하는 걸 그녀는 좋아하지도 않고 굳이 말하자면 불편해하는 편이었는데 강지혁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강지혁이 지금 무슨 이유로 그녀에게 키스한 건지는 몰라도 5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키스하는 거라 그녀는 그의 입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강지혁과의 키스에 심취해 있었다.강지혁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아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아팠는지.강지혁이 그런 말을 하는 게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그에게 냉랭한 말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도 있고 당시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눈앞에 선해 그것 또한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적어도 절벽에서 떨어진 후 병원에서 깨어난 순간 모든 걸 다 잊어버린 상태라 아예 고통의 감정 같은 게 없었지만 강지혁은 최면을 받기 전까지 계속 고통에 시달렸어야만 했을 테니까.죽음은 늘 그렇다. 항상 살아있는 사람이 더 괴로운 게 바로 죽음이었다.강지혁은 그녀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했기에 지금 이렇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게 된 것이다.강현수는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임유진은 강지혁이 혹시 오해라도 할까 봐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마침 잘 왔네. 네가 한번 말해봐. 너 그때 분명히 나한테 유진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안 그래, 강지혁?”강현수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꾹 닫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갑작스러운 대치상황에 임유진은 서둘러 팔을 빼기 위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강현수가 너무나도 꽉 잡고 있는 바람에 도저히 팔을 뺄 수가 없었다.현이는 무서운 분위기에 많이 놀란 건지 창백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그때 강지혁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맞아, 그랬지. 그런데 그게 뭐?”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하더니 이내 임유진을 잡고 있던 강현수의 손목을 억세게 잡았다.“내가 네 앞에서 뭐라고 했던 임유진이 내 아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내가 놓지 않는 한 임유진은 어디도 못 가.”“만약 유진이가 떠나겠다고 하면 그게 아무리 너라도 막을 권리는 없어!”강현수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만약 임유진이 떠나겠다고 하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도울 것이다.소중한 이를 강지혁에게 보냈던 건 강지혁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강지혁은 지난번에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여전히 임유진을 사랑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만약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을 마음속에서 지운 거라면 더 이상 임유진을 그의 옆에 둘 수 없다.“내가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직접 시험해보면 되겠네.”강지혁은 강현수를 향해 차가운 말을 내뱉고는 이내 뒤에 있는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애를 집 안으로 데려가.”기사는 그 말에 강선현을 안으려는 듯 앞으로 다가갔다.“아가씨, 이리로 오세요.”하지만 현이는 떠날 생각이 없는 듯 임유진의 손을 꽉 잡은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우리 현이 착하지. 현수 삼촌이랑 할 얘기가 있
강현수는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는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고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있었는데 왜 5년간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은 거야? 난 정말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네 장례식에 참가했을 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냐고.”강현수는 당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그녀가 떨어졌던 절벽에서 투신할까도 생각했었다.“미안해요. 의도치 않게 걱정을 끼쳤네요.”임유진이 말했다.그녀를 바라보는 강현수의 두 눈은 이미 잔뜩 빨개져 있었다.“아니야.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너무 다행이야.”강현수는 말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와 닿으려고 했다. 임유진이 정말 살아있는 게 맞다는 것을, 그의 환각이나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임유진이 몸을 살짝 옆으로 틀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이에 강현수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하고 멈췄다.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명백한 거절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강현수는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강지혁 때문이야?”“네.”임유진이 답했다.“계속해서 나한테 말 편히 하지 않는 것도 강지혁 때문이고?”“나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고 나는 여전히 혁이를 사랑하고 있어요.”강현수는 그 말에 허탈하고도 조금 슬픈 웃음을 터트렸다.“5년이야. 5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았으면서, 강지혁 보러 찾아오지도 않았으면서 여전히 강지혁을 사랑한다고? 정말 사랑했으면 더 빨리 돌아와야 하는 거 아니야?”임유진은 강현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돌아오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났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혁이고 내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면 그것 또한 혁이 옆이에요. 현수 씨 말대로 5년이나 지났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날 잊어버리고 나한테 시간이든 뭐든 쓰지 말아줘요. 그럴 가치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강현수의 눈에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
임유진은 기억이 돌아온 후 한지영과의 통화에서 그녀가 죽은 후 강현수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술을 진탕 마시고 또 허구한 날 그녀의 무덤 앞으로 가 무릎을 꿇은 채 통곡했다던 기사가 났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 S 시가 아닌 해외로만 계속 돌고 있었다는 얘기도 말이다.강현수는 목석처럼 차에 기댄 채 계속해서 기다리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5년간 줄곧 꿈속에서만 또는 정신없이 취해있어야만 간신히 보이던 이의 모습이 이렇게 현실감 없이 눈앞에 나타났다.강현수는 순간 하마터면 다리의 힘이 다 풀릴 뻔했다.그녀다. 그녀가 살아있었다. 이한의 말대로 임유진은 정말 살아있었다.“유진아...”잔뜩 매인 목소리가 강현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강현수가 임유진 쪽으로 뛰어갔다.강현수의 마음은 임유진을 사랑했던 만큼 요동쳤고 또 몸은 그녀를 그리워했던 만큼 흥분이 일었다.임유진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을 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웬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강현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다 그제야 임유진의 곁에 서 있는 현이를 발견했다. 눈빛이 똘망하고 예쁜 것이 임유진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이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이 아이가 임유진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당시 뱄던 세쌍둥이 중의 한 명이 틀림없었다.‘선율이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구나.’“나는...”강현수는 무릎을 구부리고 현이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는 강현수 삼촌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강선현이에요. 원래는 임현이었고요. 현이라고 불러주세요.”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현이를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임유진이 떠올랐다. 그날 우거진 풀숲에서 그를 구해주고 또 산 아래까지 그를 업어줬던 용감한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말이다.그때의 기억은 강현수가 한평생 놓
이경빈은 탁유미 사건이 뒤집히면 회사가 타격을 입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탁유미를 위해 당시의 사건을 뒤집어주었다.“이경빈 씨 나름의 속죄네요. 그 뒤로 언니 찾아온 적은 있어요?”“네. 그런데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걸 아니까 직접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탁유미는 시선을 돌려 현이와 함께 놀고 있는 윤이를 바라보았다.“오히려 이경빈보다 더 많이 찾아온 건 이경빈의 부모님이죠. 윤이를 집에 들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찾아왔었어요.”“그걸 언니가 거절했고요?”만약 윤이를 보냈다면 지금쯤 탁윤이 아니라 이윤으로 살고 있었을 테니 거절한 건 분명해 보였다.“윤이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때 이경빈이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뒤로 윤이는 이경빈에게 줄곧 마음을 닫고 있는 상태예요. 이경빈은 어차피 어린애라 몇 번 달래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 문제인가요? 아이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분위기 파악을 잘하고 또 섬세하다는 걸 몰랐던 거죠.”“그럼 언니는 어때요? 언니는 이경빈을 용서할 수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사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이경빈에 관한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경빈은 결혼은 물론이고 그 어떤 스캔들도 없었다.아무래도 탁유미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이경빈이 한 짓은 이미 용서했어요. 계속해서 과거의 일을 붙잡아두고 있어봤자 감정 낭비하는 건 나일 테니까요. 그런데 다시 합치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 사이는 이미 5년 전에 모든 게 다 끝이 났어요.”탁유미가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마치 그로 인해 겪었던 다양한 감정들을 이미 말끔히 지운 사람처럼 말이다.임유진은 탁유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정말 잘된 일인지 몰라 생각이 복잡했다.한때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공수진의 개입으로 한평생 함께할 수 없는 두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임유진은 딸을 데리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